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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육의 코미디 중 하나는 학교에서 6년~10년 이상 영어를 공부한 많은 이들이 간단한 영어 의사소통 상황을 버거워한다는 사실이다. 시험 점수와 실제 활용능력은 터무니없이 동떨어져 있다.

 

도덕 교육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정규교육과정에 도덕이라는 과목이 있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도덕 시험에서 만점을 받는다. 그러나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 TI)에서 발표한 한국의 부패인식지수(CPI)는 OECD 34개국 중 27위다. 동일기구에서 실시한 청소년 윤리의식 조사에서도 한국은 아시아 4개국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교육과 삶의 괴리가 불러온 기괴한 현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국의 대학진학률은 세계 최고 수준인데, 국가 행정부 수반에는 정체모를 사이비 종교인 무리에게 휘둘리는 금치산자에 가까운 이가 뽑혀 앉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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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삶의 간격이 멀어지는 근본 원인 중 하나는 교육이 대단히 공급자, 교육자 중심이라는데 있다. (공급과 수요의 틀을 굳이 빌리자면) 학교 교육의 많은 부분이 학습자의 삶이 아니라 교육자가 가르치기 쉬운 것, 측정하기 쉬운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음악 수업만 봐도 그렇다. 음악을 전공하지 않는 대부분의 학습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삶 속에서 음악을 즐기고, 향유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학교는 장3도와 단3도를 구분하고 다장조를 사장조로 바꾸는 방법과 같은, 대부분의 학습자가 졸업 후에는 두 번 다시 쓸 일 없는 것들을 가르치며 학생들을 진저리치게 만든다. 구시대적인 도덕 교육이 여전히 똬리를 틀고 있는 것 역시 같은 선상에 있다. 이러한 형태의 교육이 철학교육, 시민교육, 노동교육, 법률교육보다 교육 권력의 재생산과 사회 기득권 유지에 편리하고 유리하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도덕적 사고능력이 유아 수준인 것이 전 세계에 밝혀진 지금, 억울하지만 부끄러움은 우리 몫이다. 측정하기 어렵지만, 한국인 전체의 도덕성과 사고능력의 평균은 박 대통령의 능력 이상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부분의 총합은 전체와 같지 않다. 그가 대통령이 된 이유와 그간의 과정은 한국인 개개의 도덕성과는 별개로, 한국 사회라는 유기체의 도덕적 역량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배세력의 도덕성에 대한 분노의 끝이 결국 사회의 전반적인 도덕적 역량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를 고민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대통령의 도덕적 사고 능력은 유아수준

 

나는 종교에 문외한이지만 사회에서 흔히 사이비종교라고 불리는 이들과 잠시 교류해 본 적이 있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했을 때라 ‘도를 아십니까?’ 라는 말로 유명한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몰랐다. 그래서 길에서 우연히 만난 얼굴이 맑은 한 여자분이 자신을 도인이라고 소개했을 때 참 흥미진진한 일이 벌어졌다고만 생각했었다(혹시 특정 종교인들에 실례가 될까봐 밝히자면, 내가 만난 이들은 증산도 종교인들이 아니었다).

 

그 도인이 말했다. “얼굴에 총기와 외로움이 함께 서려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속마음은 늘 외롭겠네요.” 순간 나는 그 사람이 내 마음을 읽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내가 집안의 기운을 떠받치는 존재로서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내 가족에게 우환이 닥친다는 말을 들으니 불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천천히 바라보니 미심쩍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들이 내게 계속 말했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느끼는 외로움’은 사실 대단히 보편적인 감정이다. 즉 내 감정과 생각만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으면, 사이비종교인이나 무속인들이 하는 말의 대개가 얻어걸리면 장땡식이라는 걸 알게 된다.


아무리 종교가 이성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이라 해도 어떤 종교의 잡탕 교리는 정말이지 엉터리다. 예를 들어 방금 전까지는 내가 전생에 큰 뜻을 품었던 한 많은 선비라더니, 몇 분 지나지 않아 우리 집안의 모든 조상들의 혼백이 내 주위를 감싸고 있다고 말한다. “아니 그럼 우리 집안 조상들은 왜 환생을 안 하고 나만 따라다니나요?”라고 물어보면 내 손을 꼭 잡으며 “참 가엽네요. 우주의 순리를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하다니”라고 동정한다. 상식적으로 어떻게 한 명의 인간이 기독교와 불교를 비롯한 동서양 모든 종교의 섭리를 아우르고, 예수와 부처의 경지를 넘어 천지를 뒤바꾸며, 그 사람을 위해 돈을 내는 게 우리 가족의 평안과 무슨 관계입니까 라고 물어보면 다 내가 악귀에 씐 탓이라고 했다. 어느 순간 ‘아 이 사람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올 수밖에 없다. 주위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길가다 엉뚱한 사람들에게 붙잡혀 곤욕을 치룬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사이비 종교로부터 거리를 둔다.

 

작정을 하고 달려드는 사이비 종교인들을 물리치려면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들은 마치 온 세계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정말 최선을 다해 설득한다. 마음만 먹으면 우주의 기운이 나에게 모이고, 얼굴도 본 적 없는 집안 조상들이 총출동해 나를 도와준다. 길가다 돌에 걸려 넘어지는 것도 내가 우주의 기운에 반기를 들고, 사념을 물리치지 못한 탓이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들이지만 막상 겪어보니 왜 어떤 사람들은 대책 없이 사로잡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무엇보다, 나이를 먹었어도 아이 같은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벗어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리적 자기중심성을 벗어나는 것은 도덕성 발달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지적능력이 필요하다. 물론 뛰어난 인지능력과 언어능력이 훌륭한 도덕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개인의 도덕적 추론능력과 지능, 언어능력, 논리력 사이에는 실제로 상당한 관계가 있다. (*참고1, 참고2) 대통령의 언어능력과 논리력에는 늘 심각한 문제가 있어왔다. 그간 보여 온 기괴한 언어와 논리력, 행동양식, 사이비 종교에 얽힌 증거들에 비추어볼 때 대통령은 심리적 자기중심성을 전혀 탈피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당연히 높은 수준의 도덕적 사고능력을 기대할 수 없다.

 

“왜 대통령이 되려고 합니까?”- “제 꿈입니다” , “증세 없는 복지가 가능합니까?”- “제가 대통령이 되면 할 겁니다”라고 말하는 사람과, 수상 소감을 “저는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얹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인지능력, 심리적 자기중심성, 도덕적 사고능력은 실로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도덕성 연구에 관해 권위 있는 학자 중의 한 명은 미국 심리학자 콜버그 (Lawrence Kohlberg)다. 그가 ‘정의’(justice) 개념에 입각해 고안한 도덕성 발달 단계에 비춰볼 때도 대통령의 도덕적 추론 능력은 관습 이전단계, 즉 유아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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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버그의 도덕성 발달단계는 3개 층위, 총 6단계로 나뉜다.

 

전관습 단계(인습 이전 수준/ 1, 2단계): ‘보상과 처벌’에 중점을 둔다. 이 단계에서 아이는 어떤 행위를 했을 때 보상을 받으면 좋은 행동, 벌을 받으면 나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관습 단계(인습 수준/ 3, 4단계): ‘타인과의 관계와 법’을 중시한다.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을 기쁘게 하고,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4단계는 사회적 규칙, 법, 권위에 대한 존중을 도덕적 판단의 근거로 본다.

 

탈관습 단계(인습이후 수준/ 5, 6단계): 도덕적 자율,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원칙들이 작동한다. 5단계는 사회계약 정신을 지향하는 단계로, 법과 규칙에 대한 의심 없는 지향을 넘어 보편타당한 가치들에 초점을 맞춘다. 법은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기에, 보편적 규범을 침해하는 법은 준수하지 않는 것이 정의라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6단계는 초월적인 성인(聖人)의 단계로 학문적으로는 입증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있다.

 

* 콜버그의 도덕성 모형의 한계를 비판하는 이들은 이것이 서구의 ‘정의(justice)’개념에 입각한 것이라 문화인류학적 상대주의와 어우러지지 못한다고 말한다. 허나 콜버그의 도덕성 발달모형은 문자가 없는 원시 부족에서 서구의 대도시까지 세계 각지에서 여러 차례의 후속 연구가 실시되었고, 범문화적 타당성과 유효성이 상당히 입증되었다. 또 최근 다소 의심이 되는 일이 벌어지고는 있으나, 그래도 한국은 부족사회라기보다 공식적인 민주공화국이니 대통령의 도덕성을 ‘정의’ 개념에 입각해 판단해 보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사이비 종교인들의 도덕 윤리는 ‘상과 벌, 복종’의 틀 안에서만 작동한다. 지도자에게 의심 없이 순종하면 좋은 일이 생기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 기본적으로 기복신앙과 다를 것이 없다 해도 이들의 신앙은 특정 개인의 이익을 위해 얼토당토하지 않은 논리들을 생산하고, 신도들을 세상과 단절시키며, 반사회적, 반인륜적 행동까지 서슴지 않게 만든다.

 

대통령이라는 직업을 가진 자는 늘 도덕적 딜레마 상황에 놓인다. 남북문제에 있어서 외교부, 통일부, 국방부의 의견이 갈릴 것이고, 교육문제에 있어서도 교육부와 기획재정부, 고용노동부의 견해가 각기 다를 것이다. 재벌개혁, 의무급식, 통상조약, 노인복지 등 풀어나가야 하는 모든 문제가 도덕적 딜레마다. 그래서 대통령의 전문성은 특정 분야에 대한 식견보다는 고도의 도덕적 사고능력, 추론능력, 의사결정능력에 달려 있다. 한국은 이런 자리에 사회계약에 대한 이해는 고사하고, 관습 수준에도 이르지 못한 도덕적 사고력을 가진 자가 앉아있다.

 


학교의 도덕적 사고 능력은 어린이 수준

 

학교라는 유기체의 도덕적 역량 역시 좋게 보아도 관습 수준을 넘지 못한다. 많은 교사들이 학생들의 생활에서 정작 중요히 다루어야 할 문제들은 외면하고, 생각과 취향의 차이에 불과한 것에는 필요 이상으로 열을 올리며 제재한다. 예를 들어 어른에게 먼저 인사하지 않는 학생, 화장을 하는 학생, 지각을 하는 학생들은 꼼꼼히 잡아내어 기록한다. 허나 학교 내 신체적, 관계적 폭력과 학내 비리, 교육부가 자행하는 기본권 제한과 불법사찰 등에는 대단히 무감각하다. 다시 말해, 학교는 사회의 소소한 관습을 어기는 것에는 지나치게 민감한 반면 보편적 규범과 원칙이 무너지는 상황에서는 도덕적 역량이 마비된다.

 

꼭 학교만의 문제도 아니다. 우리 사회의 많은 이들이 연예인들의 역사상식 부족, 관습에서 벗어난 사생활에 지나치게 엄격하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삶에서 보편적인 규범들이 어긋날 때는 도덕적인 분노와 실천능력이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수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그간의 도덕 교육이 관습에 불과한 것들을 마치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규범인 양 강제해왔기 때문이다. 관습 너머의 것들에 대해 고민할 기회 자체가 차단되는 것이다.

 

자신의 도덕적 역량을 직시하고,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는 ‘관습이 보편적 양심의 가치와 충돌할 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 상사로부터 부당한 지시를 받았을 때, 내 가족이 공적 영역에서 중대한 잘못을 했는데 그것을 나만 알고 있을 때, 파렴치한 범죄자인 줄로만 생각했던 이가 알고 보니 장발장처럼 기구한 사연이 있는 자인 걸 알았을 때 등이다. 양심을 위해 고민하고, 불복종을 불사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도덕적 창의성이 발휘되며 그 역량이 발전한다.

 

‘관습’은 인간의 성장 과정에서 암묵적인 지시와 압력 속에 익히게 된다(인사하기, 수저로 밥 먹기 등). 그러나 ‘보편적 양심 규범’은 경험을 통해, 자신의 행동이 자신과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관찰하며 귀납적으로 생성되고, 논리적으로 도출된다고 보는 것이 수많은 사회심리학자들의 주장이다. (*참고2) 가르쳐야 할 가치덕목을 미리 정해 놓은 후 그것이 소중한 이유와 방법을 논하는 연역적인 도덕 교육 방식 자체가 보편적 양심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단히 역행한다. 즉 기존의 도덕 교육과 같은 ‘교화’의 방식은 관습을 넘어선 양심의 규범을 내면화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복잡한 추론을 수행해야 하는 딜레마 상황에서 권위적인 문화권의 청소년보다 토론과 의견 교환이 권장되는 문화권의 청소년들이 훨씬 빠르고 정교하게 추론을 수행했다. 한국 청소년들의 윤리의식이 낮음을 개탄하며 인성교육을 강화할 때가 아니라 그간의 도덕 교육, 인성교육을 그 철학, 내용, 방법의 뿌리부터 철저히 의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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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거 하지 말고..

 


그래서 도덕 교육을 어떻게!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 도덕성 신장을 위한 대안을 내놓으라, 답을 달라는 동료들도 있었다. 도대체 답을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도덕은 문제집 풀 듯 답 쓰고, 채점하고, 너는 80점 나는 90점, 칼로 무 베듯 똑 떨어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세상만사를 단칼에 정리해 깔끔히 서술한 도덕 교과서가 경박하고도 위험한 이유가 그래서다.

 

내가 도덕 교과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도덕에 관한 교육이 필요 없다거나, 교사는 지식만을 가르쳐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도덕 교과가 없어진다고 해서 도덕에 관한 교육이 없어질 리가 있겠는가.

 

다만 도덕성 발달을 위해 가는 길에 정답이란 없고, 교사나 부모와 같은 어른들은 정답을 주는 존재도 아니다. 다음은 6학년 영어 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6-○

 

비교급 표현을 배우는데 예시문 중 하나가 ‘Mine is longer than yours’ 이었다. 남학생 서너 명이 눈을 마주치며 크큭 웃었다. “야, 내 것이 네 것보다 길거든?”, “너 야동 좀 그만 봐라”. 딴에는 속삭인 것 같았지만 나를 비롯한 모든 학생들에게 들렸다.

 

“여러분 혹시 언어적인 성희롱에 대해 알고 있어요? 말하는 사람의 의도가 그렇지 않았다 해도 듣는 사람이 불쾌감을 느끼면 성희롱이 되는 것 말이에요.”

 

“네, 알아요! 성교육 시간에 배웠어요!”

 

여학생들이 기다렸다는 듯 목청을 높이더니 남학생들이 교실에서 걸핏하면 야한 이야기를 해서 불쾌한 적이 많았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남학생들은 잠깐 당황하더니 장난으로 야한 이야기는 했어도, 성희롱을 한 건 아니라고 항변했고 학생들 사이에 약간의 고성이 오갔다.

 

“선생님 생각은 이래요. 만약 여러분이 삼삼오오 모여 집에 가다가 ‘야, 아까 영어 선생님이 Mine is longer than yours’ 라고 말할 때 웃기지 않았냐?, 내 것이 네 것보다 길거든?, 야동 좀 그만봐라’ 고 했으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선생님이 문제가 된다 안 된다 말하는 것 자체가 웃긴 게, 그건 여러분의 사적인 대화잖아요. 선생님이나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모든 사생활을 알 필요도 없고, 알아서도 안 되죠.

 

하지만 여기는 교실이고 지금은 수업시간이잖아요. 불특정 다수가 모여 있는 공적인 장소, 공적인 시간이기 때문에 그런 농담은 삼가는 것이 옳다고 봐요. 여러분은 별생각 없이 말했겠지만 여기 있는 다수 중 누군가는 심히 불쾌감을 느낄 수 있어요. 그러니 성희롱이 될 위험도 충분하죠. 최근에 한 국회의원이 다른 국회의원에게 ‘내가 그렇게 좋아?’라는 말을 했다가 성희롱으로 문제가 돼서 윤리위원회에 제소가 되기도 했어요. 다른 시간, 다른 장소, 다른 관계였다면 농담이 될 수 있는 말이지만 그 곳은 국정감사 자리였거든요. 선생님 생각에는 여러분도 이제 사적인 대화와 공적인 대화를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여러분 생각은 어떤지? 아 그리고 또 하나, 이건 내 경험에서 나온 의견인데 본인이 의도치 않았어도 내가 한 실수로 인해 상대방이 불쾌감을 표시할 때 일단 빠르고, 강하게 사과하는 게 좋더라고요.”

 

..........

 

“선생님, 애들한테 당장 사과해도 되요? 지금 하고 싶어요.”

 

“그럼요.”

 

(남학생 몇몇이 큰 소리로) “미안합니다!”

 

학생들은 웃고, 나는 사과해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다시 수업을 진행했다.



 

교사 개인의 가치관이라는 변수는 학생들과의 대화, 교실 상황에 큰 영향을 끼친다. 저 상황에 다른 교사가 있었다면 다른 측면에 방점을 찍고, 다른 형태의 대화를 했을 것이며 그것이 당연하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결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답을 줄 수 없다. 나는 학생들에게 공적인 대화와 사적인 대화를 구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 그건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나누는 기준과 범위는 어떻게 정해야 하는가?', '사적인 맥락이라면 개인의 어떤 말과 행동도 용납될 수 있는가?' 학생들은 앞으로의 삶에서 이런 수많은 도덕적 문제에 끊임없이 직면할 것이다. 애초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해야만 하는 일은 학생들이 도덕적 문제 상황에 '참여’ 하도록 격려하는 것이지, 보편타당한 답을 주는 일이 아니다.

 

도덕 교과서가 없으면 도덕을 가르칠 수 없다는 말은 참으로 싱거운 소리다. 학생들의 생활 속에는 고민할 문제들이 넘쳐난다. 다음은 쉬는 시간에 시작된 일이다.

 


6-△

 

쉬는 시간. 남학생 몇몇이 서로 밀치며 장난을 치다가 한 남학생이 떠밀려 다른 남학생의 무릎 위로 주저 않았다. “어우, 너 게이냐?” 큰 웃음이 터지고 아이들이 ‘게이’, ‘더러워’ 라는 말들을 하며 놀리고 웃는 중 수업 시작종이 울렸다.

 

“여러분 아까 쉬는 시간에 게이라는 말을 쓰던데 그게 무슨 뜻인지 알죠?”

 

“네, 남자끼리 좋아하는 사람들이요...”

 

“그렇구나. 그런데 그 말을 우리는 왜, 누구를 놀리고 조롱할 때 사용하는 걸까?”

 

게이라는 말을 처음 시작한 학생이 당황하더니 말했다.

 

“선생님, 저는 ○○가 게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그냥 장난친 거에요.”

 

“장난인 거 알아요. 장난쳤다고 뭐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게이라는 말은 어떤 성적 취향을 나타내는 단어인데 왜 우리는 이 단어를 남을 놀리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는 걸까, 이래도 되는 걸까라고 의심을 가져보자는 것뿐입니다. 여러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영화나 티비에서도 보면 코미디언들이 성소수자를 개그 소재로 삼는 경우가 많던데요?

 

우리 6학년들 중에 이성교제 하는 친구들도 꽤 있고, 맘속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학생들도 많지요? 그래서 여러분도 알겠지만 우리가 누구를 좋아할 때 ‘나는 꼭 저 사람을 좋아하고 말겠어!’, ‘나는 여자니까 남자를 좋아하고 말겠어!’ 라는 굳은 결심을 하지는 않잖아요? 인종, 외모, 취향처럼 타고나는 것에 가까운 것들 때문에 조롱당하고, 불평등한 사회적 지위를 갖게 하는 사회가 과연 옳은 걸까... 선생님은 강한 의심이 듭니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취향 때문에 차별당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요.”

 

“그렇지만....선생님...저는 게이들을 차별하자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게이는...좀...싫어요..”

 

“솔직히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렇지만 선생님은 지금 절대로 게이를 좋아하라거나, 싫어하라거나 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 역시 여러분의 취향이기 때문에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부분이에요. 예를 들어 흑인을 내 타입이 아니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검둥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싫은 감정을 마구 표현하고, 흑인들의 인권을 제한하는 사회적 결정을 내리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입니다. 성소수자의 인권도 마찬가지 측면에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요? 어려운 문제일 수 있어요. 우리 앞으로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한번 생각해봅시다.”



 

기존의 도덕 교육을 비판하며 도덕 교과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면 ‘도덕적 아노미 상태인 사회에서 도덕 교과를 없애는 것은 영양실조인 사람에게 밥그릇을 빼앗는 것’, ‘그건 교사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 이라고 해석하는 동료 교사들이 있었다.

 

내가 보기에 도덕적 아노미 상태에서 많은 교사, 학교, 교육부 그리고 사회 전반의 어른들은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다. 성소수자 인권에 대해서 아예 다루지 말라고 지시하는 교육부는, 휴일을 이용해 결의대회를 갖는 교사들마저 색출해 단속하는 것이야말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학생들의 머리모양이나 복장 감시에는 지나친 에너지를 낭비하면서도 수학여행 업체 선정에서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교장에게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사드배치 반대집회에 참여하는 학생들에게 무단결석이라 으름장을 놓고, 당장 퇴진하는 것이 마땅한 대통령 때문에 촛불집회에 참가하는 학생들을 제재하는 학교와 교육청이 생각하는 ‘도덕’이 과연 무엇인지 나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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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고는 위 대자보가 '아직 미성숙한 가치관을 지닌 미성년자의 글'이라며 교내 게시를 금지했다(관련기사 링크)

 

도덕이란 삶에 ‘참여’해, 스스로 세상을 ‘구성’해가는 ‘과정’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답을 주는 존재도, 줄 수 있는 존재도 아니며 온갖 정답들로 채워진 도덕 교과서는 정작 조금도 도덕적이지 않다. 아이들이 직면하는 복잡한 삶의 국면들이 성장의 기회가 되도록 도와주는 일, 그 과정에서 학생들이 도덕적 영감을 얻을 수 있는 말과 행동을 실천하고, 보여주고, 나누는 것.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들은 그런 것이 아닐까.

 

복잡하고, 유쾌하지 않은 현실로부터 아이들을 최대한 떨어뜨려 놓는 것이 도덕이라고 여기는 교육은 이토록 허약한 사회를 만든다. 답이 아니고 길이 아니어도 좋다. 부딪치고 다쳐도 괜찮다. 내 머리와 내 가슴으로 만든 도덕이 없는, 껍데기뿐인 인간이 되는 것보다 낫다. 삶에 뿌리를 내린 도덕, 현실을 직시하는 강건한 교육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옳다는 용기를 가져보는 건 어떨까. 근엄하고 엄숙해질 필요도 없다. 나만의 도덕성을 갖추어가는 것은 실은 가슴 뛰게 즐겁고 감동적인 일이다.

 



* 참고1 Tetlock P.E., Suedfeld P., “Integrative complexity coding of verbal behavior”, in Antaki C. (ed), Analyzing lay explanation: A casebook of methods, Beverly Hills, Sage, 1988, P. 72-87: Sanders C. E., Lubinski D., Benbow C.P., “Does the defining issues test measure psychological phenomena distinct from verbal ability?”,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1995, 69, p. 498-504

 

* 참고2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 로랑 베그(Laurent Begue), 2013, 부키출판

 


<덧붙임>

 

‘금치산자, 유아, 어린이’는 도덕성의 인지적 발달단계를 말하기 위한 비유적인 표현일 뿐 이들의 도덕성이 형편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금치산자, 유아, 어린이 여러분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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