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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사람들

 

한 국회의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갔습니다. 억울하고 비통하게 간 노동자의 죽음에, 그들을 비정하게 대접하는 기업의 행태에, 제 가족 일처럼 분개했습니다. 재개발이 불어 닥친 땅에서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에게 기꺼이 바람막이가 되어주었습니다. 힘이 없는 자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는 세상, 그가 꿈꾸던 이상이었습니다. 

 

잇속 챙기기 바쁜 동료 정치인들에게 그는 눈엣가시입니다. 건건이 자신들의 발목을 잡습니다. 그를 구워삶아 보려 해도 헛수고입니다. 초식이 다르니까요. 여의도의 이전투구와 정쟁은 그의 관심 밖입니다. 어렵게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당적이나 공천보다 지역구 사람들의 민원이 그에게 우선입니다. 정치는 사람을 위한 일이며, 사람을 보고 가는 것이 정치인의 길이라고 믿습니다. 

 

청렴과 결백으로 걸어온 길. 그의 자산은 도덕성입니다. 하지만 정치인에게 그것은 서늘하게 날이 선 양날의 검이죠. 결국 오래전에 받은 후원금 몇천 만원이 그의 목을 겨눕니다. 세상은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침을 뱉습니다. 그에게 손가락질하는 똥 묻은 개들은 수억을 삼키며 잘도 삽니다만, 그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것이 작은 흠결이어도 말입니다. 자신을 믿어준 사람들에게 사죄하며, 스스로 몸을 던집니다. 그렇게 그의 정치는 멈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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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보좌관>

 

이 국회의원은 JTBC 드라마 <보좌관>에 등장한 이성민(정진영 분)이라는 사람입니다. 성민과 닮은, 우리가 잘 아는 어떤 이가 떠오르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기억이 아직 선명해 마음 한 편이 저릿하실 분도 계실 테지요. 만약 그러셨다면, 이 드라마의 작가는 아마도 그를 떠올리며 글을 쓴 것이 맞을 겁니다. 어떤 작가들은 종종 존경하는 작품의 인물과 대사를 빌려 쓴다고 합니다만, 이 드라마의 작가에겐 그 어떤 작품보다 현실이 더 극적이었나 봅니다. 참 슬픈 오마주입니다.

 

 

여기 또 한 대통령이 있습니다. 뜨거운 정의감과 명쾌한 논리, 그리고 수더분한 인간미. 지지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그는 청와대에 입성합니다. 그의 당선에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조선 건국 이래 600년 동안, 권력에 맞서 권력을 바꿔본 첫 번째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600년간 한반도를 장악해온 기득권의 힘은 그의 작은 반전을 누르기에 충분했습니다. 아직 임기의 반도 못 채운 지지율 한자리 대통령.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도 점차 등을 돌렸습니다. 온갖 조롱과 멸시에 시달리던 그와 그의 정부는 너덜너덜한 난파선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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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

 

하지만 이 사람은 승부사입니다. 대통령이 괜히 된 것이 아니죠. 역사의 사명과 개인의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는 해야 할 일을 합니다. 한미동맹을 볼모로 통상압박을 해오는 미국과의 협상테이블에, 꼬장꼬장한 원칙주의자 장관을 내보냅니다. 당당하게 할 말 하고 오라는 것이지요. 역사 앞에 부끄러움을 모르고, 시비를 걸어오는 일본 정부에게는 묵직한 돌직구로 응수합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tvN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에 나오는 대통령 양진만(김갑수 분)이라는 사람입니다. 또 어떤 얼굴이 떠오르셨습니까? 국정의 답답함에 담배를 꺼내 무는 양진만 대통령의 모습에서 또 어떤 저릿한 이름 석 자가 기억나셨다면, 여기에도 슬픈 오마주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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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

 

어쩌면 한때, 우리 곁에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좋은 정치인들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들의 모습이 베인 이야기 속 인물들의 고뇌를 지켜보며, 생전의 그들이 어떤 표정과 감정으로 그 시간을 버텨왔는지를 상상해 보게 됩니다. 드라마가 정치를 추모할 때, 우리는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드라마의 주연이 되기에 너무 좋은사람들입니다. 정치 드라마의 미덕은 욕망의 충돌입니다. 음모와 야합이 버무려진 권력의 수 싸움은, 어쩔 수 없이 재밌습니다. 그 맛에 보는 것이지요. 정의가 사라져도, 도덕이 뭉개져도 괜찮습니다. 이야기일 뿐이니까요. 비뚤어진 욕망을 탐닉하는 이야기는 매력적입니다. 위인들이 하는 바른 소리는 솔직히 하품 납니다. 반면에 자신의 이익과 욕망을 충실히 따르는 정치인들이 벌이는 권모술수는 박진감이 넘치죠. 그리고 그편이 감정을 이입하는데 더 쉽습니다. 악당들의 욕망이 인간의 본성에 더 가깝기 때문이지요.

 

<보좌관>의 이성민 의원과 <지정생존자>의 양진만 대통령의 행동은 인간의 욕망을 초월합니다. 그들에게는 개인의 안위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고, 눈앞의 이익보다 숭고한 가치가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가치 추구도 개인의 만족이었겠지만 요. 숙연해질지언정 관객의 입장에서 공감의 면은, 악당들의 그것이 훨씬 더 넓습니다. 정치란 취하는 입장에 따라서, 서는 높이에 따라서 쉽게 악당이 될 수 있는 공간이니까요.

 

 

대리자들

 

그래서 두 드라마는 ‘좋은 사람’들의 대리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보좌관>에서의 대리자는 성민의 전 보좌관 장태준(이정재 분)입니다. 장태준은 뛰어난 판단력과 기지를 가진 출중한 보좌관입니다. 진흙탕 싸움 속에 위기에 처한 주군을 몇 번이고 구해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위기를 기회로 삼을 줄 아는 정치인입니다. 초임 비서관 시절, 그의 사수였던 이성민 의원처럼 본인도 언젠가 가슴에 무궁화 배지를 달고 자기 정치를 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습니다. ‘공명하고 깨끗한 정의로운 세상’을 꿈꿨던 이성민 의원과 영혼을 같이하는 정치적 동지이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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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보좌관>

 

하지만 둘은 세상에 다가가는 방식이 다릅니다. 가는 길목마다 원칙과 소신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성민과 달리, 태준은 현실주의자입니다. 힘센 사람이 주는 술을 허리를 굽혀 받고, 지저분한 일에 기꺼이 손을 더럽힙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갖기 전까지 공허하게 부르짖는 정의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태준은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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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보좌관>

 

자신이 잘못 처리한 돈 때문에 성민이 죽음을 택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태준은 절망합니다. 더 많은 돈을 탐하고 더 큰 죄를 짓고도 뻔뻔하게 잘 사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몸을 내던진 성민을 원망합니다. 그리고 동지를 사지로 내몬 자신을 자책합니다. 하지만 태준은 성민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질척한 권력 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갑니다. 괴물이 되지 않기를 다짐하면서요. 태준은 돌아가기에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기 때문이지요. 태준은 과연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까요. 어쩌면 이미 괴물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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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

 

<지정생존자>의 대리자들은 대통령 양진만의 참모들입니다. 국회 연설 중 테러로 대통령과 수많은 정부 요인들이 사망합니다. 그를 대신해 권한대행 박무진(지진희 분)이 선임됩니다. 법에 따라, 내각 중 유일한 생존자인 환경부 장관이 졸지에 국가 최고 권력자가 된 것이지요.

 

넷플릭스 원작과는 달리, 사망한 전 대통령은 이야기에서 퇴장하지 않고, 내내 맴돕니다. 그의 정신과 가치를 계승한 참모들이 권한대행 무진과 함께하기 때문이죠. 참모들은 비명에 간 대통령을 그리워하며, 새로운 리더 무진에게 그 마음과 기대를 투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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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

 

전 대통령의 선임 행정관이자, 권한대행체제에서 비서실장이 된 차영진(손석구 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새로운 권력을 흔드는 세력들 앞에, 무진이 정치인으로 거듭나기를 원합니다. 그도 <보좌관>에서 태준처럼 ‘이기는 정치’를 추구합니다.

 

 

수정

대행님, 익숙하지 않으신 거예요. 정치적 사안에 승부수를 거는 여기 청와대 생리에.

 

영진

익숙하지 않다고요? 간절하지 않은 겁니다! 대행님.

 

나는 아직도 매일매일 생각합니다. 저번 정권 때, 우리는 우리가 가진 권력을 이용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들 야당이든 기득권 세력이든 우리한테 반대하는 세력에게 반드시 맞서 싸워서 이겼어야 했다고! 

 

저들에게 그때 우리가 빌미를 주지 않았다면, 아니 애초에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면, 더 밀어붙였었더라면, 내가 대통령님에게 한 번만 더 강하게 말했었더라면! 그랬다면... 대통령님이 저들에게 임기 내내 조롱당하고 끝내 이렇게 초라한 뒷모습으로 역사에 남지 않았을 텐데. 

 

양진만 대통령.. 내가 만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 8회 中

 

양진만 대통령의 뜻을 이어받은 참모 그룹 속에서, 감화된 무진은 점점 정치를 배워갑니다. 학자 출신 백면서생이었던 그는 점차 권력을 깨우치고. 그것을 자신의 의지대로 사용하게 됩니다. 각자의 욕망과 이기심으로 무장된 ‘정치 괴물’들과 차례로 대적해 나갑니다. 박무진 권한 대행 또한 전 대통령이 아끼던 ‘좋은 사람’입니다. 양진만 정부의 참모들은 전 대통령과 닮아있는 무진에게 새로운 희망을 발견합니다.

 

과연 두 드라마의 대리자들은, 좋은 사람의 좋은 정치를 이뤄낼 수 있을까요. 남은 회차에서 각자 그 답을 내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좋은 사람들, 하고 싶은 거 다 하세요.

 

두 드라마는 보통의 정치 드라마와 다른 특별한 부분이 있습니다. ‘좋은 사람’인 주인공이 괴물들의 장난질에 고생하다가, 갖은 고초를 이겨내며 성장해 결국 아름답고 평화로운 세상을 일구어내는 영웅 서사를 답습하지 않았습니다. 숭고한 뜻으로 정치에 임하는 ‘좋은 사람’들을 극 초반에 일찌감치 떠나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 인물들이 그들의 유산을 가지고 절치부심하는 이야기로 풀어갑니다. 이 이야기들은 그래서 현실감이 있습니다. 우리 곁에도 한때 그런 ‘좋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들을 떠내 보내고 그들이 남기고 간 것들을 품고 우리는 여기에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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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노회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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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노무현재단)

 

앞으로도, 우리에겐 좋은사람들이 또 나타날 것입니다. 아니, 이미 곁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전에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또 우리 곁을 떠나기 전에, 괴물에 잡아먹히기 전에, 그들이 그들의 소임을 다 할 수 있도록 알아봐 주고 지켜주는 것은 우리의 역할일 것입니다. 악당이 매력적인 것은 드라마로 족하니까요. 현실의 뉴스를 보는 건 드라마보다 좀 재미없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좋은사람들이 하고 싶은 거 다 했으면 좋겠습니다. 드라마 정치를 추모할 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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