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1. 19. 수요일
P작가
편집부 주 아래 연재물은 딴지일보 편집부로 전화를 걸어온 한 필자와 오랜 시간 상담 끝에 본지 마빡에 올리기로 결정한 기고문입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북한에서 스파이로 길러졌다 활동 도중 숙청된 남자로 필자는 그 남자와의 만남을 본지를 통해 풀어낼 예정입니다.
편집부 확인 결과, 필자는 오랜 시간 취재를 직업으로 삼아왔고 그의 본명으로 된 다양한 기사 및 취재물을 여러 통로를 거쳐 직접 확인하였기에 아래 글을 마빡에 올립니다. 연재물 도중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항이 있을 수 있기에 필자의 요청에 따라 익명으로 올린 점, 독자제위의 양해바랍니다. |
반신반의했다.
한국에 있을 때 만났던 '탈북자'들은 국적이 대한민국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아니, ‘미수복지역’에 있던 이들이 주민등록증을 회복하고 ‘대한민국’ 사람이 된 것이다. 국정원의 관리 하에 있었지만, 형식상으로는 대한민국 사람들이었다.
형식이라는 껍질의 무게는 그들의 두 어깨를 짓눌렀고, 내부는 '난 대한민국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차지하고 있었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모습 이랄까?
2001~2002년 사이에 만났던 탈북작가가 내 생에 처음 본 북한 사람이었다. 북한에서 10여년 넘게 작가 생활을 했던 사람이었지만, 나름 지식인이었기에 남한 사회 적응을 위해, 아니 살아남기 위해 그는 자신의 본성을 버려야 했다. 아니, 속여야 했다. 그의 거짓말은 유치원생이 부모에게 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느낌은 달랐다. 마치 쓴웃음 같았다.
멍했다. 흔들리는 트램 (유럽에서 많이 운행하는, 도로에 깔린 레일 위를 달리는 전차_편집자 주) 안에서 나는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했다.
그의 국적은 뭘까?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대한민국? 프랑스? 시작부터 모호했다.
그의 출신을 듣자 내 가슴에 맷돌 하나를 얹어 놓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맷돌이 돌면, 갈리는 건 내 심장일 것이다. 내 안에서 그를 만나지 말란 말이 들렸다. 이성을 앞세우니 그와의 만남이 부담스러웠지만 감정을 앞세우니... 호기심이 날 부추겼다. 일생에 한 번 올까말까한 기회였다.
내가 느낀 긴장감의 강도는 십 여년 전 이맘때 마포의 허름한 족발집에서 홍세화 선생을 기다릴 때 보다 몇배나 더 강했다. 망명이라는 선택을 한 이의 얼굴은 어떠할까? 그는 정말 글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인물일까를 고민하던 그 찰나의 복잡함. 그 복잡함의 몇 배 무게가 내 심장을 옥죄였다.
그는 내가 만나 본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공산이 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출신 정치적 망명자’였다.
그의 나이는 59세. (60세라는 말도 있다) 160cm가 약간 넘는 키에 깡마른 체격이지만, 몸은 다부졌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고, 그 서글서글한 눈웃음 사이로 비치는 안광은 사람을 위압하는 뭔가가 있었다.
그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인민무력부 정찰총국 소속이었다. (지금은 정찰총국으로 뭉뚱그려 말하지만, 그가 활약하던 시기에 노동당 작전부 소속이었는지, 아니면 군 출신인지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
"한국에 한 번 오시죠? 남한 한 번 보고 싶지 않은세요?"
란 내 말에,
"칠십 몇 년인가에 한 번 갔다 왔어. 그때 제주도였나? 제주도였네"
제주도?
"그때 참 한가로워 보이더군. 그때는 조선이 남한보다 잘 살았지..."
눈가의 자글자글한 주름이 깊게 짓눌러지며 과거를 더듬는 그의 모습. 노인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르신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딴 세상 말이었다.
"제주도로 어떻게..."
"배 타고 갔지"
당연하단 듯,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 답하는 그의 천연덕스러운 표정이 날 무안하게 했다.
"반잠수정... 이죠?"
당시 북한의 주요 침투수단이 언뜻 떠올라 되물었다. 그는 묘한 미소를 흘렸다. 긍정의 눈빛 속에 '의외'라는 기색이 묻어나왔다. 그리곤 중국인 아내와 주선자에게 손짓을 했다. 몇 마디의 중국어가 오갔고, 나는 다시 한 번 내 신분을 말했다.
"그냥 이런저런 글을 쓰는 작가입니다."
환한 웃음과 함께 내게 술잔을 건넸다. 마음 같아선 녹취를 하고 싶었지만, 그 자리는 취재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에게 넌지시, 언제고 마음이 동하면 지금 이 술자리에서 오고간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다며 양해를 구했다. 그는 따르던 술병을 조용히 내려놓더니 한마디를 던졌다.
"무에 그리 대단한 이야기라고..."
(나중에 안 사실인데, 프랑스에 망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슷한 연배의 '한국 동생'이 그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고 싶다며 밀착 취재를 한 적이 있다. 근 10년 가까이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지만, '동생'은 그의 이야기를 쓰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렇다고 프랑스에서도 정착하지 못한 룸펜 동생이 그의 곁에서 기생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파리 13구역. 차이나타운이자, 가지지 못한 자들의 동네, 프랑스로 흘러 들어온 온갖 인종들이 모여 사는 그곳에서 그는 살고 있다. 당연하게도(?) 그의 아내는 중국인이었고 (그의 세 번째 아내였다) 그 덕분에 중국인 사회와 프랑스인 사회 모두에 연결고리를 가지게 되었다. (그의 처형이 프랑스인과 결혼했다)
그는 그 곳에서 ‘김씨 아저씨’로 불리고 있고, 제법 유능한 건설업자다. 2~3명의 인부를 데리고 다니며 리모델링이나 전기수리, 도배나, 누수처리를 하고 있다. 그의 실력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성실함 때문인지 그는 한국 사람 소유의 집이나 공공 건물 수리도 맡아서 한다.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모르지만 한국 대사관 건물의 작은 수리도 했다고 한다)
파리 구역도
그가 북한을 탈출한 지 벌써 20여년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그는 결혼을 3번 했고, 가족과의 이별을 2번 겪었다.
해석하기 힘든 북한말로 띄엄띄엄 단어 위주로 말한 (웅얼거린) 그의 인생은 그 자체가 하나의 대하소설이었다.
귀국 후 진지하게 그때의 기억을 복기해 봤는데, 그가 말한 이야기 중 반이 거짓이라 해도 그의 인생은 지난(至難)한 고통의 연속이었고, 보통 사람이라면 감내하기 힘든 인고의 세월이었다. 한때 그의 이야기가 모두 거짓이길 바란 적이 있었다. 이 모든 게 사실이라면, 한 인간이 짊어지기에는 너무 큰 시련이었다.
마지막 날 13구역의 트램 정류소 앞에서 흘린 그의 뜨거운 눈물과 내 손을 붙잡은 그의 떨리는 손은 차라리 외면하고 싶었다. 나도 울고 그도 울었다. 그의 울음... 그 자체가 바로 진실의 증명이었다.
50여 년 전 그는 고아였다.
40여 년 전 그는 당 간부의 눈에 띄어 북한의 엘리트로 성장했다.
30여 년 전 그는 김책대학의 대학생이자, 스파이로 키워졌다.
20여 년 전 그는 단 한 번의 실수로 아오지로 보내졌다.
10여 년 전 그는 중국에서 잘 나가는 사업가였다가, 탈북자 색출을 피해 프랑스로 도망쳤다.
2014년 현재 그는 탈북자이자, 정치적 망명자로 살아가고 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그 곳에서 그는 평범한 건설업자다. 한 번 화가 나면 사람 한 두 명 정도는 우습게 메치는 쿵푸의 고수이기도 하다. 그 누구도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모른다. 가끔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해도 술자리의 군대 이야기 취급을 받는다. 그러면 그 역시도 웃으며 받아넘긴다. 술자리 안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의 이야기. 그 누구도 그의 쓴웃음 뒤에 가려진 그의 인생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는 통일을 말하지 않았다. 소원이 있다면, 조선땅에 한 번 들어가 보는 것이란다. 그게 남이 됐든 북이 됐든 말이다.
동포에 대한 안타까움과 한민족 특유의 끈끈한 정을 가진 그이기에 남북한을 가리지 않고, 한반도에서 왔다고 하면 우선 품어주기 바빴다. (이 때문에 적지 않은 돈을 날렸다는 후문이다)
그는 눈물이 많은 남자였다. 삶의 질곡, 그 굽이굽이마다 한 양동이 가득 물을 채워놓은 듯이... 그가 ‘조선말’을 할 줄 아는 사람 앞에서 지난 과거를 말하며 원했던 것은 같은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의 값싼 위로와 격려였다. 그 서푼어치 위로 앞에 그는 무너졌다.
그의 삶은 한 눈에 봐도 고단해보였다. 59년 그의 인생에서 단 한 순간도 편했던 기억은 없어 보였다. 육십 인생을 담담하게 토해내는 그의 입술을 보면서 문득 <반지 전쟁>이 떠올랐다.
고등학생 시절 해적판으로 본 <반지전쟁>. 그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난 그들의 여정이 빨리 끝나길 빌었다. 그들이 모닥불에 둘러 앉아 있기만 해도 한 숨 놓였고, 렘바스 빵을 뜯으며 앞으로의 여정을 논의하는 그 짧은 순간엔 안도했다. 고단한 그들의 여정 속에 작은 휴식. 작은 불빛을 갈구하며 책장을 넘기던 그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 그의 삶에 작은 모닥불이 피어 있다.
앞으로 그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술자리 푸념으로 들어도 좋고, 필력 좋은 누군가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소설이라 생각해도 좋다. 다만, 그가 겪은 인생의 고통과 그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놓지 않은 삶에 대한 의지만은 놓치지 않고 봐주길 바란다.
P작가
편집 : 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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