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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학생들은 모두 학원에 다니느라 정신없이 바쁘게 지낼 것 같지만, 사교육 같은 건 구경도 못 하는 학생들도 의외로 많다. 어떤 아이들은 학원 다니는 친구들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내가 두 번째로 근무했던 학교에는 저소득층 가정의 자녀들이 비교적 많았다. 학교를 옮긴 첫 주, 학생들의 체구가 이전 학생들과 달라 보이는 것이 내 착각인지 사실인지 궁금했다. 지나치게 순종적이거나 혹은 지나치게 거친 아이들이 많아 보이는 것이 단편적인 교육 사회, 교육 심리 지식으로 인한 내 색안경인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흔히 성적으로 대변되는 학생들의 지식수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가 의심의 여지 없이 현저히 낮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학교의 마지막 해, 두 번째 학교의 첫 해, 그러니까 두 학교를 걸쳐 두 해 동안 연달아 나는 영어 교과 전담교사를 맡았다. 지난 학교의 많은 아이들이 일기를 영어로 쓸 수 있었다. 두 번째 학교의 많은 6학년들은 알파벳도 쓸 줄 몰랐다(알파벳 읽고 쓰기는 초등 영어 3학년의 성취기준이다). 학교를 옮기면서 비교집단이 명확해진 후에야 나는 부모의 경제력과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가 갖는 아픈 상관관계를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

 

부모가 아이를 위한 최소한의 경제적 뒷받침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이가 학교에서 수업에 집중할 수 있는 정서적 뒷받침 또한 해줄 수 없음을 의미한다. 부모가 여러 직장을 뛰어가며 아등바등 살아야 겨우 먹고 산다는 건, 아이가 아침밥을 먹고 학교에 등교를 하는지, 배가 고파서 수업에 집중을 할 수 없는 건 아닌지, 생리대가 없어서 학교에 못 가는 것은 아닌지 보살필 시간이 없음을 뜻한다. 아이가 요즘 무슨 책을 읽고, 어떤 과목에 흥미를 느끼는지 물을 시간이 없다는 건 부모가 아이에게 교육에 대한 존중,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심어줄 수 없다는 걸 말한다. 그렇게 가난과 교육의 부재는 대물림된다. 사람들이 입에 담기도 싫어하는 ‘계급 재생산’은 사회의 그 어떤 곳보다 학교에서 적나라하다.

 

오래 전에 알았던 친구가 ‘너는 공부 잘해서 좋겠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스무 살도 넘은 사람이 하는 말치고는 너무 아이 같고, 생뚱맞아서 그땐 웃었다. 십여 년이 지나, 두 번째 학교의 아이들을 대하면서 그 친구가 했던 말이 부쩍 생각나기 시작했다. 그 말이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너는 공부 잘해서 좋겠다

 

22살 때 여름방학 동안 놀이공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같은 사장 아래서 일하던 스무 명가량의 알바생들이 대부분 내 또래였다. 학교를 다니지 않고, 여기저기서 알바를 한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뜨끔한 일이지만, 내 또래 중에도 대학교에 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그 친구의 별명은 ‘노란머리’였다. 다들 초록색 유니폼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그 친구의 짧은 노란 머리가 유난히 노랗게 보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군대에 갔다가 6개월쯤 전에 제대를 했다고 했다. 많이 놀았을 것처럼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착한 사람이었다. 청소하시는 아주머니가 자기 덩치만 한 큰 쓰레기 자루를 들고 끙끙거리며 지나가면 어디서든 나타나 자루를 낚아채서 사라졌다. 아주머니들이 고맙다고 음료수라도 건네면 ‘아, 됐어요! 됐어!’라고 손사래를 쳤는데 그 손모양이 ‘아, 꺼져요! 꺼져!’라고 보일 정도로 거칠었다. ‘노란머리’의 목 뒤와 팔뚝은 자주 빨갛게 익어 있었다. 그의 부모님이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데 주말이면 내려가 일을 도왔기 때문이다. 가끔 폭우나 태풍 때문에 일손이 필요해지면 평일에라도 내려가 일을 돕고, 잠 한숨 안 자고 새벽차를 타고 올라왔지만 지각 한 번 하지 않았다. 말투만 투박할 뿐이지 며칠만 함께 있어 보면 누구라도 느낄 만큼 선량한 사람이었다. 짠돌이 사장도,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도, 같이 일하는 알바생들도 모두들 그를 좋아했다.



“야, 너 교대 다닌다며? 거기 선생님 되는 학교지?”


“어? 어. 초등학교 선생님.”


“거기서 뭐 배워? 초등학교 책 가지고 배워?”


“하하, 아니. 그냥 뭐... 국어, 수학 이런 거 하다가 갑자기 뜀틀도 하고, 배구도 하고... 뭐 그래.”


“야... 대학생들이 뜀틀을 해? 되게 재밌겠다.”


“별로 재미없는데...”


“♪술래잡기 ♬ 고무줄놀이, 말뚝박기, 망까지, 말타기~”


“뭐야 그게? 노래야?”


“야, 너는 어떻게 선생님 될 사람이 이 명곡을 모르냐?”

 


동요인가 했는데 <선생 김봉두>라는 영화의 삽입곡이었다. 정말 좋아하는 노래였는지 핸드폰 노래방에 저장까지 되어 있었다. 동요 같기도, 건전가요 같기도 한 것이 내가 싫어하는 스타일이었는데 그 친구는 나만 보면 핸드폰 노래방 반주에 맞춰서 노래를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노란머리’가 불쑥 말했다.



“내 꿈이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는데. 내 고향에서 애들이랑 술래잡기, 말뚝박기 이런 거 하고...김봉두처럼.”


“하면 되잖아. 우리 학교로 와.”


“거기 공부 잘해야 들어가는 데잖아.”


“공부 뭐 까짓 거 하면 되지.”


“그래? 근데 나는 공부를 진짜 많이 해야 되는데...?”


“내가 도와줄게!”


 

나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할 때 쓰던 고1 용 영어, 수학책들을 주섬주섬 챙겨와 그 친구에게 건넸다. 알바 기간이 끝날 때까지 내가 매일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책을 펼쳐 든 친구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몇 초 지나지도 않아 내게 책을 던졌다. 낑낑거리며 들고 온 사람한테 고맙다는 말은 못할망정 책을 던지듯 돌려주는 것이 언짢았다. ‘노란머리’는 화가 난건지, 장난을 치는 건지 모르겠는 투박한 말투로 그랬다. 책 봐봤자 뭔 소린지 하나도 몰라. 중학교 때부터 공부 포기했는데 지금부터 한다고 뭐가 되겠어? 3년을 틀어박혀 공부만 해도 안 될걸. 나는 조금 짜증이 났다. 그 친구가 시작도 하지 않고, 포기를 한다고 생각했다. 괜히 나만 진지했던 것 같아 민망하기도 했다.

 

여름이 끝나고, 나는 학교로 돌아갔다. 몇 번 연락이 닿았다. 몇 달간 공사장에서 엄청나게 일을 해서 돈을 조금 모았고, 대학에도 합격했다고 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작은 대학의, 생각지 않았던 학과였다. 김봉두 되기는 영영 글렀구만? 농담을 했다. 인터넷 채팅방에서 나눈 마지막 대화에서 ‘노란머리’는 내게 닭볶음탕 만드는 법을 알려줬다. 그러다가 그 친구가 뜬금없이 말했다.



“너는 공부 잘해서 좋겠다.”


 

툭 삐져나온 말이 너무 초딩 같아서 조금 웃었다. 스무 살도 넘은 대학생이 하는 말 같지가 않았다. 그게 마지막 대화였다.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는데, 1년쯤 후에 우연히 들어간 친구의 싸이월드에서 ‘노란머리’의 영정사진을 봤다. 그는 학교에서 단체로 연수 같은 걸 갔다가,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죽었다. 그것도 다른 나라에서. 그래서 여권 사진이 영정사진이 됐다. 사진 속에서 그는 까맣게 돌아온 원래의 머리색을 하고, 다부지게 웃고 있었다.

 


학교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내 친구의 꿈은 선생 김봉두 같은 시골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소박하기 그지없던 꿈이었지만 결국 이루지 못했다. 분명 누군가는 그건 그 친구 개인의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라 말할 것이다. 하지만 누적된 학습결손, 자신감 부족이 내 친구만의 잘못이었을까? 한국의 공교육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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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벳도 다 못 쓰는 고3, 누구 책임인가'

출처 - <오마이뉴스>

 

위 기사에는 무서울 정도로 성난 댓글들이 달려있다. 돌대가리를 가지고 소설을 썼다, 교사들이 업무하느라 얼마나 바쁜지 아느냐, 부모 탓이 더 크다며 으르렁댄다. 하지만 엉망이 된 공교육 현장과,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르는 수많은 교사들을 지켜봐 온 나는 이 기사 속의 고3 A씨가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가 안 봐도 비디오처럼 펼쳐진다. 초등 3학년 때 이미 도달했어야 할 성취기준에도 도달하지 못한 채 6학년이 된 많은 학생들을 나는 수년째 대하고 있다. 이 아이들이 여기서 조금만 더 미끄러지면 고3 A 씨처럼 될 게 뻔해, 3년간 놓친 것들을 잡아가느라 매일이 다급하다. 위 기사를 쓴 풋내기 교생만큼 욕을 얻어먹더라도 이 말은 꼭 해야겠다. 학생의 움츠러듦에 아프게 공감하는 것에 대단한 교육학 지식이나 경험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 최소한의 직업윤리를 가진 교사라면 이런 학생을 걱정하는 교생에게 ‘니가 뭘 안다고 떠드냐, 교사들이 업무하느라 얼마나 바쁜지 아느냐’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할 수는 없다.

 

솔직히 돌아보자. 도대체 우리가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하느라 이렇게 바빠야 하는지.

 

이제 초등학교에서 한글은 입학 전에 떼고 오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 못한 학생들은 문화실조인양 여겨지기까지 한다. 수학이나 영어처럼 학습 결손이 누적되면 도무지 따라가기 힘들어지는 과목의 성적은 부모의 경제력, 사교육의 여부가 결정적이다. 이런 말을 하면 가난한 집 학생들도 공부 잘하는 경우 많다고 입에 게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사람들 많다. 안다. 하지만 학교 간, 학구 간 성적 통계를 한번 보라. 소위 일류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이 사는 지역, 부모의 직업들을 보라. 불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균일하다. 배움의 결과가 학교 외적인 요인에 달려있다면, 공교육의 교사들은 왜 존재해야 하는가?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교사는 수업을 통해 학생에게 지식을 전해야 한다.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면 영양실조에 걸리듯, 건강한 정신을 위해 지식이라는 영양분이 필요하다. 학생들이 지식을 바탕으로 현실을 직시하고, 비판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고급 지식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교사의 의무다.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사람은 스스로의 생각을 구조화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 기본적인 지식과 생각하는 훈련은 필수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학교가 지식을 너무 많이 가르친 것이 문제이니, 이제는 학생들의 ‘창의인성’에 집중을 해야 한단다. 정말 웃기는 소리다. 학교가 지식을 너무 열심히 가르친 게 문제가 아니었다. 제대로 된 교사가, 제대로 된 지식(학생에게 필요하고, 학생이 흥미를 느끼고, 시대의 요구에 부합하는 지식)을, 제대로 된 방법(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으로 가르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초등학교에 일제고사가 실시되던 몇 년 전까지 부진아 지도를 위한 예산 지원이 컸다. 그러자 대부분의 학교가 지식을 ‘때려 넣는 것’에 집중하며 학생들을 시험문제 잘 푸는 기계로 만들려 했다. 파행적인 수업이 판을 치고, 상품권 등으로 학생들의 점수 향상을 유인하는 등의 비교육적 사례들이 넘쳐났다. 학교가 무엇을 하는 곳이고, 교사가 왜 학생에게 지식을 가르쳐야 하는지를 정확히 이해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모든 교육활동은 전시행정으로 전락한다. 교육부가 발표한 ‘인성교육 5개년 계획’이 아둔함의 극치로 느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경제개발 5개년 계획도 아니고). 이제 학교와 교사들은 교육계에서 ‘핫’한 인성 교육 프로그램을 얼마나 잘 돌리느냐에 따라 등급이 나눠지게 됐다. 도대체 언제쯤에야 맘 편히 아이들만 열심히 가르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교사 S 와 교사 B

 

교사 S: 고학년 담임으로 수업과 담임 업무, 학교 행정업무를 빈틈없이 처리한다. 백 시간이 넘는 연수시간을 (주로 마우스 클릭질로) 채운다. 수업연구대회를 나가는 교사 수가 많아야 학교가 좋은 점수를 받으니, 젊은 사람들은 의무적으로 나가란다. 그래서 꾸역꾸역 수업 연구 대회도 나간다. 보고서만 내면 승진 가산점을 주는 것도 있다는데 혹시 모르니 받아 둬야 되나 싶어 기웃거린다. 개인이 교사라는 직업에 마땅히 써야 할 에너지가 100 이라면, 무리를 해가면서 120 정도의 에너지를 쏟는다. 그 중에 학생들에게 쏟는 에너지는 40 정도다. 할 일이 많아 칼 퇴근 같은 건 못한다.

 

교사 B: 수업만 열심히 한다. 연수는 일 년에 한두 개 정말 필요한 것만 듣는다. 수업으로 대회를 열고, 등급을 나누는데 동의할 수 없다. 아무런 대회도 안 나가고, 가산점 준다는 보고서도 안 쓴다. 업무는 빵꾸 안 날 정도로만 처리한다. 사람 모아놓고 쓸데없는 소리만 잔뜩 늘어놓는 것 같아 교무회의도 안 간다. 수업이 끝나고 남은 근무시간은 성적이 낮은 학생들을 따로 모아 지도하고, 다음 수업 준비를 한다. 교사라는 직업에 마땅히 써야 할 에너지가 100 이라면, 평소 95 정도의 에너지를 쓴다. 나머지 5는 돌발 상황에만 쓴다. 학생들이 폭력적인 행동을 할 때, 이상한 사람을 상대할 때, 관리자가 도발할 때 등. 학교에서 쓰는 에너지 중 학생들에게 쏟는 에너지는 90 정도다. 반드시 칼 퇴근한다.

 

둘 다 내 얘기다. 교사 S가 신규 시절의 나고, 그 후의 나는 교사 B다. 교사 S였던 신규 시절, 난 내가 완벽하고, 책임감 있는 교사이자 유능한 공무원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완벽함에 대한 내 욕망은 무엇이 중요한지를 모르는 아둔함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학교, 교육청, 교육부에서 권장하는 성과지표, 평가지표는 모조리 무시해 버리기로 결심했다. 관리자가 싫어하든 말든 상관없지만, 동료 교사가 ‘월급 받는 사람이 그러면 되냐’는 말을 할 때는 좀 힘들었다. 화가 나서 더 내 맘대로 했다. 다 걷어치우고 나니 막상 교사로서 할 일은 많지 않았다. 수업을 준비하고, 부족해도 내 능력껏 열심히 가르친다. 1~2주에 한 번씩은 작은 시험을 보고, 기준을 채우지 못한 학생들에게 보충 지도를 한다.

 

대단히 높은 이상을 가져서가 아니다. 아이들이 졸업 후 중학교 교과서를 펼쳤을 때 이게 글씨냐, 지렁이냐 라는 암담함을 느끼지는 않아야 해서다. 초등학교 때 이수해야 할 기본적인 것만큼은 배우고 가도록 하는 게 상식적으로 교사가 할 일이기 때문이다. 알파벳도 못 읽던 6학년이 <sand>라는 단어를 보고, ‘사..산..드?’라고 읽으면 박수를 치고, 눈을 마주치고 웃는다. 하는 일은 이게 다다. 교사B, 현재의 나는 심히 게으르다. 그러나 내가 만약 학부모라면, 난 내 아이를 가르칠 교사가 교사S가 아닌, 교사B였으면 한다. 학생에게 쏟는 에너지의 양이 많은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잘 돌보는 여유 있는 교사가 아이들도 잘 돌본다는 것에 조금의 의심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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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B가 된 이후부터, 나는 한해도 빠지지 않고 <선생님은 B등급입니다>라는 문자를 받고 있다. 학교에서 성과급은 S, A, B로 나눠지는 데 내가 바로 ‘최하위 30% 교사’라는 통보다. 어차피 각오하고 선택했다. 나는 운 좋게 선택이라도 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전혀 선택의 여지 없이 고생스럽게 교사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절대 다수라는 걸 알기 때문에 B등급을 받는다고 해서 개인적으론 불만이 없다. 하지만 내 개인의 역사와는 별개로 성과급 제도가 현장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주범 중에 하나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학교에서 성과급 지급 기준을 정할 때마다 교사들은 본인 소속팀에 유리한 기준을 짜기 위해 얼굴을 붉히며 싸운다. 등급을 문자로 통보받은 날이면, 나는 더 짜낼 힘도 없을 만큼 열심히 일했는데도 왜 최하위 등급을 받아야 하느냐고, 내가 무슨 B등급 돼지고기냐고 격분하는 교사들로 술렁인다. 분노는 곧 높은 등급을 받은 동료에게 향한다. 나만큼 일하지 않은 것 같은데 나보다 등급이 잘 나온 걸 보면 분명 관리자한테 잘 보인게지. S와 A들은, B들의 흘김을 받는다. 그러나 정작 S등급을 받은 사람들은 미안하고, 민망하다. 물론 가끔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노예화가 되어 버린 교사들은 ‘억울하면 지들도 부장 달고 일하던지’라는 따위의 말을 지껄이기도 한다.

 


아둔함과 사악함

 

교사 성과급 제도는 학생에게 헌신해야 할 교사들을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르는 바보들'로 만든다. 말도 안 되는 전시 행정성 사업을 벌이고 업무 폭탄을 떨어뜨린 다음, ‘일 많이 하면, 돈 더 줄게’ 라고 하면 된다. 교육과 교사라는 엄연한 공적 자원이 지배세력에 의해 사유화된다.

 

부지런하기만 하고 아둔하기 그지없는 리더가 공동체에 주는 피해는 막심하며, 사악하다. 교사도 마찬가지다. 어떤 교사들은 얼마나 바쁜지 ‘학교가 뭐 공부 가르치는 데냐, 그냥 애들 맡아주는 데지’, ‘가르치는 건 그냥 학원에서 하라고 해’ 라고 말한다. 이렇게 바쁜 교사들은 공교육의 부재가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불평등한 상황을 심화시키는 사악한 결과로 이어진다는 고민 따위는 할 틈이 없다.

 

어떤 교사들은 ‘승진하고 싶고, 성과급 더 받고 싶으면 부장 달고, 업무 더 하면 될 거 아냐’라고 말한다. 이 쿨하기 그지없으신 교사들은 본인이 쿨하게 떠안은 업무가 본인이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어떤 피해를 주게 될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나 바빠서 ‘일 더 하고, 돈 더 받아’라는 성과급의 노예적인 논리가 완전히 체화되어 버렸다는 걸 알아챌 틈도 없다. '교사는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니까 이딴 쓸데없는 전시 행정성 사업 그만 벌이쇼!'라는 의견을 모으고 세력화시킬 시간도 여력도 없다. 아무리 사교육이 판치는 한국이지만, 잘 들여다보면 배움의 기회라고는 학교밖에 없는, 학교의 교사 말고는 아무도 지식을 전해줄 수 없는 학생들도 부지기수다. 학교에서 이런 아이들은 그냥 내동댕이쳐진다. 돌대가리 소리나 안 들으면 다행이다. 아이들을 볼모로 놓고 지금처럼 돈 장난이나 해댄다면, 앞으로의 한국 교육에 미래란 없다.

 

‘고3이 되서 알파벳도 못 쓰는 돌대가리가 왜 교사들 탓이냐. 업무 처리하기도 바빠 죽겠는데!’라고 말하는 교사는 아둔한 것인가, 사악한 것인가?

 

‘집에서 부모는 뭘 하는 거냐. 애가 초등학교 입학을 할 때까지 한글도 못 떼고 들어오다니. 바빠 죽겠는데, 어떻게 애 하나만 앉혀놓고 한글을 가르치냐’라고 말하는 교사는 아둔한 것인가, 사악한 것인가?

 

'교원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합리적 기준을 세운다는 전제 아래 정부의 방침을 조건부로 수용한다' 애초에 교사 성과급 지급에는 합리적인 기준이 존재할 수 없었다. 교권 신장을 그리 부르짖으면서, 정작 중요한 순간마다 교사들을 권력의 병풍으로 전락시키는 16만 회원의 교총은 아둔한 것인가, 사악한 것인가?

 

‘저 철밥통들, 일하기 싫다고 또 밥그릇 싸움들 하고 앉아있네. 성과급 나눠 먹기 하면 파면이라지?’ 내 아이를 가르치는 교사가 노예이길 바라는 자들, 노예는 노예를 만드는 교육밖에 할 수 없다는 걸 모르는 자들은 아둔한 것인가, 사악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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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coc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