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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주에게 기자는 하찮고 하찮은 존재

 

또다시 재취업 3개월 만에 회사를 나왔다. 국회의원이나 국회의원 보좌진에게 전화해 월간지를 몇백 권씩 사달라는 영업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양아치 짓 같아서 용납되지 않았다.

 

제대로 된 기자로 살아보고자, 다시 수습 기간을 거치며, 몇 시간 잠도 못 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늘 쫓기는 사람처럼 살아도 괜찮았다. 그런 영업 지시는 따를 수 없었다.

 

아침회의 시간, 사장은 국회의원실에 영업전화를 넣지 않은 본 기자와 또 다른 수습기자에게 욕설을 섞어가면서 호통을 쳐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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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를 나오면서 분노나 억울함, 언론계에 대한 염증이라는 감정보다 서글프다는 감정이 앞섰다. 사장은 우리들을 업신여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부로 해도 되는 존재, 막 대해도 되는 존재, 월급만 안 밀리고 제때 주면 되는 하찮은 존재, 막 부려 먹어도 되는 존재, 존재 그 자체의 의미를 짓밟아도 되는 존재들이었다. 이 사실을 깨닫자마자, 말할 수 없이, 뭐라 표현할 수 없이 서글펐다.

 

물론 좋은 순간도 있었다. 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후 ‘6.15 정상회담 9주년 특별 강연’ 취재에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전 마지막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본 기억 같은 건, 충분히 그런 생각을 들게 한다. 보수 정권 9년 세월이 결국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막을 내린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우리의 불행한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겪어낸 몇 안 되는 ‘실천사상가’라는 표현이 더 적합해 보인다.

 

민주당을 담당하며 전국 5대 광역도시를 돌면서 신문사가 방송 사업까지 겸할 수 있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미디어법’ 반대 장외집회 취재도 기억에 남는다. 더운 여름, 주말마다 이들을 취재하기 위해 부산, 대전, 광주, 대구, 인천 등을 돌았다. 그리고 7월 22일 국회 본회의에서 한나라당이 이 법 통과를 위해 직권상정을 하고, 며칠 동안 여, 야당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 동시 점거 농성에 들어갔던 일, 그런데도 야당의원들은 결국 다수의석을 점한 여당의 날치기 통과를 막지 못하고 심각한 몸싸움 끝에 법이 가결되는 순간을 하염없이 지켜봐야 했던 순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독특하고도 정신없었던 회사 분위기도 쉬이 잊혀지지 않는다. 경박함을 넘어서서 정신 없을 정도였다. 사장과 회사 분위기가 그렇다 보니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을 가진 기자들도 왔다 가곤 했다.

 

심지어 첫 출근에 한 시간 넘게 지각을 해 놓고 사유가 “메이크업을 하느라 늦었습니다” 라고 당당히 말했던 사람이 있었던 반면, 수습이라고 들어와 놓고, 그 바쁜 국회 일정 중에 회의나 취재 현안을 따라가지 않고 마음대로 취재 동선을 이탈해 한동안 농땡이를 피우다 오는 사람도 있었다.

 

도대체 기자로서 노력이라도 해 볼 의지가 있는 사람들인지 궁금했다. 물론, 이들은 빛의 속도로 퇴사했다.

 

 

 

2. 무소속 기자일 때, 비로소 사람 취급을 받았다!

 

회사에서 마지막 일을 마치고 국회 앞마당을 돌아 나오는 순간, 전철 타고 집으로 오는 길지 않은 순간에도 수많은 상념이 지나갔다. 바로 집으로 귀가할 수 없어, 집 가까이 사는 후배를 불러냈다. 후배는 첫 직장 다닐 때 국회에서 만났던 다른 매체 후배였다.

 

후배는 A형 간염에 걸려 한 달이 넘는 입원치료를 마치고 집에서 요양을 하면서 서울문화사 자회사에서 필요할 때마다 기사 한 꼭지를 써주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이었다.

 

후배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으니, 이미 언론사 기자라는 직업을 접은 상태였다. 대학교 때 학보사 기자 출신으로, 기자라는 직업에 대한 애정이 강했다. 온갖 언론사 시험에 떨어지고, 골프잡지부터 시작해 3년 동안 안 좋은 경험은 이미 다 한 것이다. 꽤 오랜 시간 입원치료와 요양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한 후배는 한 언론사의 사보 담당 편집기획자로 취직한 참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하던 아르바이트를 대신하지 않겠냐고 권유했다. 자신이 아르바이트를 하다 월급 계약직으로 해달라는 권유를 받고, ‘오케이’ 해놓고 불과 며칠 만에 취직이 되어서 그만두게 돼 이만저만 미안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본 기자에게 말을 넣어 줄 테니 대신해보라는 조심스러운 제안이었다. 이 보다 더 반가운 소리는 없었다. 회사를 퇴사한 날 바로 직장이 잡힌 것이다. 당장 기약을 알 수 없는 백수 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후배에게 감사의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부모님께도 덜 미안했다.

 

부모님은 가슴 한 쪽에 늘 미안하고 무거운 존재였다. 언제나 면목이 없었다. 다음날, 새벽 5시면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해야 하는 내가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아버지가 깨웠다.

 

또 직장을 그만두었다고 하니 답답한 가슴에 처음으로 내게 한소리 했다. “가르쳐 놨으면 자기 밥벌이는 자기가 해야지 도대체 왜 그렇게 직장생활을 못 하느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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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들에게 책 장사 시킨다고 해도 오죽 갑갑했는지, 신입사원인데 기자든 뭐든 사장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별수 있냐는 호통이 돌아왔다. 어쩔 수 없이 더 좋은 자리가 있어서 옮겼다고 했다.

 

어머니에게도 걱정하지 말라며 문자를 보내 놓았다. 어쨌든 후배 덕분에 서울문화사 자회사에 계약직 기자로 공백 없이 일하게 되었다. 일반 기업의 웹콘텐츠를 대신 제작해주는 회사였는데, 기업 사보, 공식 홈페이지 등을 제작해주었다. 거기서 콘텐츠에 들어갈 기사를 써주는 일이었다.

 

기자였지만, 시사 문제를 다루는 언론사 기자와는 달랐다. 대기업 축에 속하는 정수기와 비데로 유명한 A사의 사보와 공식 홈페이지를 담당했다. 외주 사진작가와 영상촬영작가들과 협업해 기사를 작성, 내부 관리자에게 보내주면 그들이 본 기자의 기사를 웹디자인 해 홈페이지나 웹 사보에 올리는 일을 했다. 사내 부서에서 담당하는 업무와 부서원들을 인터뷰하고, 회사원들의 동아리 활동, 회사에서 하는 대외 활동, 사회공헌 활동, 신제품 출시 홍보 등을 취재해 기사화했다. 

 

그곳에서 일 년 넘게 콘텐츠 기획팀 기자로 일했다. 가장 속 편한 세월이었다. 계약직이라 신분이 불안정했지만, 취재를 빙자해 전국 방방곡곡 돌아다니는 일도 나쁘지 않았고, 회사원들의 삶과 조직 생활을 엿보는 일도 재미있었다. 그건 아마 본 기자가 가져보지 못한 건강한 조직, 동료, 보편적인 성인들의 무난한 정서에 대한 부러움에서 비롯된 호기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형화된 기자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취재하고 기사를 쓰는, 다양한 색채의 기자가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런데 본 기자의 관심사는 정치, 시사, 사회의 발전 방향에 대한 대안과 같은 다분히 사회과학적인 부분이었고, ‘진짜 기자’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설프게 맛만 보고 그 바운더리에서 튀어져 나온 ‘아쉬움’이 늘 따라다녔던 것도 사실이다.

 

 

 

3. 어쩌다 NGO에서 월간지 기획편집까지

 

계약직 기자로 일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구직 사이트를 살펴보았다. 언론계에 좋은 자리가 나면 취재 기자로 돌아가고 싶었다. 간절해질 수록 쉽게 자리는 나지 않았다.

 

그렇게 일 년 정도 일하고, 일하던 회사에서 더 계약을 연장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담당하고 있던 A사가 경영이 슬슬 악화돼 사보제작비용, 웹 홈페이지 제작비용을 줄여야 해서, 더 외부 기자를 두면서 업무 형태를 유지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또다시 백수가 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 회사는 부도가 나서 외국계 사모펀드 회사에 매각되었다.

 

2010년 9월부터 2011년 3월 중순까지 백수로 지냈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냈고, 면접도 몇 군데 봤지만, 다시 연락 주겠다 한 곳은 없었다. 아니, 면접을 보자고 해도 “언론사는 알다시피 술자리가 많다. 때론 술자리에서 술도 따라야 하고, 분위기에 맞게 어울려야 하는데, 할 수 있냐” 라는 말을 하는 곳들 뿐.  

 

어느 신생 매체에서는 단체 임원 면접 전에 국장이 불러서 “나는 김현정 씨가 마음에 든다. 꼭 합격시키고 싶은데, 임원 면접을 통과해야 한다. 임원들이 광고 영업을 해야 할 때도 있는데, 하겠냐는 질문을 할 수도 있다. 실제로 영업일을 시키지는 않을 테니, 임원들이 물어볼 때는 할 수 있다고 해라. 안 그럼 안 뽑는다”고 당부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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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질리는 꼴을 당하면서도 왜 또다시 언론계에 발을 들이려고 하는지, 구직사이트를 둘러 볼 때마다, 미디어, 취재기자 쪽만 본 것인지, 스스로 진절머리가 났다. 돌아보면 언론사에 취재기자로 일할 때마다 개, 돼지 취급을 당했고, 언론사 아닌 곳에서 ‘기자’ 였을 땐 그나마 상식적인 대우를 받았고, 비로소 사람 취급을 받았다. 

 

결국 언론계 재취업을 포기하고 다시 취업을 한 곳이 소비자 권리 증진 및 시장 안전을 위한 감시 활동을 위해 주로 활동하는 NGO 단체였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NGO 단체였는데, 그곳에서 하는 일은 정부가 민간단체에 위탁하는 조사‧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여 연말에 보고서를 제출하고, 월마다 발행하는 소비자리포트를 만드는 일이었다.

 

NGO 단체에서 보낸 1년은 마치 위장 취업 같았고, 르포 취재 같은 세월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왜 NGO가 제대로 된 역할 기능을 못 하는지, NGO가 GO화되었는지, NGO 단체의 공통적인 한계는 무엇인지를 눈으로 보고, 직접 경험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1년은 본 어떤 의미에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 시간이었다.

 

‘운명은 이유 없이 해코지 하지 않는다’는 말이 지나고 보면 맞는 말이었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이유 있는 운명의 해코지가 더 없이 야속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