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사례] 대통령 탄핵의 역사 2004.3.12.금요일 탄핵(彈劾)이라.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공직에 있는 사람의 부정이나 비행 따위를 조사하여 그 책임을 추궁함, 또는 그 절차"라고 설명되어 있다. 없는데서야 나랏님도 씹는다는 말이 예로부터 있어왔다만, 국가 최고지도자가 큰 잘못이라도 저지르면 대놓고 파면을 때려버릴 수도 있으니 민주주의가 참 좋긴 좋다. 다음은 지금까지 탄핵으로 물러난, 혹은 탄핵절차가 마무리되기 전 알아서 물러난 역대 해외 대통령들의 사례 되겠다. 압두라만 와히드(인도네시아) 와히드는 1999년, 인도네시아 헌정사상 최초로 민주적 절차에 의해 당선된 대통령이었다. 참고로, 와히드 이전 인도네시아의 실권자는 바로 30년간 독재권력을 휘둘렀던 토미 수하르토 되겠다. 그러나 그는 집권기간 내내 부정부패 및 국정운영 실패로 공격받다가, 2001년 이른바 블록게이트라 불리는 조달청 공금횡령 혐의 및 브루나이게이트라 명명된 브루나이국왕 기부금 수수혐의에 휘말리게 된다. 사태의 발단은 와히드의 측근이 조달청 간부에게서 구호기금조로 350억루피아(44억원)에 달하는 거금을 가로챈 비리사건이었는데, 와히드는 이 사건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조달청 자금 대신 브루나이 국왕의 구호금을 받았다"고 발언함으로써 이번엔 브루나이 국왕의 돈을 가로챘다는 혐의를 받게 된 거다. 이를 둘러싸고 친와히드 세력 및 반와히드 세력의 충돌이 빚어진 가운데, 결국 와히드는 탄핵당해 권좌에서 물러나는 비운을 맞았다. 그리고 그해 7월 23일, 와히드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전 부통령이 대통령직에 취임하였다. 와히드는 이후로도 인도네시아 정계에서 만만찮은 지지세력을 유지하고 있다. 카를로스 안드로스 페레스(베네수엘라) 페레스는 1974~1978년에 걸쳐 이미 대통령직을 수행한 바 있었으나, 1988년 대선에서 승리해 재집권에 성공한 보기 드문 사례를 이룩한 인물이다. 이는 퇴임한지 10년이 지난 전직 대통령에게 재출마의 권리를 보장하는 베네수엘라 헌법상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재집권기간 내내 그에 대한 개인부패 혐의가 끊임없이 제기되었으며, 1992년에는 하마터면 쿠데타로 실각할 뻔한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또한 의회의 페레스에 대한 견제 역시 집요해 1992년과 1993년, 두차례나 페레스에 의한 탄핵을 시도하였다. 결국 1993년 12월, 페레스는 1700만달러에 달하는 개인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탄핵 절차가 진행되던 도중 사임하는 운명을 맞았다. 게다가 1996년 5월에는 법원에 의해 유죄판결을 받기에 이른다. 재미있는 것은, 1992년 쿠데타로 페레스 정권을 전복하려고 시도했던 주동자인 우고 차베스가 1998년 선거를 통해 베네수엘라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리처드 닉슨(미국) 미국 역사상 대통령이 탄핵재판을 받은 경우는 2차례(17대 앤드루 존슨, 42대 빌 클린턴)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무죄판결을 받고 남은 임기를 잘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른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오명을 쓰게 된 리처드 닉슨은 탄핵재판을 받기 직전 자진하야하는 길을 택했다. 워터게이트 스캔들은 1972년, 당시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측이 공작팀을 가동해 민주당 선거사무실을 도청하려다 발각된 사건이었다. 당시 민주당 사무실이 자리잡고 있던 빌딩 이름이 워터게이트였던 관계로 그러한 명칭이 붙었다. 이 사건에는 대통령 보좌관이 처음부터 개입해 있었고,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닉슨 본인도 은폐공작에 가담한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닉슨은 1972년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지만, 재임이후 계속 이 스캔들과 관련된 압력에 시달리다가 1974년 마침내 하원의 탄핵결의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다. 이전까지 도청공작 관련의혹을 부인해왔던 닉슨은 결국 탄핵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사임하게 된다. 당시 부통령이었다가, 닉슨의 후임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된 제럴드 포드는 닉슨을 사면해줌으로써 형사처벌 가능성으로부터 전임자를 보호하였다. 페르난두 콜로르 데 멜루(브라질) 콜로르는 1989년 12월, 브라질에서 30여년만에 처음 실시된 대통령 직접선거에서 당선되어 이듬해인 1990년 대통령직에 올랐다. 당시 그는 겨우 39세로 선거 이전까지는 비교적 무명 정치인이었으나, 선거과정에서 부르주아 계층의 폭넓은 지지를 얻어 당선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영광스러운 집권과정에 비하면, 집권기간 내내 그에게는 부정부패의 꼬리표가 붙어다녔다. 게다가 브라질의 살인적인 인플레를 잡기에도 그의 역량은 부족했다. 게다가 때마침 브라질 정계에서 촉발된 소위 정치윤리회복운동 또한 콜로르의 정치생명을 옥죄는 요소로 작용했다. 이에 결국 1992년, 브라질 하원에 의해 대통령 탄핵안이 의결되기에 이른다. 콜로르는 그해 12월 29일, 상원에서 탄핵절차가 진행되는 도중 돌연 사임하였다. 이에 따라 브라질 대통령직은 이따마르 프랑쿠 당시 부통령에게 승계되었다. 라울 쿠바스(파라과이) 쿠바스는 1998년 5월에 실시된 파라과이 대선에서 승리하며 집권에 성공하였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지난날의 정치적 동지인 리노 세사르 오비에도 전 육군참모총장의 석방문제로 정쟁을 일으켰는데, 오비에도는 1996년 민선정부를 전복하려 기도한 혐의로 당시 10년형을 언도받고 수감중인 상태였다. 하지만 쿠바스는 독단적으로 오비에도를 석방시켰고, 이에 따라 반대세력의 격렬한 저항이 이어졌다. 또한 쿠바스의 정적인 루이스 마리아 아르가냐 부통령을 중심으로 쿠바스 탄핵논의 및 절차가 고개를 들게 된다. 그러던 1999년 3월 23일, 탄핵절차를 추진중이던 아르가냐 부통령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는 거센 민중봉기를 촉발하는 요인이 됐고, 쿠바스는 그날로 브라질로 달아나 버렸다. 훗날 파라과이 법원은 쿠바스와 다른 6명의 정치인이 아르가냐 암살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하고, 이들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하기도 했다. 쿠바스 도주 이후, 파라과이의 대통령직은 루이스 곤살레스 마치 당시 상원의장에게 승계되었다. 조셉 에스트라다(필리핀) 에스트라다는 영화배우 출신으로, 1998년 대통령선거 승리로 집권한 인물이다. 대부분의 필리핀 대통령들이 엘리트 출신인데 비해, 빈민가에서 태어난 에스트라다는 변변한 학벌이나 경력도 없이 빈민층의 절대적인 지지에 힘입어 당선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재임기간 30개월동안 최소 17채의 호화저택을 포함해 8찬만달러를 축재 및 은닉한 사실이 드러나며 위기를 맞았다. 게다가 심한 여성편력(그는 대통령 취임 이전부터 최소 7명의 여성으로부터 12명의 자녀를 본 사실이 알려져 있었다)으로 인한 윤리시비도 여전했고, 설상가상으로 도박업자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까지 제기되었다. 1백만명에 달하는 군중이 에스트라다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에 가담하는등, 소위 피플파워의 위세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2000년 1월, 탄핵절차 진행중 자진하야하기에 이른다. 퇴임후 그는 부패혐의로 필리핀 경찰에 체포되는 등의 수모를 겪었다. 알베르토 후지모리(페루) 후지모리는 일본계로서 페루 대통령직에 오른 매우 독특한 케이스로, 1990년 처음 집권한 이래 반대세력의 위헌 논란까지 야기해가며 내리 3선에 성공하는 등, 높은 대중적 인기를 구가한 바 있다. 그러나 특유의 강한 카리스마로 인해 독재라는 비난을 피하지 못했다. 그러나 후지모리는 2000년 9월 국가정보국의 야당의원 빼내오기 스캔들에 휘말리며 크게 휘청거리게 된다. 자신의 측근이었던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 국가정보국장이 야당의원을 매수하는 현장이 촬영된 비디오가 공개된 것이다. 결국 그해 11월, 브루나이에서 열린 APEC 정상회담에 참가했던 후지모리는 그 길로 도쿄로 내뺀 뒤 도쿄시내 한 호텔에서 팩스로 대통령직 사직서를 보내는 엽기적 행각을 저지른다. 흫미로운 건, 명색이 페루의 국가원수였던 후지모리는 알고보니 이중국적자였다는 거다. 현재까지도 일본 정부는 후지모리가 일본 국민이라는 점을 들어 페루 정부의 신병인도 요청을 거부하고 있다. 후지모리의 사직서와는 무관하게, 페루 의회는 대통령 해임안을 가결처리함으로써 그의 대통령직을 박탈하는, 사실상의 탄핵절차를 취했다. 이후 후지모리의 행적에 대한 대대적인 검찰수사가 진행되었고, 그 결과 살인, 공금횡령 등의 죄상이 추가로 드러났으며, 페루 국민들 사이에서는 후지모리에 대한 반감이 지배적으로 퍼져갔다.
민생현안에는 졸라 둔감하더니 정권획득과 관련된 문제에는 더없이 센시티브한 울나라 정치판, 드디어 그 누구도 탄핵씩이나 되는 사유로 생각하지 않을 건을 갖고 의회민주주의의 찬란한 승리를 일궈냄으로써, 그 무한한 정치적 상상력을 세계 만방에 고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사과여부와 관계없이 탄핵한다"는 발언으로 "대량살상무기가 나오든 안나오든 이라크를 친다"는 부시클럽에 가입하게 된 조쑨형대표, "탄핵안에 찬성하지 않는 의원은 출당시킨다"는 카리스마로 진정한 정치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준 최벙럴대표. 그리고 그 이하 191분덜. 아무쪼록 으원회관 벽에 뭐 칠하는 그날까지 영광덜 있으시라. 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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