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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조철현

주연: 송강호, 박해일, 전미선, 탕준상, 김준한, 차래형, 윤정일, 금새록, 최덕문, 남문철, 정해균, 박동혁, 정인겸, 오현경

음악: 달파란

촬영: 김태경

전체 관람가 / Color / 110분

 

조철현 감독의 장편 데뷔작 <나랏말싸미> 는 개봉 전부터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전미선 배우의 타계를 비롯해 책 <훈민정음의 길: 혜각존자 신미평전> 내용을 이용해 무단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투자 유치 받았다며 <나랏말싸미> 를 제작한 영화사 두둥이 고소당한 일도 있었다.

 

문화에 대한 한국 기업들의 횡포에 덧붙여 신미 스님이 산스크리트어를 토대로 한글을 창제했다는, 특정 종교에서나 쓰일 소재이자 폐기된 가설을 주된 이야기로 삼았다는 점 등 영화를 둘러싼 논란은 총체적 난국이다. 신미의 한글 창제설이 힘을 발휘하게끔 해준 불교 고서 <원각선종석보> 는 몇 년 전에 위서로 판명됐으며, 산스크리트어가 한글 기본이라는 가설 역시 훈민정음 창제 원리가 실린 <훈민정음해례본>이 있으므로 무용하다는 점 등으로 영화의 논리를 아주 간단히 뒤집힐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소재로 영화화가 이뤄지면 안 되는가? 물론 위험하더라도 만들어지지 말란 법은 없다. 수출은 오버지만. 이 리뷰는 기왕 개봉한 거, '만들 수도 있는 이야기' 임을 가정하고 끄적였다.

 

 

세종, 땅으로 내려오다

 

조철현 감독은 2019년 초 영화주간지 <씨네 21>과 가진 인터뷰에서 <나랏말싸미> 를 언급했다. 역사적으로 정평이 난 인물을 신선하게 조명하고자 '우선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위인을 바닥으로 끌어 내리는 작업' 부터 시작했다고 했다. 쉽지 않은 목표 앞에서 지쳤고, 자기 환멸과 일상에 찌든 세종(송강호)을 보여주면서 그가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신미 스님 (박해일) 에 관해서는 <조선왕조실록>에서 한 번도 좋은 평가를 못 받았으며, 이는 조선의 억불정책이 거셌던 영향일 거라 했다. 여기서 끌어낼 수 있는 <나랏말싸미>의 의도는 두 가지다. 세종이란 인물로부터 어두운 정서 끌어내기, 신미 대사가 부당하게 평가받은 것이 아니었을지를 상상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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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초중반부는 불교계로부터 받은 협조를 가늠케 하는 장면들의 연속이다. 신미의 첫 등장을 위해 잠시 보여질 뿐이지만, 그럼에도 2008년 서울 숭례문 방화사건 이후 문화재 보호를 위해 출입이 완전 차단된 해인사 장경판전에서 팔만대장경을 찍어낸 장면은 감탄이 나온다.

 

영화는 최근 제작되는 충무로 사극치고 외적으로 상당히 무해하다. 권력이나 땅따먹기에 집착하는 사내들을 보여주지 않는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 장면도 없으며, 사극 단골 레퍼토리인 궁중 여인들이나 당파 간 암투도 볼 수 없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한글 창제를 위해 합심해서 문자와 언어를 탐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정성을 들인다. 그래서 엔터테인먼트보다는 진중한 인상을 주는 작가주의적인 작품을 본다는 생각도 든다. 

 

신미 한글 창제설이 바탕이지만 작품에서 세종은 초중반까지 존재감과 품위를 유지한다. 지친 인상으로 현실감을 부여하면서, 우리말 창제를 반대하는 신하들과 대립각을 세우는 모습에서는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드러낸다. 학식 있는 군주임을 증명하는 순간도 있다. 신미가 세종을 처음 만나 거침없이 그를 질책하지만 막상 한글 창제 작업에 들어가자 세종은 '중들이 모르는 수학과 기하학'을 언급해서 종교인들이 간과하는 지점들을 짚는다. 생각없이 일해오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신미는 이미 노승 (오현경)에 의해 '꼴통'으로 설명되기도 했고, 조선 왕조에 의해 집안이 몰살당한 과거를 가졌다는 설정이 있다. 당대에 박해받던 불교인인 만큼 냉소적이고 날이 서 있어 조선 권력의 정점과 충돌하는 인물로서 잘 어울린다. 그래서 예고편 공개 당시부터 지적됐던 신미와 세종의 대화 장면이 그리 어이없어 보이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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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한 신미의 대사는 받아주는 상대방인 세종이 왕으로서 그 위엄과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 왕조 시대인데 한낱 중이 그런 소리를 하거든 목 날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세종은 그런 소리를 듣고도 문자와 언어를 이해하는 신미의 능력을 높이 사며 그에게 한글 창제를 도우라고 명령한다. 듣는 상대방이 여유롭게 넘겨야 해당 캐릭터의 성격과 대사가 영화적 재미를 유발하는 장치로 빛을 발할 수 있다. 신미라는 인물을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해 왕으로서의 세종을 허투루 다루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왕조시대인 만큼 그가 조선에서 최고 권력자임이 인지되어야 신미가 대단한 인물이라는 사실이 납득되기 때문이다. 초반부는 이런 흐름이 그럭저럭 유지된다. 장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장점으로 단점을 가리지 못하는 상황이 닥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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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땅 속으로 사라지다

 

<나랏말싸미>가 신미 스님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주장으로 이야기를 만든다는 점에서 세종의 업적을 일부 가져가겠다는 예상은 했다. 하지만 작품은 상상 이상이다. 세종을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만들겠다는 감독의 말은 단순한 왜곡을 넘어 아예 인물을 깎아내리는 형태다. 이야기가 중반쯤 이르자 신미와 함께 하는 줄 알았던 세종의 고유함이 사라진다. 실질적인 한글 창제 작업과 성과를 전부 신미 스님 패거리가 맡다시피 하고, 세종이 점점 배제되기 때문이다. 작품은 초반부에서 세종이 신미와 만나기 전부터 꾸준히 한글 창제를 위해 연구를 거듭했음을 보여줬다. 그런데도 세종은 어느 순간 그저 중들이 해내는 작업을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이 된다. 진행 중이던 연구가 난항에 빠졌을 때 이에 대한 해결 역시 스님들 몫이다. 수학과 기하학을 운운하는 세종의 견해는 일리 있는 게 아니라 '감히 신미 스님 말씀하시는데 토를 다는' 상황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누구든 작은 중을 건드리면 X 되는 거에요 식으로 활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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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 패거리들에게 부여되는 비중이 커지면서 왕실 쪽에서 존재감이 커지는 인물은 오히려 불교 신자 소헌왕후 (전미선) 다. 실제로 소헌왕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좋았고 요즘 트렌드답게 그녀도 위엄을 지녔음을 보여주려는 대목들이 있다. <나랏말싸미>는 한 번씩 소헌왕후가 내명부 궁녀들에게 '여자도 할 수 있다' 는 식으로 연설하는 단독 숏을 부여해준다. 세종에게는 이렇게 위엄을 살려주는 숏이 없어서 소헌왕후가 오히려 실세처럼 보일 정도다. 문제는 소헌왕후가 중반을 지나면서 사망한다는 점이다.

 

남은 분량에서 세종이 학자가 아니라 왕으로서 해야 할 일들이 있다. 한글 반포를 반대하는 신하들과 담판을 짓는 부분에서는 정치 드라마를 보여줘야 한다. 이것을 납득시키기 위해 영화는 세종의 입지를 복구해줘야 하지만, 그 일을 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어떤 시점에서 어느 인물에게 위엄을 실어줘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다. 후반부에 이르면 세종은 학자로서의 업적은 신미 패거리들에게 달리고 왕으로서 가져야 할 위엄은 소헌왕후에게 달린다. 실제 세종이 부정부패를 저지른 관리들을 벌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쪽쪽 빨아먹어 국정운영에 이바지시키는 (이렇게 빨아먹힌 대표 인물로는 78세까지 퇴직도 못 하다가 죽음을 맞이한 조말생이 있다.) 정치력을 보여준 것과 정 반대다. 영화 <나랏말싸미>에서 세종은 신하들 앞에서도 무기력하거나 타협하는 나약한 바지사장이다.

 

초반 1시간은 종교물과 역사극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며 어떻게든 가던 작품이 후반 1시간은 종교물로 달린다. 불교가 지닌 우월함을 보여주려고 한 인물을 나락으로 떨어뜨려 버린다. 감독이 말한 '바닥으로 끌어 내린다' 가 이런 의미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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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신미와 세종 간에 또 다른 대화 장면이 처음 것과는 다르게 상당히 불쾌하게 다가왔던 이유는 이것이다. 해당 장면이 나올 때 이미 세종의 존재감과 권력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약화되어 있다. 군주로서 세종이 지닌 최소한의 권력과 신념, 정치력과 학식까지 무시하고 부정하는 태도는 결국 <나랏말싸미>를 최악의 작품으로 만든다. 재평가하고자 했던 신미 스님도 정당하지 못하게 입지를 차지했다는 찝찝함을 남기는 것은 물론이다.

 

신미의 대단함을 알리려는 목적이었다면 공동 주인공인 세종의 위엄까지 뺏지는 말아야 했다. 작품의 재해석은 불교계의 불쾌한 욕망만 남긴다. 조선시대 때 받은 박해를 두고두고 기억하고 있다가 21세기 들어 이 영화로 복수하기로 한 걸까 싶을 정도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랏말싸미>는 성공한 작품이다. 국내개봉에 그치지 않고 해외개봉까지 준비 중이고, 훈민정음 서문의 글자 수를 108 번뇌와 은근슬쩍 연관시켰으며, 적어도 본편 안에서는 불자들이 우리말 창제를 한 것으로 결론 내 불교계가 숙원사업을 이뤘다고 볼 수 있어서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이후 최대의 역작

 

영화계 쪽 시선으로 보자면 <나랏말싸미>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100억 이후로, 간만에 충무로가 130억을 허공에다 보시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150억의 엄복동을 잊으면 안 되지만 그 작품에 종교적 요소가 있다고 보긴 어려우니까 '보시' 의 예시로는 들지 않기로 한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최소한 짜장면으로 맞아보겠냐는 대사와 전설의 고등어, 컬트로서의 존재감은 남았다. <나랏말싸미>는 뭐가 남았을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온라인에는 왕 노릇 똑바로 하라는 박해일의 일갈 장면과 김대승 감독의 <혈의 누>에서 보여준 거열 장면을 이어붙인 캡쳐 사진만 남게 될 것이다. (이외에 박해일이 일갈하자 아래에 태종의 사진을 붙이고 "재밌네. 더 해봐." 라고 쓰여진 짤방이 있다.) 

 

아. 때깔만큼은 괜찮았다. 극장에서 보는 동안 작품의 때깔에 취했다. 그리고 보고난 후 일어서며 정부 차원에서 종교인 과세를 다시 강화하든지, 대대적으로 세무조사를 하든지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야 종교계나 영화계나 서로 욕심을 안 부리지. 돈이 남아돌면 자꾸 이런 게 나온다.

 

p.s.

1) 송강호가 연기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작품 속 세종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다. 신하들이 불교 신자인 소헌왕후를 비난하며 그녀를 폐비시키라고 요청하는 장면이 있다. 이 요구에 답변하는 세종의 모습은 과거 장인의 좌익 경력이 문제가 되자 이런 아내를 내가 버려야 하느냐고 말했던 노무현의 모습과 겹쳐진다. 물론 내 생각일 뿐이지만, <나랏말싸미>의 세종이 노무현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캐릭터라면 그건 그거대로 화 나는 문제다. 노무현은 달변가에 승부사였는데 이 작품 속 세종에게는 그런 모습이 전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