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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입니다 추천5 비추천0






품어본 바 없는 감정의 습격에 나는 적이 당혹했다. 소년과 청년의 어디쯤에 위치한 아이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흰 앙가슴에서 공룡이 맑게 웃으며 꼬리를 착하게 흔들었다. 마치 그 꼬리가 쳐서 그런 것처럼 빛을 받아 화사하게 반짝이는 가슴팍의 가느다란 솜털이 따라서 흔들렸다. 마치, 노래를 부르듯.


나는 순간,

쥐라기의 비밀을 본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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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공영주차장에 내 차를 주차한 서지숙이 골목길에서 대문으로 이어지는 층계를 쿵쿵 밟고 올라왔다. 저이는 언제나 저렇게 몸가짐이 경박스럽다. 굳이 층간소음이 싫어 노후를 위해 아파트를 하나 사두시라는 주위의 채근과 이 동네에서 살 집을 구해 주며 알게 되어 간혹 반갑게 인사하던 A공인중개사까지도 어느 날 심각한 얼굴로 이 집은 전혀 투자가치가 없다고 말한 등등의 충고를 무시하고 굳이 이 서울 구석배기에 있는 낡은 주택을 매입해서 입때까지 살고 있는 이유가 뭐겠는가. 내 이름, 이요란과 달리 고적함을 사랑해서였건만 서지숙은 사내처럼 겅중겅중 시끌벅적하게 다닐 때마다 꾸짖어도 그때뿐이었다. 내일 모레 불혹을 앞둔 내 오랜 제자, 하긴 옛 불혹과 요즘 불혹이 다르고 아이를 낳은 적도 없는 아직 삼십대 여인의 몸에는 쿵쿵거리며 걸음을 내딛을 만한 정력이 아직 충만할 테건만 눈앞의 광경에 매료되어 있는 내게는 그것을 웃어넘길 만한 이해심이 평소 같지 않았다. 이요란. 이것은 나의 실명이기도 하고 필명이기도 하다. 어릴 적부터 늘 조용한 성격이었고 고요하게 살기를 갈구했건만 젊은 시절 정치적인 풍파에 휩쓸리며 고고히 문학만을 하지 못하고 나는 종종 요란스럽게 살아야 했다. 별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요란스레 감옥에 갇혔고 쉽게 숙이지 않아 요란스레 언론에 보도되었으며 그 경험을 세세히 노래한 시가 요란스럽게 주목을 받기도 하여 원치 않게 요란스러운 삶이었다. 고고하면서도 요염하게 사람을 매혹하는 난초가 되라는, 여성으로 사랑받기를 원하며 한껏 멋을 내어 지어 주신 부친의 뜻은 그다지 그 뜻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 젊을 적엔 투사로서, 청장년 시대에는 ‘누님’ 역할을, 더 나이를 먹고는 인자한 ‘원로’가 되기를 청하는 제각각의 바람들 속에 내가 난초 같은 여인일 수 있는 시간은 없었다. 나는 바람 불면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는 풀이기도, 쉬이 흔들리지 않는 소나무이기도 해야 했다. 긴 골목길을 한참 올라와야 하는 이 집은 내가 그 모든 요란함에서 도망쳐 숨는 요새였고, 그 요새를 웬 아이가 침범해 있는데도 싫지 않아서 서지숙이 아이를 깨울까봐 쉿, 하고 입술에 손가락을 대어 보이기도 전에 소년의 눈이 번쩍 떠졌다. “누구세요?”


은규, 너는 누가 물어야 할 질문을 했는지. 나중에 서지숙이 네 이야기를 하며 “선생님, 은규가 다니는 학교가 요 앞 특성화곤데요, 옛날 공고 말이에요. 애가 아주 꼴통이라니까요” 하며 너를 다소 폄하하는 말을 했지만 나는 네 그런 총기가 다소 떨어지는 점이 싫지 않았다. 내 젊은 시간에도 너무 총기 있는 자들은 고통만 받았고 다함께 어깨 걸고 싸울 독재가 없는 대신 개별적 싸움의 고통으로 충만한 이 시절에 총기가 있어봤자 고통을 상기하는 남다른 감각을 발달시키기 밖에 더 하겠니. 나는 너의 선량한 백치미와 무감각함이 너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 한 무한하기를 내내 빌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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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해요, 할무니, 제가 깜빡 잠이 들었네요.” 약간 혀짧은 소리는 일부러 내는 걸까, 원래 그런 걸까. 어느새 내 옆에 장승처럼 선 서지숙이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죄송하고 말고간에 너 누구야? 어떻게 여기 들어왔어?” 사탕을 문 입을 오므린 너는 순식간에 겁먹은 듯이 흔들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발끝을 내려다봤다. “걸어서... 들어왔는데요...” 그럼 날아왔을 리는 없겠지. 나는 푹, 하고 웃었고 약간 안심한 듯 너는 눈동자를 살며시 들었다가 서지숙의 여전히 사나운 표정에 다시 고개를 가라앉혔다. “어디서 왔어?” 다시 서지숙이 카랑카랑하게 외쳤지. 너는 사탕을 입에서 빼서 손에 쥐고는 머뭇머뭇 대답했다. “집...에서 왔는데요.” 나는 푹, 하고 웃다가 참지 못하고 하하하하, 입을 크게 벌려 웃었고 오랫동안 내가 그렇게 큰 소리로 웃는 것을 듣지 못한 서지숙은 당황한 듯, 약간 분하다는 듯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저 산 위로 가려면 이 집 축대를 넘는 것이 제일 빠른데요, 산길로 걸어가려니 귀찮아서... 어제 폰을 거기다 떨어뜨렸거든요.” “폰이라니? 핸드폰 말이냐? 그걸 왜 거기다 떨어뜨려?” 나의 물음에 소년이 신이라도 난 듯 대답했다. “아, 엄마가, 폰 못하게 해요. 학교 가면 수거하는데 그것도 진짜 짱나요. 급식충이라고 진짜 너무하는 것 아니에요?” “급식충이라니, 무슨 벌레를 말하는 거냐?”


내 물음에 서지숙은 경멸하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입을 열다가 내 제지에 가로막혔다. “선생님, 그 충이라는 게 애들 쓰는 아주 저질의 말인데요...” “자네는 가만 있게.” 너는 생기찬 숫사슴처럼 뺨을 귀엽게 실룩대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말 못 들어보셨어요? 일베충, 유족충, 한남충, 메갈충... 요즘 진짜 충 많이 쓰는데! 할무니는 그런 말 안 쓰시나 보다. 중고딩들 급식 먹잖아요? 급식이나 먹는 것들, 이래가지구 급식충이라고 하는 거예요.” “앞으로 어른들 앞에서는 그런 말 쓰지 말거라. 급식은 좋은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먹는 이들을 충이라고 하는 것은 나빠. 너도 급식을 먹지 않니?” “네. 급식 먹어요. 근데 졸라 맛없어요. 양도 적어요.” 나는 소년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애는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앗, 졸라라고 하면 졸라 안되는데... 졸라 죄송해요.”


나는 픽, 웃었다. “그래서 핸드폰이 어쨌단 말이냐?” “아, 그래서 엄마 몰래 공기계를 하나 구했거든요. 개통 안 한 폰이요. 그러면 친구들하고 ‘단톡’은 할 수 있어요. 카카오톡에 반톡방 있는데 거기 빠지면 진짜 짱나거든요.” 서지숙이 설명했다. “카카오톡이라고 많이들 쓰는 폰 메시지 프로그램에 여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방이 있는데요, 반 아이들이 하는 대화방에 빠지면 요즘 애들은 왕따가 된다더군요.” 나도 그런 것은 뉴스에서 얼핏 들어 본 기억이 났다. “그리고 이분이 누구신지 알고 할머니라니 얘가!” 서지숙이 야단을 쳤다. “쟤한테야 할머니 뻘이 되고도 남지 자네 왜 그러나.” 소년이 끼어들었다. “아 안 그래도 좀 그랬어요. 하나도 할무니같지 않으세요! 어쩐지 분위기 같은 게... 영화에서 본 프랑스 여배우 같아요. 음... 낡은 성에 사는 귀부인 같은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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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이가 되면 특별히 아름다운 용모가 아니더라도 자세를 꼿꼿하게 하고 소위 ‘뽀글이’ 파마만 않고 천박하게 꾸미지 않되 매무새를 정결하게 하면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나는 칠십이 다 된 나이에도 근력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입성이 구차스럽지 않게끔 마음을 썼으므로 종종 문학기자들이 하나같이 기사에 쓰는 소리였다. 내 외모가 괜찮은 게 아니라 여인에게 기대하는 미모의 수준이 세월을 보낸 이에게는 너그러워진 탓임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아프지 않은 채 살아 있고, 제 꼴을 스스로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만으로 칭찬을 들을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아이에게는 아부하는 기색이 없이 진실성이 있어 보여서 나는 그 진지한 얼굴에 다시 쿡쿡, 웃었다. “그것도 와이파이가 되는 성이지. 노인네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 방법은 젊은 아이가 어디서 배웠을꼬? 전파 터지는 곳을 찾아서 헤매다니, 친구들하고 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로구나.” “그게 아니구요, 못 끼면 따 되는걸요.” “담대하게 살아야지.” “담대한 게 뭐예요?” “작은 것에 구애받지 않는 대장부다운 용감함을 말하는 게지.” 소년은 한숨을 푹 쉬었다. “저는요, 어렸을 때부터 진짜 쪼잔해서요...” 열댓살이나 됐을까, 제가 지금은 어리지 않다는 듯 진지하게 근심스러워하는 표정이 우스워 나는 다시 웃었고 그 웃음에 힘을 얻기라도 한 듯 너는 제 바라는 바를 쏟아놓았다. “집에서는, 그러니까 와이파이가 안 잡혀요. 엄마가 저 공부하라고 인터넷 끊어 놨거든요. 진짜 짱나... 그리고 근처 집에는 다 비번을 걸어 놨어요, 같이 좀 쓰지... 그래서 제가 되는 데 없나 저 산에까지 올라가서 인터넷 하다가, 폰 놓고 왔다 내려오는데 여기는 잡히더라구요...” 서지숙이 설명했다. “선생님, 제 반 아이들하고 그 단톡이란 걸 하려면 인터넷이 되어야 하는데 제가 선생님 댁에 인터넷 설치하면서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안 걸어 놨거든요. 그래서 이 녀석이 함부로 들어와서 했나 봅니다. 내일이라도 통신사에 전화해서 비번을 걸게요.” “아 아줌마! 아니 누나! 쌤! 안 그러심 안 돼요?” “이 녀석이!” 아줌마라는 소리를 좋아할 리 없는 서지숙이 눈썹에 잔뜩 힘을 주었고, 나는 손을 저어 보였다. “굳이 그럴 것 없네. 이 산밑 골목까지 누가 굳이 와서 인터넷을 하겠나.” 소년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 저 가끔 와서 폰 해도 돼요?” “공부에 방해되지 않게 하려무나.” “저희 학교, 어차피 똥통이에요! 고맙습니다, 할무니! 안녕히 계세요!” 허리를 꾸벅 숙여 보인 소년은 똥, 이란 말을 또옹, 하고 그토록 발랄하게 발음하더니 다리가 긴 새처럼 깡충깡충 계단을 뛰어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서 내게 외쳤다. “할무니! 저 은규예요! 한은규!” 휘파람새처럼 노래한 너는 이내 사라졌다.


“올봄부터 몇 번 길에서 마주친 아이에요. 딱 봐도 불량해 뵈는데 그렇게 무르게 구시면...” 서지숙이 낮은 소리로 불평했다. 아직도 네가 남겨놓고 간 무게로 가늘게 흔들리는 의자 옆으로 나뭇잎이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나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공룡을 봤나, 자네?” “무슨 공룡이요?” “조심하게나, 가슴에 용을 품고 사는 아이야... 다행히 초식인 것 같지만.” 나는 녹색 기운이 가득한 그 나무이파리를 주워 이빨로 물어뜯는 시늉을 해 보이고는 소년이 앉아 있던 자리에 몸을 앉혔다. 갓 떨어진 나뭇잎에서, 얼마나 입은 채로 나뒹굴고 놀았는지 엉덩이 부분이 반질반질하던 교복이 닿은 자리에서 온기가 스며들어왔다. 열없이 다리에서 힘이 빠져 의자에 더욱 몸을 의지하자, 가느다란 초여름 바람이 코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게, 나는 은규를 처음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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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규 1





김현진입니다 


편집: 딴지일보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