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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4. 03. 목요일

논설우원 파토










<파토의 쿡찍어 푸욱>은 


시급한 현안에서부터 해묵은 숙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치, 사회 관련 문제를 다루는 코너임다.


과학 잡설 <호모 사이언티피쿠스>와 교대하면서 격주로 연재되니


 많은 사랑 주시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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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기사


<파토의 쿡찍어 푸욱> 1. 공포의 마스터플랜

<파토의 쿡찍어 푸욱> 2. 그들은 왜 변절했을까

<파토의 쿡찍어 푸욱> 3. 지금 우리에게 놓인 투쟁의 현실

<파토의 쿡찍어 푸욱> 4. 시대와 진보에 대한 단상

<파토의 쿡찍어 푸욱> 5. 사회의 품격(1)

<파토의 쿡찍어 푸욱> 6.박정희, 이승만, 일제 그리고 개드립

<파토의 쿡찍어 푸욱> 7. 사회의 품격(2)

<파토의 쿡찍어 푸욱> 8. 하는 김에 하는 교통 이야기



 

 

 





민주당과 안철수가 합쳐 하나가 됐다. 머, 다들 알다시피 벌써 좀 된 이야기라 뉴스도 아니다. 사실 우원은 그들이 합쳤던 시점에 그 주제로 글을 하나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악명 높은 안철수 진영의 4.19/5.18 삭제론이 불거졌고, 그걸 보고는 의욕이 떨어져 쓰던 글을 치워 버리고(어쩌면 더 중요할지 모를) 교통 글을 하나 더 썼다.

 

그런데 마, 결국 하려던 이야기는 해야지 싶다. 이 건으로 불거져 나온 이슈 하나에 대해서 좀 생각을 해 봐야지 싶기 때문이다. 앞으로 우리의 이런저런 정치적 선택과 관련돼서 중요한 문제가 될지도 모르고.

 

그럼 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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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봄, 서유럽으로 진격한 나치 독일은 순식간에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베네룩스 3국을 휩쓸었다. 프랑스가 그토록 믿었던 마지노선은 독일의 우회 전술에 의해 허망하게 무너졌고, 불과 한 달도 안 되어 파리는 함락되고 만다.

 

그렇게 프랑스 땅을 차지한 독일은 북프랑스를 직접 손에 넣었고, 남부에는 오베르뉴의 작은 도시 비시를 수도로 하는 비시 정부가 서게 된다. 이 비시 정부의 수반은 1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었던 필리프 페탱 원수였다.

 

이 양반은 독일이 침공해 오자 압도적인 군사력과 기세를 보고 승산이 없다고 판단, 독일과 협정을 맺고 정부를 세워 스스로 수반이 됐다. 이 비시 프랑스는 지금은 나치 독일의 괴뢰 정권으로 여겨지지만 당대에는 여러 입장이 분분했다. 특히 미국은 이런 비시 프랑스를 상당기간 동안 합법적인 프랑스의 정부로 인정했다.

 

전후 맥락을 보면, 그들이 단지 일신의 안위를 지키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나치에 빌붙었던 것만은 아니다. 사실 나치 독일이 주창했던 가치와 제국의 부활은 독일 외의 유럽인들에게도 호응을 얻었었고, 페탱과 함께 비시 프랑스의 리더였던 피에르 라발은 1942년 6월 22일 라디오 연설을 통해 “이 전쟁으로 새로운 유럽이 탄생할 것이며, 그 건설을 위해 독일은 거대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라고 주장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즉, 페탱이나 라발은 나치가 그리고 있던 거대한 통합 유럽 제국의 목표에 어느 정도 동조했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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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시 프랑스의 두 핵심, 페탱과 라발.

2차대전 이전까지 페탱은 드골이 존경하는 멘토이자 상관이었고

그가 사형을 면한 것도 드골과의 그런 관계 때문이었다.

 

 

이 비시 프랑스의 정확히 반대편에 서 있던 쪽이 바로 드골의 자유 프랑스였다. 독일군에 의해 제3 공화국이 무너지자 프랑스군 준장이던 그는 즉시 영국으로 망명한다. 그에게는 독일은 더도덜도 아닌 침략자일 뿐이었고, 따라서 비시 프랑스도 나치의 앞잡이 괴뢰 정권이었을 뿐이었다. 처칠의 인정과 지원 하에 드골은 프랑스 본토의 레지스탕스 운동에 관여하고,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결과 물러나는 독일군을 쫓아 8월 25일 드디어 파리를 탈환했다.

 

이렇게 나치가 패퇴하고 나서, 비시 프랑스를 위시해 독일에 협력한 프랑스인들은 드골 정부에 의해 혹독한 단죄를 받았다. 페텡이 종신형, 라발이 사형, 그리고 나치 부역자 중 10,434명은 강제노동형, 24,116명은 유기징역, 2,173명이 금고형, 그리고 자그마치 6,763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지나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지만, 드골과 프랑스는 적어도 나치 독일과 관련된 문제 만큼은 타협이 없었다. 독일이 단지 프랑스를 점령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유태인 학살 등 나치의 범죄는 보편성을 침해한, 인간성 자체에 대한 범죄였고, 이유가 어찌되었건 거기에 동조한 것은 그에 준하는 죄악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관용은 자칫 그런 세계관과 행위가 되살아날지도 모를 불씨를 남겨두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그럴 수 있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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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쯤 열분들은 우원이 페탱과 드골 이야기를 갑자기 늘어놓은 이유가 궁금하실 거다. 안철수와 새정치연합 이야기라더니 먼데 이게.

 

마, 이 예를 통해 던져 보고 싶은 아래와 같은 질문이 있어서 그렇다.

 

 

 

우리에게 수구 기득권 세력은 페탱 머리 속의 ‘같은 유럽인’인가,


아니면 드골 머리 속의 ‘나치 독일’ 인가?

 

 

 

좀 설명을 드려 보자. 2차 대전 당시 페탱이 택한 것은 어찌보면 역사적, 정치적으로 뒤섞여 있는 유럽의 특수성 하에서의 통합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걸 우리의 친일파 짓거리와 마냥 똑같이 보기는 좀 어려운 게, 독일과 프랑스는 전쟁도 많이 했고 경쟁관계였지만 여하튼 사촌 같은 면이 있기 때문이다.

 

실례로 두 나라의 중간이라고 할 스위스에는 지금도 프랑스어 권과 독일어 권이 함께 존재하고, 이탈리아 북부도 19세기에는 독일계인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였던 걸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점령하기도 했다. 더욱이 샤를마뉴 대제의 프랑크 왕국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는 실은 한 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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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의 프랑크 왕국. 프랑스 전역과 독일, 이탈리아의 상당부분을

포괄하는 거대한 제국이었다.

 

 

이런 유럽의 역사적 동질성이 있기 때문에 페탱이나 라발이 ‘새로운 유럽의 건설’ 운운하는 소리를 공공연히 할 수 있었고, 그런 비시 정부의 입장이 미국과 국제사회에도 어느 정도 먹혔었던 거다.

 

이건 우리와 북한의 관계하고도 좀 비슷하다. 학살을 주고받은 전쟁도 치렀고 북한 ‘정권’이야 좀 미친 게 분명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그들에 대해 형제나 친척의 이미지와 애틋함을 갖고 있다. 당연하지 않냐, 싶지만 실은 바로 이 지점에서 대결과 협력의 혼란이 비롯된다. 저들의 어디까지가 적이고 어디까지가 동포인지 우리 자신들 내부에서도 헷갈리기 때문이다. 이건 반공, 용공, 반북, 종북 따위 개념과는 다른, 별개의 문제다.

 

보자. 북한 김정은 정권을 어떻게든 무너뜨리면 그 압제 속에 신음하던 ‘민초’들은 마냥 두팔 벌려 자유대한민국의 품으로 뛰어올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 대부분은 평생을 그 체제 속에서, 그 사회의 가치를 믿으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아무리 불만이 쌓여 있다 한들 전쟁이라도 나면 그들은 김정은의 편에서 남쪽으로 총구를 겨누게 되고 우리도 물론 그런 점에선 마찬가지다. 그럼 어제의 억압받는 민초는 오늘의 ‘인민군’으로서 우리가 먼저 쏴 죽여야 하는 적이 된다.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 현실이 그렇다.

 

이제 우리 사회의 내부를 돌아보자. 만약 이 땅의 수구 기득권 세력을 드골이 본 나치 독일처럼 악으로 여긴다면, 그 악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ㅂㄱㄴ, 새누리당, 조중동, 일베 등이 일단 떠오르지만, 한편으로 새누리당 내 합리적 인사들은 어떨까. 조중동의 대중음악 섹션 기자들은. 일베 들락거리면서 한편으로 열심히 사는 소년가장 윤모군은. 무엇보다도, ㅂㄱㄴ와 새누리당을 진심으로 지지하는 울 아버지는…?

 

저들에 대한 우리의 분노와 정의의 실현에 대한 의지와는 별개로, 이게 구체적인 부분으로 들어가면 이렇게 어려운 문제가 된다. 저들도 우리와 같은 문화와 역사, 언어를 공유한 친척임에는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은 울 아버지 아니라 ㅂㄱㄴ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어쨌든 타협하고 공존해야 할 공동체의 일원으로 여기는 게 맞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순간 다시 고개가 꺄우뚱한다. 피와 땀으로 일궈낸 민주주의를 비웃고 선거에 개입하고 이 사회를 다시 과거로 되돌리려는 자들이 아닌가? 지성도 성찰도 없이 무한욕망의 가치관을 마구 퍼트림으로써 이 사회를 천하게 만드는 장본인들과 그들의 하수인, 혹은 몽매한 그 지지자들 아니었던가.

 

저런 사람들인 만큼 앞으로 선거라는 것이 과연 공정하게 이루어질지, 혹은 다시 선거로 이겨도 노무현 같은 상황이 반복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다면 말이 좋아 타협이고 공존이지 결국은 저들에게 이 나라를 계속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과 뭐가 다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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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유명한 카툰, Spy Vs. Spy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인 얘네들도 실은 같은 얼굴을 하고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무대에서 살고 있다.

이들은 적일까, 동료일까.

 

 

…현실 정치 속에서 안철수의 존재는, 좋든 싫든 우리에게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을 들이밀고 있다.

 

그는 저들이 미운 시동생일망정 나치 같은 존재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새정치라는 것은 결국, 갈등을 극복하고 신뢰를 회복해서 이 사회의 분열을 넘어 통합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 가능할 거다. 전후 17년이 지나고 철천지 원수였던 프랑스와 독일, 드골과 아데나워가 화해의 손을 잡았듯이 말이다. 그랬기 때문에 유럽 통합도 됐고 결국 공존공영하게 된 건 사실이다.

 

안철수가 뭘 해 보고 싶은지는 알 것 같다. 아 머 그런 관계에서도 화해하는데 한 민족끼리 못할 게 뭘까. 이 좁은 나라에서 지역이니 이념이니 하며 계속 싸우고 있는 것, 하루 이틀도 아니고 우원도 정말 지겹다. 화해하고 통합하고 서로 이해하며 협력하는 공동체를 이뤄야 하는 것, 크게 보면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의문이 남는다. 그게 과연 ‘지금’의 지상과제일까.

 

예컨대, 많은 사람을 고통과 죽음으로 내몬 나치의 과오는 어디로 가는 걸까. 만일 60년대에 아데나워가 나치의 정당성에 대해 중얼거리고 자기들 덕에 프랑스도 전후 미국의 원조를 받아 더 잘 살게 됐다 운운했다면 그때도 화해나 유럽 통합이 가능했을까. 21세기에 유신의 세계관을 다시 끌어내며 선거 개입과 사찰, 민주 탄압의 전횡을 벌이고 있는 이 정권과 기득권 세력의 행태가 그것과 크게 다른 건가?

 

10여년 전 슬금슬금 감정적 향수로 시작된 박정희의 부활이 어느 틈엔가 따님의 대통령 당선으로까지 이어졌고, 이제 5.18은 물론 4.19까지도 평가절하되는 세상이다. 독재 끝에 민중 봉기에 의해 물러난 이승만이 국부의 모습으로 되돌아오고, 일제강점기마저도 긍정적인 면이 있었다고 가르치려 드는 게 지금 이 순간의 대한민국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과연 화해와 통합이 원한다고 가능하며 나아가 정당한 걸까.

 

그리고 우원은 궁금하다. 화해와 통합 자체가 이런 식의 ‘목표’가 될 수 있는 걸까?

 

통합은 실은 수많은 과정과 노력이 모인 결과다. 합리성과 보편성이 사회 속에 공유되고 그래서 서로의 차이는 지엽적인 게 되고 공통점이 본질이 되는, 그렇게 이해와 양보와 포용이 대국적으로 가능한 상태가 통합이지, 그걸 목표로 밀고 나가서 이렇게 저렇게 빚어내면 짠 하고 나오는 뭔가가 아니지 않냐는 거다.

 

근데 안철수의 모습을 보면 그게 그런 거라고 여기는 것 같다. 특히 4.19와 5.18등은 이념이나 정파를 초월한 역사의 보편적 기억으로 다뤄져야 하는 문제지, 이쪽 진영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자 저쪽 진영에 양보해 줄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이런 식이라면 프랑스 쪽에서 먼저 유럽의 평화를 위해 이제 나치의 유태인 학살 같은 문제들은 언급하지 말자고 제안하는 거나 다름없다. 그게 안철수의 본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이런 억지스러운 통합이 어떻게 외형적으로 된다 한들, 진정한 의미가 있을 리 만무하지 않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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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폴란드의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비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사죄했다. 우리는 이 모습을 주로 일제침략자들에 대비해서 회자하지만, 정작 우리 내부에서 국민을 향해 자행된 권력의 범죄와 학살에 대해서 우리는 그 주체들의 사죄를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문민정부 때 전두환과 노태우가 잠시나마 감옥에 가고 이후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로 넘어가면서 그 문제는 다 일단락 됐다고 여겼다.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학살을 자행한 자들을 목매달지 않았고, 그 수많은 하수인과 동조자들을 사회에서 내몰지도 않았다. 그런 상태가 실은 인권과 공화국의 가치라는 보편주의를 바로 세우면서 가능했던 용서와 통합이었다.

 

허나 전임 가카의 치세 동안 우리는 많은 어처구니 없는 일들과 한 사람의 죽음을 겪으며 그게 우리만의 착각이라는 걸 알게 됐다. 나아가 지난 대선의 과정과 ㅂㄱㄴ 집권 이후의 모습을 통해, 거기서 끝이 아니라 상황은 얼마든지 더 나빠질 수 있다는 점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런 지금, 우리는 대체 어떤 모습으로, 어디로 통합해 들어갈 수 있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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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 프랑스 이야기 한 김에 그쪽 일화로 글을 정리해 보자.

 

2차 대전의 영웅 드골은 실은 서유럽에서 흔치 않은 장기집권을 했던 대통령이 되었고, 알제리나 베트남 식민지에 대해서는 탄압을 벌여 국내외의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렇듯 그는 결코 완벽한 정치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파리 국제공항의 이름은 지금도 샤를 드골 공항으로 자랑스럽게 남아 있다. 왜일까.

 

드골의 시대는 장 폴 사르트르의 시대이기도 했다. 사르트르는 식민주의를 열렬히 비판했을 뿐 아니라 알제리 독립자금 전달책의 역할까지 자청한 실천가였다. 그가 프랑스 경찰의 눈을 피해 전달한 돈은 프랑스 군과 싸우기 위한 알제리인들의 무기 구입비로도 쓰였다. 간첩 행위로 사형을 당할 수도 있었다.

 

허나, 그의 처벌을 주장하는 측근들의 목소리에 대통령 드골은 이렇게 답했다.

 

 

“내버려 둬. 그도 프랑스다.”

 

 

 

…이 땅의 권력자들에게,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인가.







 파토

트위터 : @patoworld


편집 : 보리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