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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일이 일고 있는데 조개를 줍고 있다.” 2002년 대선 기간 중 발생한 개혁당 성폭력 사건이 여성위 게시판에서 공론화되면서 성폭력 특위가 구성되고 당 내 가해자 실명공개 운동이 벌어지던 광경에 대해 당시 보궐선거를 앞둔 개혁당 집행위원을 맡고 있던 유시민 전 장관이 한 발언이다. 그는 당이 먼저냐, 여성의 권익이 먼저냐는 질문을 던지며 거대한 해일이라는 당 전체가 마주한 커다란 문제 앞에 성폭력 사건과 진상 조사와 개선 같은 것은 조개를 줍는 것과 같은 지엽적인 행위라고 말한 것이다. 나는 개혁당 당원은 아니었지만 여러 여성들이 그랬듯 유시민 전 장관을 좋아했으므로 이 발언에 다소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우리에게는 그토록 큰 상흔을 남기는 일이 그에게는 여자들이 몰려오는 해일도 못 보고 꼼지락꼼지락 조개나 줍고 있는 광경으로 보였으리라는 것이 슬펐다. 벌써 15년이나 지난 일이니 그의 여성관과 성평등 시각에도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이것은 유시민이라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소위 ‘대세’ 앞에서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의 고통은 미련하게 조개나 하나 둘씩 줍고 있는 광경이라고 비난받거나 무시당하고 지워지는 현실은 여전하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자신의 고통을 말하려 할 때 혹시 꽃뱀? 이라는 의혹이나 왜 창창한 사람(가해자) 앞날을 망치려 하느냐, 지난 일 들쑤셔 봤자 뭘 하느냐, 이런 핀잔이 피해자에게 던져지고 여전히 우리는 해일이 오건만 어리석게 조개나 줍는 ‘아녀자’들이 되어 버린다. 이를테면 이 기사의 사건이 아주 전형적인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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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원문 - (링크)


2014년 10월 12일 고려대 재학생이던 성범죄자 A는 새벽 5시 경, 정기 고연전 뒤풀이 자리가 끝나고 같은 학교 학생 B와 함께 택시를 타고 귀가하던 중 B의 의사에 반하여 B의 얼굴, 가슴, 음부 등 신체를 강제 추행하고, 술에 취한 B를 성동구청 부근 모텔 앞에서 내리게 한 다음 강제로 모텔로 끌고 들어가려 시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발기된 성기를 B의 신체에 비비는 등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언행과 욕설을 하였다. B는 교내 양성평등 센터에 신고하였고, A는 ‘자신을 범죄자 취급하여 기분이 나빴다’고 한다. 자기 성욕은 해일과도 같건만 그 따위 것으로 신고를 하다니 ‘조개나 줍고 앉았다’는 이야기다.


그는 B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왜 고소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한다. 법원은 그에게 감형을 해 주었는데, A가 의경으로 입대하여 피해자와 ‘격리’되겠다고 선처를 요청한 것이 적잖게 작용했다. 그러나 그는 군면제자였으니 ‘격리’ 운운은 감형을 위한 액션에 불과했다. 학교에서 주어진 징계 기간이 끝나자마자 바로 복학하여 피해자와 함께 학교를 다니고 있다. 그의 선배이자 교수이며 동시에 피해자의 선배이자 교수인 이들이 A의 감형을 위한 탄원서를 써 주었다. B는 여기에 관해 ‘너는 잘 살 것이다’라는 분노에 찬 대자보를 붙였다.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앞으로 두고 볼 일이지만, A에게 탄원서를 써 준 선배와 교수들은 그 날 이후 택시 안 강제 추행의 기억 때문에 택시도 타지 못하는 B의 입장에서는 이들이 정면으로 이렇게 쏘아붙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네가 당한 일은 별 것 아니야. 너의 고통보다는 A의 창창한 미래가 중요해. A의 장래는 해일처럼 중대하지만 네 괴로움? 그거 조개 몇 개 줍는 것 정도라구!


하지만 용기 있는 여성들은 계속해서 해일이 올지언정 조개를 줍는 것, 즉 진실을 길어 올리는 것을 선택했다. 학내에 대자보를 붙이며 상황을 공론화한 B씨도 그렇고, 최근 몇 달 간 트위터를 뜨겁게 달군 #문화계_내_성폭력, #영화계_내_성폭력, #문단_내_성폭력, #예술계_내_성폭력 등의 해쉬태그를 단 고백들이 이러한 움직임의 하나다. 영화잡지 <씨네21>도 영화계 내 성폭력을 특집기사로 다뤘고, 방송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을 대대적으로 다룰 예정이라고 한다.


확실하게 가해자로 판명난 몇몇 문인들은 언론에 보도되었고,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사과문을 올렸다. 그들의 사과라고 해봤자 빈약한 것이, 다시는 SNS를 하지 않겠다거나 (그대로 출간됐어도 딱히 팔리지도 않을) 신작 출판을 중단하겠다거나 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가 적정선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피해자들이 입은 상처를 보상하기에 마땅해 보이는 것은 없었고, 이렇게 인정하고 사과한 이들은 발뺄 수 없는 증거와 목격자가 있었던 경우이며 대부분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적용해 법적 대응을 할 것이라 밝히고 있다.


영화화된 소설 <은교>로 유명한 박범신 작가는 술자리에 있던 모든 여성들을 연령에 따라 은교라 부르되 ‘늙은 은교’ ‘젊은 은교’라 부르면서 그 자리에 있던 여성들에게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언행을 했다고 하는데, 트위터에 이를 사과한다며 “살고 사랑했어요~ 마음 상하게 해서 미안해요~ 주위 사람들에게도 미안해요~ ”라는 식으로 웬 물결이 난무하는 트윗을 올려 사과인지 장난인지 보는 사람들을 헷갈리게 했다. 하나하나 나열하려니 너무 끔찍하지만 문예창작을 전공하는 예고생들에게까지 성추행 및 성폭력이 가해졌을 정도의 현실은 처음에 한두 명인가 싶다가 계속해서 터져나온다. 지금까지 조용했던 것이 이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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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조용했던 것이 별 이상할 일 없기도 하다. 문단의 경우 다소 특수성이 있어서, ‘습작생’이라는 시스템이 존재한다. 이 ‘습작생’들은 절대적인 권위에 따라야 하는 존재이고, 성폭력이 ‘성’보다는 ‘권력’에 관련되어 발생하는 폭력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습작생(문예창작학과나 문학강좌의 학생들은 여성이 많다)들은 얼마나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먹잇감이었을 것인가. 전세계적으로 한국과 일본에서만 통용되고 있다는 ‘등단’이라는 제도 덕분이다. 유력 일간지에서 해마다 여는 신춘문예나 이름 있는 출판사의 문학상을 타야 비로소 ‘등단 작가’가 되는데, 이 등단 루트를 타는 것과 단순한 ‘투고’로 책을 내는 것은 천지 차이로 다르다. 한마디로 등단을 해야 작가다.


내 경우가 투고로 여러 권의 책을 냈고 올 가을 소설을 낼 예정이지만, 앞으로도 소위 순혈 작가로 인정받을 가능성은 낮다. 소위 ‘진짜 작가’가 아닌 것이다. 이 등단 제도가 소위 작가 면허 시험 같은 구실을 하고 있고, 거기에서 부여하는 자격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아무리 많은 책을 낸다 한들 문예지에서 청탁이 오거나 문예창작학과 혹은 하다못해 동네 면사무소 강좌의 글쓰기 교실의 강사로 초빙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작가회의에 가입이 될지도 모르겠고, 문인들을 위한 레지던스인 연희창작촌 등은 아예 응모 자격을 신춘문예 등의 권위를 가진 ‘등단 작가’로 한정지어 놓고 있다. 대충 상황이 이러니 문학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이들에게 등단은 필수적인 바늘귀가 되고, 이를 통과하는 몇 안 되는 낙타가 되기 위해서는 이 좁은 문단이라는 동네에서 어떠한 스승을 모시고 어떠한 지도를 받느냐가 중요하다.


‘너 나한테 잘못 보이면 등단 못한다’라는 협박이 실제적인 위협이 되기 때문에, 문단 성폭력 피해자들은 작가의 꿈과 성적 수치심 사이에서 고통스럽게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후자가 승리한 경우 예술의 길을 포기한 여성들의 고백도 수없이 많다. 젊고 호기심이 많은 여성 습작생의 경우, 기성 문인들이 모인 술자리에 문학과 작가에 대한 호기심으로 참석했다가 그 자리의 어떤 노리갯감으로 취급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녀)가 아무리 문학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으로 그 자리에 참여했다 하더라도 아직 등단을 못한 습작생의 경우 일종의 ‘빠순이’ 취급을 받아 모멸감을 느꼈다는 고백 정도는 흔하다. 여기에서 더 심하면 성폭력까지 진행된다. 웬만하면 문단에서 권력을 가진 기성 문인과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필사적인 마음과 실제적인 권력 문제가 미친 새끼야 손 떼, 라고 딱 잘라 거절하지 못하고 좋게좋게 넘어가자고 마음을 졸이게 만드는 것이다.


게다가 예술가의 어떤 스테레오타입이 한국 남성 문인들에게는 여전히 유구한 모양새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 같다. 오죽하면 남류문학이라는 말이 있겠는가. 술을 좋아하고, 여성이 없는 술자리는 견디지 못하고, 섹스를 많이 해봐야 - 남자 맛을 알아야 - 인생과 문학을 안다고 주장하며 자신과 섹스할 것을 강요하고(앞서의 예고생들의 경우, 미성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탈선을 해봐야 문학을 안다며 관계를 강요당했다고 한다), 이것들이 문제가 될 경우 자신의 혈관에서 끓는 예술가의 피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며 도리어 피해자의 자리에 자신을 갖다 두는 것. 인생과 작품에 대한 다분히 의도적인 혼동. 게다가 이들의 트윗 혹은 에버노트 몇 줄로 링크한 사과문들의 화자는 그들에게 피해를 당한 이들이 아닌 앞으로 계속 잘 보여야 할 독자, 혹은 대중으로 상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 경우 전혀 학부에서 시나리오를, 대학원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하면서 그런 압박을 주지 않는 스승에게 사사를 받을 수 있었던 건 수많은 문창과 학생들의 고백에 비교해볼 때 드문 행운이었지만, 문단을 비롯한 예술계 내에서 성폭력을 겪은 것은 어디 가서 절대 빠지지 않는 수준이다. 이러한 성폭력의 경험이 가장 서글픈 것은,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삶에 대한 기대치가 이러한 경험을 한 번 겪을 때마다 확실하게 눈금이 내려가 버린다는 점이다. 누군가 내 의사에 대한 요만큼의 관심도 없이 나를 손 닦고 버리는 물수건처럼 주물럭거릴 때,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을 유지하기는 매우 어렵다. 십대에 첫 책을 냈고 21살 때 첫 충무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으니 문화계에 일찍 들어온 나는, 몇 가지 사건을 겪은 후 조로, 혹은 무감해져 버렸다.


23살 즈음 영화잡지의 송년회에서 모 영화배우가 몸을 비비적거리며 귀에 입김을 뿜어대거나 문학상 뒤풀이 자리에서 모 소설가가 자기 작업실에 재워주고 자기는 집에 가서 자겠다며 갑자기 덮치던 일이나 야심한 시각에 영화사 대표가 네 섹시한 사진 있으면 좀 보내보라던 문자 따위의 일들에는 아예 상처조차 받지 않았다. 강해진 것이 아니라, 누가 날 함부로 대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거였다. 삶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지는 것. 성폭력의 가해자들이 저지르는 가장 큰 죄과 중 하나는 피해자들이 삶과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꿈과 기대를 사정없이 눌러 납작하게 짓밟아 버리는 것이다. 스스로를 하찮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 더럽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


최순실 게이트, 대통령 하야 등의 큰 ‘해일’이 일고 있는데 봇물처럼 쏟아지는 익명의 여성들의 고백은 누군가가 보기에는 조개나 줍고 있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큰일’, ‘대업’을 위해서 누군가의 고통을 보류하거나 무시하지 않는 것이 진보의 참 가치 중 하나가 아닐까. 여성혐오의 현상 중에는 여성 숭배가 그에 해당한다. 모성 숭배나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숭배가 그에 해당된다. 모성을 칭찬하거나 아름다운 여성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고결하고 희생적인 모성의 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숭배하고 찬양하며 자연스럽게 그에 미치지 못하는 여성들을 자격미달로 간주하게 되는 것이 전형적인 모성 숭배다. ‘나는 여자 없이 못 사는데 내가 어떻게 여성 혐오자냐’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경우, 소위 쭉쭉빵빵한 아름다운 여성을 찬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 그 미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여성들에게는 자연스럽게 경멸하고 무시하는 태도를 의식 중이든 무의식 중이든 취하게 되는 것이다. 문단 내 성폭력 해쉬태그에 올랐던 박범신 작가의 <은교>에서 여고생 은교는 사실상 늙은 문인 이적요와 그의 제자 서지우 사이의 애증 섞인 BL을 뜨겁게 만드는 도구에 가깝다. 이적요가 작중에서 은교의 하얀 ‘앙가슴’과 쪼르르 흐르는 땀을 찬미하는 구절을 다시 보며, 만약 여성 문인이 남고생 ‘은규’를 사모하는 내용이었다면 이 작품이 그토록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까, 잠깐 생각했다.


문단 내 성폭력 해쉬태그 고백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앞으로도 당분간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더 이야기되어야 한다. 그 광경을 보며, 풍자문학이 척박한 한국에서 나는 일종의 실험을 위해 <은규>를 직접 써 보고자 한다. 만약 여성 노인이 하얀 ‘앙가슴’을 지닌 소년 ‘은규’에 대한 연정을 품는 것이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것이고, 어쩐지 역겹고 불편하다면 그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남성 노인이 청장년 남성 제자와 함께 10대 소녀를 놓고 애증에 휩싸이는 소설과, 여성 노인이 청장년 여성 제자와 함께 10대 소년을 둘러싸고 갈등에 빠지는 소설을 볼 때 우리는 어떤 감상을 갖게 될까. 전작을 모두 풍자할 수는 없으니 축약본으로 몇 회에 걸쳐 핵심 줄거리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연재해 보고자 하니 함께 고민해 주고 돌아보아 주는 독자가 계시면 감사하겠다.


나의 영원한 동정, 나의 숫사슴, 나의 영원한 새신랑, 나의 은규...! 개봉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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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입니다


편집: 딴지일보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