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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가 나타났다.


드디어 고든 램지가 한국에서 칼을 잡았다. 11일 JTBC <냉장고를 부탁해> 159회가 시청률 6.4%(닐슨 코리아 수도권 유료가구 기준)를 찍었다. 분당 최고 시청률은 7.8%. 셰프 최현석이 소금을 흩뿌리는 키친을 MC 정형돈이 깐족대며 누비던 <냉부>의 이전 전성기를 떠올리게 하는 수치다. 수훈갑은 단연 영국에서 온 셰프, 고든 램지다.


<키친 나이트 메어>, <헬‘s 키친>, <마스터셰프> 등에서 보여준 불같은 성격, 욕설과 폭언,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커버하는 압도적인 실력과 카리스마로 잘 알려진 그가 한국의 쿡방에 출연한다는 사실은 큰 이슈가 되었다. 프로그램 말미에 3분 동안 등장했던, 사실상 예고편과 다름없는 이 전 회차(158회) 시청률이 1% 가량 증폭했다. 전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건 25개 오트퀴진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미슐랭 별을 16개나 쓸어 모은 외국인 셰프가 한국의 요리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그림은 누가봐도 흥미로웠다. 저스틴 비버가 <K-POP스타>에서 마이크를 잡는다든지, 코난 오브라이언이 <무한도전>에서 지하철과 달리기 시합을 하는 것과 견줄 만한 흥분 아니겠는가. 진짜가 나타난 것이다.



OB맥주의 빅 픽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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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를 부탁해>에 고든 램지가 섭외되었다는 놀라운 소식에 여러 재미있는 말들이 오갔다. '어디서 약점 잡힌거 아니냐, 돈이 부족하냐, 큰 사업 후 삐끗했냐' 등의 짓궂은 반응들에서 세계적인 셰프로서의 그의 대단한 파급력을 알 수 있다. 프로그램을 연출하는 이창우 PD는  "고든 램지 셰프가 <냉장고를 부탁해>의 포맷에 관심을 가지고 흔쾌히 출연을 결정해줬다"라고 전했다.


여기에 생략된 말을 찾아보면 고든 램지의 JTBC 출연이 조금 납득될 것이다.


(카스 광고 모델인) 고든 램지 셰프가 (계약 이행사항의 일환으로 한국의 미디어에 출연해서 카스를 많이 팔아야하는데, OB맥주측이 제시한 프로그램 리스트 중) <냉장고를 부탁해>의 포맷에 관심을 가지고 (“F**K! 그나마 이건 할만하겠군”이라며)흔쾌히 출연을 결정해줬다.


오비맥주 홍보 담당자는 “고든 램지를 초청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여러 방송국에서 섭외가 정말 많이 들어왔다”며 “일정상 모두 소화할 수 없어 램지와 상의 후 몇 개 프로그램만 선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링크)


사실 카스 광고에 고든 램지를 기용한 것은 사실 매우 리스크가 큰 전략이었다. 오랜 기간 두 기업이 독과점해온 맥주 시장에 최근 수입 맥주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풀리기 시작했다. 다양한 세계의 맥주를 즐기게 된 소비자들은 그 다양한 풍미에 개인의 기호를 반영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또한, 상대적으로 맥아 비율이 낮은 국산 맥주에 대한 실망감이 커져가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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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거짓말하지 마요...



그 와중에 요리에 조금이라도 허점이 발견되면 가차 없이 엿을 날리는 괴팍한 셰프가 극찬하는 국산 맥주 광고는 소비자에게 제품에 대한 호기심보다 다른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대체 모델 게런티를 얼마나 받은 거야?' 같은. 제아무리 고든 램지라고 할지라도, 이미 국산 맥주에 대한 평가를 끝낸 소비자들에게 "신선하고 깔끔한 맛을 내는 카스만큼 한식에 잘 어울리는 맥주는 없다"라는 셰프로서의 마리아주 견해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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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위키트리(링크)



하지만 OB맥주의 고든 램지 마케팅 플랜은 1차원적인 스타마케팅이 아니었다. OB맥주는 고든 램지를 광장시장을 돌아다니게 하고, 동네 삼겹살집에 앉히고, 각종 미디어에 섭외를 주선해줬다. 카스 상표 노출을 최대한 자제한 채로 말이다. 익숙한 서울의 풍경에서 ‘도촬’된 고든 램지의 한국 기행이 여기저기 퍼 날라지면서 그에 한국과 한식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대중에게 차분히 설득했다. OB맥주는 고든 램지를 "빌어먹을. 내가 맛있다면 맛있는거야!"라는, 아집 가득한 권위자나 "광고료 받았으니까 처 마셔 이 자식들아!"라는 자본주의의 노예가 아닌 의외로 인간적이고 친절한 '램지 형'으로 노출시켰다. 


'친절한 램지형' 전략의 정점은 <냉장고를 부탁해> 출연이었다. 낯선 환경과 낯선 재료들 앞에 던져진 고든 램지는 거장의 위엄을 집어던지고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의 날카롭고 괴팍한 키친에서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시청자들에게 MC 김성주의 장난을 재치 있게 받아넘기는 장면을 보여줬다. 지금 촬영하고 있는 한국의 예능프로그램에서 자기에게 어떤 역할이 요구되는지 정확히 간파하고 움직이는 베테랑 방송인의 면모였다.


무엇보다 요리에 대한 자부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한식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배우려는 겸손함과 불리한 요리 대결에도 힘껏 불타오르는 열정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직업 요리인으로서의 진정성을 확고히 했다. 후에, 씨알도 먹히지 않았던 카스 광고를 다시 본 시청자들은 조금은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수도 없이 먹어보고 실망했던 국산 맥주지만, '적어도 기름진 삼겹살에는 어울리는 건가?' 싶어 램지형 말 믿고 한 병쯤은 새삼 다시 마셔볼 여지를 파고든 것이 OB맥주가 고든 램지로 그린 큰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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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음식 맛없다고 합니다만.



뜻을 품은 자들에게


고든 램지의 주방에는 ‘셰프의 테이블’이 있다. 원래는 셰프의 지인이나 주방에 놀러 온 다른 셰프들을 위해 마련된 이 자리에 고든 램지는 손님을 앉힌다. 손님이 자신이 먹는 요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자세히 보고 간단한 조리과정에 참여하는 일종의 공연을 기획한 것이다. 큰 이슈가 된 셰프의 테이블은 고든 램지 레스토랑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손님에게 조리과정과 주방의 청결을 공개한다는 발상은 그의 경영적 탁월함 이외에도 요리에 대한 그의 자신감과 완벽주의를 의미한다.



사춘기 시절에 내가 만났던 셰프들은 친해지기 쉬운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나를 눈여겨보았다. 시키는 건 뭐든 하고, 쉬지 않고 일하며, 충고란 충고는 모조리 빨아들이는, 굶주린 애송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고든 램지의 불놀이:Gordon Ramsay's Playing with Fire> P.12



 

고든 램지는 그의 프로그램들에서 애송이들을 마냥 탈탈 털지 않는다. 수련자가 기본기를 건너뛰려 한다거나 지적에 변명으로 방어할 때는 불같아 지지만, 미숙함을 인정하고 발전하려는 자세에는 든든한 지지를 보낸다. 


누가 뭐래도 오늘의 고든 램지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의 단전부터 올라오는 독설들이었다. 의미 없는 비난은 사람을 시들게 하지만 애정 어린 채찍은 뜻을 품은 자에게 자양분이 된다. 눈앞에서 길길이 날뛰는 자가 그 길에서 경지에 이른 대가라면 말이다. 그래서 가끔 고약한 대가들은 애정이 있고 가능성이 보이는 애송이를 만날수록 혈압이 오른다. 좌절할 것이냐 뛰어넘을 것이냐의 기로에서 그들이 그의 스승에게 배운 것은 자기를 더 몰아치는 것이었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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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링크)



그도 한때 실패한 애송이였다. 술에 의지해 손찌검을 일삼는 아버지 밑에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축구라고 믿었던 스코틀랜드 소년이 축구를 그만두게 되었을 때 밀려오는 좌절감은 자기만이 알 것이다. 그것을 씹으며 불과 칼이 날아다니는 살벌한 주방에서 하루 17시간 노동을 견뎌낸 고든 램지의 절치부심은 당연히 남달랐을 것이다. 



내가 나보다 앞서 있는 사람들을 한 번이라도 질투한 적이 있을까? 없다. 그런 일은 앞으로도 절대 없을 것이다. 나보다 앞선 사람들은 그저 이정표이자, 내가 가능한 한 빨리 따라잡고 싶은 대상일 뿐이다.


<고든 램지의 불놀이:Gordon Ramsay's Playing with Fire> P.13




소박하든 원대하든 누구나 한 번쯤은 뜻을 품는다. 누구는 앞서가는 이를 보며 좌절하기도 하고 또 누구는 다른 길로 돌아가 다시 뜻을 세운다. 샘 킴과 레이먼 킴이 고든 램지 옆자리에 앉아 그토록 설레하던 이유도 TV 속의 고든 램지의 지적과 충고가 그들이 요리사의 길을 걸어온 고비마다 따끔한 채찍질이 되어서 일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 뜻을 품어본 자라면, 그가 수련자에게 쏟아붓는 욕 한 바가지에서 얻는 어떤 영감이 있다. 이것이 그가 ‘진짜’로 환영받는 이유다.






근육병아리


편집 : 딴지일보 인지니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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