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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랜만에 아들 녀석과 함께 야구장을 찾았다. 야구를 보러 간다고 하니 많은 이들이 우려 섞인 목소리로 다시 생각해 볼 것을 권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야구장 직관 필패'의 저주가 내게 찾아온 지는 오래되었다. 구체적으로 셈해본 적은 없으나 지금까지 나의 직관 승률은 1, 20% 정도가 아닐까 싶다.

 

어쩌다 한번 시간을 내 맘먹고 찾는 야구장이지만, 승리의 기쁨을 좀체 맛보지 못한다. 저주는 내 응원팀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지인들에게도 민폐를 끼친다. 한화를 응원하는 친구를 따라 야구장을 찾으면 한화가 진다(한화의 경우를 예로 드는 게 적절하지 않은 것 같지만). 지독한 저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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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는 최악이었다. 손에 땀을 쥐거나 기대를 품고 선수들을 바라볼 기회조차 없었다. 1회부터 아슬아슬하던 선발투수는 4점을 내주며 근근이 버티다 5회에 교체되었고, 후반 반격을 고대하던 6회와 7회에는 합쳐서 10점을 내주었다. 결과는 14 대 1의 패배. 화끈하게 졌다. 아쉬울 것도 안타까울 것도 없는 깔끔한 패배였다.

 

경기 초반부터 죄 없는 닭다리만 뜯어가며 연신 술을 들이켜다 8회 초에 맥빠진 걸음으로 야구장을 나왔다. 우리는 입었던 유니폼을 조용히 벗고 집으로 가는 차에 올랐다. 경기가 이겼으면 도착할 때까지 벗지 않았을 유니폼이었다. 한 시간이 넘게 걸려 시무룩한 채 집으로 돌아가니, 기다리던 아내가 안 그래도 울고 싶은 부자의 뺨을 때려준다.

 

“그러게 왜 야구장에 가서 또 지게 만들고 오냐고오. 아시안 게임 덕분에 푹 쉬고 선수들이 다시 치고 올라가려고 열심히 하는데, 왜 또 찾아가서 초를 치고 오냐고~ 겨우겨우 시간 내서 돈은 돈대로 쓰고 뭐 하시는 거냐고오~"

 

억울하지만 할 말은 없다. 함께 야구장을 가지 못한 아쉬움 때문에 아내가 심술을 섞어 놀려대는 걸 안다. 그냥 웃고 만다. 성질 같아서는 “내가 두 번 다시 야구를 보러 가면 성을 갈고, 아주 개자식이다.”라고 하고 싶지만 참아야 한다. 이미 강아지 가문의 30대 손쯤 되고, 성씨(姓氏)도 30번 쯤 갈았다. 더 이상 바꿀 성씨가 없다. 속상한 일이다. 멍멍~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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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의 프로야구 출범 개막전을, 지금은 사라진 동대문 야구장에서 보았다. MBC 청룡-삼성 라이온즈의 경기였다. 그날 서슬 퍼런 경호원들 사이에서 흐뭇하고 거만한 얼굴로 시구하는 전두환을 보았다. 프로야구 1호 홈런을 치는 삼성의 이만수를 보았다. 9회 말 7 대 7까지 추격한 상황에서 극적인 역전 만루홈런을 치는 MBC의 이종도를 보았다. 생애 가장 잊기 힘들 패배의 끝내기 만루 홈런을 맞고 넋빠진 표정으로 서 있던 삼성의 이선희를 보았다. 야구라는 스포츠가 만들어낼 수 있는 극적인 장면이었다.

 

몇 년 전, 국내 프로 야구 9회 말 끝내기 만루홈런의 확률을 직접 계산해본 적이 있다. 2012년까지의 기준으로 967.2경기에 한 번 나오는 장면이었다. 1천 경기쯤을 해야 한 번 나올 수 있는 진귀한 장면을, 프로야구 출범 첫 경기의 현장에서 직접 목격했다. 프로야구 개막전의 끝내기 만루홈런으로 동대문 야구장이 뒤집어지던 그 엄청난 순간,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까까머리 중학생이던 내가, 야구 팬 그것도 MBC 청룡의 팬이 되지 않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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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MBC 청룡의 광팬이 되었다. 그 후 한동안 MBC 청룡에 대한 사랑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뜨거웠다. 고만고만한 또래들의 야구 인기를 훌쩍 뛰어넘어버린 나의 열혈 팬심 덕분에, 학교와 집에서의 생활에도 영향을 받았을 정도였다. 아버지를 비롯한 어른들로부터 많이 구박받고 혼났다는 이야기다. 그놈의 야구 때문에 그랬다. MBC 청룡의 백인천 감독 겸 선수를 비롯해 하기룡, 이종도, 이길환, 유종겸, 김재박, 이해창, 신언호, 이광은 같은 선수들이 돌아가며 꿈에 나올 만큼, 그때는 그렇게 야구가 재미있고 좋았다.

 

그 후로 오랜 시간이 흘렀고, 여전히 야구를 좋아하지만, 지금은 LG 트윈스(MBC 청룡의 후신)의 팬이 아니다. 응원하는 팀이 바뀌었다. 오래전, 그때 나의 아버지가 응원하던 팀을 이제는 나도 응원한다. 그 팀은 당시에 내가 끔찍이 싫어하는 팀이었다. 가장 마음에 안 드는 팀이었다. 언제쯤이었을까. 내가 응원하는 팀이 바뀐 시기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분명한 건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된 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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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못지않게 아직은 봉황기 대회나 청룡기 대회 같은 고교야구가 인기 있던 80년대. 최고의 인기스타였던 고교선수 박노준이 속한 선린상고는, 각종 대회 4강과 결승전의 단골손님이었다. 선린을 상대로 전국 고교 강호들이 번갈아가며 준결승과 결승에 올라왔다. 대구상고, 부산고, 경북고, 경남고, 경남상고, 광주일고, 광주상고, 군산상고, 천안북일고, 덕수고, 신일고 등이었다. 당시의 박노준은 그냥 No.1이 아닌 'ONLY 1'이었다. 박노준을 대체할 선수는 없었고 박노준 다음으로 잘하는 선수는 부상당한 박노준이었다.

 

그 시절 다른 많은 아저씨들이 그랬듯 박노준을 가장 좋아하고 늘 응원하던 아버지가 이상할 때가 있었다. 여느 고교 팀들과 선린상고의 대결에서는 박노준을 응원하며 기분 좋게 경기를 즐기던 아버지가, 상대가 광주일고이거나 광주상고이거나 군산상고일 때는 그렇지 못했다. 경기의 결과는 대부분 박노준이 활약한 선린상고의 승리였는데 아버지 표정은 밝지 못했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초고교급 박노준의 활약에 한 번씩 감탄하긴 했지만, 다른 때처럼 박수를 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그때의 아버지 마음이 조금씩 이해가 됐다.

 

TV를 틀면 “오늘 전두환...”과 “한편 이순자...”로 시작되는 9시 뉴스가 방송되던 시대가 있었다. 뉴스의 시작과 함께 화면에 등장하는 전두환을 바라보는 아버지에게서, 크지는 않지만 나지막한 한숨이 흘러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 그 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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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과 92년, 97년. 대선이 있던 해마다 반복되던 기억이 있다. 신문을 더 많이 더 열심히 보고, TV의 정치뉴스에서 눈을 떼지 못했으며,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고향의 친구분들을 만나는 횟수가 잦아지던 아버지. 연말이 되어 마침내 대통령 선거일이 다가오고, 선거가 끝나고 나면 며칠 동안의 폭음과 함께 한층 무기력하고 감정을 읽기 힘든 어두운 표정이 되곤 했던 아버지. 그런 변화와 표정들이 이해되기 시작할 무렵, 그때부터 나는 해태 타이거즈를 응원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3.

 

프로야구에는 10개의 팀과 9개의 홈구장이 있다(두산·LG 공동 사용). 야구 팬으로 전국의 모든 야구장을 한 번씩이라도 가 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특히 부산의 사직 야구장에서 쓰레기 봉투를 한 번은 꼭 뒤집어써보고 싶다. 구단의 유니폼은 이미 모두 준비되어 있다. 문제는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 9개의 야구장 중 부산의 사직 야구장과, 수원 kt위즈파크, 대전 한화이글스파크, 창원마산 야구장, 광주 KIA챔피언스필드를 아직 가보지 못했다(예전의 부산 구덕 야구장과 광주 무등 야구장은 가 보았다).

 

7년 전에 가 본 인천의 SK야구장은 규모는 작아도 세련되고 편안해 보였다. 새로 지어진 광주와 대구의 야구장들은 그보다 더 좋아졌으리라 생각한다. 오랜 시간 어쩔 수 없이 찾아야만 했던 목동 야구장. 외야 관람석조차 없는 그곳은 솔직히 모든 면에서 최악이었다. 새로이 넥센의 홈구장이 된 고척돔 야구장. 정치적 상황 탓에 졸속으로 결정돼 억지로 지어진 그곳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많다. 접근성이나 주차장 등 편의 시설도 그렇고, 지나치게 상업적인 관람 가격(싼 좌석은 전광판조차 볼 수 없는 차별)이 그렇다. 개인적으로는 야구장에서 하늘을 볼 수 없는 게 큰 아쉬움이다. 허구연 위원이 들으면 화낼 말이다.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많을 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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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역시 잠실에서 봐야 제맛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지은 지 40년이 다 되어가는 탓에 여러 가지 면에서 노후하고 낙후된 부분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잠실 야구장은 사이즈부터 다르다. 접근성과 편의 시설들도 좋지만 무엇보다 관중의 규모가 다르다. 빅게임이 벌어지는 날 야구장 가득 들어찬 3만에 가까운 팬들이 소리를 지르며 열띤 응원을 할 때, 전율을 느낀다. 그런 부분에서 잠실을 따라올 야구장은 우리나라에 없다. 검게 어두워져 가는 저녁 하늘. 그 아래 환한 조명에 밝혀지는 눈 시린 녹색의 잔디가 깔린 운동장과 선수들. 그 위로 쏟아져 내리는 수많은 관중의 떼창과 함성.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내 몸의 감각들을 점령해 오는 순간, 울컥하며 감동할 때가 있다.

 

잠실 야구장에서 야구를 보다 겪었던 일들이 많다. 결혼하기 전, 아내와도 가끔 야구장을 찾았다. 경기를 보다 은근슬쩍 처음으로 손을 잡았던 일과 역전 적시타에 정신없이 환호하다 힘껏 안아 보았던 일. 아들 녀석이 네 살이 되던 해 처음 유니폼을 입혀 손잡고 야구장에 함께 들어가던 당시의 뭉클한 기억. 야구장에 갈 때마다 치킨과 과자만 실컷 먹고 나면 몸을 비비꼬다 집에 언제 가냐고 채근하던 녀석이, 어느 날부터 기아 타이거즈 모든 출전 선수들의 응원가를 막힘없이 따라 부르며 열심히 막대 풍선을 두드려대는 모습을 본 순간의 놀라움과 대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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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녀석과 내가 나란히 앉아 야구 보는 모습을 친구가 찍어주었다. 우리가 입고 있던 유니폼의 등에는 똑같이 7번 이종범의 이름이 마킹돼 있었다. 또 있다. 메이저리그에서 돌아온 박찬호가 몇 차례의 도전 끝에 두산을 상대로 잠실야구장에서 국내 무대 첫승을 기록하던 날. 외야에서 한화를 응원하던 나는, 경기가 끝나자 펜스를 뛰어넘어 박찬호를 향해 덕아웃 쪽으로 달려갔다. 물론 얼마 가지 못해 보안 요원에게 붙잡힌 채 질질 끌려 나와야 했다. 그날 다리 부러질 뻔했다. 잠실 외야 펜스는 위에서 볼 때는 별 것 아니지만 아래의 운동장에서 보면 2층에 가깝다. 한참 떨어진다. 행여 객기들 부리지 마시라. 내가 해 봐서 안다.

 

 

4.

 

 

응원가 이야기를 빼놓기 힘들다. 생각나는 곡들이 있다. 롯데 팬들이 가장 좋아하고 많이 불렀을 응원가는 강민호의 것이 아니었을까. 보니 엠의 노래(훗날 립싱크로 밝혀졌지만) <By the rivers of Babylon>가 원곡이다. 성경 시편의 한 구절을 소재로 해서 만든, 오래전 한 시절 굵은 흔적을 남긴 유명한 노래였다. 그 노래 ‘바빌론 강가에서~’가 전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사직 노래방에서 터져 나오는 ‘롯데의 강민호~’가 되었다. 지금, 강민호는 삼성으로 떠나 버렸고 오랜 응원가는 주인을 잃었다.

 

 

레드 제플린에 필적하는 하드 록의 최고봉이라는 딥 퍼플의 노래 <Smoke on the water>는 기아 최희섭의 응원가로 불렸다.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음악이다. 최희섭이 그 노래를 응원곡으로 쓸 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응원하는 팀과는 상관없이, 좀 더 큰 활약을 했던 선수의 몫으로 갔어야 할 응원곡이 아닌가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아~ 참기가 힘들다. 이 말은 해야겠다. 응원곡이 아깝다. 미안하다. 빅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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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잠실이고, 야구 응원가는 이종범이다(개인적인 의견임을 다시 밝힌다). 이종범의 응원가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에 나오는 부분을 따왔다. 야구장에서 바람의 아들 이종범의 응원가를 직접 들어본 적이 있는 팬들이라면 안다. 얼마나 멋진 응원가인지. 바람의 아들의 아들, 바람의 손자 넥센 이정후에게 그 응원곡이 상속될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현재 타격 1위인 이정후는 어쩌면 세계 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부자(父子) 타격왕의 기록을 세우게 될지도 모른다. 응원한다, 바람의 손자.

 

마지막으로 잠실 야구장에서 상대로 만나는 두 팀, 두산 베어스와 LG 트윈스의 이야기를 조금 해 보고 싶다. 두산은 부러운 게 많은 팀이다. 무엇보다 팬심과 응원 문화. 두산 팬들의 팀 사랑은 유난히 끈적하게 느껴진다. 타 팀의 팬들에 비해 유별나지 않지만 두터운 신뢰와 믿음이 느껴진다고 할까. 묵묵하게 그러나 성실하게 응원하는 두산의 팬들을 많이 보았다. 두산은 선수들도 팬들도 곰을 닮았다.

 

아주 오래전, 두산을 상대로 경기를 하던 날. 해태 응원석 건너 두산 팬들이 응원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만 명이 넘는 두산 팬들이 경기 시간 내내 함께 응원가를 부르고 일사불란하게 박자를 맞춰 응원 동작을 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해태의 팬이었던 내게는 낯선 광경이었다. 당시 해태의 팬들은 관중석 여기저기 산재해 앉은 채, 개인적으로 소리를 지르거나, 선수들에게 장난이 섞인 욕설을 해대거나, 옹기종기 모여 술잔을 주고받거나 하는 풍경들이 많았다. 다른 팀에 비해 유난히 해태 관중석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풍경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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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응원단은 많이 달랐다. 상대적으로 함께 모여 앉은 관중들이 많았고, 무엇보다 열심히 응원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이길 때나 질 때를 가리지 않고 함께 성실하게 응원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응원단을 앞에 두고 모여 앉은 수천 명의 두산 팬들은 열정적인 응원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어쩌면 돈을 받고 고용된 알바들이 아닐까’라고 나는 한동안 의심을 가지기도 했었다. 정말이다. 지금은 타 구단들도 많이 달라졌다. 두산의 응원 문화가 야구 전체의 응원 풍경을 많이 바꿔 놓았다는 생각을 한다.

 

두산의 좌익수 김재환. 잠실에서는 늘 원정팀의 팬인 나는, 전광판과 3루쪽 방면 외야의 중간 지점에 자리를 잡을 때가 많다. 우리 팀의 공격시간, 대부분 두산 좌익수 김재환의 뒷모습을 보며 응원을 하게 된다. 김재환의 뒷모습은 참으로 당당하다. 큰 키와 우람한 몸집과 두툼한 허벅지를 뒤에서 보고 있노라면 부러울 때가 많다. 남자로서 또한 야구팬으로서 그렇다. 현재 홈런 2위인 김재환의 스윙은 커다란 덩치만큼 호쾌하다. 김재환의 홈런은 잠실 야구장의 중앙 펜스를 가볍게 넘긴다.

 

야구장이라고 해서 다 같은 야구장이 아니다. 전국 야구장 규격의 수치가 대동소이한 것 같지만, 실제 플레이하는 선수들이 느끼는 거리 차이는 상당히 크다고 들었다. 너무나 매력적인 캐릭터 삼성의 레전드 양준혁도, 잠실 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쓰는 선수들의 홈런 개수는 최소 10개 이상 인정해줘야 한다고 했다. 나 역시 잠실 야구장의 홈런왕이 진짜 홈런왕이라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다. 3년 연속 30개 이상의 홈런을 기록하고 있는 김재환에게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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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연속 30홈런 이상은, 잠실 야구장을 홈으로 했던 선수들 중 외국인이었던 타이론 우즈만이 유일하게 달성한 기록이다. 김재환이 그 기록을 깨주었으면 한다. 김상호와 타이론 우즈 이후로 사라진 잠실 홈런왕에 김재환이 오르길 응원한다. 힘을 내서 멋진 기록을 달성하기 바란다. 이런저런 이유로 김재환을 비난하는 팬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실력과 기록으로 보여주는 것 말고 별 수가 있겠는가. 건투를 빈다.

 

LG 트윈스는... LG는... 잘 했으면 좋겠다. MBC 청룡의 원조 팬으로 무언가 답답하고 안타까울 때가 많다. 우승한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줄무늬 유니폼만큼 멋졌던 LG 트윈스의 모습을 빨리 다시 보고 싶다. LG 파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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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9월 말 기아가 다시 잠실에 온다. 이길 때까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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