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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세대가 묻습니다 : 촛불로 세상을 바꿀 수 있나요





얼마전에 딴지 일보에서 빵꾼님의 '촛불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요?'라는 글을 읽었다. 글쓰기 내공이 상당한 사람이 쓴 글이라는 느낌이 왔다. 개인적인 정보를 풀어내는 방식의 치밀함도 인상적이었지만 '꼰대들아 입으로만 떠들지 말고 광장으로 튀어 나와라'라는 말을 매우 공손하게 전달하는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정의당원이라고 스스로를 밝혔는데, 정의당은 이런 청년 인재를 놀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무튼 그 글에 감명을 받고 나도 한 마디를 하고자 했다. 나는 비록 우리가 기성세대라 말할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회적 지위나 경제력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에 불과한 데다가 내 스스로 단 한 번도 내가 기성세대에 속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빵꾼님 말마따나 예전에 문익환 목사님이나 백기완 선생님 연설을 들었던 한 사람으로서 그가 던진 묵직한 질문, 촛불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요에 대한 내 나름의 고민의 여정을 공유하고자 글을 쓰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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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우리의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가 없는가, 이것은 동서고금을 통해 언제나 현재진행형인 문제의식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해 일부는 근엄한 포즈를 잡으며 뇌까린다. 빵꾼님의 대문 글에 누군가가 이런 댓글을 달아 놓았다.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다만 당신이 바뀔뿐입니다. 당신이 바뀌면 세상이 다르게 보일뿐입니다."


사회 변화를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두 번, 실은 그보다 훨씬 자주 들을 수 있는 견해이다. 이런 견해를 밝히는 사람들은 대체로 세상 풍파 다 겪은 것처럼 자신의 경험을 늘어놓는다. 경험이 일천한 청년들은 거부감을 느끼지만 뭐라 반박하기 힘든 주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언술로서 본인의 역사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기능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발화일 뿐이다. 일찍이 2500여년 전에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변한다'라는 명제를 주장했다. 21세기에 지적인 수준과 역사에 대한 통찰력이 청동기 시대에도 미치지 못하는 천박한 세계관일 뿐이다.


다 떠나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사람은 본인은 어째서 수렵, 채집 생활을 하지 않고 문명을 누리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이다. 아니면 어떻게 흑인인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 당선이 가능했는지를 설명하든가, 아무튼 저 헬렐레한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사례는 차고도 넘친다. 세상은 바뀌지만 무지(無知)의 단단함만큼은 안 바뀌는 것 같다. 이 점만큼은 헤라클레이토스가 틀리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세상은 바뀐다. 이것은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증명되는 엄연한 사실이다. 다만 변화의 방향이 어떤 양상으로 흘러가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세상은 점점 좋아진다는 진보적인 세계관과, 반대로 점점 타락해간다는 염세적인 세계관이 있는데, 둘 다 한 방향으로 사회 변화가 이루어진다고 바라보는 점에서 단선적 세계관이라 이름 붙일 수 있다. 인류의 역사는 합법칙적인 발전단계를 거친다는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이 전자이고 세상은 갈수록 타락해서 최후의 심판으로 다가간다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대표적이다. 그런가하면 세상은 변화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같은 일의 반복이라는 니체식의 세계관도 있는데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주장에 좀 더 세련한 외피를 입힌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별로 특별하지도 않은 세계관에 대해 탄탄하지도 않은 이론적 분석을 늘어놓을 마음은 없고, 그냥 내가 느꼈던, 내 동년배들이 느꼈던 세상의 변화와 정치참여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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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우리가 정치 참여를 하는 것은 세상이 변화한다는 신념을 먼저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박정희 시대에 그에게 대항했던 사람들,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고 전두환에게 대항했던 사람들, 나에게도 선배 세대들인데 이분들은 처음부터 '세상은 변화한다. 이 군사독재는 반드시 끝장나고야 만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운동을 하지 않았다. 그저, 너무나 견딜 수 없는 고통,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사회 분위기 때문에 사회 운동에 발을 디뎠고, 세상이 변하느니 안 변하느니 하는 사변적인 논쟁은 관심도 없었다. 처음에는 막연한 분노로 시작했지만 차츰 시간이 흐르며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군사독재를 끝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민족주의, 주변부 이데올로기, 해방신학, 마르크스 주의, 주체사상 등의 다양한 이론을 접하게 되었는데, 결국에는 마르크스 주의와 주체사상이 학생운동의 양대산맥으로 남게 되었고 다른 이론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나로서는 그 전 과정을 통찰할만한 능력이 없지만, 조심스레 내 경험에 비추어본다면, 다른 이론들에 비해 맑시즘과 주체사상은 너무나 매력적인 일종의 복음처럼 다가왔다는 점에 그 생명력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역사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상호 모순에 의해 변화하고 모든 사람이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필요에 따라 배분하는' 사회주의 체제가 최후에 성립한다는 마르크시즘, 한 발 더 나아가 역사는 인간의 자주성 해방의 길로 나아간다는 주체사상, 제시하는 미래상이 달콤할수록 추종자가 많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분위기에서 80년대 후반부터 운동권의 대량생산이 이루어지면서, 먼저 분노하고, 좌절감을 딛고 일어서는 오랜 자기 성찰의 기간을 축소하고 거리에 나가는 것만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프랜차이즈(?) 운동권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70년대 선배들은 거의 아는 사람이 없지만 80년대 선배들을 만나보면 대체로 86년도 이전과 이후로 분위기가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87항쟁 이전 세대들은 진중하고 사색적이다. 그 아래 선배들은 대중적이고 행동적이다. 학교에서 구호 한 번 제대로 못 외치고 전경에게 끌려가던 세대와 사대문 교통을 마비시키고 전경들을 무장해제했던 세대의 차이라고나 할까.


언젠가 한 번 "박정희에게 당한 분이 어째서 박근혜를 찍으신 거에요?"라고, 약간 반항하듯 여쭈운 적이 있습니다만 돌아온 대답은 "그 시대에는 박정희가 맞는 것이었다. 시위는 그냥 선배들이 하라는 대로 을 뿐"이었습니다.


빵꾼님의 아버지가 회의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 대해 나는 폄하하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고 오히려 여러 측면에서 공감이 느껴진다. 내 또래의 세대들 역시 몇 차례 엄청난 실패의 경험을 겪으며 좌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시발점은 80년대 후반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였다. 대부분의 운동권 학생들이 절대적인 선으로 믿었던 사회주의 국가들이 실은 모순 투성이였고 그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먼저 무너져내렸다는 것은 마르크스의 예언에는 없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직접적으로 패배주의와 회의주의를 심은 것은 아무래도 91년 투쟁의 실패라고 생각한다. 강경대 학생의 사망 사건으로 촉발된 91년 시위는 매일 수십 만의 시민들이 종로를 점거하는 6월 항쟁 이후 최대의 투쟁으로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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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들은 곳곳에서 무장해제를 당했고 이스라엘에서 수입한 물대포는 성난 시민들에 의해 뒤집혔다. 노태우 정권이 끝나는 것도 시간 문제라고 모두 생각하고 있을 때, 김지하의 조선일보 사설, 김기설씨 유서 대필 사건, 외대 학생들의 정원식 총리 계란 투척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국면은 급격히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거기에 당시 전대협 지도부는 92, 93년 대변혁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남은 학생들의 열정을 쥐어짰지만 그마저도 실패로 돌아갔고, 사실상 명맥만 유지하던 운동권은 96년 김영삼의 연세대 진압으로 사실상 와해되고, 이듬해 프락치 살인이라는 희대의 헛발질로 자멸했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나와 내 동료들은 극도의 허탈감에 빠졌다. 이때부터 몇 년 간 내가 무슨 생각으로 살았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을 지경이다. 아마도 빵꾼님의 아버지도 비슷한 상처가 있는 분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몇 년 미친놈처럼 의미없이 살다가 한 장의 충격적인 사진을 접하게 되었다. 유태인 학살인지 코소보 학살인지 기억은 나지 않는데, 군인들이 땅파기 귀찮으니까 학살당할 희생자들에게 삽을 쥐어주고 직접 무덤을 파게 하는 사진이었다. 총을 메고 근엄하게 서 있는 군인들과 비굴한 미소를 띄며 삽질하는 희생자들의 모습을 보고 머리가 발칵 뒤집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기왕 죽을 거, 삽이라도 한 번 휘둘러보지, 뭐하러 죽는 순간까지 힘들게 땅을 파고 있나. 그리고, 이때부터 나는 내 인생의 목표를 내 무덤을 삽질하는 인생이 되지는 말자로 정했다.


사회 생활을 하며 만나는 수많은 갑들은 나의 일방적인 양보와 희생을 강요한다. 그걸 맞춰주는 게 세상살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나 자신을 잊고 살다보면 어느 순간 내 손에 삽을 쥐어주고 땅을 파라고 지시한 후,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나에게 총알을 날리는 인간을 만나지 말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그래서 부당하다는 생각이 드는 지시는 거부하고, 트러블이 생기면 결국 그 곳을 떠나고, 그때부터 나의 인생은 그런 패턴의 반복이라 할 수 있다. 누군가가 본다면 한심한 인생일지 모르겠지만, 내 스스로는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나에게 떳떳한 삶을 살고 있다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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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빵꾼님에게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할만한 견해를 내세우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한 가지 함께 생각해볼 거리는 공유하고자 한다. 먼저 질문을 바꿨으면 한다. 빵꾼님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촛불을 드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 내가 촛불을 들든 안 들든 세상은 나와는 거의 무관하게 자신의 흐름대로 흘러갈 뿐이다. 내가 글을 올릴 때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글을 쓰지 못하고 있을 때나 딴지일보는 나와는 상관없이 잘만 굴러간다. 그렇지만 나는 가급적 글을 쓰고자 한다. 내가 쓰고 싶으니까. 나 한 사람 광화문에 안 나갔어도 어제 광화문에 이십여만명이 모인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나갔다. 내가 나가고 싶으니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세상이 변하든 그렇지 않든, 그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라는 꼰대스러운 조언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영향력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사람들은 항상 뒷탈을 일으켰다. 나는 내가 분노하면 글을 쓰고, 더 분노하면 촛불집회에 나가고, 그보다 더 분노한다면 직접적인 물리적 타격도 행사할지 모른다.


나는 빵꾼님이 질문의 주체를 '세상'이 아닌 '나'로 바꾸는 것이 훨씬 마음의 부담을 덜어줄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이 바뀌든 말든 그건 알 바 아니고, 난 박근혜와 최순실의 무당놀음으로 나라가 운영되어 왔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어서 집회에 나가, 넌 아직은 참을만 하나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우리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촛불을 들어야 한다'는 선언적인 주장보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잘 먹혀들지 않을까. 순전히 개인적인 의견이니 혹시 기분 나쁜 부분 있었다면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도비공


편집: 딴지일보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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