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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3. 19. 수요일

춘심애비








편집부 주


본 기사는 딴지일보 무규칙 이종 매거진


<더딴지> 13호에 실린 기사의 전문입니다.








문화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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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무슨 말인고 하니, 문화라는 것은 결국 인간 군상의 삶 그 자체라는 얘기다. 이 역시 무슨 소리냐면, 문화의 다양성이라 함은 결국 인간 삶의 다양함과 같을 정도로 다양하다는 말이다. 3명의 사람이 있다면 3가지의 취향이 있고, 그 취향에 따라 3가지의 문화가 발생된다. 그 3명이 함께 만드는 문화도 있고, 그 3명 중 각각의 2명이 만들어내는 문화도 있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서로 영향을 끼치듯, 문화도 그렇게, 서로의 영향을 통해 발전되고 또 반복된다.

 

문화가 삶에서 비롯된다면, 인간의 삶이 크게 달라질수록 문화도 크게 달라진다. 산업혁명이 인간의 삶을 뒤바꾼 만큼, 똑같이 문화도 뒤바뀐다. 스마트폰이 삶에서 수만 가지의 변화를 만들어냈듯, 수만 가지 문화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거꾸로, 인간의 삶은 완전히 송두리째 뒤바뀌지는 않는다. 수천 년 전부터 내 연인이 바람을 피우면, 죽일 듯이 상대방에게 달려들었고, 내 자식이 맞고 돌아오면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된다. 인간의 본능이나 감정, 스스로의 삶에 대한 목적 등은 크게 바뀌지 않고, 또 크게 다르지도 않다. 우리 삶의 모습은 정말 많이 바뀌었지만, 삶 그 속의 이야기는 크게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까 아직도 수백 년 전 어떤 한량이 쓴 책을 읽고 눈물을 흘리고, 수백 년 전 어떤 백수가 만든 노래에 전율을 느낄 수 있는 게다.

 

30년 전, 한국의 젊은이들은 필사적으로 들국화 앨범을 찾았다. 마찬가지로 어떤 시대 어떤 나라의 젊은이들은 빅토르 최를, 커트 코베인을, 앤디 워홀을, 장-미셸 바스키아를, 서태지를, 장 뤽 고다르를, 오즈 야스지로를, 스크릴렉스를 필사적으로 찾았고 또 찾는다.





힙스터, hip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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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스터(hipster)라는 말이 있다. 혹시 이 말을 처음 들어본다면 우선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당신은 힙(hip)하기가 힘들다.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겠는데 위로를 한다니 기분이 나쁠 테고, 그에 대해서는 정중히 사과한다.

 

힙스터는 어떤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말 자체는 미국에서 이미 1940년대에 생겨났는데, 당시 기준에서는 일종의 신조어였다. 무려 70년 전의 이야기다. 그 때 사람들은, 주류 문화에서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비주류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을 지칭하여 힙스터라고 불렀다. 자료를 찾아보면 당시 힙스터들이 구성한 문화에 대한 설명이 나오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주류 문화에 속한 사람들이 그들을 서술하기 위해 애써 찾은 단면들의 조합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지금의 힙스터들에 대해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2010년대 현재, 사람들은 힙스터라고 하면 나름대로의 비주얼을 생각해낸다. 앞의 저 사진 속 사내처럼 생긴 모습이든, 옆머리는 바싹 밀고 윗머리만 남긴 채 뿔테 안경에 콧수염을 기른 사내든, 너절한 반팔 라운드 티셔츠에 맥락 없이 단이 모자란 청바지를 입은 사내든. 흔히 힙스터들은 인디음악, 그것도 정말 메이저 언론에서는 찾아볼 수조차 없는 매니악한 인디음악을 좋아하거나, 브레이크 없는 자전거를 타거나, 고양이를 좋아하거나, 담배를 늘 피우거나, 낡은 노트에 뭘 끄적거리는 사람이라고 여겨지기도 하지만, 막상 최신 유행 팝을 들으면서 준중형세단을 타고 갤럭시 폰을 쓰는 사람이 힙스터가 무조건 아닌 것 만은 아니다.

 

90년대 ~ 2000년대에 다시 시작된 힙스터 문화는, 미국에서 대개 서브컬쳐라고 불리는 비주류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써 부활한다. 그들은 동네 레코드점에 가도 남들은 신경도 안 쓰는 이상한 음반들이 켜켜이 쌓인 코너에 매일 들락거리고,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잡지를 챙겨 본다. 정말 극소수만 즐겨야 할 것 같은 그 문화를 즐기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았고, 주류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 눈에는 그들의 행색이 다 비슷해만 보였다. 스케이트보드나 자전거를 타도 꼭 이상한 걸 타고 다니는 애들이 그 레코드점 그 코너에 있었고, 알 수 없는 소품들을 들고 다닌다.

 

그들을 뭐라 부르긴 해야할 것 같아 선택한 말이 힙스터다. 이게 다다. 뭐 애초에 이름이라는 건 원래 내가 짓는 게 아니라 남이 지어주는 거니까. 힙스터들에게 왜 너네 이름이 힙스터냐고 물을 수는 없는 거 아니겠나.

 

사실 이런 식의 비주류 문화는 다양하다. 머리를 가운데만 남기고 오만 군데에 피어싱을 한 채 '징'박힌 가죽 옷만 입는 펑크(Punk), 밀가루 '처'바른 듯 창백한 얼굴에 짙은 눈화장을 하고 마치 집구석에서 사람 피를 '퍼'마실 것 같은 고쓰(Goth), 분명 노숙자 같은데 늘 행복해 보이는 히피(Hippie). 그런데 이들과 힙스터는 다르다. 많이 다르다.

 

 

 

 

주류 문화, 비주류의 눈치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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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스터의 가장 다른 점은, 이상하게도 신경이 쓰인다는 거다. 저 근본도 모를 놈들이 나를, 내 문화를 비웃는 것만 같은 느낌. 아무 소통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왠지 힙스터들이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아서, 그들의 문화를 비하하고 싶어지는 그 느낌. 오죽하면 GTA 최신판에는 I hate hipsters를 외치며 힙스터들을 대량 학살하는 미션까지 만들어져 있다.

 

도대체 왜일까. 한번도 펑크나 고쓰들의 눈치를 본 적은 없으면서, 왜 힙스터는 이상하게 신경이 쓰일까.

 

힙스터 문화는 기존의 그 어떤 비주류 문화보다도 본인의 취향에 투입되는 노력의 양이 압도적으로 크다. 아니, 표현이 잘못됐다. 힙스터는 그저, 자신들의 취향을 즐기는 행위 그 자체, 취향을 지키는 것 그 자체에 가장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만으로 정의되는 그런 집단이다. 자기 자신의 취향, 그 한가운데로 끝없이 파고드는 그들의 모습은, 그저 미디어에서 ‘이게 제일 좋아’하고 보여주는 정답을 꿀꺽 삼키는 주류 문화에서 볼 때, 미묘한 열등감을 일으킨다.

 

즉, 좋아할 것을 찾는가, 아니면 주어진 것을 좋아하는가, 이 차이가, 현대인이 삶에 치이며 마음 한 곳에 애써 묻어둔 무언가를 계속 자극하는 것이다. 나도 뭔가가 있는데, 나는 그 뭔가를 애써 파묻어 뒀는데, 그 뭔가를 위해서만 사는 것 같은 모습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 그 상대적 박탈감은 마치 좋아하는 학우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은 초등학교 2학년생처럼, 그들을 괴롭히고 싶게 만든다.

 

또 한 가지. 하다 못해 샤프연필을 하나 사도 알아보고 사면 좋은 걸 산다. 노래 하나를 들어도, 끝없이 찾아보고 선택한 노래가 형편없을 리는 없다. 옷도, 안경도, 먹을 것도 마찬가지다. 힙스터들의 선택은, 대부분 그들 자신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선택이다. 반면 주류 문화의 수동적 향유에 익숙한 사람들은, 남들이 좋다 하는 걸 좋아한다. 이 역학관계는 결국, 힙스터들이 선택한 것을 주류 문화가 따라가게 만드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낳는다. 많은 젊은이들이 꼭 한번 가고 싶어하는 뉴욕의 힙 플레이스(hip place)들은 힙스터들이 놀다간 자리일 뿐이다.

 

결국 힙스터가 쓸고 지나간 자리를, 주류 문화가 답습한다. 이렇게 주류 문화와 힙스터의 애증은 자리잡는다. 그리고 힙스터는 - 조금 과장해서 - 인류 역사상 가장 도발적인 영향력을 지닌다.

 

 

 

 

힙스터의 실종, 21세기 문화의 빅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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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펑크나 고쓰의 예를 들어보자. 펑크나 고쓰는 나름대로 명백하다. 당장 일본 하라주쿠나 영국 캠든타운에 가면, 마치 교본처럼 ‘아, 쟤는 펑크고 쟤는 고쓰구나’라고 몸소 체험하며 그들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다. 반면 힙스터는? 힙스터임이 분명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당신이 생각하기에 아무리 봐도 힙스터 같은 사람에게 가서, “힙스터세요?”라고 물어보라. 그는 마치 베드로가 예수를 부정하듯 부정할 거다.

 

90~2000년대에 부활한 힙스터는, 주류 문화에서, 자기 취향의 충족을 행하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싸잡아 붙인 이름이다. 적어도 주류 문화에서는 그들을 구분하는 것이 명확했다. 주는 대로 받아먹는 나와는 달리, 빨빨거리고 돌아댕기는 저놈들이 힙스터니까. 레코드샵의 한 코너에, 괴상한 인테리어의 까페에, 버려진 창고 같은 지하 클럽에 몰려있는 그 놈들은 확실히 힙스터였을 게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힙스터가 없어졌지?

 

2000년대 중반이 지나면서 전 세계에는 인터넷 열풍이 불었고, 2010년대에 들어 스마트폰 혁명이 뒤따르는 과정에서, 세계 곳곳의 젊은이들은, 각 지역의 ‘타칭’ 힙스터들이 만들어둔 문화의 외연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뉴욕 힙스터들이 자주 갔더라는 그 까페, 샌프란시스코 힙스터들이 애정했더라는 그 DJ, 오스틴 힙스터들이 환장했더라는 그 인디밴드에 대한 정보가, 초고속통신망으로 세계 곳곳에 퍼져나간다. 이 과정에서, 분명히 ‘몰려 있었던’ 그 놈들을 지칭하던 힙스터는, 갑작스레 그 형체를 잃는다. 말하는 게 꼭 옛날에 레코드샵에 있던 그 힙스터들 같은데, 알고 보니 대한민국 삼척시에 사는 중학생이네? 입고 다니는 꼬라지가 분명 그때 그 클럽에서 웅성거리던 그 놈들 같은데, 쟤는 왜 중국 샹하이 화이하이루에 있지?

 

그 삼척 사는 중학생과, 화이하이루에 있던 젊은이는, 힙스터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취향을 탐닉하던 중에, 힙스터들이 형성한 문화의 외연 중 일면이 마음에 들어 참고했을 뿐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자신의 취향을 탐닉하고 정보를 교환하면서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진다. 물론 이들을 힙스터라고 불러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그들은 힙스터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레코드 샵에 몰려다니지 않고, 그 클럽에서 웅성거리지 않으니까.

 

이렇게, 힙함(being hip)은 남고, 힙스터는 사라진다. 즉, 힙함은, 그냥 자기 취향에 몰두하는, 그 태도일 뿐이다. 이제 당신은, 힙한 사람을 찾을 수 있을 뿐, 힙스터는 찾을 수 없다. 당신 자신이 힙스터라고? 스스로를 힙스터라고 부르는 순간, 당신은 이미 힙하지 않다. 그건 너무, 구려.




 

30년 전, 30년 후, 그 다음 30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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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대한민국에서는, 몇몇 젊은이들이 모여서, 자신들이 듣고 부르고 연주하기에 가장 좋을 음악을 만드는 데 몰두한다. 바로 들국화다. 밑도 끝도 없이, 그냥 만든다. 앞에서도 말했듯, 샤프연필 하나를 사도 알아보고 사면 좋은 걸 산다. 음악이라는 게, 밑도 끝도 없이 제일 좋은 걸 만들려고 하면, 그건 대개 좋을 수 밖에 없다.

 

대한민국이라는 땅덩어리에서 남들이 다들 하고 즐기는 게 아닌, 자기 자신들이 전율할 법한, 그런 음악을 만들어 냈다면, 같은 시각 같은 나라에서 똑같이 자신들이 듣고 즐기기에 좋을 음악을 찾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도, 분명 좋았을 게다. 취향에 대한 추구는, 이렇게 위대한 밴드와 위대한 팬들을 만들어낸다.

 

30년이 지난 지금, 그 취향에 대한 추구는, 심지어 주류 문화를 ‘눈치 보게’ 만든다. 실체는 사라진 그 행동 양식 자체가, 가질 만큼 가진 자들로 하여금 신경 쓰게 만든다. 문화적 계층이, 경제적 계급을 압도하는, 아마도 인류 역사상 최초의 전복이 발생한다.

 

30년이 더 지난다면, 아마도, 바라건대, 내가 듣고 싶은 게 있으면 들을 수 있고, 내가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을 수도 있고, 내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할 수 있는 세상이 올 게다. 남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내 취향이, 그저 외로이 누군가 오길 기다리는 산자락 돌덩어리가 아니라, 언제든 원한다면 이어질 수 있는 11자리 전화번호에 가까워질 게다.




P.S : 춘심애비의 힙함(Being Hip) 탐구는, 앞으로 지겹도록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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