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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을 운영하다 보니 어지간하면 팔고 남은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지만, 한 달에 두세 번 짜장면이 생각나는 날은 가게 문을 닫고 외식을 하러 나간다. 외식이라 봐야 짜장면에 탕수육 한 접시, 이과두주 한 병일 테지만 이 시간이 즐거워 손꼽아 기다려지기까지 한다. 보통은 혼자일 때가 많고 그녀가 오는 날에는 그녀와 함께, 친구가 오는 날은 친구와 함께 중식당으로 향한다.

 

작년 초겨울 무렵 가게에서 가까운 곳에 차이나웨이라는 중식당이 문을 열었다. 눈여겨보지 않았던 식당이었는데 단골손님과 얘기 끝에 그 집 탕수육이 맛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게 되었다. 20평 남짓한 작은 공간을 절반으로 나눠 주방과 손님을 받는 홀로 사용하고 있었다. 한가한 시간이라 그랬는지 식당에 손님은 없고 주인으로 보이는 30대 중반의 남자만 카운터에 앉아 전화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남자는 숫기가 없어 보였다. 어서 오시라는 인사말만 전하고는 내가 메뉴판을 들여다보는 동안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나는 그저 '그렇구나....'라고 생각했다. 주방에서 음식만 하다 이제 처음으로 식당을 차린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어서였다. 아마도 머릿속으로는 형식적인 농담이나 질문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무지 말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의 꾹 다문 입술과 나의 지난 시간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식당만 네 번을 말아먹고 다섯 번째 장사를 하고 있는 나도 살가운 농담 한마디 던지는 것이 여전히 오글거려 멀뚱멀뚱 바라만 보는 경우가 많은데, 주방 출신 초보 사장님은 얼마나 오글거릴까. 특히나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중식당 출신의 과묵함이라면 손님이 이해해주는 편이 나은 일이다. 4차 산업혁명을 말하는 시대이나, 나나 그 남자에겐 3차 산업에 이르기도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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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겨레온(링크)



나는 짜장면과 탕수육, 이과두주 한 병을 주문하고 가게를 둘러보았다. 메뉴판에는 여느 중국음식점에서 판매하는 메뉴들이 적혀 있었는데, 메뉴판 아래 적혀 있는 원산지 표시를 보고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게 되었다. 원산지 표시에 적혀 있는 재료들은 모두 국내산이었다. 어떤 마음으로 이 식당을 차렸는지 짐작 가는 대목이었다. 국내산 식재료를 고집하는 식당은 매우 많지만, 중식당에서 국내산 식재료를 고집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쌀, 고기, 채소 정도만 국내산으로 사용하고 해산물과 김치는 중국산이나 수입산을 사용하는 것이 중식당의 불문율이라면 불문율인데 남자는 김치마저 제 손으로 담가내고 있었다. 그런데도 짜장면 한 그릇에 4,000원, 탕수육 한 접시에 12,000원이었다. 걱정이 앞서고 한편으로 응원해주고 싶었다. 

 

남자는 탕수육과 이과두주를 먼저 내주었다. 찹쌀 탕수육이었는데 매우 깨끗한 기름에 튀겨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튀김이 하얗고 깨끗했다. 소스에는 그 흔한 오이 한 조각 들어 있지 않았다. 고명 없는 맑은 소스였다. 그것은 자신감으로 보였다. 채소를 섞어 넣어 소스 본연의 맛을 흐리거나 손님의 눈을 현혹하지 않고 맛으로 보여주겠다는 자존심이자 자신감. 간장, 식초, 설탕, 녹말만 이용해 소스를 만들고 마지막에 레몬즙을 조금 넣어 향을 입힌 소스의 맛은 일품이었고, 튀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바삭하고 부드러웠다. 보통 두 번 튀겨 바삭한 식감을 돋우는데 그렇게 하면 튀김이 누르스름한 색을 띠고 딱딱해진다. 그런데 튀김이 눈처럼 하얗고 사각거리는 것을 보아하니 한 번만 튀겨 완성한 것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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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맛본 탕수육 중 최고의 맛은 부천에 있던 북경이란 중식당에서 맛본 것이었다. 북경에서는 사천식 탕수육을 주문했는데 소스로 옷을 입혔는데도 겉은 사각거렸고 속은 부드러웠으며 육즙은 그대로 남아 입안에 감돌았다. 북경 또한 고명 없는 탕수육을 내주었는데 그때 맛본 탕수육과 비슷한 식감과 맛을 전주의 구도심 뒷골목에 새로 생긴 작은 식당에서 느낄 수 있었다(공교롭게도 북경은 몇 년 전 문을 닫았다. 그 집 주방장은 어디에서 탕수육을 튀기고 있을까).

 

탕수육 맛에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남자는 짜장면을 들고 나왔다. 재료와 색은 여느 짜장면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한 젓가락 먹고는 눈이 감기고 말았다. 아... 왜? 짜장면에 조미료가 한 톨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맛이 없었다. 기름도 돼지기름을 사용하지 않고 식용유를 사용한 듯 보였다. 설탕으로 단맛을 냈지만, 설탕도 어중간하게 넣어 달지도, 짜지도, 고소하지도, 입에 짝짝 달라붙는 감칠맛이 나지도 않았다. 어쩌면 이것이 짜장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평생 먹어왔던 그 짜장면이 아니어서 맛이 없다는 생각이 우선 들고 말았다. 가령 임실군 강진면에 위치한 태복장의 짜장면처럼 '짜장면은 본래 이런 맛이었어!'라는 탄성이 튀어나올 만큼 확실하게 고전적인 방식으로 만든 짜장면이었다면 특별한 맛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을 테지만 조미료와 돼지기름을 사용하지 않는 것만으로 주방장의 깊은 의중을 읽어 줄 사람은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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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짜장면이 맛없다 해도 그 날 이후 나의 짜장면집은 차이나웨이가 되었다. 다음에는 짜장면 대신 짬뽕과 탕수육을 주문했는데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조미료를 넣지 않은 짬뽕이라니. 바지락, 새우, 홍합, 오징어로 맛을 낸 짬뽕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조미료를 넣은 짬뽕과 비슷한 맛을 내기 위해서는 5500원이라는 객단가는 너무나도 낮은 가격이었다. 여느 짬뽕보다 많은 해물이 들어갔다 한들 진한 맛을 내기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국물은 개운하고 깔끔해 국으로 먹기에는 좋았지만 말아진 면을 감당해 내기에는 국물의 감칠맛은 한없이 부족했다. 그런들 어떠한가. 탕수육을 비롯한 요리들은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았다 해도 역대급의 맛을 자랑하는데.

 

나는 종종 들러 이런저런 요리를 주문해 놓고 이과두주나 소주를 마시는 것을 즐겼다. 손님이 있는 날은 얼마 되지 않고 언제나 단둘이 따로 앉아 멀뚱거리는 이 분위기에서 오고 가며 인사도 나누고 이야기라도 몇 마디 나눌 법했지만 나는 끝까지 관찰자의 자세를 유지했다. 장사에 대한 조언을 꺼낼 일도 아니고 저 건너편에 망해가는 식당 주인이란 얘기도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식당을 찾은 식당 주인이라니. 그만큼 부담스러운 손님도 없지 않겠는가.

 

남자에게는 두 아이와 아내가 있었다. 네 살짜리 큰 아이와 이제 막 태어난 갓난아기를 둔 가장이었다. 아내는 두 아이를 키우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고 장사는 남자가 도맡아 하는 것으로 보였다. 장사가 바빠지면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는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집이 있는지 아내는 곧장 달려와 서빙을 하고 상을 치웠다. 그러나 아내는 요식업이나 서비스업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사람으로 보였다. 서툴고 실수가 잦아 아내의 실수를 만회하느라 남자는 더욱 정신없어 보였다. 남자에게는 책임져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있는 듯했다. 어머니인지 장모인지 모르겠으나 집에서 아이를 돌봐주고 있는 엄마가 있다는 사실을 두 사람의 대화에서 엿들을 수 있었다. 작은 중국집 하나로 다섯 식구가 먹고살아야 한다는 계산 앞에 눈앞이 깜깜해졌지만 나의 그런 우려와는 상관없이 남자의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첫째 아이를 바라보는 얼굴은 영락없는 딸바보였고 아이를 안고 있는 아내를 바라보는 눈은 가늘어진 입술만큼이나 길게 피어났다.

 

차이나웨이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 점심 장사를 하고 오후 5시까지 휴식시간을 가졌다. 그 시간에 떨어진 재료와 음식을 준비하고 휴식을 취한 뒤 오후 5시부터 8시까지 저녁 장사를 하고 문을 닫았다. 배달은 하지 않고 홀 손님만 받았고 늦은 시간까지 술손님을 받는 경우도 없어 보였다. 휴무는 일요일 하루뿐이었지만 그만하면 감당할 만 한 노동으로 보였다.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노동의 양과 질, 그에 따르는 수입을 고려했을 것이다. 아마도 차이나웨이라는 중식당을 열기 전까지 어느 중식당의 주방에서 품을 팔아 번 돈으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웠을 것이다. 식당에서 품을 팔아 벌었던 돈보다 더 큰 돈을 바라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품을 팔아 벌던 수입만큼만 벌 수 있다면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가족과 함께 더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어 선택한 자영업이었을 것이고 영업방침이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그만큼의 노동이라면 다섯 식구 밥은 먹고 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휴일에 대단한 여가활동은 아니더라도 영화 한 편은 볼 수 있어야 하고 걱정 없이 낮잠도 잘 수 있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두 부부는 휴일에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는 것을 여가로 삼는 것처럼 보였다. 카운터 뒤편엔 액자 두 개가 걸려 있었는데 그 액자에는 극장에서 나눠주는 영화 팜플렛이 끼워져 있었다. 액자에 끼워지는 포스터는 종종 바뀌었는데 내가 기억하는 영화는 <로건>뿐이고 나머지 영화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멜로영화들이 대부분이었다. 두 아이를 '엄마'에게 맡기고 두 사람이 즐길 수 있는 여가란 것이, 시간이란 것이 얼마나 있을 수 있을까. 아마도 일주일 혹은 이주일, 한 달에 한 번 극장을 찾아 영화를 보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여가의 최대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어젯밤 장사를 마치고 산보를 나섰을 때야 알게 되었다. 차이나웨이라는 간판은 그 골목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차이나웨이가 있던 그 자리에는 바둑이, 포커, 맞고, 훌라라는 글자가 써진 입간판에 세워져 있었다.


그와 말한마디 깊이 있게 나눠보지 않았기에 그가 정의롭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그의 시도가, 그의 의도가 올바른 것이었다고는 말해주고 싶다. 조지 R.R. 마틴 같은 염세주의자이자 쾌락주의자가 신이었다면 그 남자와 나의 모가지를 댕강 잘라내며 개똥 같은 소리 집어치우라고 했을 테지만 세상은 그렇게 악과 악의 전쟁이자 사랑만으로 이루어진 곳이 아니어서 반짝이는 바둑이가 슬펐고 사라져버린 차이나웨이가 그리웠다.


아마도 그는 지금 어느 중식당 후미진 주방 뒤편에서 강요된 조미료를 한 국자씩 퍼 담으며 짜장을 볶고 짬뽕을 끓이고 있을 것이다. 조미료가 좋고 나쁨을 떠나 스스로 올바르다 판단한 것과는 정반대의 행동을 하고 있을 때 사람은 자괴감을 느낀다. 그렇다 하여 볶고 끓이기를 멈출 수는 없다. 목숨 바쳐 지켜주고 싶은 두 아이와 바라만 봐도 행복해지는 아내는 자괴감보다 무겁다.


면목 없는 일일 테지만 이 일로 인해 그의 아내가 그를 미워하지 않길 바란다. 그가 실패의 원인을 자신에게 전가하고 스스로 학대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가혹한 노동으로 자신을 불사르지 않길 바란다. 가끔 영화 보고 들고 오던 팜플렛을 벽에 거는 일을 오랫동안 행복으로 여기기를 바란다. 불 켜진 바둑이를 보고 울고 말았다. 예상했던 결과였음에도 그들의 행복을 내내 빌었었다. 그러나 나의 바람은 너무나도 힘겨운 일일 것 같아서 눈시울이 붉어지고 말았다. 그 티끌만한 행복조차 지켜내기란 왜 이리도 힘든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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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극장에 들러 <로건>을 보며 꽤 많이 울었다. 늙고 기운 빠진 울버린의 죽음이 안쓰러워서도, 홀로 남은 로라의 앞날이 걱정스러워서도 아니었다. 영화가 너무 훌륭해서 감동의 눈물을 흘린 것은 결코 아니었다. 로건이 로라를 살리고 최후를 맞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죽는 것만이라도 저만큼 멋있을 수 있다면... 사는 것도 졸라 멋지게 살더니 죽는 것도 졸라 멋지네. 시바'


사는 것은 말할 것 없이 찌질하고 죽는 것마저도 한 개도 멋있지 않을 것이 분명한 프라이팬 인생이 로건의 죽음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것 같아 부끄럽고 억울해서 울었다. 그렇다고 영화 <로건>에 아무런 매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우울한 날에는 단지 상상이라도 해야 기분이 좋아진다. 영웅주의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로건처럼 멋있게, 죽는 것만이라도 멋있을 수 있다면.



<안녕, 용문객잔>처럼,


안녕, 차이나웨이





전호용(a.k.a 아톰)의 네 맛대로 살아라(링크)


9월 9일 토요일 오후 3시, 충정로 Bunker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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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hom


편집 : 딴지일보 인지니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