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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52시간 근무 때문에 한국영화가 망한다는 한국경제 기사는 정말 말도 안되는 개소리입니다.

 

한국 영화의 구조적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오늘은 시나리오 작가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한국영화가 폭망해 가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공의 문턱에서 번번히 실패의 쓴맛을 본 시나리오 작가입니다. 영화 크레딧에 제 이름을 걸지 못했으니 실패한 시나리오 작가죠. 10여 년 전 암담한 한국 영화계의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글쓰기를 그만두었습니다. 그때 한국 영화계가 이렇게 망가질 것이라는 걸 어느 정도 예상했습니다.

 

한국영화에서 시나리오는 누가 쓴다고 생각하시나요? 우리나라에선 대부분 감독들이 시나리오를 씁니다. 감독들이 시나리오를 써서 가지고 오거나 원안(시놉시스)을 가져오면 작가들이 그걸 각색합니다. 지금 한국영화의 시스템은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게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습니다. 김지운이나 김기덕 감독이 자신의 시나리오로 영화를 찍고 나름 성공을 합니다. 그 이후 이런 감독들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강제규, 박찬욱, 곽경택, 최동훈, 나홍진 등등의 감독은 자신의 시나리오를 영화화해 아주 큰 흥행을 거둡니다.

 

감독들도 다른 작가의 작품보다는 자신의 작품을 영화화하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걸 뭐라고 할 순 없죠. 게다가 감독들은 아무래도 작가들보다는 인맥이 넓습니다. 그렇다 보니 입봉하고 싶은 감독들이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들고 인맥을 통해 입봉하는 것이 트렌드가 되어버리더군요. 작가는 감독이 쓴 시나리오를 고쳐주는 역할 정도가 되어 버린 것이죠.

 

위에 나열한 감독들이 활동하던 그 시기가 우리나라 영화의 최고 전성기였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 직감했습니다. 한국영화가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공정한 경쟁에 의해 더 나은 시나리오가 영화화되는 것이 아니라 감독의 인맥과 그가 쓴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는 것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고 작가들의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영화화되는 것은 매우 드물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작가들의 설 자리가 없어지고 영화계에서 먹고 살기 힘들어진 작가들은 공중파나 케이블로 넘어가거나 저처럼 퇴출된 작가들은 일반 생활인이 되어 버렸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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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에서 실력이 없으면 퇴출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한국영화계는 그렇지 않았기에 지금의 위기를 맞은 것입니다. 좋은 컨텐츠가 지속적으로 생산되어야 하는데 그걸 만들 수 있는 작가들이 대부분 공중파나 케이블로 빠지고 생활고로 퇴출되고. 그렇다고 원고료를 많이 주는 것도 아닙니다. 한 편당 1500~2000을 줍니다(지금은 3천 정도 받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뼈 빠지게 6개월 혹은 1년 넘게 작품을 써서 이 돈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거 받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제작사나 감독이 요구하면 각색 작업도 해줘야 합니다.

 

을의 입장인 작가는 혹시 거절했다가 영화계에 안 좋은 소문이 나면 작가 생명이 끝날 수 있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그냥 해줍니다. 그렇게 인연이 되서 다른 작품 의뢰를 받을지 모른다는 기대감도 있구요. 물론 네임 밸류가 있는 작가들에겐 영화사에서 각색료를 줍니다. 유명 작가들은 돈 안 받으면 아예 써주지도 않거든요.

 

언뜻 생각하면 2천이든 3천이든 큰 돈 아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직업적인 작가 입장에서 봤을 때 이 돈으로 몇 년을 버텨야 합니다. 언제 팔릴지 모를 작품을 쓰면서 말이죠. 헐리웃에선 영화제작비의 1~2%가 작가료입니다. 천 억짜리 영화라면 10~20억이 작가료입니다. 거기다 흥행하면 인센티브도 줍니다. 영화 판권을 다른 나라에 팔면 또 줍니다. 그래서 헐리웃 작가지망생들은 시나리오를 로또라고 생각한다고 하더군요.

 

한국 영화계의 현실에서 저런 걸 바라는 건 당연히 무리입니다. 바라지도 않지만 적어도 먹고 살 수는 있어야 계속 그 일에 종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영화계는 돈도 적게 주면서 그마저도 작가가 살아갈 수 있는 생태계를 완전히 파괴해 버린 것입니다.

 

감독은 대체적으로 이미지에 감각이 있는 사람들이고 작가는 언어와 스토리 구성에 능한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천재 감독이라 할지라도 항상 좋은 시나리오를 쓸 수 없습니다. 감독과 작가가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으면 한국에서 재밌고 좋은 영화는 점점 더 기대하기 힘들어질 겁니다.

 

누구도 항상 좋은 작품을 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인프라가 중요합니다. 좋은 인프라와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으면 그 중에 대박치는 작품을 쓰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영화계는 그런 인프라와 시스템이 없습니다. 그러니 운에 기댈 수 밖에 없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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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년 전 영세 애니메이션 제작사에서 의뢰가 들어와 작품을 써 준 적이 있습니다.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써달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원고료가 5백. 그래도 썼습니다. 당시 저에겐 돈이 문제가 아니었거든요. 어떻게든 입봉을 해서 제 이름을 알리는 게 중요했으니까요.

 

3개월 동안 죽어라 써 줬습니다. 그런데 결국 제작은 안됐습니다. 투자자가 없어서. 그때 알게 됐는데 우리나라 애니메이션은 세계적인 수준입니다. 2D는 일본 다음, 3D는 미국 다음입니다. 우리나라 애니메이션은 대부분 일본이나 미국에서 하청받아서 생산하는 방식입니다. 오리지널 작품이 거의 없습니다.

 

제작사 대부분이 영세하다 보니 좋은 작가를 고용할 수 있는 형편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형편이 안 되니 좋은 작가를 고용할 수도, 키울 수도 없고. 그게 반복되니 오리지널 작품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다른 나라 하청업체로 생계만 유지하고 있는 것이죠.

 

일본이 애니메이션 강국이 된 것은 수많은 만화 작가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앤롤링이 해리포터를 쓸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운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영국엔 마을마다 동네마다 소설을 쓰고 창작하고 토론하는 모임이 있습니다. 이런 인프라 없이는 한국영화의 미래도 밝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부자가 될 생각으로 시나라오 작가를 하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글 쓰는 게 재밌고 그 일을 계속하고 싶어서 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공중파나 케이블로 간 작가들이 대우가 형편없는 영화판으로 다시 돌아올까요? 저 역시 영화를 좋아하지만 우리나라 영화판엔 질렸습니다.

 

영화에 있어서 시나리오는 건물의 골격과 같은 것입니다. 영화인들도 잘 알고 있죠. 백이면 백 시나리오가 제일 중요하다.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작가에 대한 대우, 형편없습니다. 저작권에 대한 생각, 형편없습니다. 중국 저리 가라입니다. 저도 몇 번 당했습니다만 남의 아이디어 도용하고 표절하는 거 예사입니다.

 

한국영화의 문제점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면 사실 밤새워 얘기해도 모자릅니다. 두서없이 쓰다 보니 글이 너무 길어졌네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제가 겪은 영화판 이야기를 조금 더 해드겠습니다.

 

 

 

 

 

 

편집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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