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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요일 일본 홋카이도에 있는 삿포로에 갔습니다.

 

출발 전부터 불안했던 게, 태풍 제비 때문에 비행기가 뜰지 안 뜰지 모르는 상황이었죠. 몇 백만 원(코스에 고급 료칸이 있어서) 들여놓은 게 아까워 취소도 못하고 그냥 출발한 게 화근이었습니다.

 

신치토세 공항(삿포로에 있는 공항)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상했습니다. 태풍 제비로 인해 JR트레인이 운영을 안 하고 있었죠. 그래도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다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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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일어나기 6시간 전 삿포로입니다. 오른쪽이 오도리 공원이네요.

 

저녁에 A호텔(영사관 바로 근처더랍니다 다행히)에서 묵게 됐고, 새벽 3시에 지진이 왔습니다. 호텔 내에 있던 액자와 화분은 다 떨어졌고 방 안에 놔두었던 충전기도 다 뽑혔습니다. 불안에 잠이 안와서 4시까지 눈을 뜨고 있었는데, 불들이 꺼지더니 정전이 됐습니다. 물도 안 나오기 시작. 결국 밤을 샌 채, 아침 10시쯤 체크아웃을 위해 호텔 카운터로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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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R전차, 버스, 공항, 노면전차 모두 운휴됐습니다.

삿포로에 갇힌겁니다.

 

당장 아침에 먹으려했던 조식 뷔페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침을 먹으러 밖으로 나왔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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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인근 패밀리마트입니다. 지진으로 휴점했습니다.

 

해결방안을 찾아야 했습니다. 일단 급하게 영사관에 전화했습니다만, '침착하라'는 말만 하더니 다시 전화주겠다고 합니다. 2시간이 넘게 기다려도 전화가 오지 않더군요. 와이파이가 다시 터지기 시작해서 영사관 위치를 찾았습니다. 호텔 근처라서 다행이었죠.

 

영사관에 가자 벌써 한국인 관광객들 20명이 벌벌 떨면서 있더군요.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다보니 영사관 직원도 당황한 상태였습니다. 영사관이 알려준 대피소로 이동했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소엔 초등학교라는 곳에서 한 시간 정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다 나가라는 겁니다. 일본인 전용 대피소로 써야 한다면서요. 쫒겨나오니 이제는 오도리 고등학교라는 곳으로 이동하랍니다. 차로 15분 거리.

 

이렇게 지진 이후 피난민의 하루가 시작됐습니다.

 

일단 제일 중요한 건 물이었습니다. 대피소로 이동한 지 2시간이 지났지만 물이나 모포도 주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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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리 고등학교 체육관입니다. 다 한국분들입니다.

사진에는 모포가 있습니다만, 오후 4시쯤이나 돼서 준 겁니다. 대피소로 이동한 시간은 12시.

 

물은 이때까지도 주지 않았습니다. 식수 공급이 필요한 상황. 일단 전날 묵었던 A호텔에서(큰 호텔이라서 그런지 비상 전력으로 전력 복구를 금방 해내더군요) 난민이 된 여행객들에게 물을 제공해줬습니다.

 

같은 대피소에 있는 분들에게 말씀 못드린 것은 정말 죄송하네요. 다들 목마르셨을 텐데...

 

이제 식량을 찾으러갑니다. (이때부터 핸드폰 배터리가 없어서 사진을 못찍었습니다. 지도로 대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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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시된 곳이 오도리 고등학교입니다.

 

일단 전략을 세웠습니다. 일행은 호텔에 머무르면서 물 확보, 저는 주변 가게 탐색. 일단 인근 1km 이내의 모든 편의점은 닫혀 있었습니다. 점심도 먹지 못한 상태에서 움직이다보니 너무 힘들더군요.

 

마지막에야 열려 있던 로손 편의점을 찾았습니다. 생수는 이미 바닥났고, 선반에 올려져 있던 컵라면 8개를 모두 쓸어 담았습니다. 그 외에 건조식품 몇 개를 담았습니다. 이름도 잘 모르겠는 것들을 마구 집었습니다. 편의점에서 휴대용 계산기로 찍어서 계산하더군요.

 

다시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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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로 돌아오니 이런 게 붙어 있네요. 7도 지진.

 

우리나라에는 6.7로 설명되었습니다만 일본의 지진 강도 측정(0, 1, 2, 3, 4, 5 약, 5강, 6약, 6강, 7) 10개 단위 중 가장 강했다고 합니다. 예약했던 료칸에서 전화가 옵니다. 노보리베츠에 있는 료칸인데, 료칸 내부가 무너져 사용이 불가능하답니다. 무료 취소... 다행이네요.

 

영사관에서 뒤늦게 문자가 옵니다. 그런데 데이터를 켜지 않으면 볼 수가 없게 왔습니다. 게다가 저한테만 왔습니다. 일행한테는 안 갔어요. 다행히 통신시설이 복구돼 얼른 로밍을 신청하고 확인했습니다.

 

별 내용은 없었습니다. 대피소 위치를 알려주는 문자였네요. 나중 일입니다만, 삿포로 대피소는 오후 3시쯤 알려줬는데 노보리베츠, 하코다테 쪽 대피소는 8시가 넘어서야 공지됐습니다. 먹을 물과 음식을 해결하니 멍 때리게 됩니다. 저는 대피소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5시 쯤까지도 물 한 병을 안 주네요.

 

5시 30분쯤 되니 저녁이라면서 뭔가를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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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집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간이 하나도 안 돼 있는 흰밥과 미역 같은 해조류가 들어있습니다. 물도 없이 먹으려니 굉장히 목이 메던 기억이 나네요. 게다가 제대로 불려지지 않아 이가 아플 정도로 딱딱합니다.

 

6시 쯤 대피소를 빠져나와 호텔로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호텔 칭찬(?)이랄까, 애프터 서비스가 너무 좋았다는 점을 꼭 설명하고 싶네요. A호텔은 삿포로 내에서 크기로 따지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호텔입니다. 다른 호텔보다 훨씬 빨리 전력이 복구됐습니다(자체 전력) 또 5시쯤 자체적으로 수도도 복구했습니다. 화장실을 쓸 수 있다는 게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더군요.

 

그리고 지진 당일 묵었던 손님들에게 2층 컨벤션 홀을 내줬습니다. 객실을 내주자니 아무래도 이미 예약한 사람들도 있고 해서 어렵고(재예약하려고 했지만 이미 꽉 차 있었습니다)해서 자구책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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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컨벤션 홀입니다. 침구류가 없어서 시트를 잔뜩 배부해줬습니다.

 

심지어 대피소에 있는 사람들보다 빨리 받았다는 게 유머네요.

 

[우리나라 영사관 뿐 아니라 다른나라 영사관도 얼(?)타는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심지어 일본 영사관도 욕먹고 있었습니다. (처음 갔던 소엔 초등학교를 왜 외국인에게 개방했느냐 등) 홋카이도에 이런 큰 지진은 처음이라는 등,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다네요(현지 한국인들도 입을 모아 말하더군요). 아무래도 지진을 겪은 당사자다 보니 저도 영사관의 미진한 대응에 좀 화가 나긴했습니다만, 지금에 와서는 어느정도 이해는 갑니다.]

 

 

호텔 덕에 물과 잠자리는 해결했습니다만, 저녁은 라면으로 때우기 어려웠습니다. 이제 밖을 다시 돌아봐야 했습니다.

 

저녁을 찾기 위해 밖으로 나왔습니다. 핸드폰이 다 꺼진 상황(호텔에 전기가 들어와 그나마 충전중)이라서 사진이 없네요. 인근에 뭐라도 열려있을까 기대하면서 구석구석 살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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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근처에서 한국인 분이 하는 음식점을 찾았습니다! 7시 반쯤 됐는데, 문이 열려 있더군요. 얼른 들어갔습니다. 장사를 안 하긴 하는데 그래도 한국 사람이라니까 저녁을 주시겠다네요! 일본 현지식 삼계탕을 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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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레시를 비춰가며 먹은 삼계탕.

다리 두 개만 들어간 삼계탕입니다.

 

주인 분도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고 하시네요(20년 넘게 사셨다고 함). 자녀 분들은 다행히 홋카이도에 없었고 본인하고 부부만 여기 계시답니다. 라디오를 틀어두셨는데, 짧은 일본어 실력으로 들으니 다음날(9월 7일)이면 전기가 70% 복구될 거라고 나왔습니다. 다만 버스나 지하철 등은 복구될지 미지수라고... 또 6강으로 측정됐던 지진이 7로 격상됐다고 합니다.

 

친절하신 주인 분 덕분에 저녁을 잘 먹었습니다. 일본에서 삼계탕을 먹을 줄이야.

 

호텔에 가기 전 오도리 고등학교에 마련된 대피소에 들렀는데, 사람이 너무 많은 데다, 덥고, 불도 꺼져 있어(전기가 끊겼으니) 호텔 컨벤션 홀에서 자기로 했습니다. 호텔에서는 찬물 더운물 다 잘나왔거든요. 전기도 되구요.

 

씻고 누우니 할 일이 없었어요. 하루가 너무 길어서 일찍 잠들었습니다.

 

 

다음 날, 예약해둔 항공사로부터 이런 카톡이 옵니다.

 

"삿포로-인천 결항편 승객께서는 아사히가와발 인천행편으로 대체편 탑승이 가능하오니 출발 2시간 전까지 카운터로 오셔서 수속안내를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아사히카와 공항은 어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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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km 떨어진 곳에 있는 시골 공항입니다 ㅡㅡ;;;

 

버스도 전철도 기차도 다 끊겼는데 어떻게 가야 할까요? 답은 택시입니다. 호텔 직원에게 부탁해 택시를 불렀습니다. 예상 가격은 4만엔이라고 하네요. 어쩌겠나요? 가야죠. 너무 고마웠던 호텔 직원들에게 거듭 감사의 인사를 건넨 뒤 9시쯤 택시를 타고 출발했습니다.

 

진앙지에서 꽤 떨어진 하이웨이를 타고 갔습니다만, 도로 여기 저기가 무너져 있었습니다. 사진을 못 찍은 게 안타깝네요. 예상보다 한 시간가량 늦게 12시 반쯤 도착...하자마자 이런 문자가 옵니다.

 

"삿포로-아사히카와공항 이동수단 관련하여, 영사관에서 버스를 제공하고 있사오니 오도리공원 부근 대한민국 영사권으로 오셔서 안내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젠장;;; 택시비 40만원을 날렸습니다. 영사관 너무해요.ㅠㅠ

 

속 쓰린 상황이지만 어쨌든 공항 안을 살핍니다. 가게 몇 곳은 이미 태풍 제비로 재료를 구입하지 못해 닫은 상태. 면세점도 출국장 쪽은 열려 있었습니다만 살 게 없더군요.

 

몇 시간 뒤 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이 도착합니다. 급하게 항공기를 준비하다보니 전산이 마비됐습니다. 결국 수속 카운터 직원들이 일일이 수기로 티켓을 작성합니다. 이런 건 처음보네요. 수기로 작성하다보니 예상보다 훨씬 늦게 비행기를 타게 됐습니다. 밤 9시나 돼서야 출발했네요. 그렇게 간신히 삿포로 지진에서 빠져나왔습니다.

 

도착하니 새벽 0시. 이날 저녁을 못 먹어서 새벽에 감자탕 먹고 집에 들어갔습니다. 지진의 충격이 가시질 않아, 새벽 5시까지 잠 못 들었습니다. 이 기억이 정말 오래 가겠네요.

 

 

간단하게 지진 겪었을 때 팁을 드리자면,

 

1. 영사관 위치와 숙소 간 거리를 가기 전부터 확인한다. 꼭! 저는 운이 좋아서 코 앞에 있었지만, 멀리 있던 분들은 사실 답답하셨을 겁니다. 미약하지만 그래도 대책을 세우려고 하는 점은 칭찬할 만 부분이죠.

 

2. 섣불리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저처럼 급하게 움직여서 택시비를 날리거나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절대 그러시면 안됩니다. 택시에 돈을 잔뜩 주고 치토세 공항에 가신 분들도 있었는데, 치토세 공항 내부가 무너지면서 노숙을 하셨을 겁니다.

 

3. 필요한 것, 해야 하는 것이 있으면 호텔 직원에게 묻고나서 해야 한다. 현지인이 무조건 관광객보다 잘 압니다. 무조건 물어봐야 합니다. 절대 그냥 움직이면 안됩니다. 위험해요.

 

이렇게 홋카이도 지진 탈출기를 마무리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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