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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에서 헬게이트가 열리고 있다. 결혼, 연애 출산을 포기하는 3포를 비롯해서 인간관계를 더해서 4포, 자택을 더하면 5포 그리고 거기에... 갈수록 무시무시한 헬게이트가 열리고 있다. X누리와 MB 그리고 鷄 여사를 비롯한 이 사회 지도층 인사의 노력으로 헬게이트가 열린 덕분에 통칭 헬조선(그런데 이 표현 조선 시대를 모욕하는 말이라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차라리 조선시대는 3포의 시대는 아니었다.)에 살게 된 우리는 기쁨의(?) 비명을 지르고 있다. 비록 뒤늦었지만 이 글에선 헬게이트 in 한국의 오픈을 축하하며 한국에 앞서서 헬게이트가 열렸던 곳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한국에 앞서서 헬게이트가 열렸던 곳은 15세기 중엽에서 17세기에 이르기까지 튜더왕조 시대의 영국이었다.


이 글의 주제는 이 시기 한창 성행하였던 '인클로저'이다. 인클로저란 지주와 영주들이 대규모 목양업을 위해서 농경지와 마을들을 모두 없애버린 뒤 광범위한 지역을 통째로 방목장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이 인클로저를위해 광범위한 농경지가 사라지고 수많은 마을이 강제철거되었다. (응? 이거 어디서 본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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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하하하!!! 돈 없고 힘없어서 쫓겨나는 놈들의 목숨 따위 알게 뭐냐? 밀어버려!'
라는 사고가 잘 드러난 2009년 용산 참사.
튜더 시대에도 그랬다. 

 

농경지가 사라지고 마을이 강제철거되면서 대대로 농사를 짓던 농민들은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거리를 떠돌게 되었다.(이것도 어디서 본 거 같아.) 인클로저가 한창이었던 시대를 살았던 영국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토마스 모어(1478~1535)는 이것을 두고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표현했다. (헬조선에선 무엇이 사람을 잡아먹고 있을까?)


인클로저가 발생한 배경에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배경이 얽혀있다. 1453년에 백년전쟁(친일파와의 백년전쟁이 아니라 영국-프랑스 사이에서 벌어진 백년전쟁이다.)이 끝난 뒤 이어서 일어난 영국의 내전, 장미전쟁은 30년이나 지속되었으나 전쟁의 중반쯤에 들어서 요크 가가 랭카스터의 본류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실제로는 147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전투는 사실상 소강상태가 되었다. 심지어 1480년대 중반 요크 가의 내분을 틈타 랭가스터를 외가로 하는 튜더 헨리가 리처드 3세를 밀어내고 왕위에 올라버리면서 전쟁을 끝내는 과정도 보즈워스 전투 단 한번의 승부로 결정난 덕에 오랜 전쟁의 참화를 겪지는 않았다.


즉, 백년전쟁과 뒤이은 장미전쟁 초기 이후 영국사회 내부는 더 이상의 전쟁 피해를 겪지 않고 비교적 안정되어있었으며 경제적인 변화 또는 발전을 할 기반이 마련되어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 많고 많은 산업 중에서 하필 목양업이 성행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여기엔 영국 외의 일과 영국 내의 일, 두 가지를 이유로 들 수가 있다. 


당시 신흥 모직물공업국(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유치한 수준이지만)으로 떠오른 네덜란드로의 영국양모수출이 폭증한 것이 국외적 이유였다. 반세기도 안 되는 사이 수출량이 5~6배나 늘어났다. 한마디로 대박 난, 없어서 못파는 장사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대박 장사에 화룡점정을 찍어준 것이 국내적 이유였다. 당시 튜더왕조는 마구를 비롯해 군사물품제작에 많이 쓰이는 피혁을 조달하기위해 양가죽을 선택하였다. 따라서 영국국내에서는 왕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목양업이 정책적으로 육성되었다. 양모는 없어서 못 팔고 양가죽은 국가가 보증해서 수매하니 망할 수가 없는 장사였다. 이쯤 되니 어떤 바보가 밀 농사 같은 돈 안 되는 짓을 하고 있겠는가? 너도나도 목양업에 뛰어들었다. 지주들은 농민들에게 소작주던 땅을 거두어 울타리를 쳐서 방목지를 만들고, 영주들은 아예 자기 영지 내의 장원을 통째로 방목지로 만들었다.


그럼 그들에게서 소작을 지어 먹고 살던 농민이나 농노들은? 지주, 영주의 '아몰랑'에 그냥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 덕분에 '농노해방'이 이루어졌다. 신분이 농노에서 거지로 클래스업(?)된 것이다. 이 성장(?)을 긍정적으로 보는 학자들은 인클로저라는 자본주의현상에 의해 농노해방이라는 '역사의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지주들이 농노를 내쫓은 것은 역사 발전의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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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인클로저를 통렬하게 까주신 영국의 지성 토머스 모어(1478~1535) 경이시다. 
헨리8세라는 또라이 왕을 보좌했으나 헨리의 똘끼 폭발로 처형당하였다.

 

자칭 역사의 발전이 이루어질 정도였다면 인클로저는 굉장히 광범위하고 활발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는 어느 정도였을까? 인클로저로 인해 없어진 농지는 적게는 3퍼센트에서 많게는 5퍼센트로 추정된다. 


'응? 5퍼센트? 얼마 안 되잔아?'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다만 전근대의 경제에서 농업은 절대적이었다. 단순비교를 할 수는 없지만 지금 한국사회에서 실업률이 5퍼센트 추가 상승하면 경제가 어떻게 될까? 슬슬 당대인들이 느낀 심각성이 상상이 되시나, 독자 제위들? 오늘날과 달리 당시엔 농업과 그 관련 산업이 경제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으므로 새로운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었다. 대대로 농사짓던 땅에서 농민들이 구조조정(?) 당한 것은 농민들이 무능해서 인가? 아니면 관습법이 명문화되어있지 않은 점을 이용해 농민의 권리를 마구 침해한 지주, 영주가 탐욕스러워서인가?


이러한 인클로저도 몇 가지 형태가 있었다. 사회적으로 심각하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부터 살펴보자. 


하나는 농지를 방목지를 만든 것이다. 이런 경우는 소작인은 땅을 뺏기고 사회적으로는 식량 생산이 줄어드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게 가장 덜 심각한 거다.) 


그 다음은 농지와 농지 사이를 연결하면서 방목지를 만드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도로라던지 공동경작지 같은 곳이 강제적으로 편입되기도 했다. 도로가 끊기고 공동경작지까지 뺏기게 되면 그곳에선 정말 먹고 살 게 없어진다.


마지막으로 가장 안 좋은 형태는 영주가 나서서 그 지역을 통째로 방목지로 만드는 것이다. 경작지나 도로는 당연하고 사람이 사는 마을도 강제 철거해버린다. (용산?) 다시 말해 그냥 그 지역을 통째로 무인지대로 만들어버리고 양을 키우는 것이다. 인클로저가 활발한 지역 중에서는 약 300개나 존재했던 마을이 40개까지 줄어든 지역도 있다. 말 그대로 10중 8, 9가 없어진 것이다. 영주가 마을을 강제로 철거시키면서 쫓겨나는 농민들을 위해 새로운 정착지를 준비해주는 경우는 사실상 없었으므로 철거민들은 그대로 거지가 되어 떠돌았다. 튜더영국에 헬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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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을 포식한 양들의 모습(?)이 아니라 한 지역을 통째로 인클로저를 해버린 모습이다.

허허벌판에 양들만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터전에서 쫓겨나 유랑하게 된 농민들은 조금이라도 먹고 살길을 찾아 이곳저곳으로 흘러들었으나 대부분 종착지는 도시였고 그중에서도 수도인 런던에 절대다수가 모여들어 런던의 인구폭발에 한몫 기여하였다. 덕분에 튜더 시대의 뒤를 이은 스튜어트 시대에 런던은 경사스럽게도 이미 50만의 인구를 자랑하는 대도시가 되어있었다. 당시에는 고층건물도 없었는데도 불구(정확히는 지을 기술이 없었던 거지만) 런던에 50만이라는 인구가 모여 살았으니 실로 대단한 규모라 하겠다. 


그러나 당시 런던은 사람이 살기에 제대로 된 도시라 하기 어려웠다. 좁고 구불구불한 길들과 빽빽하게 들어선 집들, 그나마도 주택은 턱없이 부족하여 이슬을 맞고 사는 부랑자들이 넘쳐났다. 상수시설은 물론 하수시설조차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아 비만 오면 도시가 물에 잠기고 똥과 쓰레기가 온 도시를 둥둥 떠다녔다. 상하수도의 부재와 주택의 부족, 빈민의 유입 등으로 튜더 시대 런던은 몸살을 앓았다. 그리고 이러한 런던의 치료를 위해 영국의 지배층은 특단의 대책을 내놓는다.


특단의 대책을 설명하기에 앞서 인클로저가 일어나 없어진 토지가 5퍼센트였다는 상기의 설명을 떠올려보자. 이 5퍼센트의 토지가 어디에 있는 어떤 토지였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불과(?) 5퍼센트만으로도 당시 영국 사회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인클로저가 있었던 곳은 영국 동부의 곡창지대였다. 농사가 기름진 땅에서 잘되듯 양들이 먹을 풀들도 기름진 땅에서 잘 자랐기 때문이다. 같은 넓이의 땅이라도 서부보다 동부의 곡창지대가 인구부양력이 더 높았으므로 농민들 역시 서부보다 동부에 많이 살았다. 


이러한 곡창지대가 사라졌다는 것은 그 만큼 많은 숫자의 농민들이 농토에서 쫓겨나 떠돌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또한 곡창지역이 사라진 만큼 줄어든 식량 생산은 런던에서의 식량 가격 상승을 유발하고 덩달아 다른 물가도 같이 오르게 만들었다. 이것을 부채질한 것은 런던에서 가까운 지역에서부터 인클로저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인클로저는 상업적인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므로 교통이 좋은 곳 그중에서도 런던에서 가까운 곳부터 이루어졌다. 당시 모든 양모는 런던항을 통해 네덜란드로 수출되었다. 따라서 런던까지의 운송거리를 단축해야 수출과정에서의 운송비가 싸게 먹혔다. 이것은 런던 근처의 농경지부터 우선적으로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였고, 런던으로 공급되는 식량은 보다 먼 곳에서 생산해 들여와야 한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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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클로저가 런던에 가깝거나 교통이 좋은 곳에서 이루어진 위의 현상이 운송비의 절감을 노린 결과였다는 것을 주목해 보라. 사회적으로 양모의 운송비는 줄었지만 영국에서 상품 식량의 운송비는 증가했다. (곡식을 사다먹는 사람들은 주로 도시인인 런던사람들이니까.) 튜더 시대 영국의 수도 런던은 인구폭발을 경험하며 세계적인 거대도시로 탈바꿈하였고 엘리자베스 여왕 시기의 런던은 이미 인구수 50만을 찍었다. 도시의 거대화는 필연적으로 농촌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상품 식량을 요구하였으며 곡가변동은 50만 인구의 생활을 결정짓는 매우 민감한 사안일 수밖에 없었다. 


구구절절 설명했지만 요점은 인클로저로 인해 도시의 식량 가격이 올랐다는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서민들의 생필품 물가가 올랐다는 얘기로 이해하시면 되겠다. 수출 지향적 경제 덕분에 재벌... 아니, 지주와 영주들은 떼돈을 벌었지만 농민들은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고, 도시에선 식량 가격이 폭등했다. 식량 가격은 한번 오르기 시작하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폭등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여기엔 매점매석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매점매석의 범인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당시 그만한 자금력을 가진 존재들이 누구였을지를 생각해보면 되겠다. 


식량 가격이 오르자 가장 타격을 받은 이들은 런던의 빈민층이었다. 더욱이 인클로저로 인해 쫓겨난 농민들이 런던으로 모여 들면서 도시의 빈민층은 갈수록 늘어났다. 런던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던 빈민들은 식량 가격에 굉장히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약간의 상승만으로도 큰 타격이 되니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클로저는 거의 2세기 동안이나 지속되었고 식량의 고물가행진 역시 계속되었다.


정리해보자. 인클로저로 인한 농민들의 몰락과 식량 가격의 상승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도미노 현상처럼 이어졌다. 좀 전에 말했듯이 몰락한 농민들은 도시, 특히 런던으로 밀려들어 대규모 빈민집단을 형성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런던은 상품 식량을 생산하는 농지감소로 인해 식량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다. 또한 갑작스러운 인구증가로 식량뿐 아니라 도시의 주택 역시 부족해졌다. 식량가격은 오르고 인구는 늘어난 반면 일자리는 그만큼 늘어나지 않아 경쟁이 치열해졌다. 인클로저로 인해 양가죽을 이용한 피혁제품 관련 산업은 번창하게 되었지만 이것은 가죽세공을 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였다. 기술 없는 대다수의 빈민들이 도시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일용직 노가다처럼 기술이 필요 없는 일들뿐이었다. (이런 대규모 비숙련노동력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분업화된 공장의 시초라는 설도 있긴 하다.) 이런 처지의 도시빈민이 늘어나며 영국에는 만성적 기아와 그에 따른 영양실조가 만연했고 당시 비위생적이었던 도시 환경이 더해져 잦은 역병이 창궐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층민들의 삶은 사회불안의 원인이 되었다. 영국 지배계급의 입장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이러한 불안을 잠재울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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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영국인들에게 지옥을 보여준 엘리자베스 1세(1533~163)

처녀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 할멈(평균수명이 40대인 시대에 70까지 살았으니)은 

두 가지 의미에서 지옥의 여신이었다. 

구빈법, 고등재판소 등으로 대표되는 악랄한 통치를 했다는 의미,

그리고 무시무시한 외모를 갖고 있다는 의미.

그녀는 젊은 시절엔 한가닥했던 외모였다 하지만 

세월의 힘을 거부하기 위해 화장품의 힘에 지나치게 의존했다고 한다.

당시의 화장품은 납을 비롯한 중금속덩어리였다. 

한 지성의 표현을 빌자면 "아름다운 귀부인들을 지옥의 여신"으로 만드는 마약이었다. 

그림에서도 화가가 최대한 좋게좋게 표현하려 했으나 

할멈의 창백하고 섬뜩한 인상을 완전히 지우고 그리진 못한 거 같다.

 

인클로저로 인한 사회문제가 도미노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빈민들을 중심으로 피지배층의 불만이 위험수위에 이르자 지배층은 이에 대응하여 나름의 해결책을 모색한다. 그 결과로 내놓은 해결책은 절대왕정의 성립과 엘리자베스 구빈법(救貧法)의 제정이었다. 이 두 가지 해결책 중 절대왕정의 의미는 명백했다. 피지배층의 불만을 폭력적으로 억눌러줄 강력한 독재권력의 설립이었다. 앞에서 언급된 장미전쟁의 종결과 함께 15세기 후반에 성립된 튜더왕조는 영국 최초의 절대주의 왕조였다. 이미 인클로저로 인한 사회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던 시기니 이런 왕조가 등장한 것이다. 


전근대사회에서 군주독재가 머 그리 나쁜 거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절대 왕조의 등장 이전, 중세의 왕은 그저 영주 중 한 명에 불과했다. 중세의 왕은 독재자가 아니라 중재자(물론 원해서라기보단 힘이 없어서 그랬던 면이 컸지만)였다는 얘기다. 그러한 왕이 영주들의 명목상이 아닌 실질적인 군주가 된 데에는(물론, 여기에는 인클로저 하나만이 아닌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 현실은 단 하나의 인과만으로 굴러가는 단순한 곳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한 계산이 깔려있기 때문이었다. 강력한 힘을 가진 절대주의 군주는 외부적으로는 프랑스, 에스파냐 같이 점점 강해져 오는 대륙의 경쟁세력으로부터, 내부적으로는 피지배층의 불만으로부터 지배층을 보호해주는 방패가 되었다.


지배층은 강력한 군주로 대변되는 막강한 통치권력을 세운 다음 피지배층 내의 불만 세력을 솎아내는 작업을 하였다. 그들이 보기에 피지배층 중에서 가장 큰 불만세력으로 잠재적인 반란세력으로 간주되는 존재는 당연히 집 없이 떠도는 부랑자들이었다. 따라서 이 빈자들이 혁명을 꿈꾸는 것은 막아야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튜더 시대판 복지(?)였다. 이른바 엘리자베스 구빈법이라는 것이었다.


구빈법은 인클로저 이전, 중세부터 관습법으로써 존재하였으나 중세의 그것과 튜더 시대의 구빈법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중세에는 흉년이 들거나 하여 식량이 부족해졌을 때 농민이나 도시민들이 (유망이나 반란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도록 주로 교회가 나서서 이들을 구휼하는 것이었다. (피지배층이 극단적인 선택을 할 때 가장 먼저 공격을 받는 곳이 부유한 교회였다.) 중세의 구빈법은 법망 안에 있는 공동체가 위기로 인해 붕괴하는 것을 막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엘리자베스 구빈법은 정반대의 것이었다. 먼저 구빈원이라는 커다란 건물을 짓고 병사들을 풀어 집 없는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수색한다. 그리고 부랑자들을 발견하면 친절하게(?)도 강제입소를 시켜 그 안에서 강제취직(?)을 시켜 평생 살게 해주는 것이다. 당연히 거부권은 없고 죽어야 출소할 수 있었다. 이것이 영국식 복지였다.


이런 법이라도 없는 거 보다 낫다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 운영을 보면 구빈원의 목적이 구빈이 아니라 감금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법망에 있는 사람들을 위기에서 보호해주는 것이 아니라 법적 테두리 바깥에 있는 사람을 탄압하는 방법으로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웃긴 것은 이 감옥, 아니 구빈원의 간수, 관리인들은 대부분 하급성직자였다는 것이다. 어처구니없게도 이 광신자들은 불쌍한 어린양들을 올바르게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하지만 구빈원에 갇혀 매일 중노동에 시달리는 이들에겐 불행한 일이었다.) 오늘날 자본주의 시장경제사회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있을 경우 그것은 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무능과 게으름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사실여부는 제쳐두자.) 전근대 유럽에서는 신에게 불경을 범해 벌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것도 사실인지의 여부는 제쳐두자.) 


다시 말해서 빈민들은 신에게 불경을 범한 존재들이라 가난하게 사는 것이기 때문에 이 어린양들을 회개시키는 것이야 말로 자신들의 사명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렇게 부랑자들의 강제 수감을 명령한 장본인은 왕과 의회였지만 그 증오를 받는 것은 감옥에 갇힌 부랑자들 보다는 조금 풍족한 삶을 사는 자들이 대신해주고 있었다. 이렇게 헬게이트가 활짝 열린 영국은 그야말로 헬튜더라고 불릴만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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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수용소라 불리는 실제 구빈원의 한 모습이다. 

이 그림을 보면 구빈원이 감옥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훗날 군주 독재의 약빨이 떨어졌다고 느꼈을 때 영국의 지배층은 쓸모없어진 왕을 죽여 버리고 (그것을 영국혁명이라고 한다.)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냈는데 의회주의라는 것이었다. 지배층의 모임인 의회로부터 간택(?) 받은 자가 왕이 되는 제도였다. 지배층들은 의회에 모여서 자신들 사이의 분쟁을 조율하고 화합을 도모하며 공동의 이익을 위해 뭉쳤다. 피지배층을 억누르는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에는 왕 한 명에게 맡겨져 있던 과업을 이제 집단이 나서서 수행하는 체제로 바뀐 것이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싸움 구도가 왕 vs 불온분자에서 의회 vs 불온분자로, 즉 개인 대 집단이라는 구도에서 집단 대 집단이라는 구도로 바뀌었다. 좀 더 파워풀한 계급전쟁의 수행이 가능해진 것이다.


영국의 지배층은 인클로저로 인한 사회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강력한 독재권력을 통해 사회의 불안분자를 탄압하는 것으로 무마하려 했다. 구빈원 감금을 통해 공안정국으로 사회 불만을 억눌렀던 것이다. 이러한 행태는 비단 영국만의 것은 아니다. 당대의 여러 유럽국가들 역시 대부분 비슷한 방법으로 피지배층을 억눌렀고 시공을 뛰어넘어 헬조선에서도 사회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기보단 피지배층을 억누르고 비난하는 데에만 혈안이지 않은가? 당분간 이곳 헬조선에선 헬게이트가 닫힐 것 같지 않다. 그리고 세계 어느 곳, 어느 시대든지 지배층은 헬게이트를 열 기회를 노리고 있다. 





에헤이대략난감


편집 : 딴지일보 퍼그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