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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많고 탈도 많고 불평불만도 적잖이 끼어 있는 걸 알지만, 나는 고려대와 연세대의 정기전 관람을 즐긴다. 애교심 따위는 별 관심 없다. 그냥 미친 듯이 머리 흔들고 팔다리 휘두르는 젊음들이 충만한 에너지를 뿌려주고,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열정적인 경기가 그저 재미있을 뿐이다.

 

그런데 고려대와 연세대 학생들이 마땅히 불러야 하는 노래가 있으되 전혀 부르지 않는 노래가 있다. <친선의 노래>다. 고려대 교수였던 조지훈 선생이 작사하고 연세대에 계시던 나운영 선생이 작곡한 이 노래는 이렇게 끝난다.


“우리 오늘 만난 것은 얼마나 기쁘냐. 이기고 지는 것은 다음다음 문제다!”


하지만 종종 과열된 분위기에서 선수들이나 관중들은 이 노래 가사를 가끔 폐기해 버린다. 만나서 기쁜 게 아니라 이겨야 기쁘다. 오늘 고려대 선수 하나가 이단옆차기에 가까운 태클을 구사했다가 양팀 선수들이 엉키기 직전까지 갔던 모습도 그런 정서의 단면이었다.


누구나 이기면 기쁘다. 그러나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는 것 또한 누구나 안다. 무슨 수를 쓰든 이기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승리하는 스포츠는 이미 스포츠가 아니며, 그렇게 승리한 이들이 영광을 독차지하는 스포츠라면 그 존립 가치를 상실한다. 하물며 그렇게 이긴 자들이 자신의 부당함을 변명하고, ‘어쨌든 우리는 이겼고 너희들은 졌다’고 윽박지른다면 그들은 불의하다는 변명을 모면하지 못할 것이다. 즉,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정의’가 사실 별 게 있겠는가. 응당 해야 할 일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도록 애쓰며, 옳은 일을 하는 이들이 상을 받고 그른 행동을 하는 이들은 그만큼의 대가를 치르는 이치가 정의의 요체다. 물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과 옳고 그름을 누가 정하느냐고 삐딱하게 나온다면 고려대와 연세대의 교훈을 합성하여 이렇게 얘기해 보자.


“정의란 인간을 자유케 하는 진리의 요체다.”


라고.


역사 속에서 정의는 쉽게 구현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래서 승자의 역사라는 비아냥거림이 힘을 얻고, 역사 속에서 정의가 승리한 적이 몇 번이나 있냐는 볼멘소리가 높으나 비록 그러할망정, 역사란 한 인간 또는 집단을 억압하는 강력한 힘으로부터 자유를 확대해 가는 끝없는 과정이라는 말이 더 진리에 가깝다.


비록 실패한데도 후대는 선대의 가치를 익히고, 참담한 과거라도 후손들은 그 어둠 속에서 횃불을 쳐든 조상들을 기리고 숭배하며, 그것이 자신들의 자유를 확대하는 정의의 기억임을 가슴 속에 품는다. 어느 나라든 자신들의 조상을 동상으로 만들어 세워두고, 끊임없이 그들의 의미를 되새기며, 정규 교과서로든 전설로든 할아버지의 옛날이야기로든 전해 내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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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고려대학교 교수라는 자가 강의 때 했다는 말이 매스컴을 탔다.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다. 어마어마한 돈을 벌고 있었고 몇 달만 일하면 고국으로 돌아갈 비행기 삯을 구할 수 있었지만 (돈을 벌기 위해) 남은 것.”


이런 망발은 차라리 웃어넘길 수 있다. 스스로의 무식함을 허리띠 풀고 덜렁덜렁 드러내는 바바리맨에게 도덕경을 읊는 것도 무망한 일이니 말이다. 그러나 학생의 폭로를 듣고 사실 확인 차 전화한 기자에게 했다는 말을 나는 도저히 그냥 들어 넘길 수가 없다.


“(일제에 저항한) 독립운동가 1명 때문에 99명의 ‘보통’ 사람들이 모두 죄인 취급을 받는 것은 불합리하다.”


독립운동가를 일종의 별종으로 취급해 버리는 저 폭력적인 비율도 어불성설인데다가 당시 조선에 살던 2천만을 ‘보통’이자 ‘친일파’로 구분해 버리는 큰일 날 대담함은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으나 이 학자의 치명적인 무식함은 역사에서 ‘정의’를 깡그리 삭감해 버리는 데에 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결과일 뿐이다. 식민지 시대에 인구도 늘었고, 근대화도 진행됐고, 1%의 독립운동가를 제외한 99%의 보통 사람들은 일본 밑에서 잘 살았는데, 독립운동한 게 뭐가 대수라고 99%(?)가 죄책감을 느껴야 하느냐고 악을 쓰고 있는 것이다. 아마 이 무역학자는 “노예무역이 무슨 죄냐? 그 덕분에 수천만 명의 흑인들이 아프리카에서 벗어나 미국에서 자유를 누리고 살고 있지 않느냐?”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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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학자의 말을 들으며 머리에 떠오른 것은 우리 시대의 ‘정의’의 비극이 여기에 이르렀는가 하는 한탄이었다. 역사 속에서 배워야 할 정의를 외치기는커녕, 무엇이 정의롭고 불의인지 헛갈리는 단계마저 넘어섰다. 결국 ‘이기면 장땡’이라는 식의 폭력적인 주장이 스스로의 정의를 구성해 가고 있지 않은가. 저 무역학자의 이야기대로라면 치열했던 독립운동은 시대착오였고, 과거지향적이었으며, 그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고, 나아가 존중할 필요도 없는 존재가 된다. 대체 그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싶은 것인가. 대학에서 무슨 학문을 가르치며 역사를 운운하고 있단 말인가.


부끄러운 분단과 참혹한 전쟁의 그림자 속에서 수십 년을 보내면서도 우리 역사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넓히고 돋우는 과정 하에서 진행돼 왔고 최소한 정의가 구현되지는 못하더라도 대놓고 무시하지는 못하는 나라라고 여겨 왔는데, 저 학자의 말은 가슴 속 많은 것들을 무너뜨린다.


저 사람도 어쩌면 오늘 나와 같은 자리에서 자유·정의·진리를 외치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우리의 현실이 여기에 이르렀던가. 이제는 저런 독버섯들이 대놓고 곧추서서 건들건들 사람들을 깔아보기에 이르렀던가. 이제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이 무식한 무역학자의 답은 이러하였다.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기 위해 역사교과서 개혁, 국정화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점잖게 말하느라 애쓴 나 자신을 치하하며 마지막에는 끝내 인내를 잃고 만다. 북한산 들개들이 달려들다가도 냄새 난다고 피할 똥덩어리 같은 자식 같으니라고.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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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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