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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음방송(玉音放送)에서 옥음(玉音)은 ‘왕의 목소리’란 의미이다. 즉, 덴노가 직접 방송으로 목소리를 들려준다는 의미다. 히로히토 덴노가 1945년 8월 15일 <대동아 전쟁 종결의 조서>를 읽은 라디오 방송을 ‘옥음방송’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덴노가 항복문서를 낭독한 것이라 보면 되는데, 당시로선 파격 그 자체였다. 덴노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는 경우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덴노의 목소리를 방송에 내보내는 건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동일본 대지진 같은 국가 대재난이 벌어져야 겨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왜 그랬던 걸까? 간단하다. 일본이 ‘왕조국가’이기 때문이다. 구름 위의 존재인 ‘덴노’의 목소리를 일반인들이 쉽게 듣는다면, 그 권위가 어떻게 될까? 전제왕조국가에서는 ‘왕’의 권위를 유지하고 확보하기 위해 수많은 전통을 만들어 내고, 불편한 격식들을 강요한다.

 

따지고 보면, 똑같은 사람이지 않은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을까?

 

그렇다면, 덴노의 지시는 어떻게 전달될까? 바로 아랫사람을 통해서다. 덴노가 시종이나 대신들에게 말하고, 이를 다시 평민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덴노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것 자체가 특권이 됐다.

 

옥음방송이 얼마나 예외적인 상황이었는지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하긴, 항복하는 상황이니 방송을 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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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녹음 막전막후

 

방송을 하기까지 과정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다사다난(多事多難)”

 

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한 국가의 패망 앞에서 너무 가벼운 표현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히로히토가 항복을 최종적으로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군부는 이에 동의할 만한 ‘기분’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크고 작은 충돌이 있었고, 옥음방송을 녹음하러 들어간 NHK의 기술진들은 7시간 넘게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더불어 덴노도 기다려야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애교’로 봐줄만 했다.

 

군부 소장파 장교들이 궁을 포위해 NHK 직원들을 납치하려 했다. 실제로 이들은 NHK 직원들을 체포했지만, 녹음레코드를 찾지는 못했다. 당시 녹음 된 4개의 레코드는 당시 황궁의 시종이었던 도쿠가와 요시히로의 재치 덕분에 궁내성 사무실 금고에 보관되었다(당시 도쿠가와 요시히로는 공습 대상지역의 중심부에 있던 NHK보다 황궁이 안전할 거라며 궁내에 보관하라고 말했다).

 

옥음방송 전후의 ‘사건’들을 정리해 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항복 선언문의 작성

둘째, 방송을 물리적으로 막으려는 사건

 

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씩 정리해 보면,

 

항복 선언문의 작성에 관한 부분이다. 1945년 8월 14일 어전회의를 통해 최종적으로 ‘항복’이 결정됐고, 그날 오후 각료회의에서 항복 선언문 초안이 작성되고, 동시에 녹음을 위해 NHK 기술진이 황궁에 도착했다.

 

(당시 NHK직원들을 데리러 황궁에서 차가 왔는데, 이때가 오후 2시였다)

 

이제 항복 선언문만 완성되면, 덴노가 녹음만 하면 됐다. 문제는 항복 선언문에서 터졌다. 항복문서를 작성하던 총리 보좌관들과 아나미 고레치카(阿南 惟幾)가 설전을 벌였다. 문장 하나 때문이다.

 

“전황은 매일매일 우리 일본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 문장을 보고 아나미가 분노했다. 이게 진실이라면, 그 동안 육군장관 명의로 발표된 성명서들은 모두 거짓말이 된다는 거였다(일본 군부가 그 동안 ‘거짓말’을 했던 건 사실이다).

 

“우리는 아직 패전하지 않았다!”

 

아나미의 주장에 아무도 대답할 수 없었다. 결국 몇 시간의 토론 끝에 문장은 수정된다.

 

“전시 상황이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되지 못하고 있다.”

 

그 사이 황궁의 히로히토는 시종장에게 항복선언문이 출발했는지를 재촉했지만, 마지막까지 아나미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모두가 동의하는 항복선언문은 8월 14일 오후 7시 30분이 돼서야 작성됐다(그 사이 스즈키 수상은 히로히토를 찾아가 항복선언문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사과해야 했다). 급하게 작성된 항복선언문은 곧장 황궁으로 전달됐지만, 이걸 그대로, 아무렇게나 쓴 항복문서를 덴노에게 건넬 수 없기에 이를 깨끗하게 정서(正書)하는 데 또 시간을 잡아먹었다.

 

이 문서를 받아 본 히로히토는 황궁 도서관에서 문제가 됐던 문장을 또 고쳤다. 여기에 시종장의 참견이 더해졌다. 원자폭탄 투하에 관한 문장이 잘못됐다고 이걸 다시 정정했다.

 

이제 항복선언문이 완성됐다(바로 녹음에 들어가야 하기에 정서하는 건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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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부터 대기하고 있었던 NHK 녹음팀은 밤 10시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여담이지만, NHK 녹음팀은 NG를 대비해 60분치 녹음 레코드를 준비했다. 실제로 녹음은 2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첫 번째 녹음 후 히로히토는,

 

“녹음을 다시 해야 되는가?”

 

라고 물었다. 이 당시 방송팀은 말문을 열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덴노의 목소리를 녹음 한다는 건 경을 칠 행위였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녹음하자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당시 NHK녹음팀은 덴노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고, 덴노의 목소리를 녹음한다는 긴장감 때문에 방송 내용이나 낭독의 정확성 등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목소리의 높낮이에만 신경을 썼다. 이때 시모무라 히로시(下村宏) 정보국 총재가,

 

“평소 하시던 대로”

 

라고 말했고, 덴노는 두 번째 녹음을 한다. 그러나 두 번째 녹음에서 덴노가 단어를 잘못 발음 한 게 있어서 결국 첫 번째 녹음본을 사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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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을 물리적으로 막으려는 사건은 간단히 말해서 ‘쿠데타’였다.

 

여기서 주목해 봐야 하는 게, 당시 육군장관이었던 아나미의 행보다. 아나미는 항복이 결정되고 난 뒤 짧은 성명서 하나를 작성한다.

 

“모든 황군은 한 치의 착오도 없이 덴노 폐하의 결단에 따를 것이다.”

 

항복에 반대했지만, 그는 덴노의 충실한 신하였다. 덴노의 뜻에 반하는 군의 ‘집단행동’은 명백히 반대한 거다. 그는 성명서를 작성한 다음, 육군성 내의 모든 중견 관리와 장교들의 서명까지 다 받아낸다. 그런 다음,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긴다.

 

“장교 제군 여러분! 죽음으로써 모든 책임을 면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제군들의 의무는, 풀뿌리를 씹고, 흙을 파먹고, 하늘을 이불 삼아 눕는 한이 있더라도 살아남아 조국이 회생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길을 닦는 것입니다.”

 

장교들은 이때 직감적으로 그가 할복할 것을 예감했다. 이 당시 그가 할복할 것이란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스즈키 총리 역시 이를 예감하고 있었다. 덴노가 녹음 준비를 하던 그때 아나미가 총리 사무실로 찾아와 수마트라산 시가를 건넸다.

 

“저는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수상께서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다음 공손히 인사를 했다. 이때 스즈키는,

 

“육군 장관이 영원한 작별 인사를 하러 온 것 같다.”

 

라고 말했다. 그는 죽음으로써 책임을 지려 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건 아나미가 마지막 순간까지 육군장관으로 해야 할 일을 다 했다는 거다.

 

그는 장교들에게 재삼재사 당부를 했는데,

 

“무사도에 따라 할복하겠다는 생각은 버려라. 끝까지 살아남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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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미 고레치카(阿南 惟幾)

 

자신은 책임자의 자리에 있었기에 죽음으로 그 책임을 다하겠지만, 부하들은 살아남아 조국의 부흥에 기여하라는 거였다. 동시에 일부 소장파 장교들의 ‘쿠데타’를 방지하는 데 온 힘을 다했다. 하타나카 켄지(畑中 健二)소좌를 비롯한 소장파 장교들은 아나미를 찾아가 항복의 결사반대와 비상시에 병력동원계획을 요구했다. 병력동원계획이란 쿠데타의 다른 말이었다.

 

이들의 계획은 단순했는데, 종전을 주장하는 스즈키 칸타로, 기도 고이치, 요나이 미츠마사, 도고 시게노리 등을 처형하고, 끝까지 미국에 맞서 싸우자는 거였다.

 

아나미는 우선 참모총장인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郞)의 동의를 구하라고 이들을 돌려보냈다.

 

쿠데타로 보기엔 너무도 어설펐다.

 

이들 소장파 장교들은 덴노가 옥음방송을 녹음한다는 걸 확인하자 근위 1사단 사령부를 찾아가 사단장이었던 모리 다케시(森赳)에게 쿠데타 가담을 요구했다. 모리 사단장이 이를 거부하자 사단장과 사단참모를 죽인다. 쿠데타의 시작이다.

 

이들의 제일 목표는 옥음방송이 송출되는 걸 막는 것이기에 NHK를 일단 점거했다(마지막에는 이 안에서 자신들의 성명을 발표하려 했지만, 이 역시도 실패한다). 그런 다음 아나미를 비롯한 군 지휘부를 설득해 쿠데타를 이어나갈 계획이었는데, 덴노의 목소리가 담긴 녹음 레코드 확보에 실패했다. 육군장관 아나미가 자살했고, 군 지휘부는 이들을 진압하려고 나섰다. 즉, 군 지휘부를 내세울 수가 없게 됐다.

 

일본의 마지막 ‘발악’은 그렇게 끝이 났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 덴노의 목소리가 방송된다.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깊이 성찰한 결과,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하기로 하여, 이를 충량(忠良)한 신민들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 정부가 미영중소 4개국에 대하여 포츠담선언의 내용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지시했다. 제국 신민들의 강녕(康寧)과 만방의 공영을 위한 노력은 선조들이 우리에게 부여한 성스러운 의무로 우리 가슴에 새겨져 있다. 제국은 자존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위하여 영미 양국과 전쟁을 했으나 짐이 뜻한 바와 다르게 타국의 주권과 영토를 침해하게 됐다.

 

개전한 지 어언 4년이 되는데 육해군의 투혼, 전쟁 종사자들의 근면 그리고 일 억 신민의 최선에도 불구하고 전국은 호전되지 않고 세계의 대세 역시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그에 더하여 적은 새롭고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유례가 없는 희생자가 났다. 그래도 교전을 계속한다면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인류문명의 파괴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 상황이 되면 어떻게 억조(億兆)의 적자(赤子)를 보전하고, 선조들의 영전에 용서를 구하겠는가.

 

짐이 제국 정부로 하여금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게 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짐은 제국과 함께 동아시아의 해방에 협력한 제 맹방에게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제국 신민으로서 전장에서 전사한 장병들, 직분을 다하다가 순국한 사람들, 비명에 간 사람들과 그 유족 생각에 주야가 괴롭다. 집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고통도 걱정이 된다.

 

앞으로 제국이 짊어져야 할 고난도 결코 적지 않다. 짐은 신민이 느끼는 착잡한 심정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시대의 소명과 피할 수 없는 운명적 요인을 참고 받아들여서 앞으로 다가올 만난을 극복하여 다음 세대에 평화의 길을 열어주고자 한다.

 

언제나 충량한 신민들과 함께 국체를 호지(護持)해온 짐은 이제 신민들의 단결과 성실에 다시 호소한다. 감정의 표출은 불필요한 소요사태를 야기하고 동포들 간의 분규는 혼란을 자초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자제력을 잃은 행동은 시국을 혼란하게 하여 대도를 그르쳐서 국제적인 불신을 초래할 것이니 짐은 이를 가장 경계한다.

 

모든 신민은 먼 장래를 내다보면서 신주(神主)의 불멸을 믿고 대를 이어 한 가족처럼 결속을 다져야 한다. 미래 건설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자. 성실성을 배양하고 고매한 정신을 육성하자. 세계의 진운에 뒤처지지 않게 제국에게 주어진 영광을 고양시키도록 단호한 결의로 매진하자.

 

너희 신민은 이러한 짐의 뜻을 명심하여 지키도록 하라.』

 

4년간의 전쟁은 4분 42초 만에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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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인들로서는 허탈한 느낌보다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앞섰을 것이다. 이걸 항복문서라고 봐야 할까? 이렇게 현대어로 풀어 써서 그렇지, 원문 그대로를 보자면 무슨 말을 하는지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없다.

 

(실제로 당시 방송을 들었던 많은 일본인들은 덴노의 방송내용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궁중용어를 너무 많이 사용한 데다가, 잡음마저 섞여서 이 말이 뭘 의미하는지 몰랐다. 그저 ‘졌다는’ 것만 이해했다)

 

우리가 ‘항복 선언문’이라고 알고 읽으니 항복문서로 보이는 것이지, 이 글의 제목을 빼고 읽는다면 이건 덴노의 ‘변명’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짐이 뜻한 바와 다르게 타국의 주권과 영토를 침해하게 됐다.’

 

‘적은 새롭고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유례가 없는 희생자가 났다.’

 

침략은 자신의 뜻이 아니다? 잔학한 폭탄으로 인해 일본인들의 무익한 희생을 피하기 위해서다? 일본은 전쟁의 시작 때처럼 그 마지막도 기만과 허위로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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