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이제 너는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은유를 쓰지 않는다.

황인찬 <너는 이제 시인처럼 보인다>

 

 

1.

 

스크린샷 2019-03-12 오전 12.14.29.png

 

이말년 작가의 명작 '이말년 씨리즈'의 마지막 편 본격 산타 만화, 산타 학교 편의 주인공 오팔봉은 산타가 되기 위해 산타 학교에 입학하지만 그곳의 선배로부터 산타가 되기는 사법고시에 합격하기보다 6억 배는 더 힘들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겉으로 보여지는 화려한 모습의 이면에 존재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무슨 선물을 줄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하는 눈썰미와 모든 선물을 일일이 기억할 수 있는 기억력, 비자 발급이 까다로운 나라에 잠입하기 위해 스텔스기를 구매할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이다. 또 이러한 까다로운 조건과 더불어 선발 인원이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 역시 그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

 

그는 가진 노력으로 30년을 투자해 산타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산타가 지녀야 할 기본 소양(반드시 아이가 잠들어야 산타는 그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의 부족으로 결국 1197회 산타 고시에 불합격하고 만다. 낙방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술을 마시며 산타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겠다고 말하는 오팔봉에게 술집 주인은 제법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한다.

 

'산타의 존재를 부정할 때 어른이 되고 어른이 될 때,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비로소 산타가 될 수 있다.'

 

 

2.

 

wpid-oedipus.jpg

 

그의 이야기를 다시 정리해보면 산타의 존재 부정(존재 부정) -> 어른(새로이 생성된 피투적 존재의 생성) -> 산타(부정 존재로의 회귀)의 3단 구조로 정리할 수 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존재의 부정을 통해야만 존재가 될 수 있는 아이러니'

 

이 심플한 아이러니는 우리에게 그다지 낯설지 않다. 이 아이러니의 원형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끝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남자, 오이디푸스가 서 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역시 신탁을 통해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유배(존재 부정) -> 코린토스에서 신탁에 대해 듣고 운명을 실현하기 위해 테베로 떠남(새로이 생성된 피투적 존재) -> 신탁의 실현(부정 존재로의 회귀)의 3단 구조를 통해 운명으로의 회귀를 실현한다. 산타가 되기 위해서 산타의 존재를 부정해야 했던 오팔봉처럼, 오이디푸스는 아버지의 가슴에 칼을 쑤셔넣고 어머니를 취하는 '오이디푸스'가 되기 위해 코린토스의 유배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한 번 부정당해야 했다.

 

(*편집자 주: 오이디푸스는 왕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되리라는 신탁 때문에 산속에 버려졌다. 다행히 크린토스 목동에게 발견되어 살아남았으나, 신탁의 예언대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미니와 결혼하게 된다.) 

 

오팔봉은 어른이 되었고, 오이디푸스는 코린토스로 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둘은 환경 혹은 운명에 의해 수동적으로 움직이게 되는 피상적인 존재들로 일견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둘은 그 피투적 존재 상태에서 자신의 운명에 저항하기 위해 기투적 행동을 취한다. 오팔봉은 산타 학교를 그만두고, 오이디푸스는 테베로 떠나는 행동이 바로 그것이다. 둘은 저마다 '내던져진' 상황에서 각자의 판단으로 새로운 자신을 만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던진다'.

 

물론 오팔봉은 산타가 되기를 포기함으로서 부정 존재로의 회귀가 아닌 제 3의 길을 선택(산타도, 산타를 준비하는 자신도 아닌)을 하였으나 오이디푸스는 애석하게도 부정 존재로 회귀해 버리고 만다. 이 상황을 두고 운명이라는 낡은 기호를 사용할 수도 있겠으나, 여기서는 이 전개 과정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에 더 집중하고자 한다. 서로 다른 결말임에도 우리로 하여금 비슷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마치 마음을 묵직하게 누르는 듯한 무거운 무게추, 바로 무기력감에 대해 말이다.

 

산타를 부정한 오팔봉도, 자신의 운명을 기어이 실현해내고 만 오이디푸스도, 모두 우리로 하여금 씁쓸한 뒷맛을 남기게 한다. 다른 길을 가고자 개척한 오팔봉은 끝내 자식의 생일날 원하던 마법천자문 대신 이말년 씨리즈를 사 버리고, 자신의 운명을 모두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찔러 스스로 장님이 되길 청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왜, 우리는 운명에 저항하여도, 운명에 순응하여도 이토록 무기력한 것인가. 어째서 왜 우리에게는 이다지도 비극적인 선택권만이 존재하는 것인가.

 

 

3.

 

MV5BYzg4ZTc5NmEtYjg2OS00NWU4LThlZjUtNThlMDIyNjUwMDYxL2ltYWdlL2ltYWdlXkEyXkFqcGdeQXVyNDkzNTM2ODg@._V1_.jpg

 

하이데거의 이야기를 잠시 빌려오자. 그는 인간의 허무함이나 권태감 따위의 감정에 대해 그것이 인간인 이상 가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요소라고 하였다.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를 통해 세상에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피투성이에서 발현되는 필연적인 허무감은 생애 내내 인간을 짓누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 양식의 중요한 요소중 하나인 '정상성'은 그 자체로 인간이 피투적 존재라는 한계점을 드러낸다. 마음이라는 불안정한 요소는 끊임없이 인간을 공격하고, 우리는 이 일방적인 공격을 오롯이 받아내야만 한다. 이것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가질 수밖에 없는 원죄와도 비슷하다. 자신의 목적 의지로 구현해 낸 생의 출발이 아닌 2차 목적을 통해 시작된 출발점이라는 태생적 한계. 모든 기원이 그러하듯 이 기원 역시 비극적임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비극을 이겨내기 위한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 하이데거처럼 세계 - 나 - 존재라는 자신과 주변 상황과의 접점과 그 연대를 통해 인생을 능동적으로 다시 한번 던지는 것일까? 앞서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실제로 그러한 것처럼 보인다.

 

다시 오팔봉과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아들의 선물로 이말년 씨리즈를 준비해 버린 만행을 저지른 오팔봉의 앞에는 마법천자문을 들고 나타나는 메시아 유덕구옹이 있고, 자신의 눈을 찔러버린 오이디푸스에게는 자신을 부축해 줄 딸 안티고네가 있다. 오팔봉과 오이디푸스 모두에게 존재하는 타자라는 메시아다. 유덕구옹과 안티고네 모두 어떤 이해 관계에 의해 둘을 돕지 않았고, 그 결과 오팔봉과 오이디푸스는 구원받을 수 있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그리고 남은 우리에게는 연대의 소중함이라는 구태의연한 교훈만 남는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는 정말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앞서 이야기했듯, 훈훈하다 한들 마음속에 침전물처럼 남아있는 이 비극적인 씁쓸한 맛은 어떻게 해야 좋은가. 정말 이야기는 이렇게 끝내도 괜찮은 것인가.

 

 

4.

 

결론에 들어가기 앞서, 먼저 지금까지 써왔던 글에 오류가 있음을 스스로 인정해야겠다. 둘은 결코 무기력하지도, 씁쓸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이야기를 조금만 더 빌려보자. 그는 인간이 '비본래적 형태'로 떨어지는, 이른바 자신의 비실존적 형태로 퇴락해 버린 인간의 요소로 세 가지를 든다. '공담, 호기심, 애매성'이 바로 그것이다. 복잡하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저 인간은 피상적이고, 표면적이기 때문에 퇴락해 버린다는 것이다. 타인의 기준에 맞추어 평균적으로, 보편적으로, 적당히, 이야기해 버리기 때문에, 개개인의 존재에 깊게 탐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평균적인 인간이 되어버리고, 그렇기 때문에 허무하고 불행하게 보인다. 그래서 오팔봉이 씁쓸했고, 오이디푸스가 비극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비극으로 인식하지 않는 순간, 자신의 존재 자체를 평균적인 시선에서 한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조망하는 순간, 둘의 이야기는 그다지 비극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저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련의 감정적 에피소드들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지속적으로 자신의 생을 다음으로 던지는 인간 실존의 의연하고 처절한 투쟁사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은 때로 연대하며, 때로 고뇌하며 자신과의 싸움을 어딘가에서 계속해 나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언가 정의내릴 수 없는 인생이라는 농도 짙은 인간 실존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이 비록 세간에는 비극처럼 보일지라도, 결코 그것은 개인실존에 있어 비극으로 부를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찰리 채플린이 했던 말을 도치시켜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인생은 멀리서 보면 비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고.

 

33ef246f363eb5a89756740623211592.jpg

 

 

 

 

 

 

편집부 주

 

위 글은 독자투고에서 납치되었습니다.

딴지일보는 삼진아웃 제도의 유구한 전통을 이어온바,

톡자투고 및 자유게시판(그 외 딴지스 커뮤니티)에 쓴 필자의 글이

3번 마빡에 올라가면 필진으로 자동 등록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