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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일본이 기어코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을 처리했다. 이는 지난달 4일 있었던 소재 3종(포토리지스트, 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에 대한 수출규제시행의 추가조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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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정부는 '한국에 대한 수출을 전면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전략물자 수출에 대한 관리를 하기 위함일 뿐이다. 한일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도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물론 이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이미 화이트리스트에 오른 국가를 이런 식으로 배제하는 것 자체가 전례 없는 일이다. 이번 조치에 따라 광범위한 품목에 대해서 개별 수출허가를 받게되었다.

 

피해를 입게 된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제3자인 외신들도 사태를 크게 다루며, 일본의 조치를 대법원 판결에 대한 광범위한 무역보복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졸라 큰일인 거 맞고, 우리한테 시비거는 것도 맞다. 

 

 

문재인 대통령이 즉각적인 입장을 내놓은 게 옳았다고 본다. 일단 저쪽에서 싸움을 걸어온 이상 잘못이 일본에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단호히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는 게 필요하다. 발 빠르게 입장이 나온 덕에 '일본의 수출규제'를 보도하는 외신 대부분이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을 다루고 있다. 사태에 대해 발언권을 갖게된 셈이다. 

 

 

경제적으로 봤을 때 일본의 조치는 자해가 맞다

 

우리나라가 그동안 일본의 화이트리스트에 포함되었던 건 일본으로부터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 아니라, 일본정부가 자국기업들이 우리나라에 많이 수출하도록 절차를 간편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화이트리스트에서 우리나라를 뺀다는 건 자발적으로 서류작업을 더하겠다는 거고, 절차를 복잡하게 만드는 건 한국이랑 장사를 덜하겠다는 소리다. 

 

우리나라 기업들과 국민들에게 일본의 적의가 확실하게 전달된 것은 덤이다. 일본의 주장대로 화이트리스트 배제가 실제 수출 절차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다고 하더라도, 일본정부는 무역을 국제분쟁에서 도구로 사용할 의지를 밝혔다. 이번 조치로 영향을 받은 기업은 물론 그와 상관없는 기업이라도 확전에 대비하여 일본산 소재 및 부품에 대한 의존도를 낮출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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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비자들의 불매운동 또한 격렬해질 가능성이 높다. 일본의 무역보복조치는 우리에게 일본과의 역사문제가 과거를 넘어 현재 양국의 관계를 규정짓는 실존적인 것임을 일깨워줬다. 일본의 만행을 직접 겪지 못한 지금 세대도 일본이 과거에서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역사인식을 갖고 있으며, 우리나라에게 해를 입히고자 하는 걸 분명히 느꼈다. 

 

일본언론의 말을 빌려 지극히 '냉정히' 보더라도, 일본의 조치가 한국 소비자들에게 물건을 팔려는 일본기업과 한국인 관광객들을 유치하려는 일본 지자체에게 이로울 리 없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를 제외한 건 이것이 경제적인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인 판단이기 때문이다. 

 

본인들이 다소 피해를 입더라도 상대방에게 더 큰 피해를 강제할 것.

상대방의 전쟁의지 및 수행능력을 꺾고 나의 목표를 관철시킬 것.

 

일본은 말 그대로 무역에 전쟁의 논리를 적용시켰고, 무기화하였다. 이는 무역전쟁을 의미한다.

 

정치논리가 경제논리를 지배하는 현상 자체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영국에서는 브렉시트 논의가 한창이고, 미국은 중국을 상대로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다. 일본이 우리에게 무역으로 싸움을 거는 건 트럼프가 중국에게 으름장을 놓는 방식과 비슷하다.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여 보호무역을 들고나온 영국, 미국, 일본의 공통점을 (억지로) 꼽아보면, 

 

① 20세기에 정치, 경제적으로 강력한 제국이었다

② 제조업 분야의 경쟁력에 있고 다른 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③ 지금은 부를 이용해서 돈놀이(금융)로 먹고 산다

 

자유무역체제에서 정점을 구가했던 세 나라는 선진국이 되면서 제조업 분야의 경쟁력을 다른 나라에게 넘겨주고, 그 손실을 금융, 서비스, 관광 등에서 메우려 한다. 

 

문제는 양질의 일자리를 다수 제공하는 제조업과 달리, 금융 및 서비스업으로 혜택을 보는 건 소수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부의 양극화 현상이 일어난다. 좀 삐딱하게 보자면, 이 때 발생한 내부적 불만을 외부로 발산시키기 위해 보호무역을 들고나온 것이다.

 

돈을 벌만큼 벌어놓은 이들 입장에서는 지금 무역판을 깨더라도 잃을 게 별로 없다. 안전자산을 선호하는 자본의 특성상 전쟁이 지속되더라도 금융시장으로 손실을 메울 수 있을 거라 판단했을 수도 있다(미중의 무역전쟁이 심화될수록 안전자산인 달러화와 엔화의 가치가 오른다). 각국에서 발생중인 부의 양극화와 그로 인한 갈등이 나라 간의 갈등으로 번져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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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시비거는 애덜은 별 생각이 없다

 

일본은 경우가 좀 다르긴 하다. 영국, 미국에 비하면, 일본 제조업은 아직 현역이다. 미국은 막대한 무역적자를 판돈으로 중국에 싸움을 걸고 있고, 주도권도 쥐고 있다. 그에 반해 일본은 우리나라로부터 이십조 원에 달하는 무역흑자를 올리고 있다. 수입을 줄이는 식으로는 도저히 무역전쟁을 전개할 수가 없으니 수출품에 제한을 걸었는데, 이는 매우 교환비가 떨어지는 타격방식이다. 

 

싸움의 주전장으로 고른 반도체 시장은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과반을 넘게 점유하고 있다. 두 기업은 앞으로 수 년은 버틸 현금이 있을 만큼 맷집 센 기업이고, 과잉공급이 문제가 될 정도로 많은 재고를 쌓아두고 있다. 이들에게 타격을 주려면 당장 생산라인을 못 돌릴 정도로 비축분을 모두 소진시키고도 한참을 거래를 끊어야 한다. 물론 이 지경이 되면 이들에게 물건을 납품해서 돈을 버는 일본 기업들이 먼저 빈사상태에 빠질 것이고 램값은 오일쇼크 당시의 유가처럼 몇 배는 치솟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에게 타격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나라가 몇 안되는 산업분야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IMF 이후 신자유주의를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각 산업분야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기업 한두 개만 남기고 정리했으며, 살아남은 기업들은 전세계에서 가장 싸고 좋은 설비와 소재에 엔지니어들을 갈아넣어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냈다. 우리나라 산업의 가장 큰 경쟁력은 인건비나 원천기술이 아니라 글로벌 서플라이체인(supply chain)에 잘 융합됐다는 것이다.

 

가장 좋은 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가장 싸게, 많이 만들 수 있어야 하는 반도체 업계에서 우리나라 기업이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일본 완성품 업체는 이러한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서 망했다).

 

이런 산업에서 일본제품을 사용하지 않고, 소재 및 설비를 국산화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일이다. 일본 리스크를 감안하여 서플라이 체인에 변화를 주는 건 자본의 논리에서 보면 덜 효율적이다. 

 

한편 사회적으로는 매우 바람직한 조치다. 부품과 소재산업의 국산화는 대기업에 집중되어있던 반도체 산업이 더 많은 기업, 국민에게 나누어질 것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국내 소재기업들의 경쟁력이 올라가는 게 대기업들에게도 이롭다. 누구도 하지 못한 상생을 기업들이 생존을 위해 고민할 지 모른다.

 

결국 균형의 문제다. 일본이 그랬듯이 국산화 문제에 천착하다 글로벌 서플라이체인에서 동 떨어져 몇 안되는 경쟁력도 상실할 위험이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고민이 논의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시비로부터 강제된 것이라는 게 전혀 달갑지 않다. 

 

당사자인 일본은 복잡한 거 생각 안 했을 거라는데 500원 건다. 그쪽에선 취약해보여서 막 던진 건데 피해자인 우리만 생각이 많아지는 것이다. 원래 시비거는 애덜은 별 생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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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태에 대해서 좀 더 쓰자면, 한일 양국이 자발적으로 합의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무역갈등이 양쪽에게 백해무익하다 하더라도 저쪽이 시비를 건 이상 상응한 대응을 하는 게 맞다. 특히 상대가 우리 주권을 강탈한 전력이 있는 전범이고, 우리보다 경제규모가 세 배 가량 크다면 더더욱 그렇다. 

 

다만 이 싸움은 아무도 없는 공터에서 한국과 일본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끝장승부가 아니다. 많은 학생들 앞에서 벌어진 싸움과 비슷하다. 이미 미국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방콕으로 날아가 한일 외무장관을 앉혀놓고 싸우지 말라 중재를 했다. 그러나 일본이 추가 무역보복을 가하면서 우리는 받아들이고, 일본은 무시한 꼴이 됐다. (일본의 무역보복 직후, 아세안 3국이 이를 규탄했는데, 그중에 미국이 가장 싫어할 중국이 껴있었다. 이미 체면이 구겨진 미국은 공통의 적 중국을 앞에 두고 두 동맹국이 투닥거리는 꼴을 정말 보기 싫을 것이다)

 

조금 메타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미국이 보고 있는데 일본을 절멸시키겠다는 각오로 칼 뽑고 덤벼들 게 아니라, 일본 반응을 보면서 하나씩 대응하면 된다. 정부는 국익만 챙기고 개싸움은 우리가 개인 차원에서 하면 된다. 각자 형편에 맞게, 하고싶은 대로. 난징대학살 등으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우리보다 부족하지 않은 중국의 대일본 불매운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위에서 시켜서 한 불매운동이기 때문에 양국의 엘리트가 합의한 순간 에너지를 상실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들의 불매운동은 자발적이고, 세련되어야한다. 집에 있는 일본제품 전부 내다버릴 필요 없고, 한국에 온 일본인들에게 화를 내선 안된다(아베에게 가장 좋은 복수는 이들이 다시 찾도록 친절을 베풀어주는 것이다).

 

총구가 내 주변을 향하지 않아야 한다. 나랑 생각이 다르거나, 미감이 좀 떨어진다고(물론 일본 여행사진에 따봉을 누르지 않는 건 나의 자유의지다), 그 사람과 사생결단을 낼 필요는 없다. 우리의 주적은 이러한 조치를 결정한 소수의 엘리트 집단 뿐이고, 하루이틀에 끝나는 싸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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