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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입니다 추천4 비추천-1






들어가며:


최근 #00내_성폭력이라는 해시태그를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이를 보도한 매체 소식을 접하신 분들은 계실 겁니다. <은교>라는 영화를 보신 분 많으시죠. 원작 소설을 보신 분도 계실 겁니다. ‘로리로리하다’는 말이 뭔지 아시는 분도 많으시죠. 최근 이 소설의 작가가 도마에 오르고 있기도 합니다만, 저는 이 소설이 출간된 몇 년 전부터 이것이 여고생과 청장년 남성, 노년 남성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고생과 청장년 여성, 노년 여성간의 이야기였으면 과연 어땠을까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패러디가 나오지 않는다면 한번 내가 써보리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문학이라는 장르가 전혀 ‘대세’가 아닌 한국에서, 패러디라는 형식 또한 충분히 존재하지 않는 현실에서 노골적인 풍자 문학을 해 본다는 게 과연 의미가 있겠냐고 물으신다면 그냥 일종의 실험일 수 있겠습니다. 여고생 은교가 남고생 은규로 바뀌었을 때 과연 이 남탕의 현장에서 보시는 일차적 기분은 어떠신지, 꼿꼿한 남성 문인 ‘이적요’가 고고한 여성 문인 ‘이요란’으로 바뀌어 고교생 소년에 대한 사모를 고백하는 광경을 보는 기분은 어떠할지.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실험을 해 보고 싶습니다. 전혀 아무렇지 않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것이며, 웬지 ‘은규’가 역겹고 더럽다면 그 또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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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민족정론지를 표방하는 <딴지일보>에서 거의 십오년 째 신춘문예를 아직까지 진행하지 않는 것은 민족정론지의 의무를 방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심히 촉구하는 바입니다! 비록 상금을 도서상품권으로 지급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런 것은 해야 하지 않습니까! 권위 있는 딴지일보 신춘문예 문학상을 제정합시다! 또한 그간의 <딴지일보>가 받아온 여혐 알탕 이미지 쇄신과 타 매체보다 진보적인 행보를 위해 그동안 문단 내에서 소외되고 있던 여성 문인들로 심사위원을 쫙 깔아 주길 건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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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패러디 문학 <은규>

 

1. 시인의 노트


오늘은 은규, 네게 첫 편지를 쓴다. 지금은 부치지 않을 편지를 그래도 편지, 하고 말해 보고 나니 혀돌기가 사탕을 한입 문 것처럼 달콤하다. 내가 너를 처음 보았을 때, 그때 너는 정말로 사탕을 물고 있었지. 진분홍과 새빨강 언저리의 그 어디쯤의 빛깔 나는 사탕을 문 네 입술은 딱 그 사탕고 같은 빛으로 젖어 있었다. 나는 메마르며 어둡고, 너는 새빨갛고 촉촉하다. 어찌 그걸 부정하랴. 젊은 날에 만났더라면, 하다못해 한반도가 서른 살도 넘게 연하의 애인에게 최후를 지키게 했던 마르그리트 뒤라스 같은 여자를 품어 주는 땅이기라도 했다면, 어찌 됐든 너와 나 사이에 아무런 장애가 없었더라면 나는 일생 문학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너에게 편지를 쓰면 되었을 테니까. 나의 연정은 이리도 질기건만 하다못해 내가 답이라도 할 수 있게 너는 왜 내게 한 번도 종이 편지를 쓰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죽어서 글을 남기는 이런 짓 하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르는데. ‘카톡’으로 게임 메시지는 그렇게 줄기차게 날려 댔으면서. 하긴 제 시험 답안지도 제대로 채우지 않아 골목까지 국자를 들고 쫓아 나온 네 어머니에게 등짝을 얻어맞는 은규, 네게 종이편지는 너무 혹독한 형벌이다.


오늘, 내가 왜 네게 빠지게 됐는지를 오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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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너를 보았던 너의 손은,


우리 집 데크의 내 흔들의자 팔걸이에 자연스럽게 놓여 있었다. 소나무 잔가지의 그늘이 조각 같은 너의 손등 위에 적막하게 흔들리고 있었지. 분홍빛을 띈 손가락들은 단단한 연필처럼 길고도 튼튼해 보였고, 짧게 깎인 복숭앗빛 손톱은 정결했다. 너의 팔목은 내 발목보다 두꺼운 것 같았고, 젊은 미루나무의 가지처럼 늘씬하고 강건해 보였다. 그 팔목으로부터 손가락 사이사이로 퍼져가는 핏줄들은 강에서 뻗어 나가는 냇물처럼 힘찼다. 오랫동안 뛰는 일이 없었던 내 가슴이 갑자기 요동치기 시작한 것은 아까도 말한,


네가 물고 있던 사탕의 막대기가 잠든 너의 숨결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젖은 네 입술이 봄 햇살을 받아 반짝, 빛나던 순간이었다.


그 숨소리는 아주 가느다란 것 같으면서도 통통, 소리가 날 듯이 아주 힘차게 호흡하고 있었지. 바로 그 숨소리가 네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막힌 혈관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어린 심장의 세찬 떨림, 웬만한 여자아이들이라면 모두 부러워할 만한 길고 촘촘한 속눈썹이 볕을 받아 상기된 네 뺨에 드리우는 그늘, 내가 아침마다 마시는 커피 한 잔 정도는 충분히 고이고도 남을 것 같은 깊숙한 네 쇄골 움푹 파인 자리, 대형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 때 머플러에서 나는 소리처럼 낮고 부드러운 네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보고서 느꼈다. 내가 평생 갈망했으나 이루지 못했던 로망이 거기 있었고, 머물러 있으나 우주를 드나드는 숨결의 영원성... 집어치우자, 은규야.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와서 막대사탕을 빨면서 드르렁드르렁 퍼질러 자고 있는 너를 보면서 나는, 환호했다. 지금껏 내 삶에는 시쳇말로 ‘아재’ 천지였기 때문이지. 코를 골면서 퍼질러 있는데도 아름다운 생물체가 있을 수 있다니. ‘총각’이라는 어휘가 얼마나 신비한지 너는 모를 테지. 사람들은 흔히 산 제물로 처녀가 바쳐진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보다 몇 배 더 고급한 제물이 있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으니 그것은 총각, 그것도 숫총각이란다. 왜인지 알겠니? 처녀 같은 것보다 몇 배 더, 더 드물기 때문이지. 드문 것이 귀하고 귀한 것이 고급하지 않겠니. 너를 처음 만난 순간 웬 소년이 잠들어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사실 거짓을 말했다. 내가 온갖 불온한 시대를 견디면서, 문학을 하는 여성으로 살아오면서 그 숱한 아재들을 견디면서 실은 내가 간절히 그리워한 것은 바로 ‘총각’, 그것도 깨끗한 총각의 숨결이었다는 것이다. 네 숨결 한 줄기에 비하면, 내 문학을 칭송한 그 모든 아재들의 찬사는 모두


그따위것


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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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사탕을 문 네가 잠결에 혀를 내밀어 사탕 빛깔로 물든 네 입술을 핥던 순간, 네 모습은 내 눈앞에서 한순간 소년에서 총각으로 피어올랐다. 너를 깨우지 않으려고 살며시 몇 발자국 더 나아가 뉘 집 아이인가, 하고 네 생김새를 들여다 보았을 때 두어 개 풀려 있던 네 하복 단추 사이로 웬 무늬가 보였다. 하얗고 마른 듯한 체형인데도 제법 가슴팍은 근골이 실팍한 것이 시쳇말로 ‘갑바’라고 부르는 것인가 보더라. 단단해 보이는 맨가슴에 보이는 알록달록한 무늬가 무엇인가, 요즘 아이들은 문신도 저렇게 컬러풀하게 하는가 싶어 이미 노안이 온지 오래인 눈을 한껏 재촉하여 들여다보니,


그것은 한 마리의 용(),이었다.


아마도 스테고사우르스이겠지, 세모난 골판을 뾰족뾰족 세우고 긴 꼬리를 땅에 드리운 공룡. 무슨 만화 캐릭터인지 선량한 눈을 크게 뜨고 빙긋빙긋 웃고 있는 공룡은 새긴지 며칠 된 듯 형체가 희미했다. 모양새가 유치한 것이 문신이 아니라 어린애들이 흔히 씹는 풍선껌의 포장지에 부록으로 든 판박이거나, 싸구려 문방구점에서 초등학생이나 사서 장난으로 새기는 놀잇감이겠건만 다 큰 총각이 가슴팍에 왜 그런 것을 새기고 있는지는 생각지 않고 나는 교복 셔츠 안쪽에 숨어서 먹음직한 수풀을 찾아 헤매고 있는 고대의 초식 공룡을 상상했다. 그 거대한 몸집을 지탱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풀을 먹어 없애야 하는 공룡, 하루에 풀숲 하나를 없애고 제 배설물에 뜬 풀씨들로 또 풀숲 하나를 키우고, 끝내는 잔혹한 폭풍우 속에 지상에서 사라져 맨틀 가까운 곳에 말라붙은 뼈의 흔적으로밖에 남지 않았을 공룡. 그러나 지금은 저렇게 명랑한 총천연색으로 소년의 가슴팍에서 유쾌하게 웃으며 맛있는 풀을 기대하는 공룡. 공룡의 먹이가 될 긴 풀들이 내 뇌리에서 고대의 바람에 일순 흩날렸고, 그 풀을 잡고 싶은 것처럼 혹은 그 풀이 되고 싶은 것처럼 나 역시 그 바람에 맞은 듯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욕망인가.


욕망이라면, 극약이라도 마셔 지우고 싶을 정도로, 당혹스러운 욕망이었다.






김현진입니다


편집: 딴지일보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