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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17. 월요일

산하


 


해방은 기쁨이었지만 혼란의 시작이기도 했다. 일본이라는 폭압적이었던 지배자가 하루아침에 몰락한 이후 누가 정국의 주도권을 쥘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도 분분했고 움직이는 이들도 기민했다. '인공'이 성립하여 자치 조직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지만 그들이 과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모든 것은 인천에 상륙하는 미군에 달려 있었다. 좌우익을 막론하고 인천 부두에 달려가 '해방군'을 맞이하고 1백만 서울 시민이 열광적으로 미국을 환영하는 데에는 과연 어떻게 될까 하는 불안함과 기대감이 내재되어 있었다. 미군은 그 어정쩡을 확고하게 불식시켜 주었다. 임시정부고 인공이고 모든 형태의 자치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일본 관리들의 계속 복무를 명령했고, 소요를 일으키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고, 미 군정 시의 공용어는 영어로 한다고 선언했다. 즉 정부 수립 이전까지 38선 이하의 조선을 다스리는 것은 미국이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1945년 9월 7일 발표되고 8일부터 시행된 통행금지령이었다. 치안 유지를 이유로 미군 측은 서울과 인천 지역에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의 통행을 금지했다. 조선 시대에도 통행금지는 있었고 일제 시대에도 일부 유지되었기는 하지만 하지 중장 이하 미군 관리들이 별 생각 없이 내렸을 이 통행금지 포고령은 그대로 37년간 한국의 전통(?)이 된다. 전쟁을 겪으면서 통행금지는 전국으로 확대됐고 대략 12시에서 4시까지 4시간은 일종의 압수된 시간이 됐다.


 


 



 


 


도심에서 큰 시위라도 벌어질라치면 통행금지는 그 폭이 둘쭉날쭉했다. 4.19 때 계엄령이 떨어진 이후에는 통행금지 시간이 오후 7시였다. 부마항쟁 때에는 오후 10시가 통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족 모두가 어딜 갔다 오다가 통금이 10시라는 말을 듣고 걸음아 날 살려라 골목을 내달리던 기억이 생생하니까. ( 주택가까지 계엄군이 오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 37년간 한국인들은 너무도 통금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하나의 문화가 됐다. 한국인의 속전속결 술자리도 아마도 통금 때문이지 싶다. 퇴근하고 술자리에 둘러앉으면 7-8시인데 냅다 빨리들 먹고 취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자니 술잔을 돌리면 제꺽 술잔이 돌아와야 했고 (늦게 돌아오면 혼나고!) 그것도 안되니 맥주에 양주를 들이부어 폭탄을 제조하는 병기창이 항상 성황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래도 모자라는 주당들은 여관방 잡거나 술집 문 걸어잠그고 마시기도 했지만, 그래도 대부분 착한 사람들은 택시 전쟁을 치르며 집에들 들어갔다. 37년 뒤 전두환의 선심쓰기로 역사 속으로 통금이 사라질 때 유력한 반대의 목소리 하나가 "남편들 술자리가 길어질 것"을 우려하는 주부들의 것이었으니 그 분위기를 짐작해 볼 수 있겠다.


 


통금 사이렌이 울리면 그때부터 거리는 무인지경이 됐다. 방범대원과 경찰이 순찰을 돌다가 통금 위반자를 발견하면 불문곡직 파출소로 끌고 가서 유치장에 처넣었다. 꽤 큰 트럭이 돌아다니면서 위반자들을 짐칸에 쓸어담기도 했다. 상갓집에 갔다거나 병원에 가야 한다거나 등등 모든 핑계가 통하지 않았고 4시까지 꼼짝없이 창살 안에 앉아 있다가 즉결심판에 넘겨져 벌금을 내고 나와야 했다. "통금 위반으로 벌금" 이란 요즘의 향군법 위반만큼이나 흔한 '범죄 사실'이었다.


 


운이 좋은 곳도 있었다. 정부는 1964년 1월 18일 0시를 기해 제주도 일원에 걸쳐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했다. 이는 ‘치안상태가 좋고, 생업인 고기잡이 등 주로 통행금지시간에 일해야’ 하는 제주도의 특수사정을 감안하여 내린 결정이었다.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65년 3월 1일에는 충청북도 일원의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됐다. 그 이유라는 것이 충북 사람들로서는 매우 긍지를 가질만한 것이었다. “타도에 비하여 범죄발생이 극히 낮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으니... 정부 공인 양반 충청북도가 아니겠는가. 물론 더 큰 이유는 "지리적으로 사면이 육지로 둘러싸여 있어 해안선을 통한 간첩침투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지만서도. 또 경주나 유성온천 등 각지의 관광 특구들도 통금에서 놓여났다. 기분이 확 드러워지는 것은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는 일찌감치 통금이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얼씬도 못하는 밤거리에서 따로 할 일은 없었겠지만 그 무인지경의 밤거리를 활보하면서 외국인 관광객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통금에서 예외가 되는 날이 바로 크리스마스 이브와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는 12월 31일이었다. 이 이틀간 도심 거리는 사람들의 발길로 메워지는 정도가 아니라 미어 터졌다. 젊은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꼬꼬마들 손 잡은 부모들까지 새벽 1시 2시의 밤거리를 쏘다니며 해방감을 누렸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집들이라도 아이들이 밤새 동네를 부르며 다니는 새벽송은 일종의 해방의 노래로 관대히 받아들였다. 그래 쟤들이 오늘이나 저러지. 그리고 연말연시가 끝나면 어김없이 통행금지 단속 강화 조치가 이뤄졌고 수많은 주당과 젊은이들이 '임검'에 붙들려 '연말연시 분위기에서 깨어나지 못한 철없는 국민'으로서 벌금을 맞고 나와서는 생두부를 씹어야 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하나 있다. 해방 이후에 줄기차게 독재에 저항하고 목숨 걸고 독재자와 맞선 자랑스런 역사가 있는 우리이지만 '통햄금지 철폐하라'는 요구가 시위대의 주요 이슈로 부상한 적은 드문 것이다. 아마 지금 누가 통행금지령을 내린다면 전국 룸살롱 연합회부터 한국대학생연합과 택시노조와 대리운전기사연합과 각지의 상가 번영회까지 목숨을 걸고 머리띠를 질끈 매고 연대의 어깨를 걸 것이 분명하고, 기실 범죄 예방 (이는 통금의 가장 큰 명분이기도 했다) 등을 이유로 전 국민의 하루의 1/6을 빼앗아 가는 만행적인 행정이었음도 자명한데, 통금 자체는 놀랍게도 한국인의 생활에 당연하게 수용되었고, 그에 대한 이렇다 할 문제의식 없이 익숙하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승만을 무너뜨리고 박정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시위를 감행하면서도, 그 다음날 방범대원이 "어이 학생 이리 와! 통금 넘었어!"를 외치면 아 씨바 재수없네 순순히 트럭에 타고 파출소로 향했던 이 묘한 광경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언젠가 박노자 교수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로 그렇게 격렬하게 독재에 저항하고 체제의 모순타파를 위해 노력하던 한국 학생 운동에서 다른 나라에서는 참으로 흔했던 "병역 거부 시위"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현상을 든 바 있었다. 하긴 그렇다. 우리는 어디 당사를 점거하거나 관공서를 습격하여 징역 처벌을 받음으로써 군대를 "정리"할 생각을 했지, '미제의 용병'이든 '파쇼의 수족'이든 군대에 가지 않겠다고 시위를 하거나 사회 운동으로 승화된 적은 없는 것이다. 군대는 당연히 가야 되는 것이었고, 그건 뭔가 부인할 수 없는 일상이었다. 통금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미군정을 맡은 미국 군인들이 낯선 나라에 오면서 느꼈던 불안감과 그 나라의 치안을 장악해야 한다는 조바심으로 내렸을 것이 분명한 '통행금지령'이 1945년 9월 7일로부터 37년 동안 한 나라의 하루 중 일부를 꼼짝없이 거머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아마 저승의 하지 중장 이하 미군 장교들은 언빌리버블!!!!을 외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말 우리 왜 그랬을까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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