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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를 개발하겠다고 선언한 뒤 억새밭이었던 황무지는 일본 최대의 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순히 ‘개발’만 한다고 해서 사람이 몰려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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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에 남자가 몰린 이유 2


에도에 남자가 몰린 이유를 말하자면,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개발에 따른 인구유입

둘째, 정치적인 이유


첫째 이유는 따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거다. 지금도 신도시 개발을 하면, 공사 관계자, 건설인부들이 모여든다. 이렇게 사람이 모이면, 이들을 상대로 하는 밥집, 다방, 세탁소 기타 유흥시설이 들어서게 된다. 같은 논리다. 개발이 시작되자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러나 에도에는 이것만으로 부족한 특별한 ‘뭔가’가 더해졌다. 바로 참근교대(参勤交代)다.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 전투로 도쿠가와 가문이 일본의 정권을 잡았지만, 아직도 지방 다이묘들에게는 영지가 있고, 군사력이 있었다. 이들을 억제할 필요가 있었던 도쿠가와 막부는, 에도의 치안과 경호를 명목으로 지방 다이묘들을 에도로 불러 반년에서 1년 동안 머무르게 했다. 이를 통해 도쿠가와 막부는 지방다이묘들의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그 내막을 살펴보면,


첫째, 명확한 상하관계


쇼군을 배알하고, 에도의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지방 다이묘가 올라간다는 건 그 자체로 쇼군과 다이묘의 상하관계를 명확히 했다.


둘째, 다이묘의 지방 장악력 약화


반년 내지 1년씩 에도로 올라가 있는 영주 덕분에 지방에 있는 영지의 장악력이 떨어진다. 그 자체로 다이묘의 세력을 꺾을 수 있다.


셋째, 막대한 재정지출


도쿠가와 막부가 규정한 세세한 참근교대 지침을 보면, 그 자체로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다. 다이묘로서의 위신도 있고, 일단 ‘치안활동’을 위해 올라가는 것이기에 병력들도 끌고 올라가야 한다. 여기에 수행인원들까지 더해지고, 결정적으로 에도에서의 생활을 위해서는 거주 비용이 따로 들어간다. 이 비용이 어디서 나오는 걸까? 바로 다이묘의 ‘땅’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이렇게 비용을 쓰다 보니 세력을 키울 여력이 없어졌다.


다이묘에게는 뼈아픈 일일지 모르지만, 일본 전체로서는 이익이 됐던 게 바로 참근교대였다. 다이묘들의 이동경로를 따라 역참이 발달하게 됐고, 이 역참을 중심으로 새로운 도시가 만들어졌다. 또한, 중앙의 문화가 지방으로 퍼져나가는 계기가 됐다. 에도의 경우에도 돈을 ‘쓰러’ 온 다이묘들 덕분에 경제적으로 이득을 봤고, 결정적으로 남성들만으로 이루어진 ‘단신부임’ 덕분에 유곽이 발달하게 된다. 요시와라에 손님들이 몰려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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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에 모여든 남자들


당시 에도의 남녀 성비는 비정상적이었다. 여자가 전체 인구의 40%가 되지 못했다. 신도시 건설을 위해 투입된 인부, 전쟁이 끝난 시기 주인을 잃고 도시로 흘러들어온 낭인, 참근교대를 위해 찾아온 시골 무사들까지 남자들은 넘쳐났고, 여자들은 부족했다.


요시와라를 비롯한 유곽들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게 요시와라를 ‘비롯한’ 이라는 대목이다. 애초 요시와라를 만든 목적은 에도 안에 있는 모든 유곽들을 통폐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창(公娼)인 요시와라의 뒤편에는 사창(私娼)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공창 하나만으로 에도의 모든 남성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


“요시와라는 너무 비싸다!”


이런저런 이유로 사창가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렇게 등장한 유곽들이 모여 하나의 환락가를 이루었고, 사람들은 이를 오카바쇼(岡場所)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런 오카바쇼도 가난한 남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몰락한 낭인들에게는 하루 한 끼 밥 먹는 것도 사치. 이때, 여자들이 등장했으니 바로 유나(湯女)다. 우리가 찾아가는 ‘안마방’의 역사에 기록을 남긴 여인들이다.


“(상략)...남녀가 탕 안에 들어가 육체를 드러내고도 서로 괴이히 여기지 않으니 실로 금수와 같다.(하략)”

- 조선 숙종 시절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신유한이 쓴 <해유록(海遊錄)>에서 발췌


일본의 목욕에 관한 역사를 짧게 정리한 다음 ‘유나’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일본어로 목욕을 후로(風呂)라고 한다. 수증기로 한증을 하던 데서 생긴 말인데, 일본에서 목욕은 ‘종교적’ 의미에서 시작됐다. 불상을 목욕시키기도 하고, 수행하는 승려들이 목욕을 하기 위해 사찰에는 온실(溫室)이라는 목욕탕이 있었다. 이걸 일반인들에게 공개했는데, 찾는 이들이 많아지자 약간의 비용을 보시(布施)차원에서 받았다.


이게 헤이안 시대에 이르면, 대중목욕탕으로 발전하게 됐고, 무로마치 시절이 되면 교토 같은 대도시에도 여러 개의 목욕탕이 만들어져 장사를 하게 된다.


이게 에도 시대가 되면 유명한 도시마다 대중목욕탕이 들어서게 된다. 바로 센토(銭湯)다. 일본인들은 너나할 거 없이 목욕에 열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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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게 왜 일본인들이 목욕에 열광하느냐다. 이유는 크게 3가지 정도로 확인할 수 있는데,


첫째, 기후


일본은 아열대 기후다. 덥고, 습하다. 이 때문에 몸을 씻으려 한다.


둘째, 난방시설이 미비하다.


일본인들이 주로 저녁나절에 목욕을 하는 이유 중 하나다. 한국 같은 경우에는 온돌 문화였지만, 이들에게는 딱히 난방시설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이 때문에 잠자기 전 몸을 따뜻하게 덥힌 후 취침에 들어가는 게 습관이 됐다.


셋째, 화산섬이다.


온천이 많이 있다 보니, 목욕문화가 발달하게 됐다.


목욕이 일상이 되다보니, 남녀 간의 접촉도 늘어나게 됐다. 일본에서 남녀 혼욕에 대한 기록은 꽤 역사가 깊다. 713년 경 문헌인 출운풍토기(出雲風土記)에도 남녀 혼욕에 관한 기록이 나와 있다. 에도시절에 이미 남녀혼욕을 금지하는 훈령을 내렸지만, 목욕탕 업주들은 이를 거절했다. 일본이 법적으로 완전히 남녀혼욕을 금지 시킨 것은 메이지 시절에 들어와서 부터였다. 외국인이 드나드는 도쿄 지역 대중목욕탕은 남녀혼욕이 전면적으로 금지됐다.


그렇다면, 남녀혼욕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냥 보고만 있을까? 아니다. 성매매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유나(湯女)는 목욕탕 안에서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이다. 에도 시절 이들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요시와라나 오카바쇼에 가지 못하는 가난한 서민들과 낭인들은 목욕탕에서 몸을 파는 유나들을 만나 성욕을 풀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유나들이 에도시대에 갑자기 등장한 것도 아니고, 일본만의 문화도 아니란 점이다. 유나의 등장은 에도시대에서 한참 거슬러 올라간 무로마치 시절이었다. 대중목욕탕이 활발하게 전파되던 시절 일본 남자들은 더 자극적인 환락을 찾았다.


“목욕을 하면서 섹스를 하면 더 좋겠다.”


그러나 이건 일본인들이 특별히 더 ‘밝혀서’ 그런 건 아니다. 이미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생각들은 있었고, 이를 실행에 옮긴이들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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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마이 로마이


고대 로마의 목욕탕 문화와 현대 일본 목욕탕 문화를 콜라보레이션한 작품이 바로 <테르마이 로마이>란 작품이다. 원작인 만화는 6권으로 완결됐고, 이후 소설, 영화로 만들어져 꽤 흥행을 했다.


작품으로 보면, 재미있지만 로마 멸망의 원인 중 하나를 ‘목욕탕’으로 지목하는 학자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목욕탕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란 걸 확인할 수 있다.


로마 대중목욕탕의 시작은 아우구스투스부터였다. 처음엔 말 그대로 대중목욕탕이었으나, 점점 시대를 거쳐 가면서 애초의 ‘대중목욕탕’ 이미지는 점점 사라졌다. 네로 시절에는 12만 4천 4백 평방미터의 부지에 2천 1백 명이 동시에 목욕할 수 있는 목욕탕이 만들어졌고,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탕은 욕실만 3천개가 넘었고, 동시에 6,000명을 수용하는 대형 욕장을 갖춘 목욕탕이 등장한다.


제정시절 로마의 목욕탕은 목욕탕이 아니었다. 사우나, 독서실, 상점, 경기장까지 갖춘 하나의 복합 상가형태로 발전한다. 이렇게 목욕탕이 대형화되고, 덩달아 상하수도 시설에 대한 연구와 투자가 이루어지면서 문명 발달에 일조를 한다. 그러나 순기능은 여기까지였다.


로마 목욕탕 안에서 음란 퇴폐행위(?)가 이어졌다. 이 당시 로마 목욕탕에는 목욕을 도와주는 ‘보조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주요 서비스 중 하나가 ‘음부 마사지’였다. 그러다가 엄격하게 지켜지던 남녀 개별 입욕이 남녀혼탕으로 변질됐고, 목욕탕은 말 그대로 ‘광란의 도가니’로 뒤바뀌었다.


로마 뿐만이 아니다. 그리스 시절에도 집안에 손님이 오면, 시녀가 목욕 시중을 해주는 것이 상식이었고, 중세로 넘어오면, 기사들은 목욕을 할 때 여자들의 시중을 받았다. 이런 전통은 유럽 전역에 퍼져나가, 13세기 프랑스 파리의 경우에는 남녀가 공간적으로 격리된 욕실에서 목욕을 하도록 규정을 바꿀 정도가 됐다(이 당시 욕실은 구획으로 나누어진 게 아니라, 오전부터 점심 때까지는 여자가, 오후부터 저녁 때까지는 남자가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모른척 하고 남녀 혼욕은 일어났고, 당연히 매춘도 성행했다. 아예, 이게 발전해 목욕산업과 매춘사업을 결합해 욕탕에 창녀를 대기시킨 가게도 있었다.


이러다 보니 사창가와 욕탕 사이에 고소고발전이 횡행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업태가 목욕탕이면, 목욕만 해야지! 왜 여자를 팔아?”


“씻다보면, 할 수도 있는 거 아냐?”


“그럼 아예 여자장사를 하든가! 겉으론 목욕탕이라 하고, 여자를 팔면 우리같은 여자장사들 다 굶어죽으란 거야?”


1477년 프랑스 몽펠리에(Montpellier)에 있는 사창가 업주들이 집단으로 ‘사창 욕탕’ 두 곳을 고발하게 된다. 이 정도면, 목욕탕은 목욕만을 하는 공간이라고 볼 수 없게 된다.


이건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남녀혼욕과 매춘은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체에 만연했다. 영국도, 독일도 욕탕에서 여자를 사는 행위가 자연스러웠다.


일본이 특별히 ‘미개해서’ 유나(湯女)가 등장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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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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