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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04. 16. 월요일

논설위원 파토


 



 


패배다.


 


우원이 총선 결과를 딴지스, 독자 열분들 및 나꼼수 팀과 지켜보던 본지 신사옥 벙커 1에도 밤이 깊어지면서 점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모두 애써 힘을 내려 했지만 눈 앞에 드러나는 결과들, 역전과 재역전을 거듭하면서 쓰러져 가는 야권 후보들, 이어 빨갛게 칠해져 가는 영남, 충청, 강원의 지도는 마치 진흥왕 순수비를 세우던 강성했던 신라의 한때를 보는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솔직히 이야기하자. 우원은 작년부터 올해에 걸쳐 긴 시간을 외유로 보냈기 때문에 국내정치 상황에 깊이 개입해 있지 않았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나꼼수의 성공과 SNS로 대변되는 바람을 피부로 느끼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대부분의 소식을 해외에서 아이폰 뉴스 앱 등으로 확인해 기본적인 정보들을 접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이번 총선에 대해 그리 큰 기대를 갖고 있지는 않았다. 물론 당연히 이기기를 바랬고 이길 거라고 믿었지만 민주통합당 단독으로 새누리당을 누를 거라던가, 야권연대가 ‘개헌 의석’을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식의 완승 시나리오는 우원의 머리 속에 없었다. 그래서 처음 출구조사가 유리하게 보일 때, 딴지스 속에서도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 내심 놀랐다. 내가 그렇게 모르고 있었나? 과연 나꼼수나 SNS의 열풍이 현실 선거에서 그런 정도의 결과를 끌어낼 만큼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건가?


 


비록 우원이 게으르고 떠돌아다니던 탓이긴 하지만, 개표 결과 이런 우려는 결국 사실로 확인되고 만다. 바람은 우리들 속에서만 불고 있었다. 온 나라를 휩쓸고 세상을 바꿔 버릴 정도의 거국적 태풍이 아니었다. 우리 안에서만 휘감아 돌던 모래바람 때문에 눈이 가려 밖이 보이지 않았던 거다. 그래서 지고 난 후, 더 허무하고 망연자실하고 피로했을 거다. 꼭 이길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아니, 꼭 이겨야 했기 때문에.


 




 


우원은 여기서 다른 매체들이 이미 다 한 이야기를 다시 반복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미 열분들도 다 아시는 것들, 공천의 문제와 야권 여대 상황에서의 잡음, 한명숙의 지도력 결여, 오직 가카 심판만으로 밀어부친 전술적 오류, 나아가 김용민 등. 그래서 우원은 그런 거 빼고 딱 세 가지만 이야기 할란다.


 


먼저 자만과 환상. 이 문제는 촛불 때부터 서서히 나타나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를 거치면서 점점 확대됐다. 자만은 ‘야권연대만 이루면 1대1 대결에서 무조건 이긴다’ 는 확신으로 대변될 수 있고 환상은 ‘정의는 승리한다’는 류의 소박한, 그러나 절대적인 당위론을 말하는 거다.


 


노무현 서거를 거치면서 우리는 강한 감정적 고양 상태에 빠져 들었다. 이건 대략 슬픔과 분노 사이 어딘가에 있던 것인데 이런 흥분 상태는 추동력이라는 의미에서는 도움이 되지만 그 감정적 무게 때문에 이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만 철저히 뭉치게 만든다. 그런 감정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 우원도 그랬으니 – 그 결과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상태는 감정을 공유하는 이들과의 공감대를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데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소모하게 한다. 감정적으로 불안하기 때문에 방어적이 되고, 이 방어적인 상태는 공격적인 모습도 같이 갖게 한다. 그래서 내가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철저히 외면하고, 그런 만큼 주변을 객관적으로 살필 겨를이 없어진다. 나와 감정을 공유하지 않는 주변 현실 속의 사람들은 내 공격성을 눈치채고 아예 그쪽 대화를 하려 들지도 않는다. 이 과정에서 내 실제 생활 주변에 얼마만큼의 ‘적’과 ‘동지’가 있는지 점점 모르게 된다.


 


그럼 그 공감대의 재확인은 어디서 하나? 바로 SNS다. 다들 알다시피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구조는 내가 원하는 사람, 선택한 사람과만 주로 교류하게 돼 있다. 요즘 같은 시대에서라면 그 구분이 정치적 성향으로 정해지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면 내가 보는 타임라인에는 오로지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만이 모습을 드러낸다. 내 팔로워가 300명이던 30만 명이던 크기 차이일 뿐 이 본질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아니, 사실 팔로워가 많을 수록 착각에 빠져들기 쉽다.


 


혹자는 트위터에 민주/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많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트위터 가입을 위해서 특정한 정치 성향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닌 만큼,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트위터 속의 목소리들이 대략 10~40 대 정도의 일반인 정서를 대변할 거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허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트위터에 진보적인 사람들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그건 일반인의 평균 성향이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헌무리당을 지지하는 보수층의 경우 정치에 특히 관심이 많지 않은 한 트위터를 잘 쓰지 않기 때문일 뿐이다.


 


왜?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그들은 우리처럼 상처 입은 채 슬픔과 분노 사이의 감정을 몇 년 째 헤매 다니고 있지 않다. 우리처럼 끝없이 동지의 존재를 확인하고 감정적인 지원을 주고 받을 필요도 없다. 그들은 현실의, 기존의 가족이나 비즈니스 등 인간 관계 속에서 충분히 편안하다. 그런 데 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서 타임라인 체크나 RT에 열을 올리고 있겠는가?


 



SNS를 확인하는 김모 씨


 


그럼 진짜 ‘민심’을 알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 시장통이나 유흥가 길거리, 혹은 전철 안 같은 곳이다. 거기서 사람들을 하나하나 붙잡고 물어봐야 진짜 국민의 평균적인 생각들이 나온다. 하지만 이건 절라 힘든 일이니 또 다른 방법은 인터넷 신문 기사들의 댓글을 읽어보는 거다. 본지나 한겨레 같은 곳 말고 가급적이면 색깔이 덜한 곳을 찾아서. 이곳들을 들여다보면 기사의 성격에 따라 이쪽과 저쪽이 잠깐이나마 전선을 구축하면서 싸우곤 하는데 우리의 기대와 달리 저쪽이 우세한 경우도 많다. 근데 이러면 우리는 흔히 저쪽을 ‘알바’라고 폄하해 버린다. 과연 그럴까?


 


저들은 정말로 많은 돈을 들여서 수천 명의 알바를 고용해 온라인의 구석구석에서 24시간 암약시키고 있는 걸까. 물론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우원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기에서 드러나는 우리들의 심리적 맹점인 거다. 나와 정치적 관점이 반대되고 먼가 말하는 게 부자연스럽거나 반대로 너무 자연스러우면 알바로 치부하는 일종의 습관.


 


그래서 저런 수꼴적 생각을 가진 ‘정상적인 사람들’은 실제로는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전부 조작이거나 거짓이거나 돈으로 구워삶은 거라고 믿고 싶어하는 마음. 그 결과가 바로 착각과 자만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이제 우리가 상대해야 할 자들은 오직 정부와 헌무리당, 재벌, 수구 언론사 등뿐이며 그들을 지지하는, 표를 주는 일반 보수 대중들은 그저 무식해서 속고 있거나 너무 이기적이라 자기 생각만 하는 것처럼만 보인다. 따라서 이런 오합지졸 따위는 진실과 정의가 진용을 갖추기만 하면 스스로 지리멸렬, 사라지거나 정신차리고 정의의 편으로 돌아설 것이다.


 


…이런 정신 상태로 어떻게 이길 수 있나?


 


상대를 상대로 인정조차 하지 않는, 나와 생각이 다르면 바보거나 미친 놈이거나 나쁜 놈, 혹은 알바라는 관점을 가진 상태에서 진짜 승부가 가능하냐. 여기서 그들의 진실이, 정체가 뭐냐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다. 핵심은 상대가 어린아이더라도 전력을 다하는 진검 승부의 철학에 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저들을 잘 모르고 있으며 내가 보고 싶어 하는 모습으로만 보려 한다.


 


그렇게,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번 총선에서 진검 승부를 하지 않았다. 선거 전부터 승리의 기대에 도취되어 정의의 검을 칼집에서 뽑아 보이기만 하면 미욱하고 비겁한 저들은 그만 움찔하며 무릎을 꿇을 줄 알았다. ‘당연히 이길 거니 투표 안 해도 그만’ 이라는 일부에서 드러난 괴이한 모습은 이런 관점이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다. 제대로 승부를 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승리한다는 말이냐? 정의는 자동으로 이기는 힘을 가진 신비한 무엇이 아니라, 오로지 우리가 승리하게 만들 때만 승리할 뿐이다.


 



 


그리고 이런 이상 심리는 나꼼수 열풍과 SNS 속에서 확대 재생산되었다. 당시 우원은 나꼼수 기획에 반대하는 입장에 가까웠지만, 이후 큰 성공을 보면서 고무되기도 했고 본지의 토양 하에서 이런 프로그램이 등장했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냉정하게 보자.


 


나꼼수가 평균 200만의 다운로드를 기록하는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맹점이 있다.


 


첫째, 나꼼수를 다운로드 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미 이런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즉 나꼼수는 앞서 이야기한 동료와 공감대 확인의 극단적인 지점에 있는 매체다. 단지 확인이 아니라 거침없음과 유머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달리 말한다면 나꼼수는 저쪽이나 이쪽저쪽 중간의 어디쯤 있는 많은 사람들, 즉 정치적 동지애의 확인 및 카타르시스를 굳이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


 


둘째, 다운로드 200만이라는 수치의 실체다. 이를 방송 시청률로 한 번 환산해 보자. 다운로드 받은 사람들이 모두 각기 다른 개인이라는 전제하에 보면 5000만대 200만, 즉 인구비례 4%가 나온다. 이를 우리가 흔히 쓰는 가구 시청률로 만들기 위해서는 2.5 나 3 정도를 곱하는데, 3을 곱하면 12퍼센트다.


 


참고로 지난 2월 2일자 해품달의 가구 시청률은 40.5% 였다. 이건 무슨 뜻인가? 기존의 본지나 온라인 매체들의 기준에서 본다면 분명 엄청나지만, 티비 같은 주류 미디어를 기준으로 한다면 그저 평균 정도 프로그램이라는 의미다. 온라인 바깥의 세계에서는 우리 생각만큼 대박은 아닌 거다. 마, 이런 이야기들로 나꼼수를 폄하할 생각은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다만 지금 드러난 선거의 결과를 통해 냉정하게 우리가 가진 한계를 짚어봐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상처 때문에 냉엄한 정치 현실에서 눈을 돌렸고, 미리 정해졌다고 믿은 승리의 ‘순리’ 속에서 점차 흥분해 갔다. 허나 우리가 보고 믿었던 것들은 선거라는 현실 세계의 벽과 제도의 한계를 뚫고 올라갈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했다. 다른 잡다한 이유를 떠나 이번 패배의 핵심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이다.


 




 


 


그 다음 문제는 구심 인물의 부재. 냉정하자. 죽은 사람은 선거나 정권 교체의 구심점이 될 수 없다.


 


노무현 사후 3개월만에 대선이 있었다면 모르지만 3년이 지난 지금 그는 되려 마음의 고향같은 차분한 형태로 우리들 속에 남아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말이 없고, 우리를 격려하거나 토닥이거나 잘못을 꾸짖지도 않는다. 그러나 저쪽에는 살아있을 뿐 아니라 황녀의 정통성으로 찬란히 빛나는 박그네가 있다.


 


우원은 지금 대선 주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물론 공통될 수도 있겠지만 꼭 일치해야만 할 필요는 없다. 이 구심 인물은 주변인들의 기대와 존경을 받고 상황을 리드하고 전세를 역전할 수 있는 힘이나 상징성을 가진 사람이다. 지난 3년 동안 이런 인물을 키워야 한다고 우원은 과거에도 역설한 적이 있다. 지금 상황은 어떤가?


 


서거 직후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진지하게 논의되던 유시민은 기본적인 언더그라운드 성향을 극복하지 않거나 못하고 있다. 그는 이제 통합진보당의 네 대표 중 한 명이다. 통진당은 이번에 비례대표 포함 13명으로 크게 선전했지만, 지금의 유시민이 가진 힘이나 이미지, 파급력으로 과연 전체 야권 연대의 중심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일지 회의적이다.


 


문재인은? 그는 이번 선거에서 손수조를 통한 한나라당의 꼼수에 발렸다. 아무리 지방색 문제가 심하다지만 27살의 정치 초년생에 겨우 11.2 % 앞섰을 뿐이다. 그리고 그 역시 구심의 이미지가 되기에는 타고난 야인의 냄새를 풍긴다. 이 야인 색깔이라는 게 우리한테는 순수함과 매력으로 다가올 지 모르지만 앞서 이야기한 시장통의 대중을 상대하는 면에서는 절대 플러스 요인이 아니다.


 


안철수. 우원도 이 냥반 좋아하지만 그가 박그네를 이긴다는 여론조사 결과는 되려 우리의 자만과 착각을 키우는 데 크게 한몫을 했다고 본다. 만약 진짜 선거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순진함을 넘어 우매함일 뿐이다. 근거가 뭐냐구? 시장통이나 유흥가에 가서 안철수를 대통령으로 뽑을 건지, 아니 안철수라는 사람을 알기는 하는지 물어보면 된다. 자유선진당과 진보신당을 헷갈리는 게 보통 사람들이다.


 


그 외 손학규, 정세균 등이 안 되는 거는 설명 안 해도 이미 잘 알 거고, 정동영은 최근 몇 년간 누구보다도 큰 노력과 변화를 보여줬지만 지난 대선의 패배와 이번 총선 낙선의 한계에 가로막혀 있다.


 


그럼 누구냐고? 내가 어떻게 아냐. 하지만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 있다. 야권의 구심점이나 대권 주자가 되기 위해서, 총선에 지고 대선이 8개월 밖에 남지 않은 지금의 현실 하에서 가장 필요한 자질이 뭐냐는 거.


 


바로 감동과 열정이다.


 


노무현이 통했던 것은 그가 야인 성향을 가지면서도 거침없는 언변과 신념, 무엇보다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강렬하고도 순수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권 변호사였다던가 청문회 스타였다던가 3당 야합에 참여하지 않았다던가 부산에 계속 출마해 낙선했다던가 하는 경력들만으로는 실제 사람들의 감정을 움직이고 지지를 끌어내지 못한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눈 앞에서 그 인물이 보여주는 말과 행동이다. 그 말과 행동을 통해 먼저 감화된 사람들이 과거의 경력을 통해 그 사람됨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그럼 이제 우리 야권을 보자. 그들에게는 투쟁심과 분노와 슬픔과 복수심이 있을 망정 순수한 의미에서의 열정이 보이지 않는다. 노무현이 조선 600년 역사의 비굴함을 논하던 것 같은, 사람들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는 그런 감동이 없다. 가카 심판, 복지, FTA 반대도 다 중요하지만 그것들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람들의 폐부를 찌르는 보다 근본적인 것들,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느껴지지 않는 지금의 야권으로는 이익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단합된 저들과 그 수장 박그네를 이길 수 없다.


 


글타. 이대로 가면 게임 오버다.


 



 


엉뚱해 보이겠지만 이 양반 이야기 좀 할란다. 열분들은 최동원이라는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으신가? 한국 최고의 투수, 선동열과의 라이벌 맞대결, 84년 코리안 시리즈에서 혼자 4승 등등의 스토리는 야구에 관심이 있거나 영화 ‘퍼펙트 게임’을 본 사람이라면 다들 알 거다(개인적으로 영화는 캐실망).


 


그럼 이건 어떠냐. 87년 6월 항쟁 때 버스 타고 가다가 내려서 시위대 합류, 어려운 후배들과 2군 선수들을 돕기 위해 선수협의회 결성하고 롯데에서 퇴출, 3당 야합을 비난하며 노무현, 김정길 등에 합류, 부산에서 꼬마 민주당으로 지방의회 선거 출마, 낙선. 당시 여당에서도 콜이 있었고 민자당으로 출마했다면 당선은 따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야구로 돌아가자. 그의 경이적인 연투는 84년보다 한참 전인 고등학교 때부터 이미 시작됐다. 대학, 국제대회, 실업에서 그는 거의 일주일을 계속 던진 적도 있다. 연투는 당대 최고의 선수였던 그에게 당연한 책무였으며 그는 팀을 위해 한 마디 말 없이 그 ‘운명’을 받아들였다(이런 풍토가 바람직했다는 뜻은 아니다). 일부 선수들처럼 방어율이나 승률 관리 따위를 하려 든 적도 한 번 없고, 피로한 기색도 가려가며 묵묵히 마운드에 섰다.


 


그가 실제 어느 정도의 선수였는지 잘 모르는 분들이 많지 싶은데, 프로에서의 기록은 사실 전성기를 지난 상태의 것이다. 대학 시절인 20대 초반 그의 구속은 180이 안 되는 신장임에도 155킬로미터에 육박했고 2층에 떨어지는 듯한 드롭성 커브는 이후의 메이저리그 대투수 드와이트 구든을 연상시키는 수준이었다. 울나라에 프로리그도 없던 70년대 말의 이야기다.


 


이후 토론토 블루제이스가 메이저리그로 직행시키려 했는데, 만약 그때 갔다면 개인의 삶이나 우리나라, 나아가 캐나다 야구 역사까지 바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병역 문제로 발목을 잡히고 다시 한국에서 무한 혹사 당한다.


 


그 결과 구위는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고 84년 코리안 시리즈 당시에는 이미 전성기가 지나 있었던 거다. 이렇게 말 그대로 무한히 던지면서 그 자신도 조금씩 망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여전히 마운드에 나가기를 자청했고 불굴의 투지로 이기고 또 이겼다. 내일을 위한 계산이 아니라 오늘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 그 결과는 32세라는 젊은 나이의 은퇴, 53세라는 한창 나이에서의 죽음이었다.


 


그는 너무 뛰어났고 또 시대를 한참 앞선 나머지 그 시대에 희생되어 갔지만,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고 절대 남 탓도 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힘없는 동료를 돕고 사회의 원칙을 지키려 했으며, 그랬기 때문에 희생되면서도 웃음과 강단을 잃지 않았다. 그가 사후 진정한 레전드가 된 이유는 빠른 공을 던져서도, 메이저리그에 갈 뻔 해서도, 코리안 시리즈 4승을 올려서도 아니다. 그 모든 것들이 포함된 그의 삶의 자세가 은연중에 느끼게 만드는,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감동 때문이다.


 


죽기 얼마 전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후회는 없다. 다시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그렇게 나가 던질 것이다.’


 


이런 삶에서 떠오르는 익숙한 한 단어.


 


바보.


 



 


 


대선 전략 자체가 나오지 않는 총선 후 지금. 총체적인 자만과 환상, 오류들을 통해 패배를 자초한 우리. 그런데 이 복잡무비해 보이는 상황들 속에서 우리 머 한가지 잊고 있던 거 없냐…?


 


우리가 지금 왜 싸우고 있느냐는 것 말이다. 수많은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는 진짜 이유는 딱 하나다. 그건 저런 바보들이 바보로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는 거다. 바보가 버림받지 않고 희생되지 않고 죽지 않고, 그들의 바보됨이 어리석음으로 귀결되지 않는, 그래서 모두 바보가 돼서 살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려는 거다. 가카를 단죄하던 FTA를 폐지하던 해군기지를 막던, 그 모든 것들은 단지 이걸 위해서 필요한 거다. 목표가 아니라 수단, 혹은 과정일 뿐이다.


 


근데 말이다. 지금 이 바보들은 대체 어디에 있나…? 총선 후보건 잠정 대선후보던 구심점이던 우리들 자신이던, 열분들 눈에는 지금 바보들이 보이냐? 바보 없이 어떻게 바보로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아무도 바보가 되려 하지 않고 다들 바보로는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


 


우리가 지금 정말로 생각하고 성찰해야 할 것은 전략의 오류 따위가 아니다. 대체 왜 이기려 했는지, 왜 이겨야 하는지, 그래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노무현의 영정 앞에서 흘렸던 눈물의 의미가 뭐였는지. 지난 몇 년간 온갖 복잡한 감정과 계산 속에서 흐려지고 변질된 지금의 상태를 잊고 그걸 기억해 내야 하는 거다.


 


그래서 우리들 내부에서만이 아니라, 단지 ‘동지’들을 투표소에 좀 더 보내는 차원이 아니라 시장통에서 만나는 남녀노소, 장삼이사의 마음을 얻어내는 진정성과 감동과 열정의 지점을 찾아내야 하는 거다. 바로 그 지점에서만 진정한 구심점이던 유력한 대선 후보던 승리의 전략이던 나올 수 있다.


 


저들이 어떻게 나오던 정치 환경이 어떻게 변하던 흔들림 없이 그 지점에 두 다리를 박고 서있지 못한다면 우리의 대선은 필패(必敗). 승리의 희망은 전무하다. 아니, 실은 승리할 자격도 없다. 이미 변질되어 버린 것이니.


 


…괴물과 싸우다가 어느덧 스스로 괴물이 되어 버린 것이니.


 


 


논설위원, 파토


@pato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