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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09. 17. 월요일

Dr.A


 

 

 

 

 

아니 내가 고자라니, 가 아니라 내가 고자를 만들어야 한다니...

 

 

다시 한 번, 새누리당이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한 건 해주셨다. 이들의 음탕함이란 가끔 이런 식으로 드러나는데, ‘대구의 밤문화’ 라든가, ‘관기 하나 넣어 드리는 건데’ 뭐 이런 소리들이 나오는 건, 이들의 성의식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데 익숙한 구조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그들의 훌륭한 성의식이, 이번에는 아예 ‘법안’ 의 형태를 띄고 나왔다.

 

 

 

 

 

그러니까 ‘도저히 교화가 되지 않는 악독하신 성범죄자’의 조슬 까버리시겠단다. (<조일보>는 그런 관점에서 거의 예언 수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법안의 정확한 명칭은 ‘성폭력 범죄자의 외과적 치료에 대한 법률안’이다. 앞으로 길게 쓰기 귀찮으니 ‘거세법’이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사실, 뉴스를 보다 보면 나도 저런 악독한 넘들의 조슬 낼름 까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딱히 저 자들에게 어떤 인간적 연민이나 동정을 느껴서 이 법안을 기가 막혀 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물론 이런 거 그냥 무조건 반대! 이랬다가는 ‘조슬 단 새끼들은 다 똑같다!’ 라는 류의 비난에 시달릴 수 있다. 나도 사석에서 이 주제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했다가 몇몇 사람들이 ‘너도 좆달린 넘이라 똑같구나!’라고 비난하는 바람에 큰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아니라,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는 거다.

 

 

 

 

 

 

 

 

 

 

일단 저 법안의 발의자가 새누리당의 국회의원이고 대한민국에서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대학을 나와서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병원에서 엄청난 커리어를 쌓고 마침내 국회의원이 되신 분이라는 이야기는 나중에 다루도록 하자. 이 이야기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법안 발의자의 커리어를 문제 삼는 일은 좀 더 뒤에 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 저 법안의 이름을 놓고 볼작시면, 무려 ‘외과적’ ‘치료’에 관한 법률안이란다. 첫째는 저 법안의 집행은 그러므로 반드시 ‘외과 의사’의 개입이 필요하며, 둘째는 그 개입이 ‘치료’라는 강력한 전제를 깔고 있다. 자 이 두가지 전제를 가지고 저 법안이 얼마나 상상을 초월하는 막장 법안인지 샅샅이 디벼보도록 하겠다.

 

 

 

 

 

 

 

 

재미없는 의료윤리 얘기

 

 

의료 윤리학이라는 과목이 있다. 의사 국가 고시에도 출제가 안되고, 학점도 몇 학점 안되는데다가, 지루하고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실컷 늘어놓는 꼰대질 전용 과목이라는 인상이 강한 그런 과목 말이다. 좀 재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이후 전개를 위해서 꼭 필요한 내용이니 잠깐만 꾹 참고 읽어주기를 바란다. 열분들도 도덕, 윤리 배울 때 그런 거 있지 않았나. ‘그냥 착한 척 하고 쓰면 다 답인데 뭐하러 공부하나’ 이런 생각. 그러나 이게 과목인 이유는 정말, 생각해 볼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의사의 직업 윤리에 대한 학문인 의료윤리학에서 흔히들 ‘황족’이라고 부르는 족보가 있다. 의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의료윤리의 4원칙이 그것이다.

 

 

 

 

 

‘자율성 존중의 원칙(Principle of respect for autonomy)’

 

 

 

 

 

‘선행의 원칙 (Principle of beneficience)’

 

 

 

 

 

‘악행 금지의 원칙(Priciple of non-malificience)’

 

 

 

 

 

‘정의의 원칙 (Principle of Justice)’

 

 

 

 

 

이번에 제시된 법안은 이 네 가지 윤리원칙을 단 하나도 지키지 않고 있다. 아니, 적극적으로 깨버리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니까, 이 법이 법관들이 보시기에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의사의 입장에서 (그러니까 저 법이 통과되어 실행된다면 결국 어떤 의사가 그들의 조슬 까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감안할 때) 할 짓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의사의 의료행위에 있어 이 네 가지 원칙들은 단 하나라도 위배될 시에 사람들에게 굉장히 큰 해를 미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다 지켜져야 하는 원칙들이다. 저 원칙들을 한방에 다 까버리는 사례는 찾기도 어려운데, 역시 우리의 새누리당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의사한테 개겨보자. 사실 개겨도 된다 : 자율성 존중의 원칙

 

 

정말로 오랜 기간, 그러니까 무당이 의사를 겸직하던 그 아주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의사한테 개기는 사람들은 항상 있어왔다. 심지어 본인이 일하고 있는 사무실에서도 의사 알기를 아주 개뿔로 알며 심심하면 약을 안 먹고 개기며, 병원에 데려가려면 무슨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은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무려 세 명이나 있다.

 

 

 

 

 

솔직히 이 셋을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한 두번이 아니지만, 사실 그랬다가는 내가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꾹 참고 온갖 감언이설로 그들을 설득하곤 한다. 물론 그 감언이설의 대부분은 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내용이니 필자가 약장수일거라는 오해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어쨌든 의사의 치료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항상 있어왔고, 그 이유 또한 상상을 초월하게 많았다. 이런 모든 개김을 통칭해서 DAMA(Dischage, or Decision against medical advice)라고 한다. 즉 의사의 의학적인 조언을 모두 거부하고 자신의 뜻 대로 퇴원 혹은 의료행위에 대한 결정을 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DAMA는 상당히 많은 윤리적인 논쟁을 불러 일으켰는데, 그 이야기들은 나중에 하도록 하자. 일단 의사의 결정에 반하는 결정자체가 수 많은 윤리적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아무리 의사가 의학적으로 근거를 가지고 환자의 치료계획을 결정한다고 하더라도, 환자가 얼마든지 그 계획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렇게 때문에 현대 의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충분한 정보를 통한 고지(informed consent)이다. 즉 환자에게 뭔가 시술을 할 때 환자에게 동의를 충분히 구하고 승낙을 받은 다음에 의료행위를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앞서 서술한 자율성 존중의 원칙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원칙을 싸그리 무시하고 범죄자이기 때문에 동의고 나발이고 없이 냉큼 조슬 까는 것을 정당화 하겠다는 이야기는 의사들에게 다른 형태의 범죄를 지으라고 강요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환자가 동의하지 않는 시술을 할 권리가 의사에게는 없다.

 

 

 

 

 

정리하자면, 아무리 시술이 의학적으로 환자에게 도움이 된 다 할지라도, 환자의 뜻에 거스르는 행위를 할 수는 없다. 이 고지식하고 답답해 보이는 규칙은 사실 정립된지 채 30년도 되지 않았다. 그 전에는 동의고 뭐고 의학적으로 옳다고 생각되면, 환자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 번 생각해보면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 얼마나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지를 고민해 보면 된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몇 단어로 요약이 된다. 나치의 인체실험, 그리고 731부대.

 

 

 

 

 

 

 

 

차카게 살자, 그리고 나쁜짓 하지 말자. : 선행의 원칙 / 악행 금지의 원칙

 

 

자율성 존중의 원칙에 대해서 말이 너무 길어졌다. 자율성 존중의 원칙은 생각보다 훨씬 직관적이지 않으며, 오랜기간의 논쟁을 거쳐서 이루어진 개념이라 설명을 해야 할 게 굉장히 많았다. 선행의 원칙과 악행 금지의 원칙은 그것들 보다는 훨씬 직관적이다. 이 챕터의 제목이 모든걸 설명한다. 적극적으로 착하게 행동해야 하며, 적극적으로 악행을 하지 말아야 한다.

 

 

 

 

 

보통 의대에서 이 원칙을 배울 때, ‘니가 그때 꼭 해야 하는 일’을 반드시 해야 하며, ‘니가 그때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은 하면 안된다, 라고 배운다. 이 두개가 같은 것 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즉, 해야 하는 일은 해야 하는 일이며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은 안 해야 하는 일이라는 거다. 말장난 같지만, 사실 의사의 행동은 이 원칙을 벗어나지 말아야 하는 거라는 대전제가, 모든 의사들에게 있다. 그리고 있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어떤 환자가 당뇨를 앓고 있다. 그런데 그 환자는 당장 죽어도 좋으니 돈코츠 라멘을 먹어야겠다고 우긴다 해 보자. 이 때 사실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환자에게 경고하는 것 뿐이고 그게 왜 위험한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선행의 원칙) 물론 그 환자에게 병원식으로 돈코츠 라멘을 제공해서도 안 된다. (악행 금지의 원칙) 그러나 그 환자는 병원을 슬쩍 빠져나가 돈코츠 라멘을 먹고 올 수 있다. 이것은 앞에서 한 대로 환자의 자율성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성범죄자의 조슬 까는 일이 과연 지금 내가 의사로써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인가? 라는 질문과. 혹은 조슬 까는 일이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일이 아닐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해보도록 하자.

 

 

 

 

 

일단, 또 지루하게 설명을 해야 할 시간이 돌아왔다. 의학적으로 어떤 처치를 할 때 그 처치는 인간의 몸을 대상으로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인체에 해를 끼칠 가능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의학적 처치는 언제나 그 처치로 인해 얻어지는 이득이 그로 인해 발생하는 손실을 상회한다고 판단될 때만 시술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말이 길어지면 머리가 아파지는 독자들을 위해 다시 정리하겠다. 손익분기점을 넘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 손익분기점을 판단하기 위해서 의사들은 근거(evidence)라는 개념을 도입하기로 했다. “그냥 이 약을 먹었더니, 혹은 이 시술을 했더니 사람이 좋아졌어요”라는 무당짓을 하는 대신에, 엄격하게 통제된 조건에서 통계학적으로 검증된 방법들을 통해서 살아 남은 것들만을 치료에 적용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 방식에는 양측 맹검(Double-blind test) 무작위 대조군 실험(Randomised control test)같은 방식들이 동원되었다는 것 정도만 알아도 충분할 것이라고 본다.

 

 

 

 

 

물론, 예를 들어 <당뇨병 환자의 처치에 대해 돈코츠 라멘이 미치는 영향> 에 대한 논문 같은 건 없다. (아마도) 그러니 환자가 먹는 것이 적극적인 의료에 대한 반대 행위라는 것도 근거가 빈약해진다. 그래서, 의사의 행동은 최대한, ‘잘못하는 것 없이’ 라는 형식으로 정리된다. 물론, 돈코츠 라멘은 당뇨 환자에게는 매우 안 좋다. 고칼로리에 기름진 음식이기 때문에. 이 정도는 상식이리라 본다.

 

 

 

 

 

자 다시 정리하자. 즉 명백하게 통계적으로 근거가 없는 치료법을 이용한다는 것은, 절대로 선행도 아니며, 오히려 환자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악행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치료를 반복적으로 거부한 성범죄자에게 양측성 고환절제술은 치료 효과가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근거 없는 치료법을 환자의 치료목적으로 쓰라는 법안은 그토록 발버둥을 치면서 무당과는 다르게 환자들을 위하려 했던 모든 의사들을 한 큐에 엿먹이는 것이다.

 

 

 

 

 

 

 

 

도대체 그놈의 근거가 뭐냐고?

 

 

“Mr. A의 케이스”라는 사례 보고(Case report)가 있었다. 용례 보고라는 것은 의학계의 ‘세상에 이런일이’쯤에 해당하는 것이다. 뭔가 신기하거나 특이한 질환의 경과에 대해서 보고하는 일종의 보고서 형식의 짧은 논문이다. 보통 이 사례 보고들이 누적되거나, 같은 케이스들을 접하게 되면 그 때 의사들은 본격적인 연구에 돌입하게 된다. 즉 사례 보고 만으로는 의사들의 치료 방침을 바꿀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이다. 그게 좀 쌓여야지.

 

 

 

 

 

이 사례 보고에 의하면, 반복적으로 성폭력을 일삼던 54세의 남자 Mr. A는 수감당시 6건의 성폭력 전과가 있었고, 어떠한 심리사회적 치료를 거부했으며, 그로 인해서 주 정부 법원에서 양측성 고환절제, 즉 물리적 거세를 선고받게 된다. 거세 수술 이후, 그는 약간의 체중증가와 소극적이면서도 짜증스러운 태도를 보이긴 했지만, 기존에 보이던 공격성과 성적인 충동은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이 사례 보고는 대단히 극적이었기 때문에,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많은 수의 연구자들이 물리적 거세형을 받은 죄수들을 대상으로 이후의 연구를 진행하게 된다. 어머 조슬 까면 된대!

 

 

 

 

 

그리고, 이후의 많은 연구들에 의하면(다시 말하자면 개기다가 냉큼 조슬 까인 성범죄자의 수가 상당히 많았다는 것) 양측성 고환 절제 후 Mr. A 같은 결과를 보인 사람을 찾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아마도 그의 경우가 대단히 특이한 경우였다고 판단하는 것이 나을 거라는 논문들이 줄을 이어 나오게 된다. 즉 거세만으로는 우리가 원하는 치료 효과를 얻을 수 없었다는 얘기다.

 

 

 

 

 

이 연구보고서들을 바탕으로 비가역적인 고환 절제 대신에, 성호르몬의 분비를 억제하여 성적 충동을 억제하는 일명 ‘화학적 거세’가 도입된다. 뭐 말이 좀 섬뜩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고환 절제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형태의 치료법 내지는 형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화학적 거세’에 대한 논의는 이 글의 주제와는 많이 벗어나 있으므로 이 글에서 다루지는 않겠다. 단지, 화학적 거세 또한 심각한 인권 침해 논란이 지속되었으며, 그 치료효과에 대한 논쟁이 여전히 지속중이라는 점은 알아두었으면 한다.

 

 

 

 

 

다시 정리하겠다. 물리적으로 성 범죄자를 거세해버린다고 그 성범죄자들이 치료되거나 교화될 것이라는 주장은 의학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그것을 강요하는 행위 자체가 굉장히 의사들에게 비윤리적인 행위를 강요한다는 것이다. 혹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이 방식에 동의하시는 분이 있다면, 근거 있는 반박이 있으면 좋겠다. 없음 닥치시고.

 

 

 

 

 

 

 

 

게다가 정의롭지도 못해. 타겟은 군바리라니까?

 

 

마지막으로 정의의 원칙(Priciple of justice)은 말 그대로 치료의 배분이 사회적 신분이나, 성별을 포함한 기타등등의 불평등을 초래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이다.

 

 

 

 

 

재미있게도, 이 원칙은 보통 환자들에게 차별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으로 서술되기 마련인데, 이번 경우는 좀 다르다. 이번 경우에는 시술을 실제로 누군가 해야 하고, 그게 의사들이 될 것이며, 그 의사들에게 역차별을 강요할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에 중점을 두고 서술하도록 하자.

 

 

 

 

 

 

 

 

 

 

지금까지 이 글의 논지를 잘 따라왔다면, 정상적인 의사라면 누구나 저 시술의 집행자가 되는 것을 거부하리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열심히 공부해서 의사까지 되었더니만, 결국 망나니, 그것도 좃망나니를 시키겠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저 법안의 이름에는 외과적 치료라고 서술되어 있지만, 아마도 저 시술을 실제 집행하게 되는 사람들은 비뇨기과 의사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지금도 고환에 심각한 질병이 생긴 경우, 환자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앞서 말한 양측성 고환 절제를 실시하고는 있다. 그리고 그 수술은 대개의 경우 비뇨기과에서 담당하게 되어 있다.

 

 

 

 

 

결국은 형법의 집행자를 고르는 의자놀이(공지영씨에게 감사한다)의 최종 합격자는 비뇨기과 의사가 될 가능성이 지금으로서는 대단히 높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힘 없고 대항할 능력이 없는 ‘계약직 공무원’들과 ‘의무장교’들이 그 타겟이 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을 것이다. 저 둘이 누구냐고? ‘공중보건의사’와 ‘군의관’이다.

 

 

 

 

 

저 법안은 당연히 힘과 권력을 가진 대다수의 의사들에게는 영향이 없다. 저 법안을 실제로 집행하고 자괴감에 시달릴 사람들은 이제 막 의사가 되어 자신의 뜻대로 인술을 펼치길 희망하는 청년의사가 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실제로 조슬 까야 하는 의사의 입장에서 보자. 저 네 가지 원칙의 어떤 요소들도 지켜지지 않는데다, 자신이 시술을 하는 시점에서 네 번째의 정의의 원칙까지 깨져나가는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제 정신 박힌 의사가 저걸 하겠느냐는 말이다.

 

 

 

 

 

의사의 윤리의식 자체를 고려하지 않는 의학적 처치,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의사들에게 스스로 저 윤릐의식을 버리도록 만드는 방식으로 법안을 만들어 내놓겠다는 태도는, 참 훌륭하다. 의사들의 자존감을 있는대로 짓밟아놓고 자괴감에 시달리게 하면서 의자놀이나 하게 만드는 일이 도대체 어떠한 형태의 정의란 말인가.

 

 

 

 

 

 

 

 

도대체 역사에서 뭘 배운거냐? : 731, 나찌, 그리고 ‘필요성’ 이 사람을 잡아먹는 시대

 

 

과거에, 의사가 형벌의 집행자 역할을 했던 시기가 있었다. 의사들에게 도덕적인 굴레와 감시장치를 제거한 채 고삐풀린 행동을 하도록 집단적으로 사주했던 시기가 있었다.

 

 

 

 

 

바로 나찌와 731부대의 이야기이다.

 

 

 

 

 

어떠한 윤리적인 책임감도 가지지 못했던 하얀 가운의 악마들이 저질렀던 그 수많은 참상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들을 거론하지는 않겠다. 조금만 시간을 들여 찾아보면, 그들이 정말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무시무시한 대 악마들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후 나찌의 이 괴물들에 대한 재판은 뉘른베르크에서 열리게 된다. 한나 아렌트의 저작을 포함한 이후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그들은 결코 반성하는 대신 꿋꿋하게 자신들이 무죄임을 주장하면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악마들을 소환하지 않기 위해서 뉘른베르크의 규약과 헬싱키 선언, 그리고 제네바 선언 같은 규약들이 만들어지며, 인체실험을 포함한 의학적인 연구들의 목적과 방향성을 규제하기 위한 임상시험심사위원회(Institutional Review Board)를 설치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법안들이 속속 통과된다.

 

 

 

 

 

실제로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면서, 내 지식을 강력하게 통제하는 윤리적 목적성이 사라지게 되면 나는 그저 인간백정밖에 될 게 없다는 무서운 사실을 종종 맞닥뜨리곤 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엄격하게 다잡고, 반드시 환자를 위해서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곤 한다. 문제는, 위대하신 새누리당과 선배 의사께서 나의 이 처절하기까지 한 맹세와 약속들을 무차별하게 짓밟고자 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니들은 역사책을 읽어보기나 한 거냐. 니들은 검증 프로세스라는게 전혀 없다는 얘기냐.

 

 

 

 

 

이런 식으로 ‘필요성’ 이 사람을 잡아먹는 시대를, 우리 사회는 지나왔다. 인혁당 사건이 그렇고 장준하 사건도 ‘답이 없는 상태’ 이며, 용산에서도, 지금 강정에서도, 쌍용자동차 현장에서도 우리는 ‘필요성’ 이 사람을 잡아먹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 법안에서의 논리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사건들에서 작동했던 논리와 궤를 같이 한다.

 

 

 

 

 

 

 

 

나머지를 위해서, 저들을 잡아먹자.

 

 

마무리 하자.

 

 

 

 

 

앞서서 말했지만, 나 또한 사람이며 저런 인면수심의 성 범죄자를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정말 눈꼽만큼도 없다. 저놈들에겐 응당한 법의 처벌이 가해져야 하며, 채 피어나지도 못한 어린 생명들을 유린한 죄를 철저히 물어야 한다.

 

 

 

 

 

만약 정말로 거세가 저들의 성적 충동을 억제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하고 확실한 해결책이라면, 그래서 정말로 얻어지는 이익이 위험성을 상회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들의 치료를 위해서 수술칼을 들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찝찝해하고 윤리적인 고뇌에 사로잡히질지라도 그렇게 하고야 말 것이다. 물론 그런 근거들을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어디서 얻어낼 수 있는지는 모르곘다.

 

 

 

 

 

인간의 신체는 신성하며, 언제나 존엄성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아무리 용서받지 못하는 흉악범이라도 그들의 신체를 마음대로 훼손할 수 있는 권리를 국가가 주도하는 일이 나는 결코 유쾌하지 않다. 정말로 그 치료효과가 확실하고 부인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유쾌하지 않음이 결코 변하지는 않는다. 어쩔 수 없는 필요악으로써의 존재를 인식하고 행동할 뿐이다.

 

 

 

 

 

그러나, 근거도 없으며, 유일하지 조차 않은 치료법을 국가에서 강제하고 정의라는 이름의 독선을 보이며 행동하는 꼴을 더 이상 봐 줄 수가 없다. 단지 직관에 의거한 함무라비 법전에나 있을 법 한 행위를 의사들에게 강요하는 꼴을 더 이상 봐 줄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하겠다.

 

 

 

 

 

 

 

“나 이 법안 반댈세”

 

 

 

 

 

 

 

 

 

 

 

D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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