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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주

 

1909년 10월 26일, 항일의병장이자 사상가인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하얼빈 의거를 성공시킵니다.  

 

사용된 권총은 벨기에 FN사가 제작한 "브라우닝 M1900"으로 이 총은 일본으로 넘겨져 법정에 증거로 제출되었으나, 이후 그 행방을 알 수 없어 실물이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본 시리즈는 안중근 의사 서거 110주년을 맞아, 그 총의 행방 및 복원을 위해 고군분투한 이야기를 담은 프로젝트로 매주 연재 예정입니다.       

 

우선 역사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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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만약 넣는다면 어떨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하얼빈에서 죽지 않았다면, 근대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1909 10 26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의 손에 사살되지 않았다면, 이후의 역사는 어떠했을까?

 

일본  주장의 핵심을 보면,

 

안중근이 멍청했다. 그나마 일본 의사결정권자 중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을 추구했던 이가 이토 히로부미였다. 그가 죽은 후에 한국은 바로 일본에 흡수됐지 않았나? 이토가 있었다면 이런 무리한 합방은 없었을 거다.”

 

일본  주장만 그러했을까?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에 대해 국제사회의 반응은 양극화 됐다. 영국  제국주의 국가는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에 동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영국의 ‘타임스’는 이토에 대해,

 

대한제국(한국)에서 일본의 정책과 통치에 처음으로 융화적 성격을 각인시킨 인물이었다.”

 

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두고,

 

잔혹한 얄궂음이 느껴진다.”

 

라고 논평했다. 여기서 ‘잔혹한 얄궂음 의미하는 ,

 

조선을 위해서는 이토가 있었어야 한다. 일본의 의사결정권자들  한국에 가장 우호적이었다. 유화적인 정책을 추진했던 인물을 한국인이 죽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직후 일본이 강제로 한국을 합방한  보면, 그를 죽인  실수였다는  알  있다.”

 

일어난 사건들로만 바라보면 일견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이토가 암살된 직후 일본 강경파는 한국과의 합병을 적극 주장했고, 일본 정부는 한국과의 합병에 속도를 높였다.  무렵 한국의 친일단체인 일진회는 대놓고 한일합방 청원운동을 이며 분위기를 달궜다.

 

그렇게 이토가 죽은  7개월 만에 일본은 영국에 한일합방에 대해 통보한다.

 

우리가 한국을 먹겠다.”

 

당시 패권국이자, 일본에게는 특수관계인이었던 영국에 대한 배려였다.

 

그리고 1910 8 29. 경술국치(庚戌國恥) 일어난다.

 

일본인들의 주장에 같이 휩쓸려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폄하하는 한국인들이 있을 정도니,  부분은 분명히 하고 가야   같다(1909년의 일진회의 모습을 2019년에도 본다는  가슴 아픈 일이다).

 

당연하겠지만, 한국  학자들의 생각은 다르다.  역시 마찬가지다. 이토의 죽음 이후를 예측하기 위해선, 이토의 과거의 행적과 당시의 정치상황, 그리고 이후의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개를 합쳐보면 이토의 죽음이 한민족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죽음이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확인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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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의 과거 행적

 

이토 히로부미는 ‘외교관이다. 그가 평소에 따르고 쫓았던 인물은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 

 

비스마르크의 이미지, 그러니까 강철과 피로 대변되는 ‘강경파 인사 이미지는 그가 프로이센  의회에서 했던 연설에서 비롯됐.

 

“... 조약 이래 우리는 우리의 건강한 정치적 통일체에 걸맞지 않는 형편없는 국경을 가지고 있소. 작금의 거대한 문제 앞에 이루어져야  결단은, 1848년과 1849년에 이미 범하였던 거대한 실수인 연설과 다수결이 아닌, 철과 피로써 이루어져야  것이외다.”

 

 재상으로 취임한 후 의회에 나가서 군비확장 법안을 승인해달라고  때였다. 프로이센은 1815. 그러니까 나폴레옹 전쟁 시절부터 이때까지 상비군 숫자를 15만명 수준으로 유지했었다.  때문에 1848 혁명을 진압할  병력부족으로 애를 먹었. 의회에서의 연설 내용의 핵심은 '군비증강을 승인해달라'는 거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비스마르크가 전쟁에 광분한 강경파라 보이겠지만, 기본적으로 비스마르크는 외교관이었다. 시작점도 외교관이었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도 ‘외교관으로서의 탁월한 능력 덕분이다. 물론, 그가 전쟁을 일으킨  사실이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필요한 전쟁. 그러니까 독일 통일을 위한 불가피한 전쟁만을 했다.

 

다시 말하지만,  비스마르크의 전공은 전쟁이 아니라 외교였다. 그와 관련된 일화  ‘외교 관한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다. 누군가 비스마르크에게 ‘외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자 이렇게 답했다.

 

러시아랑 친하게 지내는 .”

 

당시 독일 통일의 방법이  가지 나왔다. 오스트리아를 포함시키는 대독일주의와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소독일주의로 나눠졌다.

 

이미 프로이센은 ‘관세동맹 통해서 독일연방 내의 다른 소국들과 경제적으로 끈끈한 연대를 맺은 상황이다. 문제는 통일을 하기 위해선 게르만 민족 전통의 강자인 오스트리아랑   붙어야 한다는 것이었지역 예선이라고 해야 할까? 독일 내에서 누가 최고인지를 정해야 했다. 이게 7 전쟁이라 불리는 보오 전쟁이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붙어서 누가 게르만 민족 최강자인지를 결정했다.

 

보오 전쟁으로 프로이센이 독일  패자가 됐다지만, 엄밀히 말하면 마인강 이북지역만 통일했다. 카톨릭 지역이었던 독일 남부는 프랑스 때문에 통합시키지 못했다. 완전한 통일을 위해선 프랑스와 싸울 수밖에 없었고, 결국 싸워 이긴다. 이게 보불전쟁이다.   번의 전쟁에서 승리한 배경을 군사학이나 전술적인 측면에서 이야기  수도 있겠지만, 독일이 이길  있었던 이유를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비스마르크를 고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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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승패를 좌우하는 3요소를 흔히 구도, 인물, 캠페인이라고 말한다.

 

인물이 아무리 좋고, 선거 캠페인이 아무리 훌륭해도 선거구도가 어떻냐에 따라 당락이 결정된다. 전쟁도 마찬가지다. 전쟁의 전략전술보다  중요한  국가의 전략이다. , 이길  있는 판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손자가 말했듯이 이기는 군대는 먼저 이겨놓고 전투를 한다. 보오전쟁이나 보불전쟁 결과를 보면 알겠지만, 싸움에 있어서 프로이센은 숨어있는 은둔고수였었다.

 

문제는 독일의 지정학적인 한계다.

 

독일은 선천적으로 포위돼 있다.”

 

독일은 중부유럽의  가운데 있다. 서쪽 국경에는 프랑스가 동쪽에는 러시아, 아래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있었다. 독일은 태생적으로 유럽 강대국에 포위돼 있었다. 만약 독일이 서쪽으로 치고 들어간다면, 동쪽의 러시아가 어떻게 나올지 장담할  없다. 러시아를 다독여서 보오전쟁, 보불전쟁 기간 동안 주저앉힌 덕분에 독일은 통일  있었다.

 

1 세계대전은 비스마르크가 실각한  외교적으로 러시아를 제어할  없게 되자 독일 군부가 서쪽과 동쪽 양쪽 전선에서 전쟁을 해보겠다는 ‘슐리펜 계획 내놓은 바람에 처참하게 무너진 전쟁이었고, 2 대전 역시 서쪽과 동쪽 양쪽 전선에서의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독일이 패배한 전쟁이다. 독일은 선천적으로 포위된  맞다.

 

비스마르크는 지정학적 위치를 ‘외교 극복한 거다.

 

이토 히로부미는 비스마르크를 존경했고, 모델로 삼았다. 그는 기본적으로 외교와 협상을 통해서 자국의 이익을 늘려가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단계별로 형식과 절차를 갖춰서 차근차근 접근해나갔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을 하지 않은  아니다.

 

류큐왕국, 지금의 오키나와를 복속시킨 것도, 대만을 식민지로 만든 것도, 한국을 식민지 직전까지 몰고 것도 모두 전쟁을 기반으로 해서 얻은 결과다. 이토는 전쟁의 결과 얻어낸 권한을 가지고  잡음 없이 식민지 확보에 나서겠다는 거지 식민지를 포기하겠다는  아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생전에 조선의 관리들이나 언론인, 백성들에게 상당히 유화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대한제국의 독립을 침해하지 않는다.”

대한제국을 일본에 병합하지 않겠다.”

 

이토는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을 정도로 한국에 유화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모습일 뿐이었다.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인 이유는 간단했다.

 

우선은 한국인들의 반발을 잠재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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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국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드는 것과 보호국 정도로 놔두는 것을 가지고 저울질을 했다. 보호국을 생각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당장 들어갈 비용을 생각해야 한다.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었을  들어갈 행정, 사법 시스템의 비용, 교육기관을 설치할 비용을 생각해야 한다.  비용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한국을 지키기 위한, 그리고 통제하기 위한 방위비용. 결정적으로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을  열강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고민해봐야 한다.”

 

완벽한 식민지보다는, 보호국으로 만들어 일본이 이권만을 뽑아먹는  이득이라는 판단이었다. 실제로 이토는 한일합방에 대한 당위성은 인정하지만, 현실적 문제를 고려해서 당장(1907) 합병하는 것엔 반대했다(1907년에  이야기가 나온  '헤이그 특사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본 조야에서 당장 한국을 합방해야 한다는 의견이 튀어나왔다)

 

외교관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피를 흘리지 않으면서도 원하는 목적을 얻어내는 .”

 

 집중했다. 러일전쟁 직전 러시아와 비밀회담을 가지고, 전쟁을 막아섰던  그가 평화주의자나 한국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가져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 흘리지 않고 이익을 얻을 방법을 모색했던 거다.

 

여기서 생각해 봐야하는 , 이토가 그렇게 노력을 했음에도 군부를 통제할  없었다. 이미 일본 군부는 이토 혼자서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는 이토가 죽은 뒤를 보면 알 수 있다.

 

이토의 가장  정적은 살아있을 때부터 라이벌이자 그의 후임이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였다. 이 야마가타 권력을 잡으면서 일본의 군국화와 한일합방의 속도는 빨라졌다.

 

단순히 이것만 보면, 이토가 죽었기 때문에 한일합방이 빨라졌고 일본 군국화를 막을  없었다고   있다. 그러나 이미 일본의 군국화는 어떻게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 2내각 때였던 1900년 야마가타는 이미 “군부대신 현역무관제 제도화 했다. , 육군대신과 해군대신은 반드시 현역 대장이나 중장 가운데서 임명해야 한다는 거였는데,  때문에 내각 자체를 붕괴시킬 힘을 ‘군대 가지게 됐다(일본 육군은  제도를 활용해 사이온지 내각을 붕괴시키기도 했다).

 

이토가 군부를 통제할 상황이 아니었다는 거다.  중요한  안중근 의사의 거사 당시 이토 히로부미의 나이다.  당시 68세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자연수명이 거의 다했.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하든 제거하지 않았든 무슨 차이가 있냐는 질문이 나올  같은데, 이토 히로부미가 살아 있었을 경우 한일합방은 이런 식으로 급하고, 거칠게 이뤄지지 않았을 거라는 거다. 외교적 수순을  밟고, 정치적 안배를  마친  ‘확실하게합방에 들어갔을 거다.

 

 경우 태평양전쟁의 패전 이후 한국의 운명이 어찌됐을까를 생각해봐야 한다. 비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오키나와가 아직까지 독립하지 못한  생각하면, 가능성은 낮지만, 아예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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