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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보다 끔찍했던 조선의 자연재해, 경신대기근 上




2. 신해년(1671년)


드디어 1671년 1월, 서울에 진휼소가 열렸다. 이 소식을 듣고 전국에서 유민들이 몰려들었는데, 보균자와 비보균자가 한 데 섞이다 보니 전염병은 빠르게 서울 경내로 퍼져나간다.


서울의 주민들, 양반, 양민, 백정, 노비 거를 것 없이 전염병이 창궐했고 심지어 궁궐을 지키는 군인과 대소신료들 중에서도 감염자가 발생해 임금 경호에 초비상이 걸렸다. 감염되어 밖으로 추방된 궁녀 중엔 사망자도 발생한다. 1월에 임금의 다섯째 누이인 숙경 공주까지 마마병에 걸려 사망하니, 2월 2일 임금은 왕대비, 세자와 함께 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전염병의 기세가 다소 꺾인 4월에 창덕궁으로 환궁한다.


진휼소가 설치되어도 궁궐 밖 상황은 달라진 게 없었다. 진휼소의 움막에서 죽어가는 자들은 셀 수 없을 정도였고, 왕실 종친들 중에도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생겼다. 이를 피해 서울을 떠나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조선 조정은 중앙에서 지방까지 관료시스템의 심각한 붕괴를 겪는다. 텅 빈 지방관청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역참 또한 정상적으로 돌아갈리 가 없었다.


전쟁 중에도 적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지역은 행정력을 발휘했지만, 이 때의 조선은 비상사태로 선회하여 식량 확보에 전전긍긍 할 뿐이었다. 서울에서 평양까지 보통 같으면 1~2일이면 도착할 수 있었으나 기근과 역병으로 역참이 텅 비고 파발이 부족해 가는데 5~7일이나 걸렸다.


부산이나 의주, 목포까지는 ‘가장 최근’ 보고가 ‘엄청나게 늦은’ 보고가 되었을 터. 더더욱 신속한 대처가 불가능해지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실제로 전라 우수영에서 서울로 공문서를 가지고 오던 사람이 과천 즈음에서 병에 걸리는 바람에 쓰러져, 다른 사람이 가지고 오는 상황이 발생한다. 보통 같으면 7일 정도 걸리는데, 이 땐 무려 19일이나 걸렸다. 도망치지 않은 것이 용하다고 해야 할 지.


많은 하급관원들이 제자리를 지키며 목숨 걸고 근무하는 마당에 중상급 관리들은 서울을 탈출하기 위해 온갖 갖은 핑계를 갖다 대며 임금에게 사직서를 제출했다. 임금 또한 그들의 속셈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기에 이를 수락했다. 붙잡을 수도 있었지만 서울을 떠나게 하지 않으니 양반들이 병에 걸리지 않은 멀쩡한 평민의 집을 강제로 점거해,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사퇴를 빙자한 도망, ‘사퇴런’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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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엔 굶어죽고 병들어 죽은 사람들의 시신들이 날로 쌓여만 갔다. 일가족이 모두 죽거나 길거리에서 쓰러져 죽은 경우가 부지기수. 원래대로라면 한성부의 관원들이 이를 수습해야 했지만, 인원에 비해 시신들이 너무나 많은데다 하급 관원들도 기근으로 인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조선의 가장 만만한 존재인 승려들을 동원해 시신을 수습했는데, 몇 번이나 수천 구의 시신을 한성 바깥에 합동매장해야 했다. 효를 중시하는 조선사회에 있어 합동매장이 가져오는 사회적 충격은 지대했을 것이다. 영조 때 도성을 정비하다, 매장된 인골 수천 기가 쏟아져 나와서 영조가 충공깽에 휩싸이기도 했다.


지평 이상윤이 올린 수구문 밖의 흩어져 있는 해골에 관한 상서
- 지평 이상윤(李尙允)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동성(東城)을 개축(改築)할 때 동문(東門)에서 수구문(水口門)까지의 거리가 1리입니다. 근래 여역(厲疫)과 두진(痘疹)으로 죽은 남녀가 몇 천 명인지 모를 정도인데 이들을 모두 그 사이에다 묻었습니다. 이제 감독하는 사람이 잘 살피지 못한 탓으로 성을 개축할 즈음 수천 개의 남녀 무덤에서 발굴된 뼈를 수십 개의 구덩이를 파고서 묻었는데, 해골과 몸 뼈가 부러지고 부서져 머리와 발이 위치가 바뀌어져 그 낭자하게 전도된 꼴은 차마 볼 수가 없는 정도였다고 하니, 이것이 재이(災異)를 부르는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듣고 나니 매우 놀랍고 참혹하다. 감예관(監瘞官)을 해부(該府)로 하여금 나처(拿處)하게 하라.”


하였다.

영조 79권, 29년(1753, 계유)



1670년과 1671년에 전염병에 걸린 사람은 5만 2천명이었으며, 이 중 절반에 해당하는 2만 3천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보고되었다. 사망자 비율은 전라도가 가장 높았으며(1만 2500명, 54%), 경상도가 그 뒤를 이었다.(4천 명, 17%). 임진왜란에서 승전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전라도의 곡창지대가 대부분 온전히 보전되었기 때문인데, 이번엔 전라도가 제대로 타격을 받았고, 이는 중앙 정부의 진휼미 확보를 어렵게 했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대기근이 닥치면 언제나 인륜을 져버리는 범죄가 발생한다. 강력한 유교관 때문인지 타국의 사례보다 발생율이 적긴 했으나, 조선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자식이 늙은 부모를 버리고, 부모가 어린 자식을 버리며, 가장은 가족을 버리고, 아내는 남편을 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최악의 상황인 인육을 먹는 식인 사고까지도 보고되기 시작한다. 충청도 깊은 산골에서 한 여자가 다섯 살 된 딸과 세 살 된 아들을 죽여서 그 고기를 먹었다. 원래 같으면 전국이 발칵 뒤집힐만한 대사건이었으나 별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승정원에서는 굶주림이 절박했고 진휼이 허술했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할 정도였다.


진휼소를 열긴 열었으나 모자라는 곡물, 전염병 등으로 죽어가는 사람은 여전히 많았다. 하지만 진휼소는 법적으로 정해진 기한이 있었다. 정부는 기한이 지나자 예정대로 철수시킨다고 통보했고, 이에 관리들은 아사자가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항의했지만, 결국 5월 15일에 진휼소를 철수시켰다. 관리들의 말대로 진휼소에서 주는 죽조차 못 먹은 자들어 사망한 이들이 늘어났다. 조선시대를 통틀어서 진휼에 관한 논의가 가장 많이 있었던 때는 현종재위기간 내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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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텐메이 대기근을 기록한 그림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예송논쟁을 두고,


‘이런 마당에 오직 정쟁(1차 예송논쟁은 10년 전인 1659년, 2차 예송은 현종 말년인 1674년에 있었다)에만 관심을 두었다’


라는 잘못된 해석이 있으나 이는 틀린 말이다. 물론 이념, 정치적인 논쟁이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대책을 내놓고자 했던 건 수도 없는 진휼기록으로 증명할 수 있다.


사실 정쟁을 할 수도 없는 것이 대소신료들마저 전염병으로 죽고 있던 시기였다. 대표적으로 당시 병조판서 김좌명을 들 수 있다. 이 사람은 대동법 확립에 큰 공을 세운 김육의 장남이며, 그의 동생은 숙종의 외할아버지 김우명이었다. 이런 정치명문가의 인물이 죽었을 정도였다. 김좌명의 후임으로 병조판서가 된 서필원도 몇 달 후에 목숨을 잃었다. 그러니까 사농공상을 따지지 않고 죽음의 그림자 아래 놓였다. 현종이 걸리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1671년 12월, 2년의 기근과 전염병으로 총 1백만 명이 사망했다는 보고가 올라온다. 1669년 기준으로 조선 인구는 공식적으로는 516만 명이었고, 추산되지 않은 사람까지 생각하면 최대 1000만 내외였다. 즉, 2년 간의 대기근으로 인구의 10%~25%가 사망하고 절대 다수가 기아를 체험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경신대기근 뿐 아니라 현종의 재위기간 내내 자연재해와 전염병이 끊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가장 극악했던 시기가 이 2년이었을 뿐. 당시의 조선상황은 북한의 고난의 행군은 뺨치고도 남을 듯 싶다. 노인들 중에선 ‘임진년 병란도 이것보다 참혹하지는 않았다’란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으니.


1671년 여름 아사자가 가장 많았을 때, 형조판서 서필원이 현종에게 청나라의 쌀을 수입할 것을 건의하지만 조정은 운송과 후환을 두려워해 반대했다. 그해 말 기아를 구제하기 위한 정부의 비축미가 바닥나자 현종이 청나라 수입 건을 다시 꺼냈는데, 신하들은 국가의 위신이 훼손된다고 또 반대한다. 명분에 집착하는 신하들에게 현종은,


“시바,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지금 찬 밥 더운 밥 가릴 때냐!”


라고 말했으나 신하들은 부정적이었다. 이러한 조선의 아비규환을 접한 청의 강희제는 “너네가 군약신강(왕권보다 신하의 힘이 더 강하다는 뜻)해서 그래, 쯧쯧”라며 비웃는다.


조선은 청에 1년 세폐(歲幣. 중국으로 해마다 보내는 물품)로 쌀 1만석을 보냈고, 일본에도 1만 6천석을 교역 답례로 보내고 있었다. 그런 조선이 쌀을 수입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을 정도로 경신대기근의 피해는 심각했다.



3. 대기근은 무엇을 낳았는가


불운하게도 대기근은 이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아까부터 손가락이 아프게 쓰지만 경신대기근 전후에도 부분적으로 기근은 있었고, 경신대기근이 끝난 지 24년 뒤인 1695년(숙종 21년), 또다시 2년에 걸친 대기근이 발생했다. 이때의 사망자도 경신대기근 못지않았다.


잽 잽 라이트 잽 잽 레프트 식으로 들어오는 자연 재해는 대비할 틈도 없이 줄기차게 닥쳤다. 숙종 땐 그나마 청나라에서 쌀을 수입해오긴 했으나 기근은 피할 수 없었다.


대기근을 겪은 후 당연하게도 조선 내부에는 체제에 대한 불만이 많아졌다. 때문에 경신대기근 중엔 금산 반란이 터졌고, 숙종 때는 흔히 알려진 장길산이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 사이에 비기, 도참, 미륵 신앙 등이 퍼지기도 한다. 이에 조선 정부도 호패법을 강화하고 오가작통제(촌락 주민에 대한 통제를 위해 다섯 집을 한 통으로 묶어 통수를 두고 관리하도록 하는 자치 조직)를 본격적으로 행정에 활용하면서 유민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신분제의 해체, 거대농장의 해체 등 조선은 사회와 경제구조가 변화한다. 조정은 부족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임진왜란 때 그러했던 것처럼 빈번하게 납속책과 공명첩(많은 곡식을 나라에 바치는 자에게 관직을 주거나 신분을 승격시켜줌)을 발행했다. 견고했던 신분제가 송두리째 흔들린 것이다.


대규모의 인구수의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왜란과 호란 중에 피난을 갔던 많은 이들이 전란이 끝나고 마을로 되돌아왔지만, 이미 가족 또는 사유재산이 사라진 상태였다. 기후마저 변화하면서 진휼이 원활하며, 따뜻한 마을로 사람이 몰린다. 작게는 마을, 크게는 도 단위의 질서가 붕괴한 것이다. 인구 수 2위였던 평안도는 4위가 되고 전라도가 2위로 급부상한다. 또 이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진휼이 잘 이루어졌던 서울로 향했고, 국가의 모든 기능이 서울로 집중되는 현상이 심화된다.


17세기 말의 대기근을 거치면서 발생한 다수의 유민들은 비교적 미개척지였던 북방과 만주로 많이 향했다. 여기에 모피와 인삼 등을 찾아 북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늘면서, 폐4군의 개발 논의가 활발해지는 한편 청과 국경분쟁이 일어난다. 이로 인해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지는데, 본의 아니게 훗날 간도 문제를 촉발한다.


사회의 급속한 변화는 의식의 변화와도 연결된다. 위로는 정치적인 스트레스가 이어졌다. 현종 대에는 예송논쟁을 거치며 예학이 대두되었다. 세기말적 현상에 도덕이 실종한 사회를 바로잡기 위한 해법으로 예학을 선택한 것이다.


아래로는 생존을 위한 투쟁이 격화되었다.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자’는 계급제의 논리가 자연재해 앞에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가고, ‘일단 살아남고 보자’는 의식이 팽배해졌다. 물론 완전한 계급제의 틀을 깨지는 못하는, 개인의 신분상승이라는 한계가 뚜렷했지만 꽤 중요한 시도였다.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고픈 자들이 모여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도 했다. 18세기 중엽 정감록의 유행은 17세기부터 이어진 기근의 위기에서 시작되었고, 훗날 세도정치기 전국적인 민란에까지 영향을 준다.


조선의 진휼책에 대해서도 빼놓을 수 없겠다. 조선은 환곡이라는 시스템과 더불어 원거리의 진휼미 운송으로 흉년과 기근을 해소하는 지원책을 썼는데, 경신대기근처럼 전국구적인 기근이 발생하면 무용지물이었다. 이에 바닷가에 곡창을 신설하여 해운과 수운을 이용하여 인근 지역에 빠르게 투입할 수 있는 대비책을 마련했다.


가급적이면 고을 자체에서 기근을 해결할 수 있도록 장려했는데, 지방 관청에 진휼고 등이 대거 마련되는 노력이 꾸준히 이어져 18세기 전반에는 진휼곡을 다량으로 비축할 수 있었다. 무용지물이었던 환곡(흉년이나 춘궁기에 곡식을 빈민에게 대여하고 추수기에 이를 환수하던 진휼제도)도 정상적으로 이루어진다(환곡은 19세기 탐관오리의 수익구조모델로 변해 농민항쟁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진휼책 뿐 아니라 군포 면제, 토지세 감면, 부채 탕감 등 경제적 지원책도 논의되었고, 실제로 시행된다. 이로 인해 중앙 재정이 바닥이 나니, 지방관리가 자급자족 진휼을 하게 장려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정부는 긴축재정에 들어갔고, 왕실의 내탕금까지 예외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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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부진했던 대동법의 지지여론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이때까지 대동법은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호남 연해에서 시행되었고 호남 내륙 일대의 시행을 논하고 있었다. 경신대기근 이후 그나마 백성들이 살아남은 건 대동법으로 부담이 완화되었기 때문이란 인식이 지방 산림들에게서 퍼지면서 대동법이 더 지지를 받게 되었다. 실제로 충청도에선 그때까지 결당 10두였던 세금을 12두로 높이는 한이 있어도 대동법을 계속 시행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기도 했다.


경신대기근으로 대표되는 17세기의 사회 양상은 상당히 혼란스럽다. 교과서적인 흐름으로 보자면 삼전도의 굴욕으로 대표되는 병자호란과 효종의 허무한 북벌논란, 그리고 현종 대의 예송 논쟁 정도. 이어지는 극심한 당파와 당쟁의 피로감 때문에 연구가 덜한 시기이기도 하다.


17세기는 18세기 조선의 마지막 안정기라 할 수 있는 영‧정조시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물론 유럽처럼 17세기의 위기가 18세기 산업혁명의 불꽃이 터진 게 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조선은 내부적인 변화가 꾸준히 일어나고 있었다.


천재지변 앞에서 무력해지는 인간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의 모습. 이 때에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는 앞으로도 자연재해 앞에 무력할 것이고 또 나름대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 갈 것이다.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어떻게 버텨야 하는지, 또 앞으로의 사회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시기. 17세기의 사관들이 고통 받는 백성의 모습을 기록한 이유는 그것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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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실록의 일부를 소개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겠다.


장선징이 백성들의 생활에 대해 상차하다

- 대사헌 장선징 등이 상차하였다. 대략에 이르기를,


“엎드려 생각해 보건대, 전하께서는 위로 3백 년간 돌보아 주던 인자한 하늘에게 노여움을 받으시고 아래로는 3백 년간 길러온 백성들을 죽이게 되어, 3백 년의 힘쓰고 고생한 대업이 전하의 몸에 이르러 망하는 결과를 장차 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궁하면 근본으로 되돌아가니, 전하께서는 여기에서 나라의 형편이 이 지경에 이른 이유를 두려워하고 깨우치지 않으시겠습니까.


신들이 본디 알기로는, 전하께서 안으로 성색(聲色)을 즐기며 가까이 하시는 잘못이 없고, 밖으로 사냥하는 개, 말의 기호물이 없으십니다. 움직이고 말하는 사이에 법칙을 지키려 애쓰시니, 전하의 성대한 절도를 또한 뵐 수가 있습니다. 다만, 성상께 한스러운 것은 뜻을 수립하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 이 때문에 무릇 마음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에 있어 공부를 할 만한 바탕이 조금도 없습니다. 전하께서도 그 병통의 근원을 몸으로 느껴 보셨습니까? 뜻이라는 것은 일신의 주재이고 만사의 근본입니다. 전하의 다소간의 병통이 여기에서 나오기 때문에 지기가 매일 낮고 미약해지며, 일의 결과가 끝내는 모이는 데가 없습니다. 유유하고 범범하여 데면데면하게 좋은 기회를 놓쳐서 자연 위험한 조짐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말이 여기에 이르니 개연히 눈물을 떨굽니다.


아아, 오늘날은 과연 어떠한 상황입니까. 조종의 은택이 이미 멀어졌으니, 뜻을 이어 사업을 계승하고 이 나라를 유신해야 할 그러한 시대가 아닙니까. 온갖 사물이 질서를 잃고 모든 궤도가 제자리에서 벗어났으니, 인하여 개혁하고 정돈하여 나라의 모습을 다시 온전히 해야 할 그런 시대가 아닙니까. 시기적으로는 다잡아야 하고 의리상으로는 펼쳐내야 하는데 한결같이 시들하고 오직 형식적인 것만 일삼으니, 밝디 밝은 상제께서 우리 전하를 경계시키고자 일월 성신의 이변을 보이시고 인간 윤리의 변고를 겹치게 하십니다. 한 해가 한 해보다 더하여 거의 ‘다달이 더해간다.’[式月斯生]는 지경에이르렀으니, 간곡히 경계하여 타이르는 것으로 보면 우리 전하를 돌보아 사랑하고 깨달아 고치기를 바람이 그 또한 지극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몸을 삼가서 수행하심이 위로 천심에 합하지 않기 때문에 밝으신 상제께서 발끈 화를 내시고 동녘 땅 수천 리에 참혹함을 내리시어 반드시 백만의 생령들을 모조리 죽이려 하시는 것입니다.


서울 내외에 굶어 죽은 시체가 도로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혹은 부모 처자가 서로 베고 깔고 함께 죽은 경우도 있고, 혹은 어미는 이미 죽고 아이가 그 곁에서 엎드려 그 젖을 만지며 빨다가 곧이어 따라 죽기도 합니다. 울고 불고 신음하는 소리에 지나가는 자도 흐느낍니다. 더욱이 전염병은 날로 치솟아 열풍이 불꽃을 일으키는 듯한 기세입니다.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드문데, 걸렸다 하면 곧 성 밖에서 죽습니다. 사방이 염병이라 온통 움막을 지어 끝없이 펼쳐지니, 참혹한 광경과 놀라운 심정을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서울 밖의 죽어가는 참상은 이미 전쟁에 비길 바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보리와 밀을 이미 그르쳤고 수수와 좁쌀도 다시 벌레가 먹었으니, 이로부터 겨우 살아남은 백성들은 생기가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늘이 실로 하는 일이니, 말한들 무엇하겠습니까마는 모름지기 인군의 마음을 크게 경계하고 크게 진작시켜 천도를 받들어 순종하여 게으르고 거친 행동이 없으면 나라의 명을 이어나가고 끝없는 사업을 영원히 보존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임금 자리를 보존하기 어렵고 돌보아 주는 천명도 믿을 수 없습니다. 신들이 어리석음과 비루함을 다시 바치려한들 또한 그럴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실지의 덕을 닦으시어 하늘의 노여움을 되돌리고 나라의 운명을 영구히 하는 바탕을 만드소서. 지금의 나라 형편은 전쟁보다 참혹한데 상하가 데면데면 평상시와 다름 없으니, 이것이 신들이 알지 못할 바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각고 면려하여 전쟁 중에 있을 때 분연히 발분하는 것처럼 하시어 무엇을 하겠다는 뜻을 이룩해 내십시오. 모든 관부에서 공사 간에 일상적으로 쓰는 용도와 수요를 일체 줄이고 혁파하여 윗물을 먼저 맑게 하며 뭇 신하들을 이끌고 인도하시어 맡을 일을 힘쓰게 하되 잘잘못을 가려 상벌을 분명히 하소서. 이와 같이 하는데도 대소 신료들이 다시금 대충대충하며 직임을 수행치 못하는 자가 감히 있거든 벌을 주어 물러나게 하여 그 불충한 죄를 드러내소서. 그렇다면 살아서 혈기를 지닌 자 치고 누군들 감동하여 분기하지 않겠습니까. 아, 나라의 원기가 가물가물하여 마치 노인이 숨져가는 형상인데 설사약을 함부로 투여하여 이미 바닥난 원기를 해친 것은 바로 훈련 도감의 별초(別抄)와 병조의 정초(精抄)일 것입니다. 신들이 그 대강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국가의 전제(田制)는 본디 공평치 못하다는 탄식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만약 지난해와 같은 큰 흉년이 오지 않고, 농민을 구휼할 줄 알아 농사철을 빼앗지 않으며 할 일을 놓치지 않게 한다면, 부역이 비록 무겁더라도 백성은 오히려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코 지탱하기 어려운 것은 아마도 신역일 것입니다. 여러 가지 명목이 거의 수십 종을 넘고 각읍의 군보(軍保) 수가 또한 수십만 이상이니, 사람이 자식을 많이 낳는다 하더라도 어떻게 부역의 명목을 다 채우겠습니까. 이렇기 때문에 해마다 세초(歲抄)할 때면 충원을 독려하는 각 아문의 관문이 바람과 벼락처럼 급하게 열읍으로 날아가 뒤섞이고, 수령된 자들은 오직 죄를 얻을까 두려워 민간을 끝까지 뒤지고 낭자하게 두들깁니다. 비록 강보에 싸인 벌거숭이라도 창을 지고 포를 내야 하는 역을 면치 못합니다. 그 어미는 관리 앞에서 가슴을 두들기며 피울음을 울고 그 아기는 어미 품안에서 빽빽 울어대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와 같은 정령(政令)이 있겠습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병조에 자세히 하문하시어 여러 명목의 군보를 조종조의 실역 45년의 제도에 한결같이 의거하소서. 이미 연한을 마친 자는 구애받지 말고 대신 군보를 정하며 모두 원안을 대조하여 줄여가게 하여, 오래 누적된 고질적인 폐단을 씻어내소서.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민정을 크게 위로할 것입니다.


근래 국가가 흉년을 진휼하는 것으로 인하여 각종 명목의 군포(軍布)를 미납한 것, 각사(各司)·내사(內司)의 신공(身貢)을 미납한 것, 관아 대출미를 미납한 것 중에 수를 감하여 받아야 할 것도 있고 햇수를 기다려 받아야 할 것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종류의 명목이 너무 많아 이루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올해의 흉년을 생각해 보건대, 옛날에 없던 일이니, 지난해에 받지 못한 것을 올해 받을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 설령 농사가 조금 되는 해가 있다손 치더라도 종전에 쌓인 빚을 한꺼번에 겹치기로 받아낸다면 백성들의 힘이 고갈될 것입니다. 올해에 기근과 역질로 태반이 사망하였으니, 빚을 진 백성들은 필시 대부분 귀신 명부에 올랐을 것입니다. 이왕에 그 당사자에게 책임지고 거두지 못한 것을 일가 이웃에게 침징(侵徵)한다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백성들을 죽은 자와 함께 버리는 것이니, 더욱 불가한 점이 있습니다. 만약 거둘 수 없다면 차라리 흔쾌하게 탕척을 시행하여 인심을 수습함이 나을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경술년이전의 제도(諸道) 각종 군보(軍保)와 노비 제반 신역(身役) 및 관아 대출미 미납 등의 항목을 성상의 마음으로 결단하셔서 일체 탕척하고 이어 윤음을 내리시어 위로하고 구휼하는 덕을 선포하소서. 이 밖에 군덕(君德)에 관계되는 일과 정령(政令) 간에 말할 만한 단서는 이 정도에 그치지 않음을 신들도 또한 알고 있습니다. 오직 성지를 세우시고 실덕을 닦으시며 크게 경계하고 크게 진작함이 오늘날 하늘에 응하는 가장 중요한 의리이며, 쓸데없는 병사를 제거하고 허비를 줄이며 포흠을 견감하고 인심을 수습하는 것이 목전의 어려운 시기를 구해내는 첫번째 일임을 생각하였기 때문에 우선 그 본원과 급무를 말하고 그 나머지는 뒤로 돌렸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이런 망극한 재변을 당하여 백성이 장차 죄다 죽게 되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니, 두려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차라리 내 몸이 그 재앙을 대신 받고 말지언정 백성이 그 화를 당하는 것을 차마 못 보겠다. 이제 차자의 사연을 보건대 모두가 격언이니, 마음에 간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글 끝에 말한 일은 대신과 의논하여 처치하겠다.”


하였다.

현종개수실록 24권, 12년(1671, 신해)





[참고 및 출처]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 김덕진
기후변동과 역사 : 17세기 중국과 조선의 재해와 기근. 김문기




빵꾼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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