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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9. 22.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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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pple과 IB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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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과 IBM은 오랜 숙적(?)관계를 청산하고 파트너쉽을 맺었다.



2014년 7월 15일 Apple과 IBM은 대등한 관계로 서로의 강점을 활용하는 배타적 파트너십을 발표했다. 요지는 개인용 모바일 기기를 만드는 Apple과 기업용 솔루션 서비스를 제공하는 IBM이 서로 협력*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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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쿡 (Apple CEO / 우)과 지니 로메티 (IBM CEO / 좌) 


Apple & IBM 주요 협력 내용


전용 앱을 포함한 처음부터 iPhone과 iPad 전용으로 개발된 100개 이상의 새로운 전문 기업 솔루션 제공

 

기기관리 및 보안, 분석 서비스, 그리고 모바일 통합솔루션 등 iOS에 최적화된 IBM 만의 클라우드 서비스

 

기업의 수요를 위한 새로운 맞춤형 AppleCare® 서비스 및 지원

 

모바일 기기 활성화 및 공급, 관리를 위한 새로운 IBM 패키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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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한다 IBM, 진심으로...

 


애플 스티브 잡스는 1981년 IBM PC 등장하자마자 “환영한다 IBM, 진심으로”라는 카피로 Apple과 IBM이 대등한 것 처럼 광고했다. (Apple은 가정용 컴퓨터를 만드는 기업 중 하나였을 뿐 IBM과 비교했을 때 조무래기에 불과했다.)



스티브 잡스는 1983년 IBM을 IT계 적으로 간주했다.

 


그러다 1983년 IBM PC가 대성공을 거두고 Apple에게 위협이 되자 IBM을 공공연하게 적으로 간주했다. 잡스가 떠나 있을 때 애플은 맥킨토시에 사용할 POWERPC CPU를 'IBM+모토롤라'와 협력하여 개발하는 등 IBM과 어느정도 협력관계에 있었지만 돌아온 잡스는 몇 년간 준비 끝에 2005년 Intel x86으로 완전히 이전*해 버린다.




스티브 잡스와 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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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l CPU로 이전 당시 Wintel(Windows + Intel)을 적으로 생각한 많은 애플 팬들이 비난했지만 이는 애플을 도약하게 한 최고의 한 수 였다. 이미 데스크탑 컴퓨터 CPU 전쟁에서 Intel이 최종 승자였으니 잡스가 IBM을 단지 싫어해서 결정한 사항은 아니었다.




1997년 이후 잡스시대에서는 IBM은 서로 영역이 달라 '관계없게 된' 회사였다. 잡스는 철저히 가정용, 개인용 기기를 선택, 집중할 수 밖에 없었고 Xserve 같은 기업용 랙 서버는 경쟁에서 밀려 입지를 넓히지 못하자 끝내 폐기하게 된다. 애플은 OS X server, Xgrid*, Xsan* 등 나름 훌륭한 기업용 솔루션이 있었지만 그들에게 돈을 벌게 한 가치있는 상품은 가정용, 아니 개인용 모바일 기기가 되었다.




* Xgrid: 관리자가 네트워크로 연결된 컴퓨터 그룹의 결합된 처리 능력을 사용하여 단일 작업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

 

* Xsan : 여러 대의 Mac 데스크탑 및 Xserve 컴퓨터를 활성화하여 고속 네트워크를 통해 RAID 저장 장치를 공유하게 해주는 64비트 클러스터 파일 시스템, 각각의 컴퓨터는 중앙 파일 시스템을 직접 읽고 쓸 수 있음




잡스시대 애플은 자신의 출발선(가전 제품으로서 가정용 컴퓨터)에서 최선을 다했고 성공으로 보상을 받았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IBM은 어떻게 되었을까? 국가, 금융 혹은 기업을 상대했던 기업용 컴퓨터에서 시작했던 IBM은 지금 그 위치마저 흔들리고 있다. 이 위기의 시작은 가정용 컴퓨터 IBM PC가 아니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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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년 IBM System360, 메인프레임의 전형을 제시한 제품.





2. 1970년대 까지 IBM


1980년 IBM은 가정용 컴퓨터 시장을 눈여겨 보고 있었다. 미니 컴퓨터*와 달리 가정용 컴퓨터는 세력 확대가 좀 더 광범위하였다. 1979년 지금의 MS 엑셀 조상인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 VisiCalc가 나오자 게임기에 불과했던 가정용 컴퓨터가가 사무용 기기로 탈바꿈되어 가고 있었다.


1977년 가정용 컴퓨터가 나왔을 당시 IBM은 컴퓨터계의 제왕이었다. IBM은 1911년 회사 설립 이후 메인프레임(MainFrame)* 컴퓨터에 도전했던 모든 컴퓨터 제조사들을 무찔렀다. 1970년대까지 IBM은 시계와 금융 등 자신만의 전문 기술로 무장한 부국인 컴퓨터계의 스위스라 비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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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BM Mainframe (좌) / PDP-8 (우)


* 미니컴퓨터(Minicomputer) : 대형 컴퓨터인 메인프레임과 비슷한 역할을 하되, 그 크기와 성능을 간소화한 컴퓨터이다, 오늘날에는 중형 컴퓨터(midrange computer)라고 부르기도 한다. 최초의 미니컴퓨터는 1964년 DEC가 출시한 PDP-8이다.

 

* 메인프레임(Mainframe) 또는 대형 컴퓨터(문화어: 대형콤퓨터) : 다양한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범용 목적의 대형 컴퓨터로서, 다수의 단말기(terminal)를 연결하여 많은 사람들이 복잡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 1964년 IBM에서 출시한 System/360이 현대식 메인프레임의 시초이다.




IBM에 도전장을 내민 컴퓨터 제조사들은 IBM 주력 무대인 국가 혹은 기업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려고 했다. 1951년 레밍턴 랜드사의 UNIVAC은 IBM 보다 뛰어난 기술로 미국 인구통계국 등 납품하였고 메인프레임에 도전한 미니컴퓨터 또한 평균 가격이 2만달러에 해당하는 전문가용 컴퓨터였기에 가정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기가 아니었다. 70년대까지 IBM의 아성은 흔들림이 없었다.





3. IBM의 기업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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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의 신념 토마스 왓슨 Jr.

 




“IBM하면 서비스(IBM Means Service)”라는 간단한 문안의 광고를 선보였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IBM 최고의 광고라 생각하곤 했다.

 

거인의 신념(토마스 왓슨 Jr.*, 1963년)


* 토마스 왓슨 Jr.: IBM CEO였던 토마스 왓슨의 아들로 1937년 IBM 세일즈맨으로 시작하여 1946년 부사장, 1952년 사장, 1956년 CEO로 오르며 IBM을 최고의 기업으로 만든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IBM의 고객은 기업이었다. 중소기업이 아닌 대기업, 금융사 등 대규모 데이터 처리가 필요한 거대기업을 상대로 하여 Mainframe을 팔았다. 기기를 팔았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실제 Mainframe을 판매했다라기보다는 데이터 처리 서비스를 제공으로 사용료를 지불하는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IBM과 수요기업 간 일정기간 계약을 하여 서비스 비용으로 사용료(일례로 2014년 IBM Mainframe 사용료로 KB은행이 월 28억원을 낸다고 한다.)를 내는 구조가 Mainframe 시장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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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기준.. 요렇단다.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PC는 70만원이 되었건 얼마가 되었건 1대당 가격 개념이 확립되어 있지만 Mainframe에서는 서비스 사용료 지불이 더 중요했다. 막말로 그 시장은 IBM 독점이었기에 데이터 서비스가 필요하면 IBM과 계약하면 될 일이었다. ('갑같은 을'이라고 할까. 지금 그 역할의 선봉장은 얼마전 은퇴한 래리 엘리슨 CEO가 몸 담았었던 오라클이었다)





4. 가정용 컴퓨터에 대한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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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Space Odyssey에서 HAL9000 : HAL에서 스펠링 순서 하나씩 뒤로 옮기면 IBM이 된다.



1970년대까지 IBM의 고객은 일반 소비자가 아니라 기업이었다. 70년대까지 IBM은 컴퓨터 그 자체로 전문가가 아니면 다가갈 수 없는 미지의 물건이었다. 그리하여도 매스컴 뿐 아니라 대형 마트 등 컴퓨터 처럼 생긴 단말기 비슷한 기기에 여지없이 보이는 브랜드가 IBM이었기에 일반 소비자들은 IBM에 대해 전혀 낯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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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M의 RSS(Retail Store Solutions). 이름하야 돈 받아묵는 시스템



그런 IBM이 일반 소비시장 즉, 가정용 컴퓨터에 진입하고자 한 것이다. IBM은 대형컴퓨터 뿐 아니라 1975년 'IBM 5100'이라는 소형 컴퓨터 관련 기술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소형 컴퓨터에 관련된 개발언어, CPU(PALM Processor는 명령어 셋이 없기에 CPU가 아니라고도 한다.) 등을 IBM이 직접 개발 소유하고 있었다.


1977년에 처음 선보인 가정용 컴퓨터의 평균가격이 $600~$1200 정도로 IBM에서 내놓은 가정용 컴퓨터와 비슷한 크기의 전문가용 포터블 컴퓨터 '5100'의 가격이 $20,000 정도 하였다. IBM 입장에서 가정용 컴퓨터는 단가 측면에서 보았을 때 매력없는 시장이었다.


IBM은 당시 시장에 나와있는 Apple 등 가정용 컴퓨터 내용물을 보고는 공대생들 장난 수준으로 판단했다. 실제로 CPU(워즈니악이 MOS Technology 6502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사용한 이유는 모토롤라 68000과 40핀수로 동일했고 구하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Intel 8080 보다 훨씬 저렴하기도 했었다.) 등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기성 부품으로 조악하게 조립한 제품이기도 했다. (얼마나 돈이 없기에 출력 장비로 집안의 TV를 이용했겠나.)


IBM은 그래도 이 시장을 놓쳐서는 안된다고 판단한다. VisiCalc로 업무를 보는 사무실이 늘어남에 따라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지만 자신의 기술로 진입하고 싶진 않았다. 그 이유 중 싸게 팔 가정용 컴퓨터를 자신의 기술로 잘 만들어 자신들이 구축 중에 있는 포터블 컴퓨터 5100의 자기잠식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대당 2천달러 컴퓨터 보다는 2만달러 제품에 더 애착이 갈 수 밖에 없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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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iCalc로 업무를 보는 좋은 예.





5. 개방형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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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M PC로 인해 촉발된 개방형 구조의 PC 메인보드.



그런 상황에서 IBM은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1980년 IBM은 플로리다 보카랜턴에 있는 비밀 팀을 구성하여 팀장 '돈 에스트리지'에게 1년 안에 가정용 컴퓨터를 완성하도록 지시한 것이다.(일명 맨하탄 프로젝트) IBM 같이 거대기업에서 1년 안에 제품을 내놓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신제품 출시 기획시 포트폴리오 선택에 있어서 관련 부서 간 서로 상충하는 의견을 조율 해야 하는 것이 그리 만만한게 아니기 때문이다. 


IBM은 싸구려 신제품 생산을 1년안에 가능하게 하기 위해 내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아웃소싱 구매를 선택했다. IBM은 그리하여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컨트롤하는 BIOS(Basic Input/Output System, 보통 ROM BIOS라 통용한다.)를 빼놓고는 IBM PC를 구성할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기술을 외부에서 찾게 되었다. 그래서 선택한 기술이 CPU로는 Intel 8088*과 OS로는 MS-DOS였다. (IBM의 Intel과 MS의 선택에 대한 내용이 각 1편씩 해당된다. 그래서 다음에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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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L 8088이라는 불리우는 것.


* 당시 대표적인 가정용 컴퓨터 Apple II는 8bit 컴퓨터(MOS Technology 6502)였는데 IBM은 Intel 8088(내부 연산은 16bit, 외부 버스(통로)는 8bit)을 도입한다. 스펙상 Intel 8088은 MOS 6502보다 경쟁력이 있었다. Intel사가 시장에서 먼저 내놓은 제품은 8088이 아닌 8086이었다. 8086은 내,외부 연산을 모두 16bit로 처리하여 8bit 하드웨어와 호환되지 않았고 IBM은 기존 8bit 하드웨어와 호환이 가능한 8088를 채택하였다.




오픈 아키텍처*, 즉 개방형 구조는 IBM이 가정용 컴퓨터의 전세계적인 확대 가능성을 바라보고 내린 결정이라기 보다는 IBM이라는 네임 벨류로 빠른 시일에 간편하게 시장에 진입하고자 내린 ‘꼼수'같은 결정이었다.




1970s-woz-jobs-w-board-300.jpg  * IBM의 오픈 아키텍처 결정에 영향을 준 기기가 Apple II 였다. Apple II는 메인보드에 8개의 슬롯이 있어서 서드파티 하드웨어를 자유롭게 장착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Apple II에 들어 있는 ROM, RAM, CPU 모두 애플이 손수 만든 제품이 없었다.(물론 만들 수도 없었다.)




또 다른 꼼수는 모델명에 있다. 1981년에 세상에 선보인 IBM Personal Computer의 모델명이 '5150'이다. IBM 스스로 떳떳하게 만든 역사적인 소형 컴퓨터 5100(상편에 나온)의 계를 잇는 제품으로 보여지길 바랬을 지도 모르지만 내부는 완전히 달랐다. '5100'은 온전히 IBM 기술로 만들었지만 '5150'은 그야말로 IBM 기술이라곤 BIOS 밖에 었었기 때문이다.

 

 

IBM은 자신이 곧 컴퓨터계의 제왕임을 알고 있었다. 서비스하면 IBM, 전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내놓은 제품 IBM PC는 $1,565의 가격으로 나온지 2년 만에 미국 가정용 컴퓨터 시장을 지배하게 된다.





6. Clone의 등장, IBM 호환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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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paq Portable은 IBM PC를 100% 호환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IBM은 PC 시장이 지금처럼 커질 것으로 생각을 못했다. IBM에게 있어서 컴퓨터는 절대 가전제품이 아니었다. PC의 판매로 비싼 사용료를 걷을 수 있는 Mainframe이 자신의 고객인 기업에 더 많이 팔리길 바랬을 지도 모른다.


IBM PC가 성공했지만 PC의 기술은 BIOS 만 빼고 IBM 것이 아니었다. OS의 저작권은 MS에게 있었고, CPU는 Intel 제품이었다. 여기에 컴팩(Compaq)이라는 회사가 무모한 도전을 하였다. 1983년 컴팩은 바로 역설계(Reverse Engineering)로 IBM이 유일하게 만든 BIOS를 100% 똑같이 구현한 것이다. 컴팩은 발매한 첫해에 1.1억 달러 영업이익을 얻게 된다. IBM은 바로 컴팩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지만 결과는 컴팩의 승리였다. 법원은 IBM의 BIOS 코드를 배낀 것이 아니라 판단했다.




* Clone은 IBM PC에만 있었던 건 아니다. APPLE II 또한 수많은 Clone이 존재했었다. 국내에도 APPLE II 호환 기종을 만드는 업체들이 청계천에 많이 있었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프랭클린이란 회사가 애플 II를 완벽히 베꼈다가 2년간의 소송으로 애플이 승소하게 된다. 컴팩이 다른 점이라면 법을 교묘히 피해 BIOS를 복제했다는 것이다. (물론 IBM PC 보다 저렴하게 판매했다 것도 차별점이다.)




IBM은 차기 제품의 대응도 지지부진 했다. Intel이 막 개발한 32bit CPU인 386 칩을 IBM PC에 적용하려고 했지만 자기잠식이 두려웠던 Mainframe 생산 부서에서 반대하게 된다. 컴팩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IBM에 비해 일찍 386 PC를 선보이게 된다. 그 결과 IBM은 점유율 뿐 아니라 기술에서도 최고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7. IBM의 Apple III : IBM PCjr., IBM P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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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M의 연타석 실패작 : IBM PCjr.(좌) / IBM PS/2(우)



IBM은 PC로 인해 1983년 최고의 해를 보냈다. IBM은 가정용 컴퓨터까지 접수하고 싶었다. 애플이 내세운 “Apple II는 가정, Apple III는 사무실” 하는 멍청한 이원화 전략을 IBM도 도입한다. 1984년 1월 IBM은 가정용 PC 제품으로 IBM PCjr.(피씨주니어 모델명 4860) 내놓는다. PC보다 가격을 낮추었지만 효과는 미비했다. IBM PC와의 차별화를 위해 하드웨어가 완전히 호환되지도 않았다. IBM은 PCjr.로 Apple II가 그나마 가지고 있었던 가정용 컴퓨터 시장을 완전히 지배하고 싶었다.


PC 그 자체가 가전제품이라는 것을 정확히 보고 있던 인물은 IBM 임원들이 아닌 MS의 빌게이츠였다. IBM은 PC가 하나의 플랫폼이 되었다는 것 아니 MS-DOS가 하나의 플랫폼이 되었다는 것을 완전히 간과했다. 전혀 감을 못잡은 IBM 임원들의 연작이 IBM PS/2 였다.


IBM은 컴팩 등 호환기종으로 점유율과 이익률이 계속 하락하자 새로운 PC를 준비한다. OS로 OS/2, 하드웨어 본체로 PS/2라는 제품을 1987년에 선보인다. 그리고 Apple이 Apple III에서 했던 실수를 똑같이 저지른다. 바로 이원화 전략으로 두가지 BIOS*를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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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보는 BIOS의 설정 화면.


* ABIOS(Advanced BIOS) 새로운 OS인 OS/2를 위한 BIOS(OS/2 1.0은 GUI가 아님)

 

* CBIOS(Compatible BIOS) 기존 PC와 호환되는 BIOS




그리고 기존 PC와 차별하기 위해 MCA라는 새로운 슬롯 인터페이스를 선보였다. 문제는 서드파티 하드웨어 업체가 MCA 슬롯을 이용하려면 IBM에게 라이센스 비용을 줘야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선뜻 서드파티 업체들은 MCA 지원 제품을 내놓지 않았다. 그 기회를 본 Intel은 저렴한 가격에 PCI 인터페이스를 선보여 하드웨어 표준이 IBM에서 Intel로 넘어가게 된다. 더이상 IBM이라는 브랜드는 데스크탑 컴퓨터 시장에서 상품가치가 인정받지 못했다.





8. 개인과 기업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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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M은 2004년 이후로 PC생산을 중단했다.



애플은 컴퓨터를 덕력 가득한 취미가의 장남감에서 가정에서 사용하는 가전제품으로 만들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기술 본위의 엔지니어 사고에서 벗어나 컴퓨터의 원형을 만들어 냈다. 컴퓨터가 전문가만 사용하는 제품이 아니라 가정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제품으로 탈바꿈 시킨 것이다.


IBM은 기업시장에서의 자신의 절대적인 지휘를 이용하여 빠르게 가전제품 시장으로 진입하였다. 가정용 컴퓨터 시장을 빠르게 진입하기 위하여 애플 등 기존 가정용 컴퓨터 주변기기 제품과 호환하는 컴퓨터를 만들었다. 자신만의 기술이 아닌 외부기술을 적극 차용함으로써 PC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모델인 개방형 모델을 만들었다.


애플의 시장진입은 가정에서 Apple II라는 단위 제품에서 시작했고 IBM의 경우 기업에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대형컴퓨터를 이용한 통합솔루션에서 시작했다. 90년대 애플은 기업시장에 진출하려다 미비하게 끝나 버렸고 IBM은 가정용 컴퓨터 시장진입이 성공적이었지만 결과는 기업 시장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두 회사는 현재 각자의 본거지로 돌아갔다고 볼 수 있다. 애플은 아이팟 이후 가정에서 개인으로 초점을 옮겼으며 IBM은 90년대 e-비즈니스 이후 하드웨어 보다는 기업 서비스에 더 집중하는 모습이다.


2014년 7월 서로 다른 지향점을 가진 두 기업이 파트너십을 맺었다. 애플에 있을때나 넥스트에 있을 때나 IBM을 적으로 생각했던 전임 CEO 잡스와 달리 현 CEO 팀 쿡은 기업시장에 관심이 많아 보인다. 그렇지만 애플의 강점이 가정과 개인이라는 사실을 염두해 두었기에 자신이 직접 뛰어드는 것을 피했다. 두 회사의 파트너십이 향후 IT 산업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 궁금해진다.




이 시리즈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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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너클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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