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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수영 진휼청


독자제현께서는 17세기를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유럽은 자신들의 역사를 16세기는 르네상스, 17세기는 혼란, 18세기는 산업혁명으로 나누곤 한다. 물론 한 세기라는 것이 이렇게 특징적인 한 단어로 무 자르듯 뚝 자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대를 관통하는 흐름은 거대해서, 관련되어 있는 모든 것들을 휘감기도 한다.


17세기는 이른바 ‘소빙하기’였다. 과거 빙하기에는 비할 수 없지만 지구의 평균기온이 하락했던 시기다. (이에 대해선 태양의 흑점활동이 쇠퇴 또는 중지 상태에 돌입하면서 지구에 닿는 발열량이 감소해 소빙기가 도래했다는 설 등 다양한 학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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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역사채널 E '경신대기근'> 편 갈무리


이 시기 유럽에서는 농산물 생산량이 줄어들고 알프스의 빙하가 늘었으며, 시도 때도 없이 강과 운하가 얼어붙었다. 중국에선 강남의 감귤 농장이 추위로 전멸했으며, 일본은 북부 지역에서 소빙기 기후가 나타났다.


중국과 일본에 영향을 끼쳤는데 조선이라고 비켜갔을 리가. 조선도 호된 시련을 겪었으니, 대표적인 것으로 ‘경신대기근’이 있다. 당시 왕은 현종이었고, 경신대기근은 재위 11, 12년인 1670~71년에 일어났다.


물론 경신대기근 외에도 17세기는 온갖 재해가 휘몰아친 고난의 시기였다. 실록을 통틀어 가장 많은 자연재해가 기록되었다. 조선은 국가를 송두리째 흔든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을 겪고 난 뒤였고, 전란의 기억을 가진 사람이 아직 생존해 있을 때 경신대기근이 닥친다. 이것은 당대와 이후 조선사에 큰 영향을 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시 인구의 약 10%가 기근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참으로 혹독한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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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빙기를 증명하는 기후변화 그래프



1. 경술년(1670년)


불길한 징조는 새해 벽두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1670년 음력 1월 1일, 속은 붉고 겉은 푸른 햇무리(햇빛이 대기 속의 수증기에 비치어 해 둘레에 둥글게 나타나는 테두리)가 보였고, 사흘 뒤엔 달무리(달 언저리에 둥글게 두른, 구름 같은 허연 테)가 보이더니, 한 달 내내 햇무리와 달무리를 매일같이 관측할 수 있었다.


햇무리가 지고 양이가 있었다.

- 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 해의 양쪽에 두 개의 고리가 생기는 현상)가 있었다.

현종 18권, 11년(1670, 경술년) 1월 1일



평안도에 흰 무지개·햇무리·양이 현상이 나타나다.

- 평안도 이산군(理山郡)에 작년 11월 29일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으며, 희천군(熙川郡)에서도 같은 날 햇무리가 지고 양이가 있었는데 흰 무지개 세 가닥이 가로로 얽혔으나, 해를 꿰뚫지는 않았다.

현종 18권, 11년(1670, 경술년) 1월 3일


설날에 모여서 새해를 맞은 현종과 대소신려들은 슈퍼깜놀했고, 앞 다투어 큰 변고의 징조임을 경고한다. 당시에 불길한 징조로써 여겨진 혜성이 관측되었기에 더더욱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그러나 조정은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했고, 그저 경고만 울려 퍼졌다.


태백(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번갯불 같은 붉은 빛이 짙은 구름 속에서 나와 곧바로 서쪽을 향하였는데, 빛이 땅을 비추고 소리가 있었다. 유성인 듯 하다고 하였다.

현종 18권, 11년(1670, 경술년) 1월 8일



태백성과 유성이 나타나다

-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유성이 하고성(河鼓星) 위에서 나왔는데 꼬리가 길고 색깔이 붉었다.

현종 18권, 11년(1670, 경술년) 1월 10일


유성 출몰 사태는 쭉 이어진다. 1월 13일, 21일에도 백색 빛을 내는 유성이 관측되었고, 2월에는 꼬리가 18m나 되는 붉은 색의 대형 유성이 관측되었으며. 운석까지 떨어진다. 유성이 잦고 운석이 떨어지면 엄청난 양의 미립자, 즉, 먼지들이 발생해 햇무리, 달무리는 물론이고 하늘이 자주 어두컴컴해진다. 해가 보이지 않으니 기온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


하늘의 선전포고는 실력행사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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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에 지진이 발생하다.

현종 16권, 10년(1669, 기유) 3월 22일



평안도에 지진이 발생하다

- 평안도 평양에 지진이 있었다. 동쪽에서 일어나 서쪽에서 멈추었는데 소리가 천둥치듯 하여 가옥이 모두 흔들렸다. 순안(順安)·영유(永柔)·중화(中和)·숙천(肅川)·강서(江西)·은산(殷山) 등지에도 같은 날 지진이 있었다.

현개(현종개수실록) 21권, 10년(1669, 기유) 8월 14일



지진사태는 경신대기근 뿐 아니라 현종재위 기간 내에 수도 없이 이어지는데, 경신년 한 해만 지진이 엄청 발생했다.


2월: 경기도 교동과 통진, 경상도 안음과 거창

5월: 황해도 풍천

6월: 경상도 동래

7월: 충청도 대흥

8월 21일: 삼남지방(영남, 호남, 충청)에서 상당히 강력한 지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 대기근이 본격적으로 시작됨

12월: 충청도, 전라도, 평안도에서 동시에 지진 발생


이렇듯 전라, 경상, 충청, 경기, 황해 등 전국에 지진이 잇따른다. 한반도가 지진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은 사서에 다 기록되어있다.


지진과 함께 병충해와 전염병이 조선 반도를 습격한다. 1670년 1월 4일 충청 감사는 이렇게 보고했다.


‘전염병이 도내를 돌아 513명이 통증을 호소하고, 사망자가 30명에 이르렀으며, 전라도에서도 598명이 감염되었고, 43명의 사망자가 속출했다’


이 보고를 필두로 전국에 빠르게 전염병이 확산된다.


윤 2월 이후 가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670년 윤 2월 26일, 봄을 앞둔 이 시점 서울에는 아침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정오에는 팥 크기 만한 우박이 떨어졌다. 이틀 뒤엔 경상도에서 우박이 떨어진다.


3월엔 비가 오지 않아 우물과 냇가 모두 말라버렸다. 새 작물 파종 계획은 접어야할 판이었고, 이런 상황에 평안도 여섯 고을엔 서리가 내려 냉해가 예상되기도 했다.


4월, 상황은 악화되었다. 비는 내리지 않고 우박만 떨어지는데다 밤만 되면 서리까지 겹치니 그 해 농사는 사실상 망했어요. 파종기에 불어 닥친 재해들은 훗날 파종시기 조정과 종개량 등 정책적 지원을 하는 원인이 된다.


5월, 여전히 가뭄이 이어졌으며 우박이 더욱 심해졌다. 평안도 쪽이 피해가 막심했는데, 곡식들은 모조리 결딴났으며 네 살짜리 아이가 우박에 맞아 죽고 동물들도 많이 죽는다. 5월 23일, 가뭄을 해소할 큰 비가 내리긴 하지만, 1년 농사는 이미 끝난 데다 폭우 수준으로 비가 내려 19명이 익사‧압사하고 논과 밭이 물에 잠겼다. 전염병까지 창궐해 전국에서 1400명 이상이 감염되면서 사망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으니, 유럽의 흑사병 못지않은 속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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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뚜기 떼도 발견된다. 메뚜기 형님들이 한번 쓸고 가면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곡식마저 눈 뜨고 코 베이는 격으로 없어지는 것이다.


영의정 허적은 냉해, 가뭄에 이어 병충해까지 등장하자, 현재 겪고 있는 재난은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는 수준이라고 진단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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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되었다.


6월에도 우박 세례는 지속되었다. 더하여 6월 중순에 전국에 폭우가 쏟아져 물난리가 발생한다. 원래 같으면 한반도 남부만 강타했을 태풍이 그 해에는 한반도 전역을 진공청소기처럼 쓸어버린다. 이 와중에 함경도에선 황충(蝗蟲. . 메뚜기의 일종으로 풀무치라고도 불림) 떼가 급습, 천만 마리가 들판을 덮고 닥치는 대로 쓸어먹었다. ‘도토리마저 열매를 맺지 못할 정도’라고 기록되어 있다.


7월에는 지속되는 우박도 모자라 무려 눈(!)이 내린다. 추수를 앞둔 작물이 죄다 말라죽었고 함경도 쪽이 특히 피해가 심했다.


영제(榮祭. 오랫동안 비가 올 때 날이 개기를 바라는 의미로 지내는 제사)를 지냈음에도 폭우와 강풍을 동반한 초대형 태풍이 제주도와 경상도 남해안 일대를 휩쓸었는데, 제주도의 피해가 엄청났다. 해일로 인해 짠 바닷물이 산과 들로 밀려 들어왔고, 작물들은 소금물에 절어 말라죽었다. 파도가 어찌나 심했는지 바닷물이 자욱한 안개를 만들어, 숨을 쉬면 짠 소금 맛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농작물은 고사하고 풀뿌리, 나무뿌리까지 싸그리 전멸하여, 당시 제주도의 전체 인구 4만 2700명 중 안 굶고 있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제주 목사는 급한 대로 육지 쪽에 곡물 지원을 요청했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겨우 도착한 진휼곡(賑恤穀. 기근에 대비하여 비축한 곡식)도 얼마 안 가 바닥나자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을 판’이라는 보고를 올리기도 했다. 이것도 물길이 험해서 쉽게 오지 못하자 제주 목사가 항구까지 나와서 백성들과 함께 배를 기다리다 못해 대성통곡을 했다.


제주의 진휼책이 원활히 진행되지 않아 피해는 더해만 갔다. 육지에서의 지원 외에는 타개할 방법이 없는 제주목사의 심정이 실록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제주 목사 노정이 폭풍우로 인한 구제책을 치계하다

- 제주 목사 노정(盧錠)이 치계하기를,


“7월 27일 강풍과 폭우가 일시에 닥쳐, 강물이 터진 듯 하였으며 소리가 우레 같았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큰물이 갑자기 불어나 수구(水口)의 홍성(虹城)과 누각까지 아울러 무너져 바다 속으로 떠내려갔으며, 침수된 민가가 아주 많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6명입니다. 밝은 대낮이 컴컴해졌고 성난 파도가 포말을 내뿜었는데, 비처럼 흩날려 온 산과 들에 가득하였으며, 사람이 그 기운을 호흡하면 꼭 짠물을 마시는 것 같았습니다. 초목은 소금에 절인 것 같고, 서리와 눈에 죽지 않는 귤·유자·소나무·대나무 등이 마르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른바 땅위에 초목이라는 것은 모두 조금의 생기도 없습니다. 각종 나무 열매는 거의 다 떨어지고 서속·콩 등은 줄기와 잎이 모두 말랐습니다. 농민들이 서로 모여 곳곳에서 울부짖고 있으니, 섬 안에 인간이 앞으로 씨가 마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실로 만고에 없었던 참혹한 재변이니, 앞으로의 구제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현종 18권, 11년(1670, 경술) 9월 9일



이제 또 하나의 악몽, 우역(牛疫. 소의 급성전염병)이 불어 닥친다. 농본국가인 조선에게 소의 중요성은 말하나 마나다. 조선이 소의 도축을 금지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한 해의 농사를 망쳐서 어떻게 버틴다 해도, 다음 해에 농사를 지어 피해를 복구하려면 소가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소를 죽이는 전염병인 우역이 퍼진다는 건 꿈도 희망도 없어지는 상황이 된다는 것이다.


황해도에서 7월 한 달만에 역병으로 죽은 소가 897마리, 경기도에선 137마리였다. 소 뿐 아니라 사람들 또한 역병으로 인해 26명이 죽었고, 505명이 감염되었다.


8월이 되면서 냉우, 즉, 차가운 비까지 더한다. 함경도 쪽은 더욱 상황이 나빠졌는데, 냉우와 우박이 번갈아 내리며 물에 빠져 죽거나 우박에 맞아죽는 사람이 속출하였다. 논과 밭이 물에 잠기고, 산삼 싹이 냉해로 말라죽었으며, 도토리까지 열리지 않으니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만주 땅으로 들어가 산삼, 도토리 채취는 물론 담비까지 사냥한다. 조선판 탈북자 문제는 이후 청나라와의 국경 분쟁을 야기했고 매우 예민한 외교문제로 비화한다.


8월 중순, 또다시 폭풍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져 67명이 익사한다. 8월 하순, 폭풍우가 또다시 한반도 남부를 강타하여, 강풍에 날아간 어린이가 추락해 죽고, 수확기인 목화가 죄다 말라 죽는 등 엄청난 손실을 입는다. 전라도엔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내리 닷새 동안 서리가 내렸고, 8월 1일과 22일엔 냉우가 쏟아져 작물이 침수되었다. 거기에 녹색풍(錄塞風) 내지 살곡풍(殺穀風)이라 불리는 동풍이 불어와 벼들이 말라죽는다. 황해도에선 우역이 크게 번져 8월 한 달에만 죽은 소가 도합 1만 6천 마리였다. 보통 가구당 1~2마리씩 보유했다고 가정하면, 최소 1만가구의 경제력이 몽땅 날아간 것이다.


9월 초, 강원도가 폭풍우에 휩쓸려 물난리가 났다. 우역 피해도 지속되었다. 황해도에선 소 8418마리가, 경기도에서도 3500마리가 죽었다.


10월 말에 폭풍우가 또 한 차례 전국을 휩쓸었다. 쌀농사를 망해버린 때에 유일한 희망이었던 밀과 보리마저 말라버린다. 경기도에선 우역으로 1800마리가 추가로 죽는다.


11월, 우역으로 소 2350마리가 죽음으로써 황해도에선 도합 22165마리의 소가 죽었다. 대략 전체 농가의 4%가 소를 잃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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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0년 한 해 동안 냉해, 가뭄, 수해, 풍해, 병충해 등 총체적인 자연재해에 시달린 조선은 거의 대부분인 전국 360개 고을이 대흉작을 맞았다. 보통 기근이 닥치면 전국에서도 살아남는 지방이 있었고, 하나의 도내에서도 살아남는 고을이 있어, 이들의 물자를 흉작의 고을에 분배함으로써 그 해를 견디곤 했다. 하지만 이 해에는 전국팔도가 와장창나면서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굶주리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은 당연했으며, 그해 4~5월의 냉해로 밀과 보리가 흉작일 때부터 기아자가 늘어나기 시작한다. 이들은 가만히 앉아서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자기가 살던 곳을 버리고 떠돌아다녔다. 하지만 전국 규모로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고 있는 판국에 누가 먹을 걸 주겠는가. 아사자 또한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기온도 떨어져 유민으로 떠도는 이들은 동사하기까지 했다. 참으로 노답이다.


1670년 7월 최초로 아사자가 보고되었고, 8월부터 급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한다. 주로 가장 재해를 심하게 입은 경상도와 전라도였지만, 서울에서도 아사자가 보고되었다. 평민이고 양반이고 너도 나도 굶주렸다.


기근이 심해지자 조정에선 그동안 금지되었던 소의 도살을 폐지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농사를 위해서 소 도축을 막아왔지만, 이번에는 워낙 심해서 도저히 도살을 막을 상황이 아니었다. 다음 농사를 대비해서 도축을 금지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당장의 식량이 더 급하다는 의견이 대세여서 일시적으로 도축 금지령을 폐지했다.


현실은 이전부터 식량을 얻기 위해 소를 도축하는 일이 잦았다. 우역으로 죽어 묻은 소를 파내서 먹는 일도 허다했다. 이로 인해 전염병에 걸려 죽거나 갑작스런 소고기 섭취로 사망한 경우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쌀이 전멸한 한 해가 가고, 어느 때보다 극심한 보릿고개를 넘었다. 계절은 목빠지게 기다리던 1671년 봄으로 넘어갔지만 상황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아사자는 수십, 수백 명 단위였고, 어딜 가든 굶어죽은 시체가 길거리를 메웠다. 전염병 또한 수그러들지 않았다. 거기다 떠돌아다니는 유민들은 오랫동안 굶어서 면역력이 떨어져 쉽게 사망하는데다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시키는 매개체가 되어버린다.


그야말로 조선판 워킹데드가 벌어진 것이다.



다음편에 계속



[참고 및 출처]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 김덕진
기후변동과 역사 : 17세기 중국과 조선의 재해와 기근. 김문기



빵꾼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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