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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10.12.월

NY 특파원 이주현







효녀심청, 억순이, 백설공주, 똑순이, 그리고 무엇보다 배고푸고 괴롭고 슬퍼도 나는 안울어... 캔디, 캔디..

5년전 달랑 300불 들고 혼자 미국에 와, 막일에서부터 시작, 접시닦이, 호스티스, 짐 나르기, 식당 종업원, 댄서... 불법으로 일하면서 욕도 무진장 얻어 먹고, 도둑질도 하고... 그렇게 그렇게 이를 악다물고 일해


지금은 NYU 석사를 따고, 레스토랑 경영 전문가, 식당 웨이츄레스 전문가, 짐 나르기 전문가, 밥 안먹구 일 막하기 전문가, 온몸 상처투성이인 인간 상처 디스플레이, 꼴같지 않게 무용가, 안무가, 공연예술 행정가, 공연기획 전문가가 되어 브로드웨이의 유명한 공연기획사 Dancing in the Streets, Inc.에서 무용공연 코디네이터로서 일하고 있는 뉴욕 특파원 이주현, 인사드립니다. 꾸벅.


총수님이 기사보내기 앞서 자신의 스토리부터 시작하는게 좋겠다고 하셔서 5년전 정말 빈손으로 처음 뉴욕에 와, 맨땅에 헤딩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몇회 나눠서 할까 해요. 잼없어도 잼있다고 격려해주세요. 꾸벅..




 


3. 졸업 후 1년... 


학교를 졸업한 후의 이야기를 하기 앞서, 미국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며 느낀 몇 가지를 여러분과 잠깐 나누고자 한다. 미국대학원은 내가 한국에서 다니며 익숙해졌던 학교라는 곳에 대한 많은 고정관념을 부숴주었다.


미국에 와서 시간이 흐르고 학교생활에 점차 익숙해져 가면서 이론적인 학과수업은 따라갈 수 있었지만( 물론 네이티브 스피커들을 따라가기란 여간 힘든 것이다..) 안무를 하여 자기작품에 관한 철학적인 논쟁을 하는 시간만큼은 완전히 기가 죽곤했다. 그것은 영어를 잘하고 못하고..하는 언어 문제가 아니었다.


한국에서 갓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건너와 대학원에 진학한 나와는 다르게, 몇년씩 사회를 겪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온 사람이 대부분인 그들은 단순히 나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에서 나온다고 보기엔 너무도 자신감 넘치는 자신만의 주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어느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는 것이었고, 또 누가 말로 들려준다고 해서 배울 수 없는 그 어떤 것이었다. 한참 후에야 그런 그들 자신감의 바탕은 바로 경험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안무발표를 할때마다 자신의 주장을 펼치며 뿜어내는 그들의 자신감은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들의 주장이 옳고 그름을 떠나 그 주장의 당당함과 자신감에 먼저 기가 죽곤 했던 것이다. 나는 그들과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들과의 이런 토론을 통해 두 가지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한국에서 배운 것이라고는 외국에서 배운 선생님들에게서 외국의 것 밖에 없었던 나로서는, 막상 미국에 와서 나의 주장을 펴야할 때, 한국인으로서 한국인만이 할 수 있는 그 어떤 주장도 펼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너무도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나의 뿌리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주장할 수 있는가..." 결국은 그런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인으로서 나의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된 것이었다.


또 한가지 중요한 깨달음은, 경험이 뒷받침되지 않는 이론은 결국 이론에 불과하다는 평범한 진리였다. 그런 토론에서 그들의 주장에 압도되어 기가 죽어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서 난 항상 이렇게 중얼거렸었다.


" 그래.. 경험을 쌓자.. 경험을.. 그래 두고봐라.. 너네를 이기고 말테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



그렇게 다짐은 했지만, 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사회에 첫발을 딛는 순간 난 너무도 암담했었다. 어떻게 하면 내가 꿈꾸어 왔던 일들을 성취할 수 있을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곳에서 과연 어떻게...


졸업 직전, 한국의 주민등록증과 같이 신분 확인용으로 반드시 필요하다고 해서 "운전 면허증"과 "소셜 시큐리티(Social Security)"를 받아두었지만 그런 서류가 내 불안감을 줄여주지는 못했다.


다행히 대학원을 졸업한 학생에게는 일년간 미국에 머물며 자기 전공분야를 더 연구하거나 관련분야에서 일을 할 수 있는 훈련기간인 프렉티컬 트레이닝(Practical training)이 허락되었는데, 그 1년이 지난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할지 막연하기만 했던 것이다.


학교를 다시 들어가면 학생비자가 나와 체류기간을 연장할 수 있었지만, 학교에 재등록하자니 경제적 여유가 없었고, 그렇다고 1년 후에 그냥 돌아가긴 정말 싫고, 결국 방법은 제대로 된 직장에 취직하는 것 밖에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런 곳에 취직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부터 너무도 불안하고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던 그 1년동안, 내가 거쳤던 과정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혹시 미국에 무작정 건너와 어떻게든 해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눈여겨 보시기 바란다...


졸업 후 가장 먼저한 것은 집을 구하는 것이었다. 보증인이 없으면 안되고, 또 고정된 수입이 없으면 수개월 분의 집세를 미리 내야하는 등 보통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다행히 운 좋게 빌리지 보이스(Village Voice)라는 신문에 난 광고를 통해 브로커 없이 집을 구할 수 있었고 같이 졸업했던 학교 친구들 6명과 코딱지 만한 스튜디오에서 같이 살기 시작했다.


첫번째 일자리는 세인트 막스(St. Marks Place) 거리에서 티셔츠 가게를 하던 한국인 아저씨가 소개해준 아프카니스탄 식당 카이버페스였다. 이 식당은 잊을 수가 없다. 졸업 후 첫 일이었고, 풀타임으로 뛰는 첫 일이었으며, 식당일로서도 처음이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카이버페스의 주인인 Mr. Sha 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뉴욕으로 이민 온 사람이었는데, 식당의 규모는 최고 80-90명 정도 받을 수 있는 작은 크기였고, 주방에는 요리사아저씨( 저 먼 아프리카에서 온 아저씨들..) 2명 그리고 설거지 보이, 웨이트레스 2명이 있었다.


당시 주인은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내가 너 같이 불법으로 일하는 사람을 쓰다 걸리면 우리 가게 문닫아야되고 벌금도 엄청 물어야 돼, 그러니 너를 여기서 일하게 해주는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된다, 알았지.. 처음 일하는 대가는 내가 알아서 줄 테니 돈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네. 감사합니다. 어떤 일이라도 시켜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당시 미국세법이나 노동법에 관한 것을 아무 것도 모르던 나는 그저 일을 해 돈을 벌 수 있다는 기쁨에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용하는지도 어떤지 알지도 못하고 그저 시키는대로 바보처럼 일을 했다.


처음 한 일은 주방구석에서 설겆이를 하는 것이었다. 웬놈의 식기가 그렇게 무거운지 한 손으로는 들기도 힘들었고, 그 식기들을 한국에서 닦는 식으로 했다간 하루도 못하고 쫓겨날 판국이었다.


음식 찌꺼기가 붙어있는 접시들을 플라스틱 통에 넣고 샤워기로 씻어 낸 다음 세제를 뿌리고, 다시 한번 샤워시키고 스팀기에 넣는 동작을 팔이 떨어져라 하루종일 반복했다.


환기도 안되는 구석에 쳐박혀 하루 12시간을 계속해서 식기를 닦다 보면 내 몸은 구정물 범벅이 되었고 허리도 아프고 탁하고 습한 공기를 하루종일 마셔 머리도 지끈거렸다. 그렇게 6개월을 설겆이만 했다. 설겆이 하면서 한가지 좋았던 것은 어깨너머로 주방장의 요리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웬만한 아프가니스탄 음식은 다 만들 줄 안다.


여하간 난 누구보다 열심히 했고, 단 한마디도 불평을 안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나자 불평 한마디 않는 내가 기특했는지 주인은 웨이츄레스를 한번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의를 했다.


너무도 기뻤다. 조그마한 식당에서 웨이츄레스가 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하루 12시간을 구석에 쳐박혀 설겆이만 죽어라 하던 나에겐 커다란 승진이었으며, 더구나 웨이츄레스 일을 하게 되면 그날 받은 팁을 모아 당일 일한 웨이츄레스끼리 나눠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돈도 더 벌 수 있어서 이래저래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웨이츄레스로 일하면서 또 한가지 좋았던 것은, 비교적 고기를 맘껏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식당에서 주는 것은 아니었고, 손님이 식사하다가 남긴 고기를 먹는 것이었는데 손님이 식사를 다 한 듯 싶으면 잽싸게 달려가 " Are you finished? " 하고 물어본 후  상냥하게 " May I take your plate" 한 다음 얼른 접시를 들고 주방으로 달려가 남의 시선도 아랑곳 않고 열심히 먹었던 기억이 난다. 왜 그렇게 그게 맛 있었던지..


나중에 돈 벌면 다시 이 곳에 와서, 꼭 내가 먹고 싶은 이 음식들을 다 시켜먹어야지... 속으로 다짐하곤 했었다...


그 당시 나의 하루 일과는 대충 이랬다.





























오전 10시 출근
오전 11시 식당 문을 연다
오전 12시 식당 청소 시작
오후 3시 주방에서 필요한 음식재료를 사와서 에피타이저를 만든다
오후 5시 빵을 굽는 사이 저녁을 먹는다.
오후 6시 손님으로 분주해지기 시작 - 주문 받고, 음료수 주문 들어오면 만들고, 음식 나르고 (샐러드는 직접 만듦), 테이블 치우고 (보통 규모가 있는 식당에는 버스보이<Bus boy>라고 해서 테이블만 치우는 사람이 따로 있다), 계산하고, 청소하고...
오전 12시 그 날 수입 계산 후 주인이 "Tip Tax" 20% 공제(이건 미국 어디에서도 없는 것으로 주인이 팁에다 세금을 임의로 매겨 무조건 내라고 한 것. 나쁜.. ) - 수입은 장사가 안되는 날은 하루 $ 35-40, 잘되는 날은 $ 90정도, 주방과 홀 청소시작. ( 손님이 있으면 갈 때까지 대기 )
오전 1시반 귀가..

처음 웨이츄레스로 일을 할때는 욕도 참 많이 얻어 먹었다. 불법 취업한 동양인이었기에 괄시가 더했지 않나 한다. 주문이 엇갈려 음식이 잘못 나왔거나, 일손이 부족해 음식이 밀렸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무조건 잘못은 나에게 있었고 나는 그 식당의 동네북이었다.. 청소하러 갈때는 청소부... 식당홀에선 웨이츄레스.. 나는 그 시절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미리 뜨거운 접시라는 말을 안해줘서 접시를 번쩍 집어 들었는데 손에서 지글 지글 소리가 나는 듯 했지만, 떨어뜨려 깨버리면 또 무슨 소리를 들을까.. 테이블까지 그냥 들고 가서 내려놓고는 화장실로 달려가보면 손바닥에 이만한.. 물집이 잡힌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고 주부습진까지 겹쳐 내 손은 이미 20대 처녀의 손이 아니었다. 이때 치료를 제대로 못해서 지금도 내 손은 거칠다..


이렇게 일을 마치고 새벽에 돌아와 다른 일터에서 돌아온 동료들과 각자 일터에서의 상사를 실컫 욕하곤 했는데, 그런 가운데 나는 내가 미국 밑바닥의 노동자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 시절 학교다니던 때부터 쌓였던 육체적, 정신적 피로에다가 식당에서 받는 스트레스.. 그리고 울퉁불퉁한 내 손을 펼쳐보면 까닭 모르게 엄습하는 우울증으로 신경이 폭발직전까지 갔었는데, 그럴때 나를 붙들어 주었던 것은 딱 두가지였다. 하나는 한국에 계신 부모님을 떠올려보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바로 돈이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보상은 성공해서 돈을 버는 밖에 없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식당에서 버는 수입만으로 하고 싶었던 공부를 계속하기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나는 식당 일이 끝난 후 또 다른 부업을 해야만 했었다.


행사가 많은 뉴욕인지라 끊임없이 행사장 부스가 만들어지고 다시 부숴지곤 했는데, 행사를 맡은 장식회사(Special Decoration Co.)의 트럭에서 행사장으로 박스를 옮기고 부스를 만들고 하는 일도 했었고, 야외 무대를 설치하는 일도 했었다.


이런 일은 주로 이~만한 덩치의 흑인과 스페니쉬들이 했는데 조그마한 동양 여자아이였던 나를 신기해 하긴 했지만, 오히려 이들이 나를 동등하게 대해 주었었다. 밑바닥 노동자들끼리의 동료의식이었을까..


이럴 일을 할때는 주로 새벽에 일을 해야했고 날씨에 전혀 상관없이 오로지 일정에 맞춰 일을 해야했기 때문에 특히 추운 날씨일때.. 정말 고생이 심했다. 크리스마스 직전 어느날.. 메트로테크라는 빌딩에 크리스마스 츄리를 장식하는 일을 했었는데 새벽에 전등에 올라가 장식을 하려니 쇠에 손이 쩍쩍 들어붙고 얼마나 추웠던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화장실로 달려가 쪼그리고 앉아 손을 비비며 한참을 숨어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나는 울지 않는 캔디...


 





4. 미국 주류사회에 도전하며...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돈을 마련한 후 드디어 예술행정학 수료증을 따는 여름 집중코스를 밟았다. 그리고 이 코스를 밟으며 나는 마침내 조그마한 희망을 발견했다.


마케팅시간에 초청강사로 준 초이(Jun Choi) -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Asian American Arts Alliance 의 Executive Director - 라는 분이 오셨다. 수업 시간에 회사소개를 하시고 교실 밖을 나가시는 그분의 손을 붙잡고 물어봤다.


" 저, 혹시 회사에 인턴 사원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무엇이라도 기회만 주신다면 다 하겠습니다.. "


사실 그다지 큰 기대도 안했다, 그냥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물어본 것이었는데, 3개월 지난 95년 10월 전화가 왔다. 가을 인턴을 뽑는데 인터뷰를 하고 있으니 언제 어디로 몇 시까지 오라는 것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졸업을 하고 사회생활이라고는 한번도 안 한고 온 나에게 미국사회는 넘지 못할 장벽처럼 높게만 느껴졌었다. 그런데, 항상 몸으로 때우는 일만 해왔던 내게 드디어 회사 인터뷰의 기회가 온 것이었다.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도 회사 인터뷰를 한적이 없었던 나는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은 채 그냥 평상시 입던 옷을 입고 인터뷰를 하러갔다. 그리고 모든 질문에 솔직하게 답변했다.


아직 이런 회사에서 일한 경험은 없지만 기회만 주신다면 밑바닥부터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겠다는 것을 특히 강조하면서..


사실 그런식의 " 무조건 열심히 하겠다.. "는 답변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라는 걸 안 것은 내가 회사에 들어가고 경험을 쌓은 후 이제는 인턴사원들을 직접 인터뷰하는 반대의 위치에 서고 난 후였다. 이력서를 보낸 후 인터뷰를 한다는 자체가 대단히 어렵게 오는 기회였다.


그리고 막상 인텨뷰를 하면서 아무리 열심히 하겠다고 조르고 졸라도 실력이 안되면 "I am sorry" 밖에는 해줄 말이 없는 곳이 미국이다. 일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최우선으로 따지는 미국사회에서 적어도 일자리 구하는 인터뷰에서 정이라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 오로지 실력과 경험만이 능력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된다.







동료 말리와 함께..


그런데 나는 파트타임의 인턴자리를 구할 수가 있었다. Jun Choi의 특별한 배려였다. 정말 고마웠다.


밤에 식당일, 청소일 등 몇가지씩 일을 하면서도, 낮이 되면 무거운 몸을 이끌고 회사에서 진행하는 갖가지 행사, 이벤트, 갤라, 세미나 등등에 젖먹는 힘까지 짜내며   반드시 참석하여 내가 배워야 할 것들을 배워나갔다.


그리고 그 시절, 드디어 미국사람들과 맞서 이기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하기 시작했다.


예술행정가가 되고 싶었던 나는 그런 일을 하려면 경력이 제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며, 적어도 관련분야에서 2-3년의 경험을 쌓아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답은 간단했다. 닥치는 대로 경험을 쌓는 것이었다. 돈이 되던 안되던 최소한의 생활만 되면 무조건 관련단체나 분야에 뛰어들어 경험을 쌓는 것,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때부터 나는 내가 가야할 길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고 나의 생활태도도 바뀌기 시작했다. 그 전에도 맡겨진 일은 언제나 불평없이 묵묵히 다했지만, 그렇다고 불만이 없거나 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무조건 참았던 것이지. 그러다 보니 속으로 쌓이는 스트레스는 정말 엄청난 것이었다. 스스로 정신착란이 오는 것이 아닌가 걱정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 즈음부터는 무슨 일이든 즐거운 마음으로 주인의식을 가지고 하게 되었다. 아마 내가 가야할 길이 눈에 보이고 목표가 뚜렷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갑자기 돈을 많이 벌게 된 것도 아니고, 큰 회사에 취직해 생활이 안정된 것도 아니었고 그저 바뀐 것이라고는 마음자세 뿐이었지만, 그런 마음자세의 변화는 내 생활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저 공부 욕심이 많기만 했던 철부지 학생이 비로소 미국에서 사회인으로 미국인들에 당당히 맞설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최초로 생긴 시절이기도 했다...


 


To be continued.....


- NY 특파원 이주현 ( Jewrhee@ao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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