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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대로가 이 기사의 주제다. 하지만 기사를 쓴 목적은 최순실 사태에 관한 지난 기사(링크)의 연장선상에 있다. 기사 말미가 독자들에게 전 국민 공동책임론으로 읽힌 것으로 안다. 반은 의도와 상관없었고 반은 진심이다. 이 기사는 독자들의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이자 내가 국정농단 사태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미리 경고하지만 이 기사의 내용은 끔찍하다.




물리적 조건을 벗어난 투명한 작은 사회


김성근 감독이 한화이글스에서 자행한 전횡과 선수학대가 보도되었다. 바깥에서는 상식 밖의 일이 안에서는 버젓이 벌어졌다. 그런데 만약 김성근 신화가 무너지지 않고 그의 입지가 흔들리지 않았어도 ‘야신’의 그림자가 드러났을까. [박근혜(최순실)-대한민국]과 [김성근-한화이글스]를 평행 비교하는 이들이 있다. 그만큼 두 사건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개인이나 집단의 지위에 심각한 균열이 생기고 나서야 내부의 실체가 드러나는 양상은 얼마나, 어떤 차원에서 한국적인 것인가? 왜 우리는 언제나 문제란 것이 자루 안에 고였다가 봉제선이 터지면 와르르 쏟아지는 느낌을 받는가?


드라마 ‘엑스파일’에는 미국 외딴 곳의 지역 커뮤니티가 ‘작은 사회(small society)로 종종 등장한다. 마을은 사이비 종교집단이기도 하고 야만성을 통해 유지되기도 한다. 마을 사람들은 비밀을 공유하고 서로 감시한다. 이들의 삶의 논법은 외부의 보편타당성과 유리되어 있다. 그들 서로는 무엇보다 피해자이자 가해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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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해 나는 우리 사회에서는 작은 사회가 물리적인 조건을 벗어나 일상 곳곳에 침투해있다고 본다. 신안의 염전노예 사건은 지도만 봐도 경위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런 곳은 그냥 물리적으로 중앙의 감시시스템과 떨어져 있다. 다만 우리나라는 드넓은 국토를 가진 미국보다 훨씬 조밀하다. 한국은 시골조차도 도시화된 나라다. 하지만 한국에서 작은 사회는 물리적 조건을 벗어나 겹겹이 중첩되어 있다.


기업을 예로 들어 보자. 삼성반도체공장 노동자의 백혈병 발병부터 각종 노동자 탄압과 사디스트 자본가의 악취미까지, 문제가 이해할 수 없이 오래 지속되었다가 터지는 패턴이 반복된다. 여기 현장에서 산재를 당한 노동자가 있다 치자. 그러면 피해자의 동료인 생산노동자는 세상은 공정하지 않다는 상식(?)을 새삼 받아들이고, 사무직 노동자는 자본의 편에 서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이런 경우는 너무 많아서 실례를 가져올 필요조차 없다. 부조리를 당연시하는 탓에 미봉책, 은폐술도 빠르게 학습한다. 권력자의 의지를 자발적으로 부양한다. 그렇게 공모자로서 어느새 투명한 작은 사회의 일원이 된다.




비정상의 정상화? 비정상의 일상화

 

작은 사회의 대표주자인 군대 이야기를 해 보자. 내가 군 생활 시절 속해있던 중대의 내무생활 난이도는 이웃 중대에 비해 훨씬 인간적이었다. 선임들의 품성도 좋은 편이었다. 어쨌거나 내무생활의 피해자였다가 가해자가 된 후 제대한 사람으로서, 내가 경험한 내무부조리의 실상은 세계보편의 기준에선 경악할 만한 것이다(예컨대 벨기에 사람이 들으면 눈이 휘둥그레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 외국인은 분명히 인권'유린'이라고 외칠 것이다).


군대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뉴스를 접할 때 예비역들은 "왜?"라고 묻지 않는다. 안 봐도 빤하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이미 실상에 가까운 시나리오가 자동 완성된다. 인간적 분노와 슬픔을 느끼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그 모든 과정에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다. 비정상의 정상화가 아니라 비정상의 ‘일상화’다.


나는 한국인에게 작은 사회의 존재와 그 내용에 대한 침묵을 당연시하는 습관이 형성된 건 아닌지 의심한다. 그 정황증거를 국정농단 사태에 대입해보겠다. 최순실이 공직자들에게 얼마나 막강한 존재였는지 확인해주는 뉴스가 연일 보도되고 있다. 일차적으로 공직사회의 기강 문제지만 보다 깊고 음험한 기저가 의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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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은 한국인에게 뿌리박힌, 작은 사회의 공모자적 습관에서 피어난 곰팡이다. 공무원들은 최순실의 걸음걸이를 보자마자 그녀가 VIP임을 직감하고 굽실거렸을 뿐 기괴한 상황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들은 정부의 꼭대기에서 하달되는 기괴하고 부도덕한 명령에 문제를 제기하는 일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포기했다. 외려 부조리를 상수로 놓은 후, 그것을 하부와 국민에게 포장 혹은 강요하는 데 집중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작은 사회는 보다 공고해진다.


새누리당은 대통령제의 한계를 지적하고 나섰다. 물론 논점일탈이다. 공범인 자신들의 책임을 제도에 전가하겠다는 시도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제는 법제적 측면에서 그렇게 어설프지 않다. 최순실의 실체가 드러날 기회는 끝도 없이 많았다. 비선 실세의 거대한 그림자를 접한 공직사회와 민간의 그 누구도 놀라거나 화내지 않았다. 외부세계에 알리려는 의무감도 느끼지 않았다. 이 현상이야말로 최순실의 정체성만큼이나 기괴하다.




작은 사회의 전형적 특징, 이탈자 혐오


우리 사회는 내부고발자를 유난히 증오한다. 이는 흔히 전근대성-봉건성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우리의 전통 봉건문화에서 배신자와 이탈자는 동일선상에 놓여 있지 않다. 정당한 신념을 가진 이탈자는 오히려 존중받았다.


목숨을 걸고 상소문을 올린 선비는 상소의 내용과 상관없이 존경받았다. 관직을 버리고 고향이나 산중에 은거하는 선비가 존경받은 이유는 정치를 혐오하는 문화 때문이 아니다(외려 정계진출은 선비문화의 핵심이다). 스스로 옷을 벗는 일이 적극적인 '동조 거부'였기 때문이다. 낙향은 ‘당신들이 틀려먹었다’는 강력한 비판의 신호다. 그들은 군주나 소속 붕당의 정치적 결정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낙향한 후 다시 돌아와 달라는 문제해결 신호, 혹은 사약을 기다렸다. 때로는 반대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곡기를 끊고 굶어죽기까지 했다(위정자들에게 커다란 타격이다). 적어도 조선 중기까지 양반은 그렇게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권력과 집단을 둘러싼 현대 한국 사회의 문화는 양반정신이나 유교와는 거리가 멀다. 내부고발자 증오는 봉건성이 아닌 '작은 사회'의 특질에 더 가깝다. 밑에 밝히겠지만, 나는 이 국민성이 현대에 형성되었다고 본다.


이탈자 혐오의 이면엔 이탈자가 되면 큰일 난다는 공포가 있다. 무리에서 이질적인 존재가 되는 거야 언제나 위험한 일이다. 그런데 무리의 공동이익이 아니라 무리 내 소수 권력자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마저 경계의 대상이 되면 기괴하다. 공무원들은 최순실의 그림자에 ‘알아서 기었다.’ <시사IN> 주진우 기자는 떡고물을 바라고 그랬다고 한다. 물론 책임자 몇은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론 부서나 지역조직 전체의 질서정연한 굴종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들은 기꺼이 피해자이자 공모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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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사회의 증거와 폐해


한국인에게 강요되는 스트레스는 양적 차원에서나 층위의 차원에서나 지나치다. 작은 사회의 관습과 보편적 규범 사이의 심적 균열은 한국인들의 고통에 큰 몫을 차지한다. 불의를 견디는 일은 결코 간단치 않다. 몹시 복잡한 작업이다.


세월호 사건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먼저 슬펐다. 그 다음엔 책임자들의 행태에 분노했다. 여기에 더해 우리는 죄책감을 느꼈다. 어쩌다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각자의 작은 사회에 참여한 경험을 대입하면 그림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 죄책감은 너무나 큰 것이어서 죄의식을 덜기 위한 심리적 작업도 필요했다. 보수의 ‘교통사고론’과 진보의 ‘고의침몰설’은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장치라는 점에서 궤를 같이 한다.


이제 다른 믿음을 가진 두 집단은 서로에게 분노한다. 이쯤 되면 누적된 분노는 너무나 커서,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분노를 억제하는 노력까지 필요해진다. 돌팔매질은 정교한 조롱으로 진화하는 동시에 속내에는 상대 진영에 대한 살벌한 혐오가 자라난다. 이런 감정적 소모는 서유럽과 같은 보편사회 구성원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이다.


가해와 피해가 동전의 양면이듯이 스트레스와 스트레스 해소도 그렇다. 인터넷은 이미 혐오와 배제의 문화로 만연해 있다. 우리는 다양한 원시부족에 동시다발적으로 소속되어 적대부족에 돌창을 날린다. ‘맘충’족, ‘흡연충’족, ‘틀딱충’족, ‘한남충’족…. 21세기 한국인들은 증오의 가시로 뒤덮인 고슴도치 같다. 우리 자신이 그렇듯 남들도 정의롭지 못할 것이라 가정하는 탓이다. 한국이 작은 사회의 집합임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다.


작은 사회는 구성원의 영혼을 좀먹는다. 미국에는 오래 전 ‘O.J 심슨 쇼크’가 있었다. 살인범임이 명백한 미식축구 스타가 값비싼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무죄판결을 받은 사건이다. 당시 TV에 비친 미국인들의 반응은 그들에게도, 내게도 충격 그 자체였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회사원, 울음을 펑펑 터뜨리는 웨이트리스, 우울증에 걸린 주부, 실의에 빠져 휴학을 신청한 대학생…. 정신과 의사들이 난데없는 호황을 맞았을 정도였다. 어린 학생이었는데도 돈과 불의의 승리를 당연시한 나는 미국인들이 참 순진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나는 비정상을 일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미국인이 우리보다 훨씬 행복하다고 믿는다. 그들에겐 우리에게 없는 행복의 자격, 순진함이 있다. 부조리를 당연시한 나와 비선 실세의 존재를 당연시한 공직자들이 과연 본질적으로 다른 인간일까? 나는 끝도 없이 튀어나오는 비리의 정황을 두고 ‘원래 수구가 집권하면 저 모양’이라고 하고 넘어가지 않았던가?


최씨 일가의 범죄는 순진하면 손해 본다는 한국인의 광범위한 관념에 무임승차해 가능했다. 한국인은 영악한 탓에 역설적으로 무기력하다. 부조리가 만연한 환경에서 분노하고 의심하는 능력을 봉인하지 않으면 삶이 너무 괴롭기 때문이다. 무엇이 우리를 식물로 만들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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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에 심어진 군사독재의 유산


작은 사회 구성원의 특질이 인간의 보편적 특성이 아니라 한국인의 특수성이라면, 혹은 한국에서 보다 강하게 발현되는 요소라면, 그 근간의 핵심에는 군사독재가 남긴 신드롬이 자리한다. 스톡홀롬 신드롬과 PTSD가 합쳐진 어떤 결과물로써 말이다.


쉽게 퉁을 쳐서 '군대문화'라 할 수 있는 한국의 수직적 가학 문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이만 먹어도 높은 확률로 가해자가 될 것을 종용한다. 우리는 공공연한 비밀을 공유한 공모자가 됨으로써 침묵을 강요받는 동시에 불의를 옹호하는 습관이 함양되었다.


나는 인류문명이 무너지는 순간을 경험한 적이 몇 번 있는데, 그 중 하나를 대학 시절 학회 선후배와 MT촌에 놀러가서 겪었다. 옆 숙소에서 간호학과 2학년 여학생들이 1학년 후배들에게 극한의 군대식 얼차려를 주는 것이었다.


혼동을 방지하기 위해 첨언하겠다. 나는 군대문화 자체가 아니라 군대문화와 결합된 작은 사회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학과 밖에서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은 학과 안에서도 일어나면 안 된다(일례로 종로 3가에서 시민들이 그러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그 얼차려 현장의 가해자도 피해자도, 당연한 상식과 현실의 괴리, 아니 그들의 작은 사회 내부와 외부의 괴리에 어색해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군사독재, 군대문화, 작은 사회는 각각 다른 개념이다. 작은 사회의 기저에 군사독재의 과거가 도사리고 있다는 말을 하는 중이다. 그리고 작은 사회에서 행해지는 폭력의 양상이 종종 군대문화로 발현된다는 이야기다. 다시 못 박지만 내가 제시하는 작은 사회의 특질은 비정상의 일상화다.


장하준 교수는 한국에서 진보적 경제정책이 우파적인 것으로 오인되는 현상들 두고 ‘군사독재의 사악한 유산’이라고 했다. 나는 그 유산의 사악함이 훨씬 심대하다고 본다. 독재자들과의 동거엔 연습이 필요하다. 폭력에 순응하고 부조리에 침묵하기란 후천적 노력에 의해서나 가능하다. 이 점에서 나는 우리가 2016년에 겪는 불행의 원류가 박정희라고 단언한다.


권력이 권력이라는 자체로 정당화되는 사회에선 화나고 놀라는 감각을 퇴화시켜야 한다. 이는 작은 사회가 곳곳에 자라날 좋은 토양이 된다. 웹툰 <이끼>가 잘 표현했듯 작은 사회는 수평적이고 민주적일 확률이 낮다. 곳곳에 파시즘이 도사린다. 우리는 유대인으로 분류되지 않기 위해 조용해졌다. 그러나 뱃속에서는 맛이 전혀 다른 두 가지 독이 차오른다. 하나는 도덕불감증, 다른 하나는 타인의 도덕불감증을 향한 증오다.




작은 사회 붕괴의 임계점


개인이 모여 체제를 구성한다. 개인의 인내력을 넘는 임계점은 체제도 버티지 못한다. 내 판단에 한국인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해 있다. 최순실 게이트로 ‘뚜껑’이 열리기 전에도 말이다.


작은 사회에서 정의와 상식은 일상적으로 매몰된다. 이런 경험은 경험자와 목격자 모두에게 차곡차곡 내적 스트레스로 누적된다. "조선왕조 육백년 동안 우리는..."하는 반복구로 기억되는 노무현의 전설적인 연설은 냉정히 말하면 막연하고 자신이 그 내용을 실현하지도 못했지만, 한국인들에게 왜 명연설로 남았는지는 음미해볼만 하다.


상식과 정의를 뜨겁게 부르짖었다는 지지자들의 평은 다른 성향 유권자들의 공분을 샀다(‘그럼 우리는 불의를 지지한단 말이냐’). 허나 단지 '정의는 좋은 것'이기 때문에 연설이 이토록 인상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 연설이 보편성 회복, 더 구체적으로 말해 작은 사회로부터 해방되고픈 유권자 대중의 소망을 자극했다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의 퇴임 후 비리혐의(그 진실성과 경중을 떠나)와 그의 죽음이 지지자들에게 준 좌절은 일맥상통한다. 노무현은 정확히 같은 이유에서 역적이 되었다가 순교자가 되었다. 이 좌절은 세월호 침몰을 거쳐 작금의 최순실 게이트까지 이어진다.


우리는 작은 사회를 어떻게 파훼할 것인가?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학습한 '작은 사회의 사회성'을 붕괴시켜야 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철저한 파괴와 재건, 즉 혁명의 불안한 잔상이 어른거린다. 언제부턴가 젊은 층이 입에 담기 시작한 '죽창'의 과녁은 지배 권력이 아니라 작은 사회다. '죽창론'은 농반진반이다. 다시 말해 결코 농담이 아니다.


젊은 층은 우리사회 권력의 상층부가 아니라 일상 곳곳에 부조리가 만연해 있음을 느끼기에 종말을 꿈꾼다. 그래서 ‘가족 같은’ 중소기업을 다닌 경험을 이야기하다가 죽창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보면 네티즌들이 최순실 사태를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풍악을 울리는 이유는 조갑제와 윤서인 류의 순박한 보수(?)주의자들이 믿는 것처럼 반대편의 불구경이 신나서가 아니다. 초유의 사태가 주는 혁명의 기시감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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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사회에서 보편사회로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일단 나는 혁명 스트레스를 견딜 자신이 없다. 최순실 게이트는 우리가 혁명을 피해갈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명시한다. 깨끗이 설거지하지 않으면 그릇을 버려야 한다. 민관군 그리고 언론까지, 보수 세력은 이 사태를 조장하고 방조했다. 그렇다면 야권은 또 설거지나 하라는 얘기인가? 그렇다. 그것도 똑바로 하라고 채근하는 수밖에 없다. 야권이 먹을 욕이 산더미만큼 준비돼 있다. 어쩔 수 없다. 야권의 책임이 너무나 크다. 가까이는 현재의 보수 세력에 사망선고를 내리고 거시적으로는 한국 사회의 정체성을 바꾸는 일이다.


우리는 망했는가? 아니라고 믿는다. 거리에 나선 어린 학생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럽다고 말하는 어른들의 모습은 희망적이다. 죄책감은 곧 책임감이다. 나는 한국인이 어떤 측면에서는 서유럽인보다 성숙했다고 본다. 이 나라의 문명이 결코 얕지 않다.


우리는 타락했는가? 역시 아니다. 내가 논한 한국인들의 타락은 어디까지나 의식적이고 전략적인 차원의 퇴행이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마음속 한편으로 스스로 도덕성을 회복할 기회를 갈망한다. 한국인은 그 누구보다 보편사회에 목마르다. 작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사는 고통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참혹한 사태가 하늘이 준 기회라는 도올 김용옥 교수의 말에 찬성한다. 허나 회복의 기회를 놓친다면 이후에 떨어질 나락은 무저갱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보편사회라는 용어를 끝까지 왜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으로 바꿔 쓰지 않았는지 밝히겠다. 사실 양자는 대체로 겹치는 말이다. 그러나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의 세계관에서는 악을 처단하면 문제가 해결된다. 이 사고틀로는 최순실 게이트의 근본적인 이유와 해결책에 근접할 수 없다. 우리는 보수 세력은 물론 우리 자신의 내적 모순으로부터도 해방되어야 한다. 지난 기사에 모두의 책임을 암시한 것은 이런 차원에서였다.


알 수 없는 변화가 다가온다. 두렵고도 기대된다. 솔직히 고백컨대 기대보다 두려움이 앞선다. 20세기는 한국인들을 혹독하게 채찍질했다. 21세기의 요구사항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이곳에 살고 있다.



P.S 긴글 위에 언급한 고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은 나도 무척이나 좋아한다. 참여정부가 실패했다고 판단한다고 해서 노무현과 그 지지자들을 저주하는 사람은 아니다. 국정농단 스캔들에 관한 나의 마지막 기사는 야권의 입장에서 본 전략적 차원이 주제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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