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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제 나이보다도 어렸을 때에, 최루탄 가스를 마시며 문 목사의 명연설을 들었을 인생 선배들께 여쭙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버지들께 여쭙는 글이기도 합니다.

 

제 아버지는 박정희 시대 시위에 열심히 나가다가 인생이 꼬였습니다. 할아버지가 장교이신 덕에 감옥행 대신 군대로 끌려갔지만, 훗날 행시 합격 석 달 만에 안기부로 끌려가 시위 전과로 퇴직당하신 케이스입니다. 6월의 뜨거운 항쟁 때엔 이미 그런 것들과는 거리를 많이 두고 사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평생 2번만 찍던 분이 지난 대선에서 1번을 찍으셨습니다. 간간이 시골집을 가보면 늘 <TV조선>이 켜져 있습니다. 언젠가 한 번 "박정희에게 당한 분이 어째서 박근혜를 찍으신 거에요?"라고, 약간 반항하듯 여쭈운 적이 있습니다만 돌아온 대답은 "그 시대에는 박정희가 맞는 것이었다. 시위는 그냥 선배들이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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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좀 충격적이었습니다. MB 욕을 그렇게 하시던 분이 어째서였을까요. 박정희 시대가 그만큼 각별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쩔 수 없는 것이구나.

 

그러나 '유행처럼 시위를 했다'는 말씀은 참으로 가슴 아팠습니다. 비록 의붓아버지지만, 10년을 넘게 같이 살며 들어온 정치적 견해는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요. 고등학생 때 수줍게 광화문 시위에 다녀왔다는 제 고백을 듣고, 당신은 "잘했다. 그런 것도 해 봐야지"라 하신 분입니다.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

 

한 때, 그리고 지금도 분명히, 2030세대에게는 '486책임론'이 유행했고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맨날 학교 안 가고 시위만 하다가 운 좋게 대기업 취직한 사람들이 이제 우리에게 노오력 타령을 한다' 대충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비단 취직 얘기 뿐 아니라 부동산, 창업 등 각 부분에서도 통용됩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불쾌하실 것이라는 것도 예상이 됩니다.

 

저는 상근예비역으로 복역을 했습니다. 당시 동대장님이 전형적인 486 세대였던 것 같습니다. 그분과는 일반적인 장교와 사병 관계가 아니었던 것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분께 '486책임론'을 들려드렸더니, 그분의 대답은 "학우가 고문으로 죽어나가던 시대보다 지금이 더 고통스럽다는 게 이해가 안간다" 였습니다.

 

제가 20대의 대표가 아니듯, 저희 아버지도 유신 시대의 대표가 아니고, 동대장님도 486의 대표가 아닐 겁니다. 저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좁은 경험으로 세상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 또한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다만 제 이야기를 잠깐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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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는 성수대교와 삼풍이 무너지던 흐릿한 뉴스장면처럼 기억되지만, 저희 세대에게 남긴 결과는 생각보다 큽니다. 학교에 가면 빈 자리가 속출했고, 전학생이 많아졌습니다. 처음엔 왜 그런지 몰랐습니다만, 제가 겪고 나니 그것이 부모들의 이혼, 빚쟁이들로부터의 야반도주 등의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새 가정 속에서 어린 나이에 뭘 알았겠냐만, 희미하게 느낀 것은 '내가 엄마를 도울 일은 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는 것뿐이 아닐까?' 정도였습니다. 이마저도 아마 담임선생님의 상담 덕에 알게 되었던 듯합니다.

 

어느새 세월이 흘렀고, 무언가 굉장히 분노할 만한 일이 생겼습니다. 글쎄 가카께서 대운하인지 뭔지로 남한강을 까뒤집으신다는 겁니다. 제 시골집 바로 앞에는 남한강이 흐릅니다. 철새도래지도 있고, 낚시가 잘 된다고 소문난 생태늪지도 있었습니다. 신문을 보니 또 민영화 어쩌구로 시끄럽습니다. 유시민 쌤의 말을 듣고, 친구가 매일 가져오던 조선일보도 좀 봤습니다만 아무래도 유쌤의 말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피디수첩에서 광우병 보도를 합니다. 그 이후에 벌어진 일은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시간이 흐른 현재, 각 커뮤니티에서 광우병 시위는 대표적인 조롱거리입니다. 선동에 당한 무지몽매한 국민들. 그 속에 서 있던 저 역시 '촛불좀비'가 되어버렸기에, 4대강으로 완전히 사라진 마을 앞의 생태늪지는 외면했습니다. 제 손을 떠난 일이라 생각했죠. 물론, 여전히 광우병 시위위에 대한 평가는 진행중입니다만 커뮤니티들은 하나의 정치적 시위에 대해 엄격한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베플을 보면, '선동' '일베충' '좌좀' 같은 단어들이 꼭 들어갑니다. 그것들을 보는 것 자체가 불편하고 고역스럽습니다.

 

다른 쪽에서는 '어떤 시위가 옳은 시위인가'에 대한 토론도 늘 이어졌습니다. 폭력 시위를 극도로 경계하고, 신고 절차를 준수한 평화적 시위를 지지하는 것이 대다수의 의견입니다. 그 가운데 운동권을 매우 경계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서울대학교의 시국선언문을 다들 칭찬하면서도, 말미에 적힌 '민중해방의 불꽃'이란 문구에 어쩐지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심지어 정의당 당원인 제가 그럴진대, 다른 이들은 어땠을까요. 한편 고려대학교는 '민중연합당'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시국선언을 철회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집회에서 실시간으로 시위 양상을 지켜보며, 청와대로 향하는 움직임에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이런 글에는 늘 '선동', '빨갱이' 등의 용어가 마구 사용되었고, 그것이 여전히 불편했습니다.

 

이 글에서 유일하게 단언할 수 있는 대목은, 이런 불편한 감정이 꼭 저만의 것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술자리에서 어느 누가 정치 얘기를 잠깐 꺼내기만 해도 그는 꽤 오랫동안 뒷담화를 당할 만한 거리를 만드는 건수를 만드는 사람이 되니까요. '비례는 정의당'을 카톡으로 뿌리던 저 역시 '정의당 메갈 사태' 이후 친구들의 장난 섞인 조롱을 들어야 했습니다. 소위 말하는 '정치병 환자', 이 딱지가 붙은 사람은 여러모로 힘들어지는 게 사실입니다.

 

'인터넷 여론과 현실정치는 다르다'라는 말은 어느 정도 증명된 것입니다. 2030세대가 주도하는 판은 사실 전체세대 중 작은 조각일뿐 이니까요. 그마저도 인구가 점점 줄고 있으니, 오히려 앞으론 '아재'들이 막강해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각 커뮤니티에서 흘러나오는 반응들은 나꼼수가 열풍이었던 때보다 더욱 뜨거운 것 같습니다. 매우 이례적으로, 박근혜는 하야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일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2030세대는 침묵하는 다수 속에 숨어 제각기 늘 그래왔던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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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세대가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필리버스터를 라이브로 보기 위해 모인 '팟수'들, 국감 때마다 쏟아져나오는 패러디, '일간베스트'의 존재 등 2030세대는 온라인 공간에서 나름대로 정치에 큰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광화문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지난 집회 이후 유행했던 것이 '시위 인증'입니다. 모두가 시위를 나갔다면 시위인증이 베스트를 먹을 수 있었을까요? 이 글들은 시위에 나가는 행위와 목적은 지지하지만, 나가지는 않았던 많은 이들의 표출한 의견이라 생각합니다. 바꿔 말하면, 여전히 침묵하는 다수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왜 이들은 분노하면서 거리로 나가지는 않는 걸까요? 내일로 예정된 총궐기에 얼마나 나갈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여전히 무언가 두려운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난 10년간, 2030세대의 다수가 지지하는 정치세력은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서울시장선거도 있겠지만, 사실상 첫 승리라고 할 수 있던 것이 지난 총선입니다. 노무현의 극적인 승리도, 탄핵 역풍으로 열린우리당의 과반의석 획독도, 2030세대는 참여하지 않았거나 완벽히 동화될 수 없었던 시절의 승리입니다. 우리 세대가 본격적으로 투표권을 얻은 후부턴 압도적으로 MB가 당선되고, 한반도가 새파랗게 한나라 일색으로 점령되고, 이건 꿈일 거야 싶었지만 박근혜가 당선되었습니다. 사실 총선 전까지는 굉장히 암울한 분위기였습니다. '킹무성찍고 탈조선 하자'는, '킹찍탈'의 유행처럼 자조하고 좌절한 세대의 힘없는 하소연이 선거결과를 보자 유례없는 흥분으로 바뀌었습니다. 심지어 어느 한 정당의 압승이 아닌, 단순히 '새누리 과반 저지'라는 당면목표를 달성했다는 것에 그토록 즐거워하는 모습은 참 '웃픈'일이었습니다.

 

요즘 돌아가는 검찰과 청와대의 움직임을 보며 또다시 좌절의 그림자가 스멀스멀 기어오는 것 같습니다. 이런 글도 보았습니다. '아무리 지랄해도 최순실도 박근혜도 십상시도 관련자들도 새누리도 대기업도 검찰도 처벌은 받지만 바뀌지는 않을 것 같다' 사실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는, '헬피엔딩'이지 않은가요?

 

그래서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한 번도 무언가를 요구해서 제대로 바꿔본 적이 없는 세대입니다. 사실 그런 세대는 찾아보기 힘들죠. 하지만 2030세대는 군부독재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막대한 정보를 접하는 세대입니다.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불일치는 이 세대가 역사상 가장 비겁한 세대라서가 아닌, 넘치는 정보량과 충분한 배움을 가지고도 '옳음이 행해지지 않는 사회'를 받아들이기 힘들어 외면했던 까닭이라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시간에 추운 바람 맞으면서 헛짓거리하느니 따뜻한 방 안에서 오버워치나 하는 게 더 이득이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질 걸 알면서도 도전하는 모습은 참으로 멋있습니다만, 제 얘기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변명이고, 합리화입니다. 그렇게 비난해도 이들은 잘 안 나가려 할 겁니다. 일정 부분 승리한 총선의 결과로도 이 사태를 막지 못할 것 같으니까요.

 

다시 아버지와 동대장 얘기로 돌아가려 합니다.

 

아버지를 드디어 이해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시위경력'은 자랑스러운 일이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이름 석 자 널리 알리지 못한, 흔하디 흔한 학생이었을 뿐,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는 보람을 갖기에 당신이 겪은 이후의 고난들은 극복하기 어려운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영원할 것 같던, 도저히 깨부술 수 없을 것 같던 권력이 총알 한 방에 스러졌을 때, 아버지는 환희가 아닌 절망을 느끼셨다고 합니다. 수 많은 인생들이 스러지거나 꼬여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멈춘 것은 결과적으로 총알 한 방이었다는 사실에. 모든 것이 흘러간 지금은 그 수많은 인생에 존경을 표하는 것이 전부지만, 당신들이 체험해야 했던 고통과 좌절감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것들을 꿋꿋이 견뎌내고 투쟁을 이어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에 빗대면 아버지는 일종의 '변절자'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편 동대장은, 어쩐지 넘치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군무원 신분이라는 한계에서도 거침없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표출하고, MB의 삽질이 거듭될 수록 "갈아치워 버리던가 해야겠어"라는 농담을 하던 그분은 최루탄 시절을 말할 때 마치 즐겁고 아련한 추억처럼 묘사하곤 했습니다. 아버지께 시위하던 시절을 물으면 일단 얼굴이 찡그려지고 고개를 돌리시는 것과 대조되는 모습이었지요.

 

비록 삼당합당으로 의미가 퇴색되었지만, 6월의 항쟁은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민중이 승리한 사건입니다. 무려 한반도 최초입니다. 그 역사적 사건을 일선에서 주도했거나 대열의 끝에 있었거나 하는 것은 관계없이 국민을 향해 늘 혼만 내던 국가가 국민에게 싹싹 빌던 그 광경을 라이브로 보았을 그 뜨거운 감정은 우리 세대에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제 아버지 세대에도 없던 것입니다. 저는 보잘 것 없는 식견으로 한국사 글을 쓰고 있지만, 아무리 사료를 뒤져보아도 6월 항쟁에 비견할 만한 사건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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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2030세대에게 87년 6월은 이미 역사가 되어버린 사건입니다. 학창시절에 6월 민주항쟁은 교과서의 끝자락에 있던 이야기였지요. 그 이후로는 시험에 더 나올 것도 없었기에, '사건을 시간적 순서대로 배치하라'라는 시험문제가 나오면 무조건 마지막은 6월 민주항쟁이었습니다. 지금의 학생들에게 서울역 회군부터 87년 6월까지의 이야기는 제가 어릴 적 할머니가 머리맡에서 들려주시던 전쟁통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30년이 지났습니다.

 

요즘의 상황이 과연 심각하기는 한 것인가? 회의가 듭니다. 심각한 것 같기는 한데 시위에 나가겠다는 젊은이들은 아주 간혹 보이나,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고치는 법을 잘 알 것만 같은 아재들은 이렇게 딴지에나 와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 아버지가 변하셨듯이, 흘러온 세월만큼 사람들도 변했지요. 이재오 전 의원이, 김문수 전 지사가 다른 길을 가듯이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시국은 모두가 '하야'라고 외쳐야 할 것 같은데, 그리고 분명히 다들 하야를 외치고는 있는데, 거리로 쏟아져 나오지 않는 것이 이상합니다.

 

거국중립내각이든 나발이든 각자의 정치적 계산은 뒤로하고 야권의원들이 나서서 하야를 당연히 요구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왜일까요. 박근혜 게이트는 아직 그렇게까지 심각한 사건은 아닌 것일까요?

 

사회의 가장 최전선에서 변화의 물꼬를 터야 할 20대는 '이번에도 실패할 것 같다'고 주저앉는 가운데, 87년 6월의 뜨거운 기억을 가지고 있을 아재들도 나오지 않는다면 박근혜는 무사히 남은 임기를 마치고, 다음 대선도 어쩌면 다시 새누리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꼰대라고 무시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찾냐'라며 화를 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노유진의 정치카페 마지막회에서 진중권 교수가 '왜 우리만 늘 청춘이여야 해?'라며 불평하던 말도 기억납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잘 아는 분들이니, 이렇게 여쭈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광화문에 나가 촛불을 들면, 정말로 세상이 바뀔 수 있는 것입니까?





빵꾼


편집: 딴지일보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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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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