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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만연한 제4외인연대 3중대 Raissac 농장은 고즈넉했다. 농장 전체엔 잘 정리된 잔디가 마치 누군가가 끊임없이 정리를 하고 있는 듯했다. 프랑스 국기인 삼색기가 걸려 있는 연병장이 병영 바로 앞에 있었고, 넓고 푸른 대지에 가축이라곤 찾아 볼 수 없었다. 아름드리나무가 농장 입구를 장식했고 주변은 얕지만 숲으로 가득 찼다. 한국의 산이 깊고 오밀조밀해서 낭랑 18세처럼 명랑하다면, 프랑스는 둥글둥글 스케일이 큰 글래머 같았다. 수줍은 소녀의 치맛자락처럼 단정한 한국의 산에서 볼 수 없는 굵은 곡선의 산! 얕아 보였지만 구보를 하기엔 길고 지겨우며 지랄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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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부대 사령관의 케피블랑 수여식 검열식. 3중대 Raissac

 

언덕 같은 얕은 산을 감싸고 있는 숲과 농장이 조화로웠고 한국의 여느 산하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깨닫게 했다. 한국의 산하는 고단한 인생을 그대로 담고 있다. 버려진 농기구나 정리되지 않는 농촌의 힘든 노동을 하는 농부들의 모습이 내가 지금껏 나고 자랐던 한국 시골의 모습이었다. 프랑스의 시골은 시간이 지날수록 여유가 넘치고 풍요로워 한국적인 내 인식과 비교되었다. 사람들이 안정을 찾아 뿌리내려 터전을 잡기 위해 단단한 요새처럼 집을 지은 것이 프랑스의 시골이라면, 한국의 집은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된 것처럼 비바람을 피할 셸터 같다고 할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생각은 다양한 각도로 발전, 확고해졌다.

 

행군을 다니면서 만나는 프랑스 시골의 마을은 정말 평화롭고 풍요로웠다. 고단한 농촌의 일상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을은 잘 정리되어 있었고 어느 집이든 발코니에 꽃을 내놓았다. 요란한 간판 하나 없는 마을에도 길거리를 지나면서 그 집이 카페인지 레스토랑인지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길거리마다 화단을 꾸며 놓았다거나 조그만 화분으로 제철 꽃을 심어 놓은 것은 여유를 갖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므로 그 자체로 내겐 충격이었다. 3중대 농장도 그랬다. 군인들이 와 있어서 군 병영이라는 인식 외엔 휴양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소대 병영은 야전 침대가 놓여 있었다. 비상근무를 서거나 5분 대기조가 아니라면 2층 침대를 사용하지 않았다. 농장엔 식당과 무기고, 공부방이 따로 있었다. 대부분의 이론은 공부방에서 이뤄지고 이론을 공부했으면 밖으로 나가 실습을 했다. 여기가 어디이며, 내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잊어도 좋을 만큼 안전하지만, 낯선 세계에서 낯선 친구들과 땀을 흘리며 전우라는 이름으로 같이 있었다. 우리에게 오지 않았던 첫 번째 절박함은 굶주림이었다.

 

춥고, 배고프고, 피곤했다.

 

음식 정량은 적은데 활동도 많고 무엇보다 일찍 일어났다. 구보는 특히 빡셌다. 얼마나 잘 달리는지 입에서 단내가 났다. 내가 비록 소대에서 소대장 다음으로 나이가 많아도 체력은 자신 있었다. 배가 고팠다. 오장육부를 말라비틀어지게 만들 작정인지 포크를 들었을 뿐인데 누가 벌써 음식을 다 먹어버린 것처럼 양은 적어 보였고, 그것마저도 접시가 닳도록 남아있는 양념을 말끔하게 빵에 발랐다. 바위도 씹어먹을 나이이지 않은가!

 

그랬던 나는, 굶주리고 허기진 창자를 채워야 했다. 장애물 통과, 행군, 몸쓰는 일에는 발군이었지만 머리 쓰는 일에는 둔했다. 굶주림이 그렇게 힘든 것을 예전에 미처 몰랐다. 복싱을 했기 때문에 체중 조절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런데 이건 뭔가?! 내 배둘레햄 지방을 싹 태울 모양인지… 먹을 것을 위해 눈에 살기를 띄기 시작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동기 녀석들도 다 같은 생각이었는지 눈빛이 살기등등했다. 특별히 하비라는 친구가 우리의 배고픔을 즐겼다. 이 녀석은 라마단 때 한 달씩 굶는 게 습관이 되었는지, 우리가 굶주린 분노로 이글거릴 때마다 이죽거렸다. 생긴 것도 어찌나 재수없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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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중대 Raissac 농장 병영 앞에서 외인부대 명예 헌장 스케치

 

나는 기가 막힌 남조선 남아의 본능을 발휘했다! 식당 지원 나갈 때, 양파와 마늘을 챙겼다. 주방도 정량 배식이 끝나고 나면 어찌나 깔끔하게 치우는지 프랑스 국방부를 증오할 지경이었다! 훈련병의 땀 묻은 군복이 볼록했다. 휴식 시간이 주어지면 냄새가 날까봐 저 멀리 비켜 혼자 마늘을 까서 조금씩 먹었고 양파는 아구아구 씹어 먹었다. 자극적인 음식을 요구하는 심장이 환호작약했다. 러시아, 폴란드 애들이 자기들도 달라고 했다. 합심해서 마늘 냄새를 풍기며 훈련에 임했다. 어차피 걔들은 양파 냄새 풍기는 놈들이었으니! 담배는 마음대로 필 수 없어 시시때때로 금단 현상에 애를 먹었다. 끊게 만들려는 의도인 듯 했다.

 

청명하고 아름다운 날씨의 연속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날엔 종족본능의 임무에 충실해야 했다! 건강하게 자라고 있을 미래의 남조선 잉여인력을 위해서라도 이렇게 아름다운 날, 찬란한 햇살을 받으며 훈련은 할 짓이 아니었다. 아침 이슬을 먹은 농장은, 어디선가 요정이라도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배가 고팠고, 단지 그 이유로 서로를 증오하며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가장 기다리는 시간인 식사 시간이 되면 아주 사람을 돌아버리게 만들었다. 스테이크 위의 양념 소스 냄새가 허기진 창자와 오감을 자극하는 사이, 당직을 맡은 병장 녀석은 여유 있는 몸짓으로 우리에게 군가를 부르게 했다. 외인부대 명예 헌장을 군가 뒤에 외우게 했다. 분노와 증오, 광기를 잔뜩 품은 우리는 목소리만으로도 적을 사살하듯 독한 명예 헌장 7가지를 내뱉었다!

 

그렇게 일상은, 아침 5시 30에 기상, 세면을 하고 아침식사, 청소,

 

08h00 ; 소대 집합, 푸팅(구보)

10h00 ; 전술 및 기술 훈련

12h00 ; 점심

14h00 ; 프랑스어, 전술 및 기술 훈련, 장애물 통과 및 제식, 군가,

18h00 ; 저녁, 또 청소

19h00부터 야간 훈련에 이어 잠들기 전까지도 학습의 시간을 가졌다.

 

첫 4주 동안, 병아리 외인부대원들은 병영생활, 제식훈련, 외인부대 군가(프랑스 군대와 다름), 기초 프랑스어, 전투훈련, 행군과 야영이었다. 제일 어려운 건 소총 청소. 소총 FAMAS를 분해하고 모든 부품을 외우고 분해과정과 조립 과정을 외워 설명할 수 있게 훈련했다. 총은 닦고 또 닦아도 병장들은 덜 닦인 부분을 찾아냈다. 하루 종일 총기 청소를 했다. 무료하고 따분하고 짜증이 났다. 사격은 공포탄을 사용했다. 사격전 PT 체조를 하거나 체력을 바닥내거나 하지도 않았다. 물론, 공포탄 탄피를 줍거나 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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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레를 쓴 비놈(불어권)과 짝이 된 친구들의 불어 공부. 완전 초보 수준.

 

시간이 지나자 모든 게 익숙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착한 비놈이 수고를 했지만 내 머리가 따라주지 못했다. 체력으로 하는 일이야 누구나 따라 하는 거지만 설명이 필요한 훈련은 따라갈 수 없었다. 수류탄도 모형이 아니라 실제로 터져 밀가루가 사정거리까지 날아가는 연습용이었다. 모든 문제는 의사소통에 있었다. 알아먹어야 담당 중사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듣던지 할 텐데 각 파트별로 돌아가는 팀장들의 연습엔 아무것도 알아먹지 못하고 있었다. 군대 나온 친구들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대충 보고 알 텐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먹통이었다.

 

언어장벽! 말이 안 통하는 상태에서 훈련이 가능한가?

 

가능하다. 고문관이 되면 된다. 한국 군대 생활이나 다를 바 없어서 유격훈련 받아 본 사람들은 말이 통하지 않아도 이해하고 있다는 인식은 심어주었다. 의사소통 문제가 심했기 때문에 ‘이해하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과정이 중요했다. 그 과정이 서로를 돌아버리게 만들었음에도 서로는 이해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팀장(하사관, 하사나 중사)의 노력이 대견했다. 그 와중에 나는 고문관이 되어갔다.

 

“저기 보이는 트럭에 무슨 일이 있었나?”

 

내전에 휩싸인 유고연방에서 온 티토 중사가 내게 물었다.

 

우리는 숲에 숨어서 중사가 손을 뻗어 지시하는 200미터 정도의 거리에 서 있는 트럭의 변화를 감시하고 있었다. 각자에게 감시할 영역을 정해주고 한참의 시간이 지나 물었다. 운전자가 내려서 차량 정비를 하며 움직였지만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독립운동가의 심정으로,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는 굳은 신념으로 입을 다물었다. 질문은 알아듣겠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못했다. 티토 중사의 인내가, 머리 꼭대기로 올라가는 분노 게이지가 느껴지는 듯했다.

 

“말을 해! 말을 하란 말야. 이 멍청아!”

 

중사의 분노가 폭발했음에도 대답을 못해 우물쭈물 난감했다. 씨부럴! 나도 돌아버리겠거던! 식은땀이 흐르는 적막한 공포의 시간이 흘러갔다. 나는 문득, ‘부동산'이란 단어를 생각해냈고 세상 쪽팔릴 각오를 하고 쥐 죽은 목소리로 ‘부동산'이라고 대답했다.

 

“브왈라! 바로 그거야! 말을 하란 말이야! 메르드!!!”

 

중사의 고함소리에 내가 다 놀랬다. 공포의 적막함 속에서 언어 하나에 세상 말 못하는 바보가 되어가는구나... 암흑 속 한 마디는 ‘이모빌리예 (Immobilier;부동산, 부동의)’였다.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다음 대원에게 자리를 옮기는 중사가 미친놈 같았다. 

 

‘부동산이라니! 운전수가 움직이고 수리를 했는데…’

 

마치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졸음에서 깨어났다.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통째로 문장을 외워 샹송이나 문학 내용 중에 필요한 말을 한번씩 내뱉었다. 이모빌리예도 샹송에 나오는 단어로 ‘꼼짝 않고 서서’에서 따 온 한 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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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기 검사 중인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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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행군

 

한번은 휴식 중에 동료들이 저물어 가는 오후의 햇빛을 가리고 대화를 하고 있었다. 내가 '내 햇빛 가리지 마!"라고 말하자 동료가 자리를 비켰다. 티토 중사가 어이없다는 듯이 내게 물었다.

 

"누가 한 말이야?"

 

"디오게네스!"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던 중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닫았다. 말이 통하지 않아 명령자는 시켰고 훈련병은 따랐다. 완벽한 상명하복이 손짓과 한 마디의 말로써 이루어졌다.

 

서서히 대원들의 윤곽이 잡혀갔다. 될 놈과 안 될 놈, 할 놈과 안 할 놈, 착한 놈과 골때릴 놈! 그 중에 나는 돋보이지 않았다. 24살에 4개국어를 하는 놈이 여럿 있었고 장애물 통과를 3분 05초에 해내는 놈이 있었다. 푸팅에서 1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놈이 있는 반면, 항상 무언가에 불만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내가 있었다. 나중에 케피블랑 착용 세레머니 때 찍은 사진을 보고 너무 놀랐다. 어떻게 저 표정으로 훈련을 할 수 있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 정도로 내 표정엔 짜증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타고난 체력과 스피드를 이길 순 없어도 난 세 손가락에 드는 스페셜이 되었다. 그 와중에 내가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세 가지 있었다. 첫 번째가 나는 필요한 불어 문장을 통째로 외워 사용했다. 남들이 듣기에 완벽해 보였다. 그런데 알아듣지 못해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체한다고 오해를 샀다. 두 번째가 행군, 오랜 행군 뒤에도 사뿐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팀장이 놀라워했다. 마지막으로 장애물 통과 3분 30초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소대장에게 “욘, 넌 특별해!”라는 얘기를 들었다. 자신이 흘러 넘쳐났지만 생각이 없었다. 호기심이 생기거나 애착을 갖고 잘해야 되겠다는 생각 없이도 잘 되는 건 되고 아닌 건 아니어서,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훈련과정이 나를 외인부대원으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4주째, 우리 소대는 마지막 케피 수여를 위해 30kg 군장을 메고 50km 행군을 실시했다. 이 행군을 통해 많은 동료들이 병원에 입원을 했지만 탈락시키지는 않았다. 이미 훈련소로 온 친구들은 자발적 포기가 아니면 탈락시키지 않았다. 우리 분기 때, 자발적 탈락을 신청하자 영창을 살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무단으로 이탈했다가 들켰는지 돌아왔는지도 정확하지 않았지만 그 친구만 잘려나갔다. 우리 소대에서도 포르투갈 친구 하나가 행군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된 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엔 운동화를 신고 훈련하는 우리를 지켜보다가 사라졌다. 행군은 내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 소대가 50km 행군을 할 땐, 소대장을 포함해서 단 한 명의 열외자 없이 행군에 참여했다. 케피블랑 수여식에 필요한 50km 행군을 수료하지 않으면 케피를 주지 않았으므로 모두 참여했고 소대장이 앞장섰다. 중대 단위라면 중대장이 앞장섰고 연대 단위라면 연대장이 앞장섰다. 행군 때나, 구보 때는 언제나 장교들이 앞장섰다. 한 번 내린 명령은 취소 없이 꼭 이루어졌다.

 

내게 어려운 건 프랑스어와 졸음이었다. 졸음 때문에 하품을 했다가 혼자 농장 건물 20바퀴를 도는 징계를 담당 중사로부터 받았다. 광수와 동료들이 도와주려 하자 못하게 막았다. 자율 학습 시간에 졸다가 식당 청소 징계를 받기도 했다. 프랑스어는 이해하지 못하는 차원을 넘어 고문관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다른 영역에서 특출났기 때문에 괴롭히거나 차별을 당하진 않았다. 비놈이란 제도 때문에 혼자 뒤쳐지지 않게 옆에서 이해할 때까지 거들었다.

 

하루는 겁도 없이 야간 근무를 서다가 폴란드 동료 두비솁스키에게 담배를 사러 다녀오겠다고 총을 메고 야영지를 벗어났다. 왕복 8km를 달려 말보로 4갑을 사와 동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분명 병장과 하사관들은 나의 이탈을 알고 있었겠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도 모르게 우리는 어느새 50km 무장행군도 마치고 케피 수여식을 진행했다. 가끔 거나한 행사가 진행되기도 했지만 우리 소대는 중대장과 중대 부사관들의 참여하에 쓸쓸하게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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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피블랑 수여식, 외인부대 퇴역군인들과 민간인들도 참여하는 행사를 거행하기도 하는 유명한 행사로 자주 프랑스 TV에 중요하게 소개된다. 

가끔 이렇게 천사 같은 아이들도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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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아이들을 보면 천사를 보는 듯하다. 일반인들이나 외인부대 전역한 노병들을 만나도 몸에 밴 친절을 경험하게 된다.

 

레싹의 1소대 연병장은 케피블랑 수여식을 위해 중대장과 부사관들이 참석했다. 한번씩 성대하게 거행되는 대외용 세레머니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4연대 내에서 이뤄질 것이다. 바로 우리 뒤 소대에 한국인들도 여럿 있었다.

 

중대 부사관들과 중대장이 이른 아침부터 케피블랑 수여식 준비를 했다. 병장들의 검열이 있고 중대장이 자리를 잡자 소대장이 보고에 들어갔다.

 

"3중대 1소대 차렷! 제4외인연대 3중대, 4명의 부사관, 하사 1명, 병장 교육생 5명, 지원병 57명, 상사 알브레슛의 1소대, 명령만 내리십시오. 중대장님!"

 

"제4연대, 3중대, 상사 알브레슛의 소대, 케피블랑 착용!"

 

"레지오! 파트리아! 노스트라! LEGIO PATRIA NOSTRA(외인부대는 우리 조국이다)"

 

소대를 대표하는 당타스가 연대장 앞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 - 외인부대원! 

너는 명예와 충성으로 프랑스에 헌신하는 지원병이다.

 

- 각각의 외인부대원은,

모든 종교와 혈육, 국적을 떠나 전우이다. 너는 언제나 가족과 같은 깊은 연대의식을 표한다.

 

- 전통을 존중하고,

명령에 복종하며 전우애와 군율, 용기와 충성은 너의 힘이다.

 

- 외인부대원임에 자부심을 갖고,

의복은 언제나 우아하게, 행동은 언제나 당당하게 하되 겸손하게, 병영은 언제나 정돈한다.

 

-  정예 병사로써,

엄격하게 훈련하고 너의 무기를 가장 소중하게 다루는 것처럼, 너의 신체도 엄격하게 관리한다.

 

- 미션은 신성하며,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끝까지 완료한다.

 

- 전투에서,

증오 없이 냉정하게 대하며 투항한 적을 존중하고 어떤 경우에도 너의 목숨과 부상, 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당타스가 앞부분을 선창하고 나머지 대원들이 뒷부분을 합창했다. 그렇게 우리는 케피블랑을 착용했다. 

 

이제 우리는 4연대로 돌아가 5주차 훈련인 소총 분해 조립과 근무, 대민 지원 및 사격 등등 본격적인 업무에 들어가서 나머지 3개월 동안, 자대 배치 전까지의 병사 평가와 지원연대, 앞으로 받고 싶은 특기 등에 대해 집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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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중대 1소대 우리 팀. 가운데가 티토 중사, 맨 오른쪽 뒷줄이 하비 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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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애묘, 40대를 위한 딴지미팅 목적으로 가입! 2018년 초 2개월간 탈퇴 후 재가입. 딴지 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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