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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04. 16. 월요일

정치부장 물뚝심송


 


총선은 전국적으로 벌어지는 게임이다. 등장인물의 숫자로 보나, 전체 유권자의 관심으로 보나 국가적으로 이 정도 규모의 게임이 흔하게 벌어지지는 않는다.


 


당연한 결과로, 이 정도 규모의 게임을 전체적으로 간단하게 규명하고 분석하는 포괄적 복기를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섣부른 총평은 결국 또 하나의 허술한 주장을 만드는 것에 다름 아니게 된다.


 


결국 총선 과정을 전체적으로 분석하기보다는, 그 과정을 통해 드러난 몇가지 놓치기 쉬운 특이점을 한 가지씩 설명함으로써 독자분들께 생각해 볼 거리를 몇 가지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해 보자.


 


그 첫 번째는 독선적 권력, 좀더 관습적으로 표현해 보자면 독재에 대한 향수가 된다.


 




 


 




 


 


이번 총선전을 정리하자면, 크게 몇 번의 반전이 있었다는 점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을 거치면서 야권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몰락에 빠져들었었다는 점을 기억해 보자. 그 추세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이어져 오고 있던 상황이다.


 


차기 대선후보로는 박근혜를 상대할 후보가 아예 없었고, 국회의 의석도 여차하면 한나라당이 개헌선을 확보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있었던 기억이 난다. 모든 민주, 진보 그룹은 절망에 빠져 있었고 이명박의 실정이 거듭됨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에서는 제대로 된 정치적 공세 한 번 취하지 못하는 모양새로 몇 년의 시간을 흘려 보내고 있었다.


 


우습게도 이 상황을 뒤집어 버린 것은 민주당이나 진보정당 등 정치권이 아닌, 시민들이었다는 점. 이 점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2008년 촛불을 시작으로 FTA 반대 집회 등의 유권자 저항이 이어졌고, 이런 저항에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이명박 정권의 반응은 유권자 그룹에게 심각한 불만요소를 제공한 것이다. 그 결과, 그들에게 무엇이 부족했는지, 즉 그들에게 발생한 어떤 결핍을 눈치 빠르게 알아낸 김어준의 <나는 꼼수다>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결국 오세훈의 무상급식 선거나 뒤이어 치러진 나경원의 서울시장 선거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면서 야권에게 활력소를 불어넣었다는 점을 부인할 도리는 없다.


 


이런 분위기가 이어지면서 이번 총선의 전초전에서는 여야간의 지지율 추이에서 야권이 압도적으로 앞서는 상태가 유지되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여권에서는 여론의 심각성을 확인하고 당황하는 모습이 많이 노출되었었고, 내부적으로는 심지어 한나라당이 백 석 이하로 추락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비관적인 예측까지 나올 정도로 상황은 악화(그들의 입장에서)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야권에서는 이런 상태라면 한 번 해볼 만하다는 낙관을 가지고 총선전에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


 


이게 최초의 반전이다. 여권의 정권장악, 그리고 일방적인 독주 끝에 만들어진 끈적거리는 교착상태를 나꼼수가 등장하면서 깨트려 버리고, 여론의 주도권이 야권으로 넘어오는 과정 말이다.


 


그리고 곧 이어 두 번째의 반전이 등장하게 된다. 바로 이 글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부분인데, 총선을 준비하면서 진행된 여야의 공천과정이다.


 


위기를 느낀 여권은 좀 더 신비함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할 박근혜를 전면배치 하고 소위 말하는 개혁공천을 시작하게 된다. 당명을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교체하고, 과연 이런 사람들이 한나라당에 들어갈 수가 있을까 싶은 정도로 파격적인 비대위원 인사를 한다. 김종인, 이상돈 등이 그런 사례가 된다.


 


재벌개혁을 얘기하고 경제민주화, 복지 등을 얘기하던 이런 인사들이 새누리당에 들어가 비대위를 구성하게 되는 상황, 그리고 이어지는 파격적인 공천과정은 사실 중도계층에게 호소력있게 먹혀 들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야권에서는 야권 연대를 구성하기 위한 힘든 과정이 전개되었고, 그 과정에서 또 각 당 내부의 공천이 지속적인 잡음과 파열음을 내면서 소속 정파간의 이권 다툼으로 유권자들 눈에 비쳐지기 시작한다.


 


그 결과 힘겹게 야권연대를 성사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야권의 공천과정은 유권자들의 눈에 감점대상으로 인식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 상황이 바로 두 번째 반전이다. 이 두 번째 반전이 끝난 시점에서 야권 내부인사들은 이미 야권연대의 과반 점유가 물건너 가버린 것 아닌가, 민주당은 잘해야 130석 밖에 얻을 수 없다는 식의 비관적인 예측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두 번의 반전이 발생한 다음에 상황은 또 급속도로 야권에 유리하게 전개되기 시작한다.


 


청와대의 민간인 사찰 건이 터져나왔고, 정권심판론이 다시금 부활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에 놀란 여권의 스피커 조중동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나꼼수의 멤버 출신으로 총선에 출마한 김용민에 대한 무차별 공격을 시행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지역구가 막판 혼전, 박빙 상황을 유지하게 되었고 한번 해볼 만하다는 예측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으며 이 분위기는 투표 당일날 출구조사로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세 번째 반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반전은 결과로 나타났다. 거의 모든 박빙, 혼전 지역을 여권이 싹쓸이 하면서 새누리당은 과반이 넘는 152석을 차지, 민주-진보 야권연대는 합쳐서도 과반을 못 넘는 아쉬운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이 글에서는 바로 그 두 번째의 반전 부분. 여야의 공천 과정에서 지지율이 역전되게 되는 상황에 집중하여 얘기를 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박근혜의 새누리당은 공천과정에서 엄청난 지지율을 회복한다. 절망적이었던 여권의 분위기를 되살렸으며, 심지어 이번 총선과정을 통해 대선후보 박근혜의 지지율까지 사상 최고 수준으로 올려 놓게 된다.


 


도대체 공천을 얼마나 잘 했길래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반대로 야권은 얼마나 공천을 못 했길래 여당 백 석 이하라는 예측까지 나왔던 판이 뒤집히면서 다시 과반수를 빼앗기게 된 것일까?


 


먼저 가장 이상적인 공천 과정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자.


 


공천제도는 국내에서는 50년대 자유당에서 최초로 도입한 제도이다. 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이 실시될 때, 정당의 인정을 받고 정당을 대표하여 전국에 있는 각 지역구에 출마할 후보를 당에서 결정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제대로 된 민주적 대중정당이라면 어떤 후보의 공천은 전적으로 당원들의 권한이 된다. 특정 지역구의 후보라면 해당 지역의 당원들이 결정하는 것이 맞다.


 


그렇게 그 지역의 당원들이 자체적으로 공천 후보를 결정해서 중앙당에 추천하면, 중앙당은 단지 해당 후보가 정당에 위해가 될만한 심각한 결함이 있는가를 검증하는 차원에서 멈춰야 하고, 그런 검증이 통과되면 해당 지역 당원들의 의사를 전적으로 존중하면서 절차적으로 위임받은 권한을 활용하여 공천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태는 지극히 이상적인 상태로 현실에서는 구현되기 힘들다. 아니, 아직 구현되지 못했다.


 


각 지역별로 자율권을 가지고 있는 당원들이 상존하는 전국적 규모의 대중정당이 존재하지도 않고 당분간은 등장하지도 못할 것이다. 지역구라 해 봐야, 이미 선출된 의원이나 출마하고자 하는 후보들이 운영하는 사조직 수준의 지역당이 있을 뿐이고, 그런 조직조차도 붕괴 되어버려 없는 지역이 흔한 것이 실정이다.


 


결국 공천권 자체가 지역당원에 수중에 있지 못하고 중앙당의 공천심사위원회, 소위 말하는 공심위에 위임되어 있고 발휘되는 것이 현실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중앙에서 공천권을 휘두르며 그 대가로 공천헌금을 받아 당을 운영하는 악습도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았다. 총선만 치렀다 하면 항상 공천헌금 시비가 나온다. 전략공천이라는 어휘 자체도 당원의 의사를 무시한 중앙당의 직권남용의 혐의가 짙다. 누가 당의 전략을 결정하며, 누가 그 전략에 따라 공천권을 휘두른단 말인가.


 


즉, 현실은 아직 민주적인 공천과정을 수행하는 것이 힘들 정도로 비민주적인 정당운영이 일상화 되어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새누리당은 박근혜가 공천의 전권을 휘둘렀다는 것이 사실이다. 형식적으로야 비대위, 공심위 등이 활동을 했지만, 최종 낙점은 박근혜가 했다. 즉, 김어준의 표현대로 박근혜에게 "오너십"이 있는 정당이었다는 얘기이다.


 



 


3선 4선을 한 당 중진이라 해도 공천 자체를 받지 못하고 출마권 자체를 박탈당했다. 당원들의 목소리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부산에는 야권의 대표 대선주자였던 문재인의 지역구에 손수조라는 정치적 경력 자체가 없는 어린 후보를 공천을 해 버린다. 친이계 의원들은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다.


 


이런 공천과정은 그야말로 한 사람에게 엄청난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며, 독선적 권력, 말 그대로 독재적 정당에서나 가능한 일이라는 점은 다시금 되새겨 볼 일이다.


 


완전히 누군가 기획자가 앉아서 그림을 그린 결과이고, 그 그림을 현실로 바꿔 버릴 수 있는 독선적 권력이 박근혜에게 주어져 있었다는 뜻이다. 여기에 제대로 반발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굳이 찾아 보자면, 새누리당의 공천 과정에서 탈락한 전여옥 의원이 국민생각이라는 듣보정당으로 옮겨 비례대표 자리를 받고 출마한 경우가 떠오를 뿐이다. 나머지 친이계 중진들은 그렇게 천대받고 짤려 나가면서도 어떤 물밑 거래가 오고갔는지 찍소리도 못하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거기다가 그렇게 기획된 공천과정에서 공천된 후보들의 자질이 우수한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성폭행 전력이 있는 후보, 논문을 복사한 후보, 온갖 추문들이 넘쳐났다.


 


굳이 찾아 보자면, 전체 지역구를 총괄했을 때, 당선 가능성이 평균적으로 제일 높게 구성된 총선 맞춤형 기획 공천이었다는 평가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


 


이런 비민주적인 공천 과정이 어떻게 해서 개혁공천으로 칭송받으며 새누리당의 지지율을 급상승시키게 된 것일까?


 


반대로 야권은 어땠을까? 물론 야권의 공천과정도 이상적인 민주적 공천과정과는 거리가 엄청 멀다. 야권의 중앙당에서 역시 새누리당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기획공천이 시도된 흔적이 보인다. 하지만 오너십이 박근혜 일인에게 집중된 새누리당과 달리, 몇몇 정파가 혼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정파간의 이해가 충돌하며 잡음이 발생하면서 사람들에게는 이권싸움으로 비쳐지는 과정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권에서는 그나마 각 지역별 경선도 다양하게 치러졌으며, 그 경선의 결과 선출된 각 당의 후보들이 야권연대의 협상 결과에 동의하고 경선을 하거나 당별로 배정된 후보에게 양보를 하는 힘든 과정이 전개되기는 했다.


 


어찌보면 이번 총선을 거쳐 가장 바람직한 사례로 보이는 지역구는 경남 거제의 지역구였던 것 같다. 당 중앙의 결정과 관계없이, 야권 연대 협상과도 관계없이, 민주통합당, 통합진보당, 진보신당 3당의 후보들이 자체 경선을 통해 후보 단일화를 만들어 냈다. 물론 이 자체 경선에 참여하는 각 당의 후보 역시 각기 자기들의 당 내부에서 일정한 룰에 의해 선출된 후보들이었다.


 


문제는 그렇게 가장 민주적인 과정을 통해 선출된 진보신당의 김한주 후보는 낙선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정치는 논리적으로 진행되는 게임이 아니다.


 


정치판에서, 특히 총선이라는 과정에서 확고하게 존재하는 권력은 유권자의 선택이라는 것뿐이다.


 


유권자가 비민주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비민주적인 행태를 보이는 후보가 당선되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역설적으로 그렇다.


 


새누리당의 아주 비민주적인 총선 맞춤형 일인 기획 공천은 유권자들에 의해 "개혁공천"이라는 판단을 받게 된다.


 


그나마 각 계파간의 의사결정 과정을 거친 야권의 공천은 새누리당의 공천보다는 한걸음 더 진보한 민주적인 공천 과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권다툼"이라는 판단을 받게 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조중동 같은 언론들의 장난질이 개입하곤 했지만, 본질적인 면에서는 그렇다.


 


나는 이 지점에서 아직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중도성향 유권자들의 의식이 민주주의를 체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을 하고 싶다.


 


굳이 "조선놈들은 누군가 휘어잡고 패야 일을 잘한다"느니, 뭐 그런 종류의 열등한 패배의식 같은 것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가 무엇이고, 왜 민주주의가 인류가 만들어낸 모든 정치시스템 중에서 가장 우월한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해 보는 것 뿐이다.


 


강력한 권한을 가진 리더가 중요한 문제를 일사천리로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환희를 느끼는가 보다. 한마디씩 할 권한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시끄럽게 설전을 벌이며 한 가지씩이라도 상호의 이해관계를 조절해 가며 협상해 가며 일을 처리하는 방식을 "비효율" 이라는 한 마디로 재단해 버리는 무서움이 흔히 보인다.


 


야권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의 유권자들은 제왕적 총재로 군림하면서 당을 지배하고, 공천권을 휘둘러도 아무도 찍소리도 못하던 3김 정치의 시절에서 별로 나아지지 못한 걸로 보인다.


 


오히려 야권의 지지자들이 한명숙을 비난하는 모습 속에서, 왜 김대중처럼 당을 확실하게 장악하지 못하고 저렇게 힘없이 이리저리 끌려 다니느냐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런 것들은 결코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런 상황을 돌이켜 보면, 한 가지 모순이 남게 된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다수 유권자의 선택에 절대적이고 강력한 권한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다수 유권자들이 비민주적인 선택을 원한다면 어째야 하느냐 하는 질문 말이다.


 


요즘의 정국은 여야 모두 고정적인 각자의 지지자들을 가지고 있으며, 총선 같은 선거판에서는 누가 더 중도적인 부동층을 많이 설득해 내느냐는 것으로 승패가 갈리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그 중도적인 부동층들이 비민주적인 일처리를 선호하고 있다면, 그들을 설득하게 위해서 이번 총선의 새누리당처럼 비민주적인 공천을 해 버리고 환호를 받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민주적인 공천 과정을 고집하면서 선거에 패배해 버리는 것이 옳은 일일까? (물론 이번 야권의 공천과정이 민주적이었다는 평가를 내리기에는 많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국민들보다 딱 반 걸음만 앞서가는 정치가 옳은 정치다... 라는 돌아가신 김대중님의 말 한마디가 그 어느 때 보다도 무겁고 심오하게 들린다.


 


 



 


정치부장 물뚝심송


twitter: @murutuk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