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09. 18.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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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대통령이 뿔났다. 그녀는 9월 16일 국무회의 석상에서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에 대한 모독적인 발언이 그 도를 넘고 있다"며 "이는 국민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고 국가의 위상 추락과 외교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모독.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는 단어는 아니다. 모독이라는 단어는 대부분 신성, 국가원수, 최고존엄 같이 위엄 돋는 목적어와 결합하는 고로 셀프 사용 시 굉장히 민망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보통은 '인격'이라는 어휘를 넣어 완충을 시키곤 한다.
대통령 또한 모독이라는 단어를 쓰기에 앞서 나, 본인 등 1인칭 대신 대통령이라는 3인칭 유체이탈화법목적어를 사용하였다. 그렇다. 그녀는 개인 박근혜가 아닌 국가원수로서 모독을 당했다고 여기고 있기에 화를 낸 것이다.
이 대목에서 국가원수모독죄가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아아, 불쌍한 우리의 설훈. 긴급조치 위반으로 옥살이를 하다가 이제야 1억 원의 배상금을 받게 된, 그러나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윤여준 의원을 통해 로비스트 최규선으로부터 20만 달러를 받았다'는 주장을 하다가 집행유예를 받고 한동안 낭인 생활을 했던 설훈, 8년 만에 가까스로 국회의원이 되어서는 '대통령이 연애를 했다'는 것도 아니고 '그건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는 비겁한(?) 발언을 했던 그는 이번엔 국가원수모독죄로 끌려가는 것인가?
설훈 의원
다행이다. 국가원수모독죄는 지. 금. 은. 없다. 그 이야기는 예전엔 있었다(또는 앞으로 생길지도 모른다)는 뜻? 이에 대해 우리 형사사법의 흑역사 한 페이지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국가모독죄의 제정과정
흔히 국가원수모독죄라 불렸던 형법 제104조의2 국가모독죄는 1975년 3월 18일 공화당과 유정회 의원들의 발의로 국회에 제출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내국인이 국외에서 대한민국 또는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모욕 또는 비방하거나 그에 관한 사실을 왜곡 또는 허위사실을 유포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대한민국의 안전·이익 또는 위신을 해하거나, 해할 우려가 있게한 때에는 7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에 처한다. ② 내국인이 외국인이나 외국단체등을 이용하여 국내에서 전항의 행위를 한 때에도 전항의 형과 같다. ③ 제2항의 경우에는 10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할 수 있다.
나중에 국회의장을 세 번이나 역임하는 공화당 정책위의장 박준규는 이 법의 입법취지에 대해 고질적인 사대풍조를 뿌리 뽑고, 주체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으나, 야당인 신민당은 '근본적으로 나라 망신의 원인을 제거할 생각은 않고 그 잘못이 해외에 드러나는 게 두려워 악법을 만드는 것 자체가 사대주의'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얼른 잘 와 닿지 않는 이 법의 내용에 대해 이해하려면 당시의 상황에 대해 부연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잇따른 긴급조치로 국내의 언론은 완전히 장악되었지만, 외신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외국 언론들이 김영삼, 김대중 등 야당 인사들을 취재함으로써 한국의 실상이 전 세계에 알려질 경우 정부로선 이만저만 쪽팔린 일이 아니었던 것.
개정안 제출 하루만인 1975년 3월 19일, 여당은 이 법안을 의원 휴게실에서 야당 몰래 날치기 통과시켰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 정권에선 단 한 번도 이 조항을 적용해 보지 못했다는 거!
다만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에 따르면 중앙정보부 보고서에 명동사건(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3·1절 기념미사를 빌미로 정부가 김대중, 문익환, 함석헌 등 재야 지도자들을 대거 구속한 사건. '3·1 민주구국선언사건'이라고도 부른다) 당시 국가모독죄 적용을 검토한 사례가 나온다고 한다. 검찰은 피고인들이 국가모독죄에 해당된다고 보았으나 '이를 공소하였을 시는 공판 과정에서 외국인을 참고인으로 출석시켜야 하므로 물의 야기가 예상'되어 이를 적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박준규가 이 법의 입법취지를 '사대언동을 처벌하려는 것보다 예방하려는 데' 있다고 했듯, 박정희 정권 스스로도 이 조항을 실제 적용하기에는 껄끄러웠던 모양.
국가모독죄의 첫 번째 적용
국가모독죄는 오히려 전두환 정권이 등장한 후 요긴하게 쓰인다. 첫 번째 희생자는 기독청년연합회(EYC) 총무 김철기. 그는 1982년 노사분규를 이유로 일방적인 공장철수를 선언한 다국적기업 콘트롤데이타에 대해, '정부가 콘트롤데이타 사태의 폭력에 대하여 수수방관, 동조, 지원하면서도 다국적기업에는 나약 비굴하며 민중의 지지가 아닌 외세에 의존하고 있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만들어 일본 교도통신 한국지국장 구로다 가쓰히로(나중에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산케이신문 객원논설위원을 맡고 있다. 심심찮게 망언을 내뱉는 것으로 유명) 등 내외신기자 10여 명에게 배포했다. 국가모독죄 신설 이후 처음으로 구속 기소된 김철기는 1심(이 사건은 서울형사지법 제3단독 노원욱 판사가 심리했는데, 그는 훗날 유서대필 조작 사건의 1심 재판장으로 강기훈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기도 했다)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항소했지만, 당시의 사회 분위기상 전망이 밝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항소심을 맡은 서울형사지법 항소3부(재판장 신진근 부장판사)는 놀랍게도 김철기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국가모독죄가 성립하려면 내국인이 외국인을 비방하는 행위와 이용당한 외국인이 국외에서 대한민국 및 그 헌법기관을 비방하는 등의 행위가 있어야' 하지만 '피고인이 유인물을 외국인에게 배포한 사실만 인정될 뿐 유인물을 배부 받은 외국인이 이에 이용돼 국외에서 대한민국 정부를 비방하여 국가의 안전이익이나 위신을 해하거나 해할 우려가 있는 행위를 했다고 볼 아무런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재판장이었던 신진근 부장판사는 훗날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주심 이신섭 판사를 비롯한 재판부는 정치적 색깔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심리를 했다. 유인물이 외신기자에게 전해지긴 했으나 그 내용이 외신에 보도된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문건전달 자체만으로는 국가모독이 아니지 않는가. 실정법을 존중하더라도 미수범 처벌규정이 없는 한 죄형법정주의에 따라 무죄라고 의견을 모았던 것이다. 그런데 판결이 나자 뒤숭숭하고 미묘한 파장이 생겼다."라고 말했다.
어떤 파장이었을까? 무죄판결이 있고 난 뒤 40여 일이 지난 뒤 안기부는 '이신섭 판사 무죄선고 국가모독사건 김철기'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하버드 대학에 가기로 되어 있던 이신섭 판사의 유학이 갑자기 취소된 것은 표면적으로는 서울형사지법의 법관 부족 때문이지만, 사실은 '국가모독 사건 무죄선고에 따른 간접적인 응징'의 결과였다. 이 보고서는 다른 사건에서 이신섭 판사가 기각한 영장이 다른 판사에 의해 발부된 것을 들어 '법관으로서 상식 이하의 행위를 자행한 자로 법관 자격이 없다고 판단'된다면서 '차기 인사 시 지방 좌천 예정자'라고 단언했다. 다행히 이신섭 판사는 다음번 정기인사에서 지방으로 좌천되지 않고 서울민사지법으로 발령받았다. 그는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와의 전화통화에서 자신은 다음 기회에 해외연수도 다녀왔기 때문에 이 판결로 별다른 불이익을 받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신진근 부장판사는 무죄판결 4개월만인 1983년 5월 27일 법복을 벗고 말았다.
이 사건은 대법원에서도 논란이 되며 전원합의체로 넘겨졌다. 결국 대법원 판사 13명 중 11명의 다수의견으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유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형사지법으로 되돌려 보냈다. 이 때 무죄 취지의 소수의견을 낸 대법원 판사는 훗날 대법원장이 되는 이일규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바로 그 이회창이었다. 이들은 소수의견에서 '외국인에게 유인물을 배포한 것만으로는 외국인의 행위를 이용해 국가모독 행위를 한 것으로 볼 수 없다'며 외국인의 행위를 통해 국익손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상 '국내에서의 국가모독 행위의 규제는 자칫 헌법이 보장한 표현·비판의 자유를 부당하게 제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법원 다수의견에 따라 김철기는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파기환송심의 재판장이었던 서울형사지법 항소1부 안우만 부장판사는 훗날 대법관을 역임한 뒤 법무부장관으로 영전(?)함으로써 삼권분립을 흔들고 사법부의 권위를 떨어뜨리는데 일조한다.
출처 - <MBC>
국가모독죄의 피해자들, 그리고 폐지
국가모독죄의 두 번째 피해자는 김영삼의 비서실장이었던 김덕룡이었다. 나중에 5선 의원과 한나라당 부총재, 원내대표를 역임하는 그는 김영삼의 단식투쟁 소식을 유인물로 만들어 외신 기자들에게 뿌렸다가 구속되었던 것. 그 뒤로도 잊을 만하면 국가모독죄로 처벌받는 인사들이 생겼으니...
오늘날 새누리당의 국민대통합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민추협 대변인 한광옥은 건국대 사건(1986년 10월 28일부터 31일까지 건국대 서울캠퍼스에서 열린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 결성식 및 발대식 과정에서 경찰과 충돌하여 총 1,525명이 연행되고, 이 가운데 1,289명이 구속 송치된 사건. 구속 송치된 학생 가운데 877명이 기소유예로 석방되었고, 398명이 구속 기소됨으로써 단일사건으로는 건국 이래 최대 규모라는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고. 이상 두산백과에서 인용)과 관련 학생들은 빨갱이가 아니라고 옹호하는 성명을 냈다가 국가모독죄로 구속되었고 결국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그 밖에 당시 정권의 보도지침을 폭로하며 외신기자회견을 했던 김태홍, 신홍범, 김주언, 외신기자회견에서 정부를 비판한 전학련 의장 오수진 등이 이 법의 희생양이 되었다.
한광옥 새누리당 국민대통합위원장
심지어 국회발언 내용을 30여 개 외국 공관과 외국 언론에 배포했던 국회의원 이철이나 군사정권하의 서울올림픽을 나치의 베를린올림픽에 비유했던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까지도 국가모독죄로 고발되거나 소환조사를 받게 할 정도로 무소불위의 칼이었던 국가모독죄. 검찰은 '기자회견 장소에 외신기자가 1명이라도 있을 경우 국가기관을 비방하는 발언을 하면 해당되며, 외신 보도 여부에 관계없이 죄가 성립한다'는 강경한 입장으로 엄벌의 채찍을 마구 휘둘러댔다.
6.29 선언 후 민주화의 물결이 전국을 강타했던 1987년 8월에도 뉴욕타임스와 '나치에 대한 저항은 합법적'이라는 취지의 인터뷰를 한 연세대 총학생회장 우상호(현재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에게 국가모독죄를 적용하여 징역 1년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을 정도.
출처 - <MBC>
그러나 불과 1년만인 1988년 세상은 바뀌고 말았다. 여소야대의 13대 국회는 흑역사 청산을 위해 대표적인 악법이었던 국가모독죄를 여야 만장일치로 폐지했던 것.
유신시대가 끝난 지 10년도 지나지 않았던 때라 당시 공화당, 유정회 소속이었던 의원 여러 명이 건재했으나 국가모독죄를 옹호하는 의원은 아무도 없었다.
두 번 모두 야당 의원으로 이 과정을 지켜봤던 이기택(7선의원, 민주당 총재, 한나라당 부총재 역임)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이기택 전 의원
"75년에 여당의원들은 국가모독죄를 통과시키기 위해 도둑질하듯이 법사위는 도서실에서, 본회의는 휴게실에서 열었다. 우리 야당 의원들은 본회의장에서 농성을 하다 당했던 것이다. 그렇게 사기극 같은 날치기 입법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88년 본회의장에도 몇 명 있었다. 그런데 그쪽은 기억도 감회도 없어 보였다. 세월의 변화를 더욱 실감했다. 그리고 그 법 때문에 징역살고 멍든 피해자는 있는데 그 법을 정권방어용 무기로 써먹은 가해자들은 어디로들 사라져 버렸는지..."
1953년 제정된 대한민국 형법은 1996년에 전면 개정되기까지 43년간 딱 두 번 개정되었는데, 그 중 한 번은 국가모독죄 신설이었고, 다른 한 번은 국가모독죄 폐지였다.
마무으리
위와 같이 약 14년간 우리의 언론자유를 제약했던 국가모독죄의 흥망성쇠를 살펴보았다. 한 마디로 나라꼴이 엉망이라는 게 외국에 알려지면 쪽팔린다는 거다. 이제야 비로소 조선일보를 놔두고 산케이를 족치는(산케이야 잘해야 집행유예 받을 테고 자기네 나라로 추방시켜버리면 끝인데 형사처벌한들 무슨 실익이 있겠는가. 결국 산케이에 대한 수사는 대통령의 사생활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 내국인 취재원을 찾아내기 위한 것일 게다. 유신시대였다면 그 취재원은 얄짤없이 국가모독죄로 처벌받았을 것), 아울러 대통령에 대한 모독적인 발언에 대해서도 다른 것보다 국가의 위상추락과 외교관계 악영향을 걱정하는 그 분의 깊은 뜻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39년 전 야당의 성명을 인용하자면 '근본적으로 나라 망신의 원인을 제거할 생각은 않고 그 잘못이 해외에 드러나는 게 두려워' 팔팔뛰는 그 자체가 나라 망신인 거다. 일본사람이 일본사람들 보라고 일본어로 쓴 글에 대해 한국 형사법을 적용해 처벌한다는 것도 어색한 일이고, 대통령이 연애했다는 건 거짓말인 것 같다는 사람을 징계한다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다.
그렇다.
정말로 국가에 모독을 가하는 말과 글이라면, 정부가 앞장서 형사처벌을 하지 않더라도 네티즌들이 알아서 응징할 것이다. 그러잖아도 할 일이 넘쳐나 주체를 못하는 검찰, 일개 외신기자 한 명 잡으려고 공권력을 동원하며 힘빼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울러 설훈 의원에 대해서도 좀 내버려두시라. 이미 허위사실유포로 집행유예 받아서 정치생명이 오락가락했던 양반이다. 내버려두면 적당히 디스카운트해서 들을 말, 공연히 실시간 검색어로 만들 필요 없지 않은가?
언론의 자유는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인 기본권이다. 이런 언론자유를 건드린 국가모독죄는 헌법을 모독한 악법이 틀림없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대통령의 멘트는 국가모독죄가 부활할 것만 같은 느낌을 주었는바, 이것이야말로 국민에 대한 모독이자 국가의 위상 추락이며 더 나아가 외교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 아닐까?
※ 이 글의 사실관계와 인터뷰 내용은 <한겨레> 2009년 10월 6일자에 실린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 - 회한과 오욕의 역사 21. 국가모독죄와 안기부, 5공의 매력적 통치수단 "국가모독죄"'와 <동아일보> 1992년 4월 11일자에 실린 '남산의 부장들 <87> - 박정희 "유신헌법 「통과」 시켜라 특명"을 우라까이하였음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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