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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가카!


옥체강령 하시옵니까. 요즘 연일 꿀잠을 때리신다는 풍문을 들으니 건강은 염려 없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무도한 무리들이 파쇄된 종이쪼가리까지 뒤져가며 연일 가카의 병원 대리 처방 내역에 대해 보도를 때리는 것을 보니 가카의 건강 최우선 관심사는 노화방지에 있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훌륭하신 선택입니다. 길라임의 피부에 버금갈 만 한, 가카의 형광등 천 개를 켜놓은 듯한 아우라가 나는 피부가 그저 타고난 것이 아니라 필사의 노력이 담겨 있는 것이었음을 소생 몰라 뵈었습니다.


북괴의 지령을 받은 백만의 촛불들이 가카의 안마당이자 선대 가카의 동상이 세워질 성스러운 땅을 불법점거하고 ‘퇴진’, ‘하야’ 등 망발을 일삼고 있는 지 어언 몇 주째, 가카께서 텔레비전에 나와 두 번이나 머리를 숙이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에 소생의 미욱한 마음 참담하기 그지없었습니다만, 가카께서 청와대에 딱 두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신 채 만근추 신공을 시전하시는 참으로 탁월한 선택에 다시 한 번 탄복했습니다. 하여 소생, 비록 순실상왕전하의 심모원려(深謀遠慮. 깊이 고려하는 사고와 멀리까지 내다보는 생각)에는 털끝에도 비하지 못하지만 미천한 재주를 쥐어짜 가카의 만근추에 도움이 될 만한 동서고금의 사례들을 모아왔습니다. 부디 가카께서는 멀리하지 마시고 촌부의 우국충정을 살펴 읽어 주옵소서.



1. 찰스 1세 -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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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년에 태어난 영국의 찰스 1세는 재위 내내 의회와 심각한 갈등을 빚었습니다. 아버지 제임스 1세 역시 의회와 끝없는 갈등을 빚었던 것이, 꼭 선대 가카의 국회 해산이나 가카께서 책상을 탕탕 내려치며 국회를 질타한 것과 같은 뜻으로 사료되옵니다. 찰스 1세의 무리한 해외 원정 실패와 너무 무능해서 찰스 1세와 동성연인 관계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은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의 거듭된 삽질로 영국의 조세부담은 높아져만 갔고, 결국 의회는 1628년 권리청원(의회의 승인 없는 과세는 불가하다는 원칙을 비롯해서 왕권도 건드릴 수 없는 일련의 ‘자유권’을 승인해 달라는 요구)을 합니다만, 찰스 1세는 들어주는 척하면서 통수를 때리며 의회를 해산시켜 버립니다.


그 후 11년 간이나 의회 없이 홀로 왕 노릇을 하던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서 의회를 다시 열었지만, 의회가 말을 잘 안 듣자 다시 해산시키는 등 계속 갈등을 빚었습니다. 의회의 오만방자함은 도를 더해가 찰스 1세의 잘못을 2백 개 조항에 걸쳐 낱낱이 지적하는 항의문을 올리기까지 하였답니다. 결국 영국은 찰스 1세의 왕당파와 올리버 크롬웰로 대표되는 의회파가 내전을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 차례의 내전에서 모두 왕당파가 패배했고, 1648년 크롬웰은 의회를 기습‧장악하고 왕의 재판을 열었습니다.


비록 찰스 1세는 실패했지만 가카께서는 국회의 압박에 굴하지 마시고 지금 그대로 잘 버티실 것이라 믿사옵니다. 참, 찰스 1세는 1649년 1월 30일, 백성들 앞에서 목이 잘렸습니다. 가카와는 상관없는 일일 테니 이런 건 너무 괘념치 마소서.



2. 칼리굴라 -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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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2년에 태어난 칼리굴라는 전쟁 영웅이었던 아버지의 후광을 그대로 물려받고 25세의 젊은 나이에 아내도, 자식도 없이 황제에 즉위합니다. 칼리굴라는 비극적인 가족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임 황제인 티베리우스의 근위대장 세야누스의 음모로 어머니와 두 형이 추방당해야 했고, 아버지 역시 젊은 나이에 병으로 요절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황제가 되고 난 후 가카처럼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을 모시는 데 끔찍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만, 칼리굴라는 유감스럽게도 병에 한번 걸리고 회복한 뒤 갑자기 의심이 극도로 많아지고 정신이 이상해졌습니다.


서기 38년, 병에서 완쾌되자 공동제위계승자인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죽였습니다. 그는 여동생들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근친관계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답니다. 너무나 사랑했던 여동생 드루실라가 병사하자 그녀를 신격화하기도 했지요. 반인반신화는 역시 동서고금에 널리 퍼진 유구한 전통임이 확실합니다.


여기에 온갖 사치와 향락으로 전임 황제가 욕을 먹어가면서도 긴축정책을 펼치며 쌓아둔 국고를 1년 만에 탕진시켰습니다. 당연히 귀족과 서민을 막론하고 막대한 세금을 물렸고, 그 외에 말도 안 되는 폭정을 저지르면서도 자신이 멋지게 수습을 하는 상상을 하며 천재지변이 나길 기도했답니다. 아무리 그래도 지도자가 국가적 재난을 바라기까지 했겠습니까. 소설임이 분명합니다.


아버지의 후광은 사라지고 순식간에 국민 대다수가 욕을 하는 처지로 변한 칼리굴라는 그럼에도 헛짓을 멈추지 않다가, 서기 41년 29세의 나이로 신하의 칼에 찔려 암살당하고 맙니다. 고작 재위 3년 10개월 만에 죽은, 가카의 치세보다도 짧은 왕위를 지낸 황제니 이 사례는 너무 맘에 담아두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3. 현종 -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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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현종은 당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황제입니다. 685년에 태어나 712년에 황제에 오른 후, 할머니인 측천무후의 여러 개혁책을 계승하고 유능한 신하들을 등용하며 훌륭한 성군의 모습을 잘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그대로 쭉 성군으로 끝났다면 굳이 소생이 이 분을 꼽지 않았겠지요.


742년, 현종은 정치가 지겨워졌는지 기존의 유능한 신하들을 멀리하고 간신 이임보로 대표되는 귀족세력들만 가까이하며 총기를 잃어갔고, 752년에 유명한 양귀비를 맞아들이면서 정국은 불안에 빠집니다. 비천한 신분 출신이지만 과거제를 통해 들어온 관료들은 점점 홀대를 받았고, 죽은 이임보 대신 양귀비의 집안사람들이 현종 주위를 점령해 국정 문란을 더해갑니다.


가카께서 조금이라도 반란의 낌새가 보이는 자들을 “나쁜 사람들”이라 칭하며 좌천시키는 것처럼, 간신 이임보도 새로운 정치세력의 대두를 강력하게 막았는데 이때에 힘을 키운 안녹산이 755년, 양귀비의 오빠인 양국충의 타도를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킵니다. 안녹산의 난은 매우 위협적이었고 현종은 장안을 비우고 몽진까지 합니다. 사태를 잠재우기 위해 양귀비는 자살을 택하는데, 현종은 이때부터 현자타임이 온 것 같습니다.


결국 주변 사람들에 의해 황태자가 황제로 추대되었고, 황실의 분란이 일어날 수도 있었지만, 현종은 순순히 하야하여 태상황이 되었습니다. 가카께서는 절대 순순히 하야하지 마시고 버티시기 바라는 마음에서 당 현종을 꼽아보았습니다.
 


4. 차우셰스쿠 - 루마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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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모르실까봐 말씀드리지만 오른쪽의 사람입니다


‘정열적이고 총명하며 매력적인 인격의 영원한 우리의 지도자’라는 칭호를 가진 차우셰스쿠는 1918년에 흙수저 신분으로 태어나 청년 시절 공산당 활동을 하며 수없는 투옥생활을 보냈습니다. 선대 가카께서도 잠시 남로당에 몸담으신 것을 보면 공산주의가 그때에는 제법 매력적인 주장이기는 했나 봅니다. 그런데 차우셰스쿠는 하필이면 스탈린주의에 심취하는 바람에 영 좋지 않은 생각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줄을 잘 타서 루마니아 공산정권의 서기장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의 심복이 되었고, 이후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이후 권력을 독점하였고, 1965년, 게오르기우데지가 죽자 서기장이 되고, 1974년에는 헌법에도 없는 대통령직을 만들어 독재를 완성합니다. 초반에는 나름대로 여러 유용한 경제정책을 펼치며 인기도 쌓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스탈린주의의 필수 코스인 차우셰스쿠 우상화를 강요하며 전국 각지에 동상과 초상화를 만들게 합니다. 가카께서 선대 가카의 동상을 세우려는 참뜻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차우셰스쿠는 또 완벽한 1인 독재 권력을 완성한 마오쩌둥과 김일성의 숙청 과정을 지켜보며 이 둘을 존경했다 합니다. 당연히 비밀경찰을 풀어 많은 민간인을 사찰했고, 갱제는 막장으로 흘렀으며, 차우셰스쿠의 가족과 측근들의 전횡은 날로 심해지는 가운데에서도 20년 이상 독재를 합니다.


1989년, 동구권 민주화의 바람이 루마니아에도 불어오자 차우셰스쿠는 늘 그러했듯 강경 유혈 진압으로 대응했습니다만, 이 소식이 전국에 퍼져 급격하게 민심이 돌아서 버렸습니다. 그러나 차우셰스쿠는 여전히 상황파악을 제대로 못 하고 이란을 방문하는 등 모르쇠로 일관합니다.


1989년 12월 21일, 평소대로 자신에 대한 지지 대회를 열던 차우셰스쿠는 자신의 연설 중에 갑자기 야유와 비난을 퍼붓는 민중들을 보며 멘붕에 빠졌고, 이 과정은 테레비 생방송으로 전국에 퍼지게 됩니다.




이후 엄청난 수의 시위대가 연일 집회를 했고, 군부마저 시위대에 합류함에 따라 차우셰스쿠는 도주를 선택합니다. 하루도 안돼서 잡혔습니다. 국민의 엄청난 야유 속에서 차우셰스쿠는 결국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가카께서는 절대로, 절대로 군부의 신임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행여라도 강경 진압 이런 명령을 내리시면 순식간에 돌변할지도 모릅니다.


아, 차우셰스쿠의 처형 영상을 본 김일성과 김정일은 “반동들을 때려잡지 않으면 우리도 저 꼴이 된다”는 반응을 보였던 반면, 덩 샤오핑은 “틀렸다. 우리도 개혁하지 않고 민중에게 베풀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5. 광해군 -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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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조선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겠지요. “역사를 잘못 배우면 혼이 비정상”이라는 명언을 남기신 역사마스터 가카이신 만큼, 광해군에 관한 최근의 연구 동향 역시 잘 아시시라 사료되옵니다. 한 때 중립외교와 대동법으로 재평가가 있었던 광해군은 최근 후속연구들을 통해 그다지 훌륭한 왕은 아니었음이 밝혀지고 있지요.


1575년 태어나 1608년 왕위에 오를 때까지 광해군은 아버지 선조의 병크들 때문에 늘 가시밭길을 걷는 세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당시 분조를 이끌며 훌륭한 세자의 역할을 수행했고 이 때문에 선조가 광해군을 경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습니다만, 어찌어찌 힘들게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극심한 왕권 노이로제에 시달렸습니다. 대통령 권위의 손상을 추호도 용납하지 않으시는 가카께서는 광해군의 심정을 잘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광해군은 인목대비의 폐비 문제에 대해 조선왕조에 몇 없던 여론조사까지 돌리는데, 이것마저도 이이첨이 알바를 동원해 조작한 것이었습니다. 가카와 MB가카가 자주 쓰시던 방법이었지요.


광해군은 수차례의 옥사를 치르며 반대파를 숙청해나갔고, 이 과정에서 북인만을 끌어안고 그다지 크게 위협적이지 않았던 서인과 남인을 적으로 돌리는 실수를 범하면서 스스로 고립되어 갔습니다. 또한, 무리한 궁궐공사 탓에 지지율은 자꾸만 추락해갔지요. 지지기반인 북인조차 완전히 믿지 못했으니, 결국 나중에 인조반정에 동조한 내부배반자로 인해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가카께서는 늘 우병우 같은 측근들을 경계하셔야 합니다. 믿었던 도끼는 늘 발등을 찍는답니다.



6. 알리 압둘라 살레 - 예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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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출생한 알리 압둘라는 군인출신으로 승승장구합니다. 1978년 6월 24일, 폭탄테러로 대통령이 사망하자 후임 대통령이 되었고, 동시에 군 참모총장까지 역임합니다. 이후 30년간 독재정치를 펼치며 1990년엔 남북예멘을 통일하고 통일예멘의 초대 대통령이 되기도 하지만, 갱제는 점차 막장화, 선거는 늘 부정선거, 자신에 대한 우상숭배, 고위관료에는 자신의 일가친척을 임명하는 행위로 인해 반체제 인사들의 꾸준한 비판을 받습니다. 또한 예멘은 알 카에다가 설치고 시아파 반군과 내전을 치르고 있기에, 이 난국을 타개할 첫 번째 단추는 ‘살레의 퇴진’이라는 주장이 이어집니다.


2011년 튀니지에서 촉발된 아랍의 봄이 예멘에도 번져가고, 2011년 1월 18일 첫 대규모 시위가 열리고 이 과정에서 12명이 사망합니다. 이미 야권이 연립정부 형태로 정권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위의 구심점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2월이 돼서야 야권이 시위에 참여하면서 살레는 압박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가카께서는 지금처럼 민주당을 기만하며 잘 이용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살레는 시위에 대한 강경 진압을 이어나갔고, 살레 대통령은 차기 대선 불출마, 연말 퇴임을 제안하였지만, 시위대는 이를 거부합니다. 살레는 하야를 거부하면서 “반정부세력들은 모두 이스라엘과 미국의 지령을 받은 것들”이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북괴의 지령을 받은 우리나라 시위대와 아마 비슷한가 봅니다.


대통령 권력 분할과 선거 제도 개편의 헌법 개정안도 야권의 반대로 무산되고, 시위는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살레는 말을 바꾸며 2013년까지 집권하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이에 다시 시위는 불타오릅니다. 보다 못한 걸프연합기구는 대통령의 평화적 퇴임과 가족들의 면책특권을 보장하는 중재안을 내놓았지만 계속 거부하며 진정한 만근추를 보여줍니다.


결국 정부군과 반군의 사실상 내전상태가 되었고, 반군의 포격에 대통령이 심각한 부상을 입는 상황까지 발생했습니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살레 대통령은 11월이 되어서야 국제기구의 중재안을 받아들여, 90일 내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될 때까지만 대통령직을 유지하고 30일 내로 부통령에게 모든 권한을 맡기는 하야를 선언합니다.


아, 예멘에서 있었던 최대 시위의 인원은 수도에서는 2만 5천 명, 전국적으로는 18만이라 합니다. 우린 백만인데, 살레 대통령 참 나약하지 않습니까.



7. 구스타프 후사크 - 체코슬로바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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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에 태어나 30대에 나치 독일에게 저항하는 슬로바키아 민중 봉기를 일으키기도 한 후사크는 젊을 때부터 공산당에 입당하여 정치에 참여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기도 했으나 복권되었습니다.


1968년 4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의 기치를 내걸며 촉발된 알렉산데르 둡체크의 개혁정책이 ‘프라하의 봄’을 만듭니다. 이 과정에서 후사크는 개혁파로 참여하였으나, 소련이 개입하자 갑자기 친소련 스탠스를 취했고 1969년엔 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습니다.


1975년엔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모든 것을 프라하의 봄 이전으로 되돌리겠다는, 이른바 ‘정상화 정책’을 시행합니다. 알렉산데르 둡체크의 개혁정책은 모두 폐기되었고, 지식인들과 반체제 인사를 강력하게 탄압했으며, 억압(Coercion), 소비주의(Consumerism), 서커스(Circus)의 3C 정책을 펼치면서 경제적으로 점차 낙후되어 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년 이상 장기독재에 성공합니다.


그러던 중 1980년대 중반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정책이 1989년 동유럽 혁명으로 이어지면서 20만 대군에 의해 짓밟혔던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가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합니다. 1989년 11월 17일 체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후사크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경찰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부상자가 생기자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됩니다.


약 한 달 뒤인 12월 29일, 마침내 후사크 정권이 물러나고 반체제 활동을 주도해온 바츠라프 하벨이 대통령에 선출되면서 후사크와 공산당은 퇴장하고 소련군도 훗날 철수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 혁명의 과정에 유혈사태가 드물고 매끄러웠다 하여 ‘벨벳 혁명’이라 부른답니다.


아마도 후사크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무리하지 않고 권력을 내놓은 것 같습니다. 가카께서는 존재 자체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분이니 후사크의 예를 본받지 마옵소서.



8. 박정희 -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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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존경하는 대통령 가카! 가카의 만근추 신공에 도움이 되는 사례들은 사실 널리고 널렸으나 이만하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가카께옵서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계시는 국정교과서에도 4.19와 10.26과 87년 6월의 사례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니, 가카도 최소한 글은 읽을 줄 아시는 분이니 그 사건들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아니다, 그냥 페이지를 넘겨버리셨나….


어쨌든 소생 이만 물러나며 가카께 드리는 마지막 충언으로 선대 박정희 가카의 위대한 말씀을 남기려 합니다.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야’”




빵꾼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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