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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눈물, 육룡이 나르샤, 정도전, 쌍화점, 뿌리깊은 나무 등등. 한국의 사극을 보면 단연 여말선초(고려 조선 ) 가장 뜨겁고 주목받는다. 체제가 바뀌고 나라가 뒤집어졌으며 욕망이 드글드글한 인물들이 등장해 명멸한다.

 

고려 말은 난세였다. 난세가 피로 정리되고 결국은 세종대왕과 한글 창제라는 해피엔딩을 향해간다. 역사의 변곡점에서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따라서 도살자 역을 맡는 인물도 등장하는데, 우리에게는 태종 이방원이 있다.

 

후세를 사는 우리는 그들이 부나방처럼 보이겠지만 당대의 당사자들은 자신이 실패할 성공할 도리가 없다. 어쨌거나 불투명한 미래에 도전했으므로, 성공하기도 하고 처참히 실패하기도 한다.

 

영국사에도 여말선초에 해당하는 시기가 있다. 현재 영국인들의 정체성이 만들어진 시기다. 영국 사극에서 가장 핫한 시대, 튜더 왕조 시기다. 유럽사에서도 중요한 파트다. 이때를 지나며 영국은 중세를 졸업하고 근대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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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더 왕조를 대표하는 인물은 아무래도 아내를 여섯 번이나 갈아치운 헨리 8세일 것이다. 시리즈의 주인공격인 인물이다.

 

조선은 정도전의 혁명이념으로부터 시작된 국가다. 조선 건국은 의식적이고 목표지향적인 사건이었다. 이는 조선이 특이한 경우다. 시대적 발전은 보통 특별한 목적 없이 난삽하게 이루어진다. 튜더 왕조 시기 영국 정치에는 치정극과 음모, 로맨스가 들끓었다. 그들은 딱히 시대변화를 추구하지는 않았다. 헨리 8세는 물론이거니와, 그의 아내들도 마찬가지다.

 

역사에는 배경이란 있어서, 헨리 8세란 인물이 언제 태어났다더라는 식으로는 이야기를 시작할 수가 없다.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 왕자로 태어났는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을 말해야 한다.

 

영국이 프랑스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백년전쟁은 무려 116년이 걸린 지루하면서도 장대한 전쟁이다. 전쟁기간 동안 프랑스는 가장 사정이 좋을 국토의 반까지 영국에 주게 되고, 멸망 직전까지도 갔다. 물론 모두가 아다시피, 다르크의 등장으로 프랑스는 국토를 수복하고 영국군을 몰아낼 있었지만(프랑스 왕이 다르크를 배신하고 영국에 팔아넘긴 덤이다) 말이다.

 

백년전쟁이 시작된 시점으로 돌아가보자. 흔히 영국이 엘리자베스 1(튜더스 왕조의 마지막 군주다) 치세 전까지 후진국이었다고 하지만, 이는 반만 맞고 반은 틀리다. 영국은 강대국이었으며 영국 왕은 유럽을 호령했다.

 

백년전쟁은 유럽 양대 강국의 전쟁이었으며 따라서 서유럽 전체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백년전쟁 초중반만 하더라도 군대의 선봉은 기사였다. 기사들 중에는 대영주도 있고, 심지어 왕도 있었다. 국가의 수뇌부도 기사인 이상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마찬가지였다.

 

기사들은 강력한 무장을 했기에 낙마하고 포로가 지언정 웬만해선 죽지 않았다. 그들은 승자의 전리품이 되어 품위 있는 대접을 받으면서 몸값을 치르고 풀려났다. 물론 '품위 있는 대접' 비용은 모조리 영수증에 찍혀 바가지 금액으로 되돌아오지만, 다음 전투에서는 이쪽이 이겨서 벌면 된다.

 

전투에 포로는 자신을 접수한 승자( 자신을 낙마시킨 상대 기사) 가까이는 사촌이거나 멀어도 사돈의 팔촌인 경우가 많았다. 가족의 안부를 물으며 와인 하는 예사였다. 아무런 혈연, 지연이 없어도 상대를 융숭하게 대접할 아는 기사도를 발휘해야 자랑거리였다.

 

반대로, 전투에 동원된 평민들에게 그런 기사도는 사치였으며, 애초에 허락되지도 않았다. 기사들에게 전쟁은 그들만의 리그였다. 생업에 바쁜 평민들에게 기사들의 전쟁놀이는 한마디로 '꼴값'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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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가 어떤 영주의 영지에 소속된 농노라고 하자. 어차피 땅에 매인 , 열심히 일해서 처자식이나 건사할 일이다. 만약 내가 모시는 영주가 전쟁에서 패배해 영주가 들어섰다고 치자. 그래도 생활에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은 적다. 농토가 어디 가는 아니잖은가?

 

물론 전쟁은 싫다. 전쟁비용으로 세금도 올라갈 테고 최악의 경우엔 나도 보병으로 동원될 있다. 전쟁은 싫지만 전쟁의 결과엔 무관심할 있는 것이 기층민의 입장이었다.

 

이와 달리 중세 유럽의 귀족이란 대체로 게르만족, 바이킹족의 후예로 기본적으로 전사 집단이다. 이들은 자기들끼리 결혼해 후손을 낳았다. 국제결혼도 많이 했다. 평민과 귀족은 동떨어져 있었다.

 

평민에게 귀족은 다른 세상에 사는 다른 사람이었다. 탄수화물 위주의 식단과 육식 위주의 극단적으로 다른 식단이 대를 이으면서 외모 차이가 크게 벌어졌다.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서 귀족과 평민 남성의 키는 보통 20cm, 크게는 40cm까지도 차이났다. 150cm 되는 남성도 수두룩한 시대에, 드물지만 180cm 넘는 귀족 여성도 있었다.

 

중세 귀족들은 기층민이 자신의 사냥터에 들어가는 일을 엄금했으며, 만에 하나 적발될 경우 가만 두지 않았다. 이는 사냥감, 육식을 독점하는 행위였다.

 

귀족은 우월인종이며, 몸에서 악취가 나지 않는 신비로운 존재, 타고난 지배자이자 온전한 인간이었다. 따라서 영국과 프랑스의 귀족들은 동질감을 느꼈다. 영국 귀족은 스스로 영국 평민보다 프랑스 귀족과 가깝다고 느꼈고 실제로도 그랬다. 물론 프랑스 쪽도 마찬가지였다.

 

양국의 귀족들은 모두 프랑스어를 사용했으며 서로 통역이 필요 없었다.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귀족과 영어를 쓰는 평민은 서로 말도 통하지 않았고, 실제로 대화할 일도 거의 없었다.

 

기층민의 정체성도 지금과는 달랐다. 내가 농노라고 , 나는 영지를 소유한 귀족 아무개의 백성이다. 물론 잉글랜드인이라거나 프랑스인이라거나 하는 국적의 개념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멀고 추상적인 개념이다. 내가 세금을 내는 대상도 나를 착취하고 보호하는 대상도 국가가 아니라 영주 개인이다.

 

영국인이니 프랑스인이니 하는 국적은 개인의 정체성이 아니었다. 나라는 state nation 아니라 country였다. country 본질적인 속뜻은 고향땅, 향토, 나와 통하는 사람들이 사는 정도다.

 

그러나 백년전쟁은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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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년씩이나 하다보니 피아식별이 너무나 확실해졌다. 귀족부터 농노에 이르기까지 '나는 영국인' 혹은 '나는 프랑스인'이라는 정체성이 형성됐다. 백년전쟁 초기에는 애국심이란 것이 없었다. 개인의 정체성 안에 국가가 없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전쟁 말기에는 모두가 자기 조국에 대한 국가의식을 강하게 느꼈다.

 

다르크는 전쟁 말기에 출현했기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칠 있었다. 그녀는 배경 없는 시골의 평민 여성이다. 그럼에도 '프랑스인'이었기에 프랑스군을 지휘했다. '나라를 구하자' 외침에 귀족부터 백성까지 프랑스군이 총집결한 이유는 민족의식과 애국심이라는 전에 없던 특별한 감정이 생겨난 후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구원자라면, 귀족 남성이라도 프랑스인이란 이유만으로 그녀의 명령을 따를 준비가 것이다.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달라졌다.

 

백성, 아니 국민들은 이상 우리 동네 영주님 얼굴만 올려다보고 살지 않는다. 이제는 의식의 스케일이 커져 국가 단위로 사고한다. 영국놈들이 물러가야 나와 가족도 살만해진다! 국익과 사익을 동일선상에 놓게 된다.

 

그래서 왕의 건강을 생각한다. 정치를 잘하는 왕이면 만수무강을 기원하겠지만 폭군이거나 망군이면,

 

'귀신은 뭐하나, 양반 데려가고...'

 

'왕자님이 아주 총명하다던데...'

 

하는 생각을 하고, 선술집에서 그런 대화도 하는 것이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나는 노르망디 사람', ' 가스코뉴 출신', ' 빠리지앵'하는 식으로 지역적 정체성을 먼저 느꼈다면 이제는 그보다 먼저 국적을 생각하는 시대가 왔다. 국가라는 단위 안에서 왕과 백성은 이전보다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다.

 

중세의 왕은 신비롭고 막연한 존재였다.

 

"머리가 개라며?"

 

"용과 싸웠다며?"

 

"...아니 사실 용과 거래를 했다던데."

 

....이런 존재였다면, 이제는 왕의 생김새와 취미는 물론 현재 사귀는 애인, 애인의 나쁜 버릇까지 가십이 되어 돌아다닌다. 왕은 왕대로 틈나면 거리에 행차해 백성의 반응을 살핀다. 중세의 왕은 신비로운 기사였다. 근대의 왕은 식사하는 모습까지 대중에 공개했다.

 

백성이 왕을 직속 영주보다 크고 직접적으로 의식하면, 자연히 왕의 권력은 커진다. 중세의 왕은 영주들 중의 하나였다. 영주들에게 점수도 따야 하고 필요하면 어르고 달래야 했다. 이제는 상하관계가 확고해진다. 오랜 전쟁 기간도 왕권에 이바지했다. 바깥에 적이 있으면 총사령관의 목소리가 커지기 마련이니까.

 

왕에게 백성은 아래 시궁창에 서식하는 막연한 존재이자, 그저 착취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제 영국의 왕이라면 영국과 영국인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왕은 그저 왕일 따름이었다만, 이제는 좋은 왕과 나쁜 왕의 구분이 생겼다.

 

좋은 왕이 되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므로 군주는 신분뿐 아니라 직업을 의미하기도 하는 시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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