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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8일. 열 살 소년이었던 나는 이 날을 무척 가슴 졸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예지적 능력을 타고난 천재로 세상의 뒤덮는 전두환의 살기를 근심하며 나라의 앞길을 내다본 것... 은 아니었고, 그날 WBC 플라이급 세계 챔피언이었던 박찬희의 6차 방어전이 열리게 돼 있었던 것이다.

지명 방어전을 앞둔 선택 방어전이었다. 상대인 오쿠마 쇼지는 퇴물이라는 호칭이 딱히 그르지 않을 정도의 한물 간 복서였다. 그러나 경기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오쿠마 쇼지는 박찬희의 보디를 집요하게 공격해 박찬희의 최상급 무기였던 스피드를 잡았고 결국 박찬희는 링사이드에 주저앉아 허망하게 경기를 끝냈다.

다음날 신문에는 박찬희의 비참한 모습이 담긴 사진이 실렸다. 그리고 또 한 켠에는 시커먼 제목의 활자가 나부끼고 있었다. ‘광주 시위 확산’

학교에서 도청 소재지를 배울 때 전라남도의 도청 소재지가 광주라는 것을 배운 것 외에 광주에 대한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빛 광(光)자 쓰는 저 도시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또 그날 이후 벌어질 것인지를 나 이상으로 알았던 어른들도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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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80년 5월 21자

복면의 괴한들이 총을 탈취했다는 소식, 방송국이 불타고 시민들이 공포에 질려 있다는 뉴스가 신문 방송을 울렸고 “간첩이든 뭐든 분명히 있다,” (당시 우리 어머니 멘트)는 생각은 너무도 당연하게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방송을 통해 유언비어 내용이 발표됐다. 아나운서는 무표정한 얼굴과 딱딱한 어조로, 북한방송의 암호문 읽는 투로 유언비어의 내용을 읽었다. 유언비어(?) 내용은 무시무시했다. “000에 가면 시체 00구가 있다.” “공수부대원이 00명을 때려죽인 후 어떻게 했다...”는 식이었다. 돌아보면 그 내용은 대개 유언비어가 아니었지만 그 내막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캄캄하게 칠흑처럼 몰랐다.

끔찍할만큼 철저했던 봉쇄의 벽 양 옆에 있었던 사람과 사람들의 이야기가 영화로 나왔다. <택시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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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에서 무지하게 고생하고 돈도 벌어 왔지만 아내의 병수발로 재산 다 날리고 결국 아내를 잃은 뒤 친구 집에서 딸 하나 데리고 살아가는 평범한 택시 운전사. 그는 광주에 데려다 주면 10만원을 받기로 했다는 동료 택시 기사의 자랑을 주워듣고 이를 가로챈다. 그리고 광주로 달려간다. 그의 손님은 독일 언론인 힌츠페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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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는 광주 전체에서 몇 안되는 외부인이었을 것이다. 물론 광주도 인구 80만의 도시였고 이런저런 업무로 광주에 들렀던 사람들은 많았겠지만 5월 18일 이후 어떻게든 빠져나갔을 테고, 시민들과 공수부대의 격돌이 펼쳐지고 광주 외곽이 봉쇄된 뒤 새로이 유입된 외부인은 드물었을 것이다. 그것도 어디 호텔방에 숨어 있는 게 아니라 현장을 고집하는 언론인을 손님으로 모신 택시운전사는 정말로 희귀했으리라.

광주를 다룬 영화 앞에서는 솔직히 냉정해지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나와 끄적인 단상처럼 광주는 “다친 적 없는 상처. 겪은 적 없는 트라우마”였다.

박찬희의 KO패에 치를 떨며 하필이면 일본놈한테 지다니 분통을 터뜨리던, 석가 탄신일에 뭐하고 놀까를 고민하던, 어린이가 그 5월의 하늘 아래 빛의 도시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깨달았을 때의 충격은 참으로 컸던 것이다. 그리고 상처와 트라우마는 세월이 가도 여간 가셔지지 않고 건드리면 아프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세 번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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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바깥에 알려 주시오. 여기 일은 여기 사람한테 맡기고.” 영화 속에서 외신 기자와 서울 택시 운전사에게 광주 운전사가 내지르는 호소다. 나는 그 말에 울컥했다.

지난 촛불시위 때 무장한 군인들이 촛불 시위대를 덮쳤다면... 반갑게 인사 나누며 아이고 너도 나왔네 인사 주고받던 친구의 아들 딸들이 대검에 목이 잘렸다면, 끝나고 술 한 잔 하자며 손가락 입에 대던 친구의 얼굴 반쪽이 날아가고 그 이빨이 이마에 걸쳐져 있다면, 내년에 군대 간다며 쑥스럽게 인사하던 선배의 아들이 팬티만 입은 채 짓이겨져 트럭 뒤에 짐짝으로 실렸다가 소식도 없게 됐다면, 그 일은 대체 우리에게 무엇일까.

사대문이 봉쇄돼서 영등포 사람들도 한강 건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고 “뭐 간첩들이 끼었나?” 소리 하면서 제 할 일에 바쁘다면 광화문에 있었던 사람들의 가슴은 뭐가 될까. 그나마 카메라 들고 플라자 호텔 창문에 매달린 외신 기자와 그가 고용한 택시 기사 앞에서 개처럼 엎드려 빌지 않을까. “제발 알려 주세요. 우리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어떻게든 나가게 해 드릴게요.” (사실 영화 속에는 적잖은 '오버'도 있다. 하지만 용서가 되는 건 감독이 저 심경을 이해했기에 나오는 과잉이라고 보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 광주의 참극을 보고 겁에 질린 택시 운전사는 외신 기자 피터를 두고 혼자 광주를 빠져나간다. 외신 기자를 환영하며 자신에게도 주먹밥을 쥐어주던 여성이 총에 맞는 것을 보았고 대학가요제를 꿈꾸지만 노래는 꽝이던 청년이 참담한 시신으로 변했다. 이빨이 절로 딱딱 부딪치는 공포일 것이다.

관련도 없는 사람들 때문에 인연도 없는 동네에서 목숨이 위태로울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는 핸들을 돌린다. 딸에게 뭐라 할 말도 없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사람으로서” 따위의 연설도 할 깜냥은 못된다. 그는 이렇게 울먹인다. “아빠가 손님을 두고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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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저마다의 정체성들을 지닌다. 택시운전사로서, 방송 PD로서, 상인으로서, 군인으로서, 아버지로서,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한 기업의 경영주로서 등등 그 정체성은 사람마다 다양하고 한 사람에게도 다채롭게 깃든다. 이걸 ‘본분’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공포 때문이건 과도한 탐욕 때문이건 오만함 때문이건 그 정체성을 스스로 부인하고 무너뜨릴 때 인간의 몸에는 털이 돋고 뿔과 송곳니가 자란다. 괴물이 되는 것이다. 바로 전두환같은 개새끼들이 나라 한 번 먹어 보자고 최고의 특수부대를 민간인 시위대 앞에 대검 꽂고 돌진시킬 때, 제가 지키겠다고 선서한 국민들에게 헬기 기총 소사를 퍼부을 때 말이다.

광주는 군인으로서의 정체성, 즉 본분을 팽개친 괴물들이 사람을 찢어발긴 참극이었다.

그 이지러진 괴물 탄생의 현장에서 홀아비 택시 기사는 하나 남은 딸에게 무슨 일이 될지 모를 결심을 하고, 공포를 뿌리치고 주저함을 밟고서 수화기 저편의 딸에게 고한다. “아빠가 손님을 두고 왔어.”

어찌 이게 택시 기사로서의 직업의식 뿐이랴. 한 사람으로서,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자유민주주의 한답시는 나라의 국민으로서의 결단이고 그 정체성의 선언이었던 것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대한민국 육군” 장성들이 오줌을 깔겼던 그 당연하지만 소중한 ‘본분’이 그 한 마디로 살아나는 것을.

세 번째로 눈물이 나왔던 건 좀 의외의 장면이었다. 기자를 싣고 광주를 빠져나가는 길에 여지없이 군인들을 만난다. 살기 넘치는 군인이 트렁크를 열라고 명령하는데 트렁크 뒤에서 '뭔가'가 발견된다. 그 뭔가는 영화로 확인하시라.

군인의 얼굴이 굳어진다 싶더니 군인은 쇳소리 나는 어조로 부하들에게 명령한다. “보내 줘.” 부하들이 보내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니냐며 반문하지만 그는 단호하다. 보내 줘.

뭉클 눈물이 난 이유는 광주를 눈으로 보고 겪었거나 참상을 알게 된 외부인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그들의 작은 양심들이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자국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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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항쟁이 진압되고 도청을 장악한 뒤 공수부대원들은 도청 앞에 모여 군가를 부른다. “무쇠 같은 우리와 누가 맞서랴 하늘로 뛰어 솟아 구름을 찬다...” 아마 그걸 찍은 카메라도 외신 카메라였을 테지만 그 앞에서 ‘승리’한 군인들의 기세는 등등했다.

그때 군인 한 명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악을 쓰는 동료들 사이에서 입을 꽉 다물고 고개를 숙인다. 언젠가 MBC PD수첩이 그 화면을 연신 내보내며 당사자를 찾으려 했지만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영화 속 택시 기사가 힌츠페터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 ‘택시 기사 김사복’임을 내세우며 나오지 않았듯이.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지만 결국 물결을 구성하는 건 물방울이다. 1980년 5월 18일과 그 후 열흘, 그리고 그 후 수십년을 채운 건 결코 승전가를 부를 수 없었던 군인, 진심으로 고마웠다며 만나기를 소망하는 외국 기자의 소식을 보며 “내가 고맙지 이 사람아.” 하고 뇌까리며 핸들을 돌려 밤 거리로 사라지는 영화 속 택시 운전사 김사복들은 잊혀지기 쉽고 무시되기 십상이나 엄연히 그른 물결을 거스르고 역사를 바른 물길로 인도하는 힘이 되는 물방울들이었다.

포상 휴가도 거뜬한 중대 발견을 하고도 “보내 줘!” 쇳소리를 했던 군인의 한 마디에 눈물이 찔끔 나는 이유였다.

이미 광주는 40년 전의 일이 돼 간다. 내가 대학생이 됐을 때 6.25를 돌아보는 그 느낌으로 역사적 사건이 돼 간다. 그러나 광주는 아직도 젊다. 그 후 역사의 고빗길마다 광주의 기억은 세대를 넘은 동력으로 되살아났으니까.

대한민국 국민은 “때리면 맞고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아니라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정예부대 앞에서도 싸울 줄 알고, 그곳에 남은 손님을 태우러(?) 지옥같은 곳으로 핸들을 돌릴 줄 알고, 마지막 양심을 어기지 못하고 외부인을 밖으로 내보낼 수 있었던 사람들임을 입증했던 광주의 기억만큼 원기왕성한 동력의 새암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를 확인하고 싶으시다면 이 영화를 보시라. <택시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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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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