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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미국은 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필리핀에 토지개혁을 주문한다. 1947년 군정 하에서 일본의 토지개혁 모델을 그대로 적용하려고 했다. 소작농들의 토지의 소유와 소작권을 보호하고 Huk. 게릴라들의 투쟁의지를 꺾겠다는 의도였다. [미국 정보기관 MSA(Mutual Security Agency)는 1952년 8월의 Hardie report에서 “지금의 소작경제체계는 필리핀의 안정적인 자유민주주의 경제체계와 개발에 대한 미국의 노력을 소용없게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으며, 필리핀 정부가 소작 농업체계를 끝낼 것을 권고하였다.]


소작농들에게 토지를 분배하여 자영농화하고 지주들의 자본을 도시의 산업개발에 쓰겠다는 구상이었으나 예상보다 훨씬 더 큰 저항에 직면하였다. 퀴리노를 미국의 토지개혁을 두고 ‘MSA의 침략’이라고 불렀으며, 에우제니오 페레즈(Eugenio Perez) 하원의장은 이 권고를 두고 “악의적이고 오만”하다고 논평했다.


퀴리노 정부는 이 충돌에서 명백한 농민의 적이 된다. 대선이 1년 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퀴리노 정부가 기꺼이 농민의 적이 된 것은 토지개혁이 단순히 경제 문제로 끝날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토지 소유를 바탕으로 한 소작 농업체계의 ‘소작단위(barrio)’는 그대로 정치적 단위로 연결되었고, 그 정치적 단위는 그대로 지방의 영향력과 의회의 의석이 되었다. 미국이 위에서 필리핀의 기득권층을 보장해주고 선택하는 주체라면, 지주와 소작농이라는 경제구조는 아래에서 그들의 기득권을 보장해 주는 기반이었다. 아무리 미국의 지원이 보장된다고 해도 그들은 자신의 기반을 뺏길 수 없었다.


이 충돌로 두 가지가 확실해졌다. 첫 번째는 필리핀의 로컬 기득권층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토지개혁에 나서지 않으면 HMB의 반란도, 필리핀의 개혁도 만족스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란 점이었다.


막사이사이 집권 후 1954년엔 ‘농업 소작에 관한 법률’이, 1955년엔 ‘토지 개혁 법과 농업 법원 재정에 관련된 법률’이 통과되었다. 이는 지주들의 토지소유와 소작료를 제한하고 소작농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안이었지만, 지주들은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갔으며 소작농들은 기존의 틀을 부시기보다는 침묵하는 쪽을 선택하였다. 미국은 ‘10 centavo’같은 농촌 커뮤니티 개발 프로그램들에 좀 더 집중했다. 미국은 원조와 CIA의 개입을 통해 경제와 정치의 구조적 개혁을 기대했지만 막사이사이는 현실정치의 과제들을 해결하는 것에 더 관심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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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에 의한 급진주의는 중산층과 기득층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 때 민족주의 저항운동의 리더로 렉토(Claro. M Recto)가 등장한다. 그는 1949년부터 필리핀의 미국 의존에 대해 비판한다. 초기의 그는 일본 지배 당시 친일부역자였던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미국 식민통치를 비판했다. 1949년 선거에서 반대후보를 비판할 때도 그랬고, 1950년 필리핀 공산당의 Jose Lava를 변호할 때도 그랬다.


렉토는 과거의 경험(2차대전 때 미-일 전쟁)에 근거하여 미국에게 필리핀 방위를 의존하는 것에 대해 경고했다.


“방위협정을 통해 필리핀은 미국의 적을 공유하지만, 전쟁 시 미국은 유럽 방위 우선 정책에 따를 것이고, 필리핀은 방위의 우선순위에서 밀릴 것입니다. 우린 다시 한 번 버림받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필리핀의 미국 의존의 대외정책에 대해 비난했다.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혁명이 커져 가는데 필리핀은 공산주의에 대한 하나의 손짓이나 그를 인정하려는 한마디 말조차 없습니다.”  


“우리의 가장 가깝고도 강력한 이웃인 중국의 새 정부에 대해 인정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서 미국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은 멍청한 일입니다.”


새로운 필리핀의 시대정신을 만든 렉토의 민족주의 운동은 한계가 분명했다. 지나치게 이념적이었으며 기득권층의 이해관계에 따라 조직된 운동이라 대중으로 확산되기 어려웠다. 그러나 1951년 일본과의 평화협정에서 필리핀 정부가 미국의 지도 하에서 굴욕적인 협상조건을 받아들이는 사건이 일어났고, CIA의 비호 아래 막사이사이가 집권함에 따라 렉토는 반대세력으로 세를 불려갈 수 있게 되었다,



막사이사이와 렉토


1953년 이전까지 필리핀 국민당(nationalista party)이 자유당(liberal)에 대한 반대논리로 민족주의를 내세운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CIA의 정치공작에 의해 국민영웅이 된 막사이사이가 국민당의 후보로 대통령이 되자, 내부의 정치적 스탠스가 미묘해졌다. 국민당 내에서도 반미 민족주의 외치는 모험을 했던 정치인은 렉토 밖에 없었지만, 로하스-퀴리노 정부에서의 경제·정치적 불안에서 민족주의를 발견해 정치에 이용했던 국민당은 막사이사이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막사이사이가 대통령이 된지 한달 후, 최초의 마찰이 일어난다. 네루의 “Asia for the Asians”를 지지하는 의미로 외교부 차관인 게레로 3세(Leon Ma. Guerrero)가 성명을 발표한다.


“지금 정부는 단지 국민당(nationalista)의 정부가 아닌 민족주의자(nationalist)의 정부여야 합니다. 민족주의란 단지 그들 스스로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민족주의를 인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필리핀이 필리핀에게 속해 있어야 하듯이 아시아는 같은 이유로 아시아에 속해야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네루는 이후 그 성명은 단지 국내의 경우라고 몇 번이나 해명을 한다. 어찌되었든 렉토가 바로 이 성명에 화답하고 게레로를 지원하면서 로물로와 충돌한다.


“일본의 프로파간다는 집어 치우시오.”


막사이사이의 선거위원장이었던 로물로는 막사이사이의 외교와 정치관을 대변하였다. 반면 렉토와 라우렐의 관점은 분명했다. 명백히 필리핀 민족주의에 관련된 성명이었다. 이전의 식민지 지배자인 미국으로부터 자주성을 되찾는 일이어야 했다.


게레로를 지원했던 외무부 장관이자 부통령인 가르시아(Carlos. P. Garcia)는 이 성명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곤란한 처지에 빠진다. 미국 대사관에서 로물로를 통해 그에게 분명한 태도를 보이길 원하자, 그는 클락필드에서 ‘이 슬로건을 미국에 대한 필리핀인의 적대감을 증명하는 증거로서 공산주의가 사용하게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이 과정에서 미국이 원조 증대를 약속한 것은 당연했다.


렉토와 라우렐을 포함한 국민당은 막사이사이에게 “Asia For The Asian”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길 압박한다. 막사이사이는 탐탁치않아 했지만 성명을 발표하기로 결정한다. 물론 미 대사관의 검토를 거쳤다. 필리핀 정부는 ‘아시아 민족 스스로의 자결권과 독립을 지지한다’는 내용을 발표했지만, ‘자유세계의 국가들에게만’이라는 조건을 붙였다. 공산주의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분명히 담고 있었다.


이 성명은 서구의 마지막 남은 아시아 식민지들의 해방을 촉진시킨다. 이로 인해 막사이사이가 세계적 명성을 얻었지만, 사실은 미국과 국내정치라는 복잡한 변수들이 만들어낸 성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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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만료되는 미국과의 무역협정이 8월, 막사이사이 정권에서 다시 논의된다. 이번 협정에서는 라우렐과 랭글리(Jame M. Langley)가 협상 테이블에 마주앉았다. 막사이사이 정권 또한 이 무역협정에 대한 개혁의지가 없었고, 오히려 미국인에 대한 parity right 전체를 보장하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이 협정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필리핀 경제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것이었다. 하지만 막사이사이 정권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당연히 렉토는 필리핀의 경제침탈과 자주성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크게 냈다.


“단순히 외국자본의 필리핀 착취를 막는 것뿐 아니라 필리핀 자본가들에 의한 산업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필리핀 자본주의가 개발되어야 하고 강해져야 합니다. 국민들의 수입이 늘어야 하며 필리핀인들이 아닌 이들의 이익은 제한되어야 합니다.”


렉토는 미국이 아닌 민족의 경제개발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하였으나 앞서 이야기 했듯 필리핀 정치인들은 로컬 기득권층의 이해관계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민족주의라 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주세(Land tenure bill. 과도한 토지소유에 대해 세금을 물림. 토지 개혁에 관련)에 대해 렉토는 “멍청하고, 잘못된, 자해적인 필리핀 이익에 도움 하나 안 되는”이라며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산업화에 대해서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나요. 그러니까 민족주의적 산업화에 대해서 말입니다. 필리핀인들의 경제에 대해서 말이에요. 그것은 필리핀 영토내의 개발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필리핀인들이 소유한 경제에 대해서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다른 측면에서 막사이사이 때 필리핀 경제는 급속도로 회복하고 있었다. 주로 외국의 투자로 인한 것이었는데 대부분이 미국계 기업의 투자였다. (민족주의자라고 불리는 기존의 필리핀 지주들은 이전까지 산업화에 부정적이었는 점을 눈여겨 볼만 하다)


렉토와 막사이사이의 광범위한 충돌 이후, 렉토는 1955년 상원선거에서 자신의 후보 명부가 빠지자 자유당의 객원 후보로 출마하여 다시 상원의원이 된다. 1955년의 선거에서 막사이사이는 자신은 높은 지지율과 인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당내의 마찰로 인하여 선거에서 패배했고, 당내에선 책임론이 제기되었다.


막사이사이를 전형적인 친미주의자로 서술했지만 그는 존경할만한 인물임에는 분명하다. 지금까지도 필리핀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정치인 중에 하나이며 그리워하는 대통령이다. 이념을 넘어서 공산주의자들과도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던 사람이다. 경호원도 없이 동네 술집에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농민이나 노동자들과 권익 보호를 위해서 많은 정책을 실행하기도 했다.


반면 렉토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다. 일본에 붙고, 그 다음엔 친미주의자에게 붙고, 다음에는 민족주의를 외치다가 막사이사이가 오니 지주들의 세를 규합해 다시 자유당의 간을 봤다. 사람 자체를 보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필리핀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그 사람 말이 틀린가 하면, ‘복잡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1950년 이후 막사이사이 정권까지 많은 정책이 미국에 의해서 제안되었고, 필리핀은 그를 따랐지만 부정적인 평가만 하긴 어렵다. 노동자의 노동권과 최저임금을 보장하고, 소작세를 제한하고, 대지주들의 지나친 토지소유에 세금을 걷어서 소작농들에게 분배하는 것이 미국에 주도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잘못됐다고 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렉토는 이런 정책들에 대해서, 대지주의 이익을 침해하고, 필리핀 자본을 약화시킬 것이고, 외세의 침탈을 더 심각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 또한 사실이다. 필리핀의 소작농과 노동자들을 위한 법이었지만, 결국에는 필리핀 로컬 자본에 대한 공격이었으며 정치적·경제적 종속이 강화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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