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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속도는 시속 나이 속도라고 하던가. 열 살까지는 시속 10킬로미터, 열 살에서 스무 살까지는 시속 20킬로미터, 서른까지는 30킬로미터 식으로 나이에 따라 세월 가는 속도가 비례한다는 매우 그럴듯한 경험 이론 말이다. 이에 따르면 시속 45킬로미터의 표준 속도를 내야 하는데 요즘 같아선 오히려 그 이론이 틀렸다 싶을 만큼 엄청난 속도의 물살에 휩쓸려 허우적대는 느낌이라 마음이 영 헛헛하다. 그래서일까 머리 속의 방향타가 종종 과거로 향하는 것을 느끼곤 한다.

돌이키건대 서른에서 마흔은 밤샘 몇 번, 방송 몇 회 하다가 스르륵 지나가 버린 것 같은 폭포 같은 세월이었고, 스물에서 서른은 결혼, 취직 등 굵직한 일이 있어선지 서른에서 마흔 사이보다는 좀 낫지만 동강 래프팅만큼은 빨랐다. 유유자적한 세월의 강물 위를 유장하게 노 저으며 주위 풍광도 지켜보면서 살았던 것은 역시 열 살 초딩에서 스무 살 군인 아저씨가 되기까지 살았던 10년이었다. 70년생인 내게 그 10년은 1980년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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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가 그렇지 않을까마는 ‘80년대’라는 코끼리 같은 단어 앞에서 나는 그저 장님일 뿐이다. 내가 더듬어 만진 것이 코끼리의 꼬리인지 코인지 아니면 그 안의 코딱지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어쨌건 80년대를 살았고, 느꼈고 그 속에서 성장해 간 한국인의 한 사람임은 분명했겠지만 80년대란 엄청난 세월에 대해 규명해 보라고 얘기해 보라면 그저 막막하고 망극할 따름이다.

따라서 이 끄적임은 1980년대를 거창하게 학술적으로 규명하거나 역사적 평가를 내리거나 기타 엄숙하고 심도 깊은 논의와는 털끝만큼도 관련이 없는, 한 어린 장님이 80년대라는 코끼리의 콧구멍의 사마귀의 털 하나를 어루만지며 느끼고 상상했던 추억의 모음일 뿐임을 밝혀 둔다. 재차 말씀드리거니와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싶다거나 심오한 지적 호기심을 지니고 이 기사를 대하는 분들이라면 간곡히 충고하건대 그냥 휙 지나치시기 바란다.

방송이든 음악이든 소설이든 프롤로그가 중요하다. 80년대의 본격적인 개막 이전의 프롤로그로서 1979년을 먼저 이야기해 보자. 나는 당시 부산의 어느 초등학교 4학년생이었다. 70년생이면 3학년 아닌가? 하는 질문에는 워낙 영특하고 똑똑하여 -라고 읽고 빨리 학교를 보내 육아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어머니 덕분에라고 읽는다- 학교를 1년 일찍 들어간 전력을 밝혀 두는 바이다.

그 해에 가장 신났던 기억부터 떠올려 보자. 나는 당시 꼬마 스포츠 광팬이었다. 야구는 좀 시큰둥했지만 축구의 경우는 대표선수들의 등번호와 포지션과 소속팀과 키까지 줄줄 외우고 다녔고 복싱의 경우 역시 복싱 팬이셨던 아버지와 함께 링 사이드에서 정글 같은 사각의 링에서 벌어지는 복서들의 혈투에 열광했었던 것이다.

1979년을 빛낸 하이라이트라면 역시 복싱이었다. 어차피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하는 보이코트 때문에 나가지도 못할 올림픽이었지만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예선에서 원숭이 같이 팔이 길었던 골키퍼 아르무감을 넘어서지 못했던 축구보다는 3명의 세계 챔피언 보유라는, 과거에는 상상 못할 황금 시대를 연 복싱이 기억에 남는 건 당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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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챔피언 김성준, 김상현에 더하여 1979년 3월 대학생 복서 박찬희가 ‘링의 대학교수’라는 멕시코의 미구엘 칸토를 완파하고 트로이카 챔피언 시대를 열었다. ‘국위선양’이 국가적 지상과제로 여겨지던 시절 ‘세계 참피온’이 된, 박찬희 선수는 물론 그 매니저까지 대통령 표창을 받는다. 세계 챔피언 되면 대통령 표창 받던 시절이었다.

아마도 그 표창장에 서명을 하면서 박정희 대통령도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불과 13년 전, 장충체육관에서 벌어진 김기수와 이탈리아 벤베누티의 타이틀매치. 어떻게든 세계 챔피언 하나 만들어 보겠다는 일념으로 없는 나라 살림에 거금 6만 5천 달러를 특별 융자해 챔피언 벤베누티를 국내로 불러들이고 차제에 1979년 현재 경호실장인 차지철을 김기수 타이틀 매치 운영 위원장으로까지 앉히며 호들갑을 떨던 그 시기를 떠올리며 흐뭇해했을지도 모른다. “챔피언 하나 만들겠다고 그 난리를 피웠었는데... 그때 링사이드에서 담배를 얼마나 피웠었는데... 이제는 챔피언이 세 명이라니.”

1961년 자칭 ‘불행한 군인’이 정부를 뒤엎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됐을 때 우후죽순격으로 독립하던 아프리카 각국보다도 더 비참한 처지였던 나라는 벌써 2년 전에 수출 100억 달러를 넘긴 ‘중진국’에 도달해 있었으니 세계 챔피언 트로이카 시대란 자신이 이룩한 변화와 발전의 한 표상으로서 기쁘게 받아들여졌으리라. “국제기능 올림픽과 사격 선수권 대회, 아시아 경기대회 등에서 빛나는 성과를 거두는 등 국력의 신장과 더불어 약진하는 민족의 기상”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신년사 중)이 또 한 번 발휘됐으니 그 아니 즐거웠을까.

그런데 당시까지 한국 프로복싱에는 넘지 못할 벽이 하나 있었다. 초대 챔피언 김기수부터 4전 5기의 신화 홍수환이나 일본의 불꽃 와지마 고이찌를 잠재운 유제두도 넘지 못한 숫자. 3차 방어의 벽이었다. 13년 동안 3차 방어 이상을 성공한 챔피언은 없었던 것이다. 3차 방어는 일종의 꿈의 숫자였다. 한때의 수출 100억불, 1인당 국민소득 1000불처럼. 언젠가는 도달하겠지만 그게 언제일지 모르는. 그런데 1979년 챔피언 김성준이 그걸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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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이맘 때, 꽃 피고 새 우는 봄 중간고사를 마친 나는 환희에 들떠 있었다. 성적이 무척 잘 나왔던 것이다. 공부 잘해서 좋기도 했겠으나 무엇보다 아버지가 챔피언 김성준 후원회사 간부로 있는 아버지 친구의 빽을 빌려 그를 만나게 해 주고 사인까지 받게 해주겠다는 약속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나는 그를 만났다. 세계 '참피온'이 내 눈 앞에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내 이름을 불러 주었고, 그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공부 열심히 하면 참피온 된다."는 뭔가 이상한 격려까지 해 주었다. 그런데 그와 헤어지고 나오면서 아버지는 전혀 상상도 못한 얘기를 꺼내셨다.

조금 전 내 앞에 서 있던 그 멋진 세계 챔피언 김성준의 전직이 소문난 소매치기였다는 것이었다. 익숙한 솜씨로 남의 양복 안창을 따 지갑을 실례하고 여차하면 칼 휘두르며 경찰과 맞서는 그 소매치기 말이다. 한국 챔피언이었을 무렵, 소매치기 전력이 드러나 경찰에 체포되어 타이틀을 박탈당하고 하는 일도 있었다니 실로 경악할 일이었다. "원래는 잘 살았는데 아버지 사업이 쫄딱 망해서 신문도 팔다가 뭐도 하다가 결국 소매치기가 되었다지."

찬연하게 빛나던 100억불 수출의 금자탑 뒤로 먹물처럼 짙은 어둠이 많은 인생들의 어깨를 내리누르고 있었던 당시, 김성준은 어둠의 멍에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고 기를 쓰던 수많은 사람 중의 하나였다. 한국 챔피언에서 졸지에 감방의 죄수로 떨어지는 나락 속에서도 그는 다시 글러브를 끼고 샌드백을 두들겼다.

어쩌면 그에게 복싱이란 인생 전체를 감아쥐고 있던 불행의 손아귀를 잘라낼 수 있는 유일한 칼날이었을 것이다. 코피 흘리고 등뼈가 부러져도 자식은 대학에 보내려던 많은 사람들에게 대학이란 그랬듯이. 토굴을 파고 고시공부했던 전직 대통령의 공부가 그랬듯이, 동생 학비 마련하기 위해 미싱을 돌리고 가발을 만들었던 여성 노동자들에게 월급이 그랬듯이.





산하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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