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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론사의 최대 과제는 ‘생존’


필자가 기자 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인터넷 언론사뿐만 아니라 종이신문까지 재정적으로 위기였다. 타격은 인터넷 언론사가 더 심했다. 참여정부를 탄생시킨 주역이 인터넷 언론사라고 할 정도로, 참여정부 시절에는 지원도 괜찮았다. 그야말로 참여정부 중기 이후까지 인터넷 언론사는 황금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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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4명으로 시작했던 오마이뉴스도 사업장 규모가 확장되었고, 데일리 서프라이즈, 데일리안, 프레시안 등 인터넷 언론사들이 무섭게 사세를 늘릴 때였다. 심지어 열린우리당이 국회의석 과반을 점한 17대 국회 초창기에는 연합뉴스보다 데일리 서프라이즈 기사가 더 빨라 연합뉴스를 번번이 물(?) 먹였던 시절도 있다. 오죽하면 데일리 서프라이즈에서는 정동영, 천정배, 신기남, 김근태 등 수많은 계파로 갈라진 열린우리당에 계파 수장마다 한 명씩 마크맨을 두었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딴지일보도 한때는 남로당이니 뭐니 하는 재기발랄한 아이디어와 콘텐츠로 찬란하게 빛나던 때가 있었다.

 

그랬던 인터넷 언론사들이 2007년을 기점으로 위기 일로를 겪는 게 눈에 보였다. 2008년부터 데일리 서프라이즈를 비롯한 상당수의 인터넷 언론사들이 긴축 재정과 인원 감축에 들어갔다. 당시 데일리 서프라이즈에 있던 기자들은 뉴시스, 뷰스앤뉴스, 이데일리, 시사저널 등으로 이직했고, 몇몇 기자들은 아예 업계를 떠나기도 했다.

 

전 세계적으로 신문 사업이 사양 사업이긴 했지만, 영세한 인터넷 신문은 그 영향이 빠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인터넷 기사를 돈 주고 보지 않는다. 유료 기사가 아니다. 그건 인터넷 신문 기사만으로 수익이 나지 않고, 이를 통해서 부가적으로 수익을 창출해야 한다는 소리다. 배너 광고나 바이럴 기사 같은 부차적인 콘텐츠를 통해서.

 

부차적인 수익이라도 얻으려면 기사 노출과 클릭 수가 많아야 한다. 언론사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많이 이용하는 네이버, 다음과 같은 포털을 통해 뉴스를 유통하는 구조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 특히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네이버가 뉴스 노출 구조를 바꾸기 시작하면서 네이버 정책의 눈치를 안 볼 수 없었다. 부익부 빈익빈 구조가 더 심해지기 시작했다. 2008년 11월 이전에는 네이버에서 언론사의 모든 뉴스를 받아 자체 편집을 거쳐 개별 뉴스들을 메인화면에 노출했지만, 이후에는 아예 몇몇 언론사들을 선정해 언론사를 통째로 메인화면에 배치하게 됐다.

 

네이버 뉴스캐스트에 든 언론사와 아닌 언론사 간의 광고 수입 차이는 천지 차이였다. 실례로 이명박 정부 시절 네이버 뉴스캐스트 메인화면에 들면서 갑자기 성장한 언론사로 뉴데일리와 프론티어타임즈를 들 수 있다. 이 두 매체 모두 뉴라이트의 파수꾼과 보수를 자처하는 친정부적 신문이었다. 물론, 프론티어타임즈는 이후 몇 번의 경영진 교체와 회사 합병을 거쳐 그때의 프론티어타임즈라고 볼 수는 없다.

 

네이버 뉴스캐스트에 들면서 이 두 매체는 몇천만 원짜리 정부 광고 수익을 쉽게 올릴 수 있었다. 네이버 포털 노출이 곧 광고로 직결되는 시대였다. 모든 인터넷 매체들이 네이버를 통해 뉴스 대부분이 유통되는 구조의 병폐와 심각성을 인지했지만, 심사 때마다 네이버 뉴스캐스트에 들기 위해 사활을 걸었다.

 

시대 변화에 따라 인터넷 신문도 병행해 운영했던 조, 중, 동을 비롯한 종이신문도 마찬가지였다. 규모가 크고 회사 업력이 오래된 이 대형 매체들은 위기를 타파할 자구책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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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을 등에 업고 법을 바꿔 방송에 진출한 것이다. 처음 종편이 출범할 당시 조악한 방송 콘텐츠와 기술, 그리고 그에 맞는 미미한 시청률로 몇 년 안에 스스로 채널 편성권을 반납하고 망할 것이라고 했지만, 이 종편들은 5년 이상을 버티면서 살아남았다.

 

문제는 종이신문과 소규모 인터넷 언론사, 그리고 지역 언론사들이었다. 이들의 최대 과제는 오로지 ‘생존’이 되었다. 영국의 인디펜던트가 2016년 3월부터 종이신문 발행을 중단했다. 그것이 우리의 종이신문과 인터넷 언론사의 가까운 미래가 아니기 위해 그 안에서 일하는 언론 노동자 기자들은 나름대로 몸부림을 치고 있다.

 

급격한 디지털 시대 도래에 따른 생활 양식의 변화. 그에 따른 ‘뉴네이션’, ‘뉴데모스’의 출현을 기자들이 미처 파악하고, 소통할 여유가 허락되지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오늘 하루도 그저 살아남는 게 목적인 ‘기레기’들만 남게 된 것이다. 어느 직종보다도 T.O는 적은데, 구직자는 많고, 구직자의 인력풀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고스펙인 분야가 미디어 업계다. 조금씩 경쟁력이 달렸던 나는, 기자들 사이에서 제대로 쳐주지도 않는, 기자 흉내만 내보는 언저리를 돌 수밖에 없었다.

 

기업 콘텐츠를 담당했던 계약 기자로 1년을 일하다 어느 날 갑자기 계약 만료 통보를 받고, 또 몇 개월 동안 불안한 백수 생활로 돌아갔다. 그동안 구직 사이트를 하루에도 몇 번씩 둘러보면서, 이력서를 수십 번은 고쳐서 넣었다. 대개는 서류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몇 군데에서는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으나, 이제 막 서른 줄에 접어든 나이에 걸맞지 않게 연차가 낮은 경력은 문제가 되었다. 대학 졸업하고 사법 시험 공부하느라, 다른 일을 준비하느라 보낸, 이력서에 적어 넣을 수 없는 긴 시절도 문제가 되었다. 히스토리의 공백을 뼈저리게 경험한 순간이었다.

 

“ㅇㅇ씨, 나이가 벌써 적은 나이가 아닌데, 대학 졸업하고 몇 년 동안 뭐 했어요? 경력이 되게 짧네. 국회 출입 기자 할 때 이런 데서 뭐 얼마나 잘 배웠어요?”

 

면접에서 대놓고 이렇게 면박을 주고, 무시한 국장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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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언론사 언저리에서 1년

 

몇 개월의 백수 생활을 마감하고 새로 취직한 곳은 NGO 단체였다. NGO의 연구원은 수많은 연구, 조사 업무와 함께 일종의 기자 업무도 병행해야 했던 직종이었다. 구직 사이트에서도 미디어 직종으로 분류가 되어 있었다. 기자라고 할 수도, 그렇다고 완전히 기자와 동떨어진 업무도 아닌 그런 직종의 업무를 담당했다.

 

이곳은 면접날 약식 교육을 실시했다.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고 사무실로 찾아가니 교육실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다. 같이 면접 보러 온 사람들은 나를 포함 넷이었다. 모두 여성이었다. 한자리에 앉아서 기다리라기에 집단 면접인 줄 알았다. 십여 분 뒤 사무총장이 들어오더니, 잠깐 영상을 보라고 했다.

 

“우리 단체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NGO 단체에요. 올해로 30년을 맞았어요. 관련 영상이 있으니 잠깐 보세요.”

 

면접 분위기 치고 굉장히 생뚱맞았지만 면접 장소 옆에 진열되어 있는, 이 단체에서 발행되는 월간지를 보고 있자니 마음에 들었다. 영상은 그동안 이 단체를 이끌어 온 회장, 대표, 이사, 사무총장 등이 나와서 단체와 자신의 인생을 자랑하는,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감동은 없는 그런 영상이었다. 구직자에 대한 질문은 없었다. 그 중 기자 출신은 나를 포함해 여행 기자를 하고 있는 한 사람. 나머지는 첫 직장을 구하는 친구, 나이는 있지만 과거에 뭘 했는지 이력이 뚜렷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공통점은 모두 같은 대학 출신이었다. 첫 직장을 구하는 친구와는 아예 법대 선후배 사이였다. 석사까지 마치고 소비자 권리와 관련해 법률문제가 직접 충돌하는 이곳에 연구원으로 지원했고, 나머지는 출판팀으로 지원했다.

 

“모두 신입사원끼리 잘 지내라고, 한 학교 출신들로 뽑았어요. 그리고 여긴 여자들이 많아요. 내근하는 상근자들 모두 여성이에요. 회장부터."

 

알고 보니 내부의 텃세가 심했고 그 때문에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소외감을 느끼다 퇴사하지 않게, 학연으로라도 뭉치라고 같은 학교 출신들로 아예 면접은 필요 없이 서류에서 이미 뽑아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는지 설명을 해주었다. 공산품들에 대한 안전 검사, 합리적 가격 정책의 유무 등을 조사하고 그 결과를 언론에 발표해 여론을 조성하는 일이 주였다. 대부분의 연구 용역은 정부 부처에서 민간단체에 위탁하는 사업을 수주하는 식이었다.

 

“그래도, 정부 사업이 가장 돈이 돼요. 우리 같이 NGO 단체는 회원들 회비도 있지만, 가장 돈이 안정적인 건 정부 돈이죠.”

 

사무총장은 교양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어찌 보면 NGO라는 단체의 정체성과 전혀 맞지 않는 소리를 해댔다. 당시는 취직이 급했으니 문제 삼지 않았고, 묻지도 않았다. 인턴 생활을 3개월 필수적으로 해야 한다고 해서 다시 인턴부터 시작했다. 어쨌든 출근은 했다. 첫 출근하는 날 보니 여행 기자라는 분은, 면접 보던 날 이제 같은 동료니 잘해보자며 먼저 제안해 밥까지 같이 먹어놓고는 출근을 안 했다.

 

면접 봤던 셋은 바이럴 마케팅 일을 했고, 나이가 많았던 동료는 한 달을 조금 넘기고 그만뒀다. 어느 날 오전, 쇼핑백에 자신이 사용했던 자리에서 모든 짐들을 싸가지고 나가버렸다. 그만두겠다는 의사는 사무총장에게 메일로 전했다고 한다. 퇴사 이유는 자신에게 떨어진 일이 정말 하기 싫은 조사라며, 교육을 받으러 간 장소에 간식으로 준비된 사탕과 초콜릿, 과자를 왕창 챙겨 먹고는 나가버렸다.

 

남은 건 학교 후배와 나뿐이었다. 어쨌든 그곳 NGO의 주 업무는 소비시장의 안전, 가격 조사감시와 월간지 출판이었다. 예를 들어, 일반 우유에 비해 가격이 비싼 프리미엄이나 유기농 우유 제품들을 수거하여 영양, 가격 등을 비교하는 일을 했다. 일반 우유에 비해 프리미엄 우유가 더 비싼 만큼 영양이 훌륭한지 등을 알아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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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프리미엄 제품과 일반 제품은 영양소 차이가 있었다. 문제는 유기농 제품들은 가공법의 차이나 소를 기르는 환경을 차별화하기 때문에 비유기농 제품들과 비교해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차이가 없다는 점이었다. 기업을 향해 딴지를 거는 대부분의 지점은 유기농이라고 확인을 할 수도 없는데(생산지에서 친환경 제품으로 소를 기른다고 해도 투입되는 비용의 차이가 일반 제품과 별 차이가 없는데), 완제품이 소비자에게 팔릴 때 가격 차이가 너무 크다는 점이었다.

 

당시 내부에서는 문제 삼을 부분이 없었는데 문제를 삼으려고, 무지 진땀을 빼던 기억이 난다. 조사 결과가 여러 차례 보도됐어도 소비자 여론에서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니, 프리미엄 우유나 유기농 우유 업체에서는 제품 가격을 내리지도 않았다.

 

기억에 남는 건, 과대광고 제품들에 대해 조사감시업무를 진행한 활동가(연구자라고 부르기도 했다)가 분유 제품에 ‘초유 성분이 함유된~’이라는 광고 문구를 과대광고 제품 유형으로 강도 높게 비판했다. 기업 측에서는 초유에 가까운 영양 성분이 있다는 표현이라고 항변하자, 그 활동가는 공개적인 토론회 자리에서 이렇게 쏴붙였다.

 

“분유가 초유랑 어떻게 같습니까? 그 자체가 소비자들 현혹하는 과대광고 아닌가요?”  

 

라고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는데,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같은 곳에 몸담고 있는 나 자신이 매우 부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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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색 색소 4호가 대표적이다. 뇌의 전두엽을 건드려 의지력을 약하게 할 수도 있는 성분이라고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회사가 기준은 지키니 이런 틈새를 문제 삼았다.

 

화학 재료, MSG, 나트륨 과다 함유 등등을 조사감시해 ‘신라면 블랙’을 시장에서 퇴출시키는 데에 일조했던 부장이 라면을 먹으면서 했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야야. 면역력이 높아지려면 너무 유기농, 자연식으로 하면 안 돼. 먼지도 먹고, MSG, 색소 첨가된 거 가리지 말고 먹어야 해. 그래야 뭘 먹어도 나중에 탈이 안 나.”

 

식품에 대한 검사뿐만 아니라 전기 제품에 대한 에너지 효율 등급 심사 같은 사업을 지식경제위원회(지금의 산업통상자원위원회가 당시는 지식경제위원회였다)로부터 위탁받아 진행했다. 소, 돼지의 도축 관리 시설을 점검하고, 고기에 대한 등급을 매겨 수상을 하는 사업도 있었다. 그리고 몇몇 봉사자들이 소비자 상담을 했다. "헬스장을 1년 등록했는데, 네 번 가고 안 갔어요. 환불해 달라니까, 달로 계산해서 1개월 치 밖에 안 준대요."라는 민원 상담을.

 

이런 연구와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매월 소비자 리포트라는 잡지를 발행했다. 미국의 ‘consumer report’를 흉내 낸 잡지다.

 

나는 서울시에서 민간단체에 위탁한 '서울시에서 유통‧판매되고 있는 공산품 및 어린이 제품에 대한 안전 검사'를 진행했다. 월간지 발행일도 맡아 했다.

 

 

 

3.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헛헛했다.

 

인턴 기간 세 달은 시키는 일만 해서 차라리 편했다. 9시 출근, 6시 칼퇴근이었다. 오래된 사무실 사람들은 9시 정시에 오는 일이 드물었다. 첫날 멋모르고 30분 일찍 출근했다가 문이 잠겨 있어 밖에서 50분 가까이 기다려야 했다. 대부분 15분에서 20분 정도 지각을 했다. 대학에 강의를 나가는 사람도 있었고, 아예 집에서 할 일을 하고 자유롭게 출퇴근하는 사람도 있었다. 소위 말하는 ‘짬밥’이 조금 되는 사람들이었다. 사무실 분위기가 연구소에 가까웠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NGO 단체 사정이 열악한데 이곳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사실 형편은 괜찮은 편이었고 사업 규모도 크고 단체의 역사도 오래됐지만, 열악한 환경에서 어쩔 수 없이 감내했던 복지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했다. 4대 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았다. 사업자 보험 가입을 하면 세제 혜택 등등의 문제가 있으니, 직원들 각자 집안에 혹시 직장 의료보험에 가입된 가족이 있으면 거기에 같이 가입하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여기서 근무하면서 NGO 운영의 현실을 파악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NGO는 NGO가 마땅히 가져야 할 정체성을 상실한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듣기만 했던 걸 현실에서 접했다. 본디 NGO는 GO가 하지 못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하고 GO를 감시해야 하는데도, NGO 자체가 GO화 되어가고 있었다. 역시나 생존의 문제와 연결되니 GO와 거리를 두고 견제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실례로 정부에서 수주하는 연구 용역비 사용이 탈법적으로 이뤄졌다. 연구 용역을 맡을 때 사업 비용으로 책정된 항목에는 인건비가 없는데, 그 사업 비용에서 종종 인건비로 사용하곤 했다. 영수증 가공자료를 받아 제출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인쇄소와 결탁해 복사비, 인쇄비로 영수증을 받았다. 사실 인쇄는 사무실에 있는 복사기와 프린트로 했다. 어쨌든 회계장부상으로는 문제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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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담당 사업은 서울시에서 준 카드로 연구비를 대야 했고, 그 기록은 서울시 전용 프로그램으로 자동 입력이 되었기 때문에 유용하진 않았지만, 이런 일들이 빈번하게 이뤄졌다.

 

높은 사람들은 정치에 대해 꿈이 있었다. 언론 노출도 종종 이뤄지고 얼굴도 알려진 시니어 그룹들은 모두 ㅇㅇ여대 출신이었고 가정이 부유했다. 입사할 때 들었던 사무총장의 말대로 텃세가 만만치 않았다.

 

회장만 해도 당시 11월 박원순 시장이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되는 걸 보더니, 전 직원을 모아 놓고 선포했다. 박원순 시장은 그와 옛날에 함께 시민운동을 했던 사람으로, 박원순이 서울시장이 되었으니 나라고 못 할 거 없다는 마인드였다.

 

“그대들, 내가 이번에 박원순 시장이 당선되는 걸 보고, 인터넷을 적극 이용해야겠다 싶어. 우리도 트위터를 하자고.”

 

그러더니 어느 날 외부 강사를 들여 트위터 하는 법 특강을 듣게 했다. 이미 스마트폰 보급이 웬만큼 이뤄진 시점이라,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SNS를 안 하던 사람이 없던 시점이었다. 다만 회장과 팔로워를 맺기 싫어서 안 했을 뿐.

 

인터넷과 스마트폰 사용 자체가 서툰 70세 가까운 노인에게 묶여서 개인적으로 스마트폰 작동법, 트위터 가입 및 활용법을 알려주느라, 준비해 온 ‘SNS의 구조와 사회적 기능’에 대한 강연은 무용지물이 되었던 기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여기서 연말 프로젝트 마감과 보고서를 제출할 때까지 1년 가까이 근무했다. 그나마 함께 입사한 4명 중 내가 가장 오래 근무했다. 입사 동기인 학교 후배는 인턴 기간까지만 근무하고 사기업으로 가겠다면서 그만두었다.

 

그래도 가장 심적으로 편안한 시간이었다. 심사하고 남은 먹거리들이 상당했고, 시료 제품들도 나누어 주었는데 그거 받아 오는 재미도 쏠쏠했다. 처우가 열악했던 건 사실이다. 복지라는 말을 붙일 수조차 없는 공간이었지만, 적어도 상식적인 사람들과 일했다. 욕하는 사람, 때리는 사람, 막말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일도 많이 배웠다. 기자 업무만 하면서 한글 파일에 기사 작성해서, 홈페이지 기사 시스템에 입력하는 일만 할 줄 알았는데, NGO 단체에서는 정부에 제출하는 공식 보고서 작성하는 일부터 배우고 익혔다. 엑셀을 사용하는 일이 의외로 많아, 엑셀 사용에 능숙해졌다. 조사와 연구하는 방법을 익혔고, 시장 감시를 하다 보니 무엇이 유해 성분이고, 무엇이 문제인지, 국제 기준은 무엇인지, 우리나라 식약처의 기준은 무엇인지, 안전 기준은 무엇인지 등등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잡지 발행일을 배운 것이 가장 큰 득이었다. 상사가 경향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했던 사람으로 차분하게 기사 쓰는 습관을 들일 수 있었고 교정보는 것, 디자인을 염두에 둔 판 배정 등등을 배울 수 있었다.

 

무엇보다 NGO의 현실을 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소비자들의 권리 증진을 위한 소비자 단체의 활동이 더 활성화되어서, 진짜로 정부의 통제 권한을 벗어나 시장을 효율적으로 견제하고 감시할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키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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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할 정도로, 기업을 위시한 시장 자본의 영향력은 비대해졌다. 민주주의, 법치주의, 삼권분립까지 무력화시킬 정도다. 공룡처럼 커버린 시장, 기업을 효율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은 어디까지나 소비자다. 그만큼 소비자 권리의 신장, 건강한 권리의 발현은 절실한데, 소비자들의 권리 증진을 견인할 NGO 단체들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GO의 한 축이 되어버린 작금의 현실이 아쉽고도 아쉬운 부분이다.

 

그곳에서 일은 제법 잘 했지만, 가슴 한켠에 공허함, 갈망은 남아 있었다. 기자로서 산화하지 못하고 불씨가 타오르다 만 세월에 대한 아쉬움, 후회, 목마름이었다. 자연스럽게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고, 결국 그해 가을, 대학을 졸업한 지 8년 만에 다시 대학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근무하면서 학위 과정을 마친 사람들이 많았는데, 나도 차라리 이곳에서 근무하면서 학위를 따 큰 연구소나 기업 연구소의 연구직으로 이직할 생각을 했다. 기자라는 직업은 인연이 없다고 체념하던 차였다.

 

정당의 당직자로 일했던 학교 선배를 11월 대학원 면접시험 때 만나게 되었다. 국회 출입할 때 당시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의 소개로 알게 된 선배였다. 국회 기자실에서 한 번 정도 제대로 인사를 나눴다. 그동안 그 선배는 정당을 퇴사하고, 나경원 의원이 서울시장에 출마했을 때 캠프에서 잠깐 일하기도 했었다. 그 선배의 소개로 다시 언론사 기자로 일할 기회가 주어졌다. 연말이었다.

 

지나가는 말인 줄 알았는데, 연말 연구 보고서를 쓰고 있는 와중에 선배로부터 이력서를 보내달라는 연락이 왔다. 예전에 써두었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성의 없이 보냈는데,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담당자로부터 새해부터 출근하라는 연락이 왔다.

 

마침 다음 해는 총선과 대선이 동시에 치러지는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