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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90년대
1987년 6.10 항쟁으로 최소한 대통령은 국민이 직접 뽑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을 민주적으로 선출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바로 잡힌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1990년 9월, 국군 보안사령부에서 이등병이 탈영했다. 그가 갖고 나간 것은 총이 아니라 플러피 디스크. 1.2MB의 소박한 저장 용량을 자랑하던 이 플러피 디스크 세 장은 한국 사회에 어마어마한 폭발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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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보안사령부가 민간인들을 사찰하려는 계획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계획은 1987년 헌법을 정지시킬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하면 “이를 방해할 민간인들을 체포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집 주소, 집 안의 가구 배치, 진입과 도주 가능 경로, 친인척 주거지까지 아주 디테일한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민주정부의 두 대통령이 이 사찰 명단에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 심지어 그 해 3당 합당으로 당시 대통령 노태우와 같은 정당에 있었던 김영삼씨도 사찰 대상이었다.

이 사건으로 보안사령부가 기무사령부로 명칭 등이 바뀌지만 역시 많이 나아지진 않았다.

1992년 3월 22일, 학군사관으로 복무중이던 한 소대장이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4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군에서 노골적으로 여당인 민주자유당 후보를 당선시키도록 정신교육을 할 것과 부재자 투표에서 무조건 기호 1번을 투표하도록 하고, 이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투표용지를 뺏거나 불이익을 주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폭로했다. 지금은 한국공인신고지원센터 소장으로 있는 이지문 중위 이야기다.

그랬던 즈음이라 당시 대학의 1학기는 아주 빠르게 지나갔다. 4.19 기념식을 시작으로 5.1 노동절, 5.18, 그리고 6.10으로 이어지는 집회에 참석하고 나면 기말고사였다.



2. 1990년 봄, 춘천
1990년 춘천은 유독 더 뜨거웠다. 90년 5월 어느 날. 강원대학교 도서관에선 학생들이 밤 늦도록 공부하고 있었다. 그 도서관에 춘천 경찰서 기동대가 투입되어 공부하고 있던 학생들을 굴비 두릅으로 연행했다. 전대협 중집 간부 중에 하나가 거기에 있다는 첩보가 있었던 것.

아니, 어떻게 경찰이 공부하는 학생들을 체포할 수 있냐고? 이렇게 대답하는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이때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이어지자 춘천경찰서는 서울의 전투경찰부대를 불러들여서 진압했다. 그 부대는 다음 해 명지대에서 쇠파이프로 학생을 죽인 부대였다. 살해된 학생의 이름은 강경대였다. 영어 잡지에 북한 관련 내용이 있으면 먹으로 칠해 읽을 수 없게 한 다음에 서점에 깔렸던 시기기도 했다.

여튼, 공부하고 있다가 경찰에 연행되는 어처구니 없는 경험을 한 학생들은 분노했고 바로 다음 날부터 항의 집회가 조직됐다. 공부하던 학생들을 연행했던지라 집회에 참석하지 않는 학생들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 즈음엔 강원대에 친구들이 있으면 도서관 이용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시험 때가 아니라면 타교생들도 종종 이용했던 만큼, 집회의 규모는 상당했다.

매일같이 화염병 + 돌 + 쇠파이프를 든 학생들과 페퍼포그 + 최루탄으로 무장한 전경이 충돌했다. 춘천 팔호광장까지 진출했다가 털려서 다시 강대로 쫓겨가는 가투가 거의 매일 벌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강원대학교 학생 한 명이 분신자살을 시도했다. 

시위는 더 격렬해졌다. 그리고 학교에서 강원대 방면으로 뚫고 나가려고 하던 어느 날, 사과탄 파편이 내 오른쪽 가슴에 박혔다. 화염병 특별법이 만들여져 화염병 던지다가 잡히면 일단 3년 때리고 시작하던 시절이었다. 아드레날린이 꽤 많이 뿜어져 나왔던지라 파편이 박혔는지도 몰랐다. 옷을 벗고 나서야 런닝 셔츠 절반이 피로 적셔진 것을 볼 수 있었다. 바로 옷 갈아입고 학교 병원에 입원했었다.

파편이 박힌 상태에서 바로 병원으로 갔으면 '들어간 길'이 있어서 그대로 집어 내면 됐는데, 가슴에 구멍이 뚫린 상태에서도 화염병 던지고 파이프를 휘둘렀던지라 파편을 찾기가 너무 힘들었던 것. 그래서 수술을 집도하던 의사는 '탈이 생기면 찾기 쉬울 테니까 일단 닫자'고 봉합해버렸다. 그러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오른쪽 겨드랑이 쪽으로 침을 안 뽑은 것 같은 아릿한 느낌은 항상 받고 있고, 해발 3천미터 이상으로 올라가거나 무거운 것을 들면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을 느낀다.



3.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제1조(목적) 이 법은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희생된 자와 그 유족에 대하여 국가가 명예회복 및 보상을 행함으로써 이들의 생활안정과 복지향상을 도모하고, 민주주의의 발전과 국민화합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개정 2007.1.26>
1. "민주화운동"이라 함은 1964년 3월 24일 이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여 헌법이 지향하는 이념 및 가치의 실현과 민주헌정질서의 확립에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신장시킨 활동을 말한다.

2. "민주화운동관련자(이하 "관련자"라 한다)"라 함은 다음 각목의 1에 해당하는 자중 제4조의 규정에 의한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서 심의·결정된 자를 말한다.
가.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자
나.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상이를 입은 자...”

그러니까 나도 이 법에 따라 국가에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그런데 이 법은 2007년까지 신청할 수 있었다. 약 8년의 시간이 있었던 셈인데, 이때 보상신청을 하지 않았다.

이유? 대학 졸업할 즈음에 아버지 사업이 제대로 망했었는데 돈이 아쉽지 않을리가. 돈 많아서 신청 안 한 것이 아니다. 법 자체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국가는 ‘배상’을 해야 했다. 국가가 침해한 "남의 권리에 대해 그 손해를 물어주는 것" 말이다. 하지만 국가는 '보상'을 했다. 법률용어로서의 보상은 “국가 또는 단체가 적법한 행위에 의하여 국민이나 주민에게 가한 재산상의 손실을 갚아 주기 위하여 제공하는 대상(代償)”을 말한다. “국가가 적법한 일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니가 피해를 입었으니 이거 먹고 떨어져라”라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다.

법 제정 당시에는 그렇지 않다는 사발을 풀었지만, 실제로 “이거 먹고 떨어져라”라는 형태로 적용됐다. 당시 한나라당이 워낙 지랄한 바람에 돌아가신 분들도 '등급'을 매겼기 때문이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졸개로 평생을 살았던 것들의 장난질 덕택에 '등급'을 받아야 한다니. ᄉᄇ 내가 돼지나 소냐고 안 한다고 침 뱉어 버렸었다.

무엇보다 이 등급 판정으로 주겠다고 했던 보상금도 어처구니 없었다.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요구하면서 자신의 몸을 불사른 전태일 열사에게 국가가 '보상'하겠다고 했던 것은 940만원이었다. 그리고 '배상'이 아니라 '보상하는 법'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다치거나, 고문을 당했거나,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아예 목숨도 잃었던 분들은 지난 안 민주정부 MB, 503 9년 동안 두고 두고 조롱당했다. 아니, 심지어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자까지 거짓 선동에 앞장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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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의 홍준표 대표는 지난 대선 기간에 이런 말을 했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고, 2017년 3월까지 9,842명이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보상을 받았다.”

"건국훈장 보상금이 약 525만 원인 반면 민주화운동 보상금은 이보다 10배 많은 1인 평균 5,572만 원이었다. 민주화유공자 유가족들에게 부여한 공직시험 가산점에 대해서도 과도하거나 치우침이 없도록 바로잡겠다."

돼지발정제로 여자를 어떻게 해보려고 했던 분에 대해 길게 쓸 생각 없다. 모조리 거짓말이라는 것은 이미 뉴스타파가 지적한 바 있으니 그 기사만 링크한다. <뉴스타파> - “민주화운동 보상금이 건국훈장 보상금의 10배?” (링크)



4. 안 민주정부 9년의 국가 폭력
앞서 말했듯,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가에 보상을 신청할 수 있었던 것은 2007년이 끝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1964년 3월 24일 이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여 헌법이 지향하는 이념 및 가치의 실현과 민주헌정질서의 확립에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신장시킨 활동”이 2008년부터 2017년 초까지 없었나?

MB, 503시절의 대부분을 난 남아시아에서 보냈다. 한국에 돌아와서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대규모 집회가 있었다. 집회란 원래 기본권이 심하게 침해 당했을 때 항거하는 수단이다. 그런데 들어올 때마다 대규모 집회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국가가 위법한 짓을 해서 거기에 빡친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얘기다. 최소 일년의 3/4을 해외에서 보냈는데 그 1/4 기간동안 대규모 집회가 없었던 적이 없었다.

90년대에 끝난 것이라고 생각했던 불법 민간인사찰은 MB, 503시절에도 있었다. 마봉춘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방송사는 ᄋᄇᄉ이 되었고 그 조직원들은 회사의 탄압에 맞서 지금까지도 싸우고 있지 않는가? 최근에 복직된 YTN의 기자들은? 세월호 유가족들을 대중으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해 청와대가 지시했던 것들은? 아니, 대선에 국가정보기관원들을 풀었던 것은 어떻고?

사람은 안 바뀐다. 안 민주정부와 독재정부에서 호의호식하며 잘 살았던 사람들이 민주적 가치를 인정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 안 된다. 그 사람들이 다시 정권을 잡는다고 하면 MB, 503시절이 반복되는 것은 당연지사. 그러니 후퇴할 수 없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그 장치들 중에 하나가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을 ‘배상에 관한 법률’로 개정하고, 국가가 폭력을 휘두른 사안의 경우엔 아예 시효를 없애는 것이다.

민주화운동은 '국가의 적법한 행위에 저항하다가 입는 손실'이 아니다. 국가의 범죄 행위에 대해 저항했던 것이다. 행위 자체를 두고 불법이라고 정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살자가 명예훼손을 말하고 돼지발정제로 여자를 어떻게 해보겠다고 했던 이들이 거짓을 흩뿌리고도 멀쩡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은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배상 등에 관한 법률"로 바꾸고 1963년부터 지금까지 국가의 불법적 폭력이었다는 것이 인정되는 사안들에 대해선 배상한다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공화국의 시민을 탄압하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이 각인되지 않는 한, MB, 503시절에 자행됐던 것처럼 언제든지 시민권은 제약될 수밖에 없다. 국가가 시민을 탄압하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이 각인될 때야 MB, 503시절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요구한다. 국가가 벌인 범죄는 시효가 없어야 한다. 그리고 그 범죄행위에 대해 국가가 '배상'을 해야 한다. 그래서 권력자의 잘못된 명령을 따르고도 "나는 국가의 정당한 명령을 받았을 뿐이다"라는 말을 할 수 없어야 한다. 이거, 이거 이 참에 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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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uel Seong

트위터 : @ravenclaw69


편집 :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