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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한국을 지킨 사람들 - 물류문화편

2000.3.18.토요일
딴지 말초 영화부 부장대우 한동원

 







지난 28호 "한국을 본의아니게 지킨 사람들" 제1편이 나간 뒤, 수많은 독자덜께서 열화와 같은 멜질주셨다. 감사드린다. 본의아니게 다량의 제보질을 접하게 된 본 기자, 그 드높은 질과 양에 심히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그 중 인천사는 한 독자는 "인천에는 이 지방 전화번호부를 평정하신 가각현이란 토호가 엄존하시는 바, 이는 가갑선 대인의 끗발을 능히 제압하고도 남음이 있다.."라는 제보를 보내왔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전화번호부의 역사는 인천을 중심으로 재편되어야 할 것인바, 실로 중차대한 사건이 아니라 할 수 없다.


하지만 본지가 기어이 그 가치를 발굴해내야 할, 한국을 지킨 거성들은 비단 정보통신계에만 포진되어있지 않다. 역사 모로세우기를 향해 나비처럼 가볍게, 벌처럼 빨리 나아가야 할 본지의 행보에 뒤를 돌아볼 시간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해서 오늘도 기냥 간다. 뒷일은 니덜에게 맡겨두마..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정보들을 쏘아주고 날려주고 배달해주는 정보통신업계가 최고의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 작금의 세태이다.


하지만 그 아무리 정보통신이 발달해도 짜장면을 LAN으로 전송해서 먹을 수는 없는 일, 오늘도 배달의 기수들은 그 수없이 많은 정통텔 벤쳐들의 문을 열어 젖히고 당당히 외친다. "식사왔슴다!"


근래들어 꼬려대앞 벙개에서부터 이창멍까지, 배달의 기수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제고가 이루어져 이들의 직업적 자긍심이 진작된 것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배달의 지연에 의한 음식물의 과도한 냉각, 배달용 2륜 원동기 운전자의 평균연령 감소에 의한 난폭운전, 그에 따른 국물의 용출등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는 범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된 덕분이라 하겠다.


그러나 제 아무리 칼이 빠른 검객이라 하더라도, 그에 걸맞는 보검을 지니지 못하면 제 솜씨를 드러내지 못하는 법. 제 아무리 바람같이 날랜 배달의 기수라도 그의 몸과 하나되어 움직이는 철가방이 없다면 온 몸에 짬뽕 국물을 뒤집어쓰는 치욕을 겪게 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한 이치이다.


허나, 우리는 지금까지 배달의 기수에 대한 과도한 신비주의와 영웅주의에 매몰된 나머지 "배달의 기수"를 "철가방"과 동일시해 그냥 "철가방"이라고 불러버리는 성급한 인격화의 오류를 범해왔다.


무릇, 눈앞에 드러나는 것이 모든 것은 아니다. 배달의 기수의 화려한 액션 뒤에는 흐르는 짬뽕국물에 온 몸이 주황색이 되고, 모서리가 찌그러지는 철가방의 헌신적인 희생이 뒤따랐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식사왔슴다!" 바로 뒤에 따르기 마련인 조흥구 "스르륵(문짝 올라가는 소리)"으로 조용히 주인의 활약에 화답하곤 했다.


주인에게 자신의 이름마저 본의아니게 바쳐가며 묵묵히 명랑물류문화 창달의 길을 걸어간 철가방들의 이 본의아닌 웅대한 기개를 보라. 벌써부터 고개가 숙여질려구 하지 않는가..




이런 연유로, 본 기자는 이 철가방의 재조명에 대한 시대적 요구를 절감, 철가방을 탄생시킴으로써 본의아니게 한국의 물류문화를 지켜나간 영웅 호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가는 장도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런 문헌이나 기록도 남아있지 않은 철가방 탄생의 역사를 더듬어가는 결코 쉽지않은 작업은, 우선 탐문수사로 착수하였다. 그 결과 서울 신당동 황학동 벼룩시장 일대에서 철가방을 공급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 전격 취재에 나섰다.


근 2시간여에 달하는 기록적인 장시간 탐문끝에 본 기자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놀랍게도 철가방은 시장의 포장재료 섹션도 아닌, 물류용품 섹션도 아닌, 둔기 섹션도 아닌, 주방기구 섹션에서 판매된다.

 대부분의 경우, 철가방은 주 판매 종목이 아니다.


 더더군다나 철가방 전문 판매점이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가게들은 적어도 한 개 이상의 철가방을 보유하고 있다.


 대부분 철가방은 행인들의 통행이 가장 빈번한 가게앞에 전시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그렇다. 위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황학동 주방기구 판매 상인들에게 철가방은 수익성 여부를 이미 초월한, 상서로운 존재다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즉, 이곳에서 철가방은, 이미 철가방이 아닌 "철함대장군" "배달여장군"에 다름이 아닌 것이다.














가게 앞마다 모셔져있는 철가방들
- 이곳 황학동에서 철가방은 이미 배달통의 의미를 넘어선다



이러한 존재이니만큼, 철가방에 대해 함부로 언급하는 일이 상인들간에 금기로 자리잡았을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짐작해볼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철가방이 기원을 찾는 본 기자의 탐문에, 모든 상인들은, 사전에 계획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일한 표정("어라, 생긴건 멀쩡한 넘이..")과 동일한 태도("쯔쯔, 젊은 나이에 안됐다..")로 일관하였다.


하지만 무릇 의인에게는 도우는 자가 따르기 마련. 장군보살의 오늘의 운세의 지시대로 서북쪽으로 향한 본 기자는, 얼마 안돼 결정적인 정보를 알려줄 귀인을 만나게 된다. 주방용품 가게 주인 아줌마를 가장한 그 귀인이 넌지시 일러준 곳은, 바로 황학동 일대의 철가방 시장점유율 82%대를 기록하고 있는


"삼 성 공 업 사"이다.


"삼성공업사"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이미 강렬한 짬뽕의 향취를 직감한 본 기자, 드디어 올 것이 왔음을 직감하고, 벅차오르는 가슴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리고 목도한 장엄한 철가방의 교향악..










오오.. 이 철가방들의 압도적인 위용..


그러나, 이곳은 대장정의 종착점이 아니었다. 이곳은 철가방이 전국으로 배급되어 나가는 전초기지일 뿐, 그 탄생과정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철가방의 발원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 발원지는 경기도 광주에 위치하고 있었던 바, 본 기자는 수뇌부 기동취재팀 산하 <긴급출동 24시간 순환대기조>에 파발을 보내 취재차량을 지원받아 즉각 광주로 향하였다.





수많은 철가방의 발원지라는 상서로움을 머금은 삼성공업사의 공장은, 그 정문에 "맹견조심"이라는 팻말을 부착하여 이곳이 일반인들은 범접할 수 없는 본의아닌 성역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팻말을 가장한 그 압도적인 표식도, 물류업계를 수호해 낸 대인을 만난다는 본 기자의 환희를 억누를수는 없었다.


그렇게 꿈꾸듯 들어선 공장 앞 마당. 그곳에는 만면에 온화함을 머금은 물류대인 김 영 태 대인께서 이미 본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독자 제위께 김영태 대인과의 대화를 전하기에 앞서 우선 본기자, 김대인의 온화하고 넉넉한 풍모를 보여드리지 못하는 점에 대해 통석의 념을 표한다. 본 기자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진촬영을 물리치시던 대인의 모습은, 일신의 영달과 안위를 도모하지 않고 물류문화의 정통성 수호만을 필생의 업으로 삼은, 앞서간 모든 지존들의 굳건한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아쉬운 마음 달래고, 김대인과의 대화를 정리하여 수록한다.







 철가방 제작은 언제부터 시작하셨습니까

20년쯤 되었소. 일제 강점 암흑기에 시작된 가마솥 제작 사업이 2대째 물려넘겨지고 있소만.


 배달통이라는 정식 명칭에도 불구하고 철가방이라는 명칭이 더 일반화 되어 있는것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그에 대해 내, 세상에 전할 말 있소. 무릇 철가방의 생명은 바람과도 같은 가벼움에 있는바, 이 가벼움은 알루미늄이라는 재료에서 나오는 것이오. 헌데, 이 알루미늄은 철()이 아니니 비철금속에 속하는 금속인 바, 철가방이라는 명칭은 애초에 잘못된 것이오.


해서 지금의 철가방이라는 명칭은 마땅히 비철가방이라는 명칭으로 교쳐져야 하오. 내, 철가방 명칭 모로 눕히기를 통해 어지럽혀진 강호의 도를 바로 잡길 바랄 뿐이오.


 속세에서 비철가방의 가격은 어느 정도를 호가하는지요


약 7000원에서 12000원 정도요. 이 비철가방 검객들은 대체로 임시로 고용된 자들인 바, 자신의 분신을 때로는 뽀개고, 때로는 버리고 영지를 떠나버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고 들었소. 과연 난세요. 때문에 비철가방의 가격은 어쩔수 없이 저렴해야하는 것이오.


 비철가방 측면의 다이아몬드형 문양은 과연 어떠한 의미인지요


그것은 단순한 장식의 의미에 지나지 않을 것이오. 아무 의미도 없음에 실망이 크셨을 줄로 아오. 허나 우리의 비철가방은 문양 하나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 개선하였소. 즉 그 문양을, 업소명을 적기 위한 사각형 공간으로 바꾸었소. 물론 그 업소명은 적색 페인트와 스프레이로 적히오.











전통문양(좌)과 개량 문양(우)



 그렇다면, 비철가방은 과연 어디에서 왔으며, 앞으로 비철가방의 운명은 어디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까


비철가방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나로서도 알 수 없소. 적어도 중국이나 일본국으로부터 오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오. 비철가방은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물류문화의 정수요. 해서, 내, 앞으로 비철가방을 중국과 일본국에 전파할 뜻을 세우고 있소. 그렇소. 중국집에서 출발한 그 비철가방을 중국으로 다시 흘려보내는 것이오.


알아두시오. 비철가방의 뜻은 그러하오. 그렇듯 원대하오..






오..


이미 독자제위들의 눈에는 본의아닌 감격의 눈물이, 랩을 씌우지 않은 짬뽕과도 같이 흘러넘치고 있으리라..


샘숭같은 넘덜이 대포부터 껌종이까지 아우르는 문어발식 경영으로 온 나라를 말아먹고 있을때, 이넘들과 같은 이름의 "삼성공업사"는 오로지 주방기구, 그 중에서도 철가방의 전통만을 꿋꿋이 지켜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우리나라의 점조직적 식품 물류문화는 본의아니게 그 꽃을 활짝 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먹는게 남는거"라는 고래의 말씀이 전하듯, 그 식품물류가 우리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삼성공업사를 포함한 수많은 배달통 제조업체들은, 각종 식품들을 원활하게 공급받아 최적기에 먹어야 한다는 인간의 기본권 식권食權을 본의아니게 지켜나간 물류문화의 첨병이었던 것이다.












그 첨병 중, 철가방 제작전선의 가장 최전방에서 3년째 묵묵히 자신에 주어진 정도를 걸어나가고 있는 삼성공업사의 윤철호 씨(26).

철가방 제작을 전담하고 있는 윤철호씨는 홀로 하루에 40여개의 철가방을 제작하고 있는 바, 지금까지 그가 탄생시킨 철가방만 어림잡아 3000여개이다.


과연 놀랍지 아니한가..






자, 그러나, 독자제위들이여, 과연 지금은 어떠한가. 묻지마 투기로 흘러들어온 떼돈들을 반짝 아이디어로 긁어와서 외형만을 부풀리는 사이비 닷컴업체들이 정보물류업계에서 판을 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 슬프다. 철가방으로 면면히 이여져오던 배달무퇴의 정신은 모두 어디로 사라지고 일확천금에 눈이 먼 소인 잡배들이 강호를 어지럽히는가.


그러나 언제나 그랬던것처럼, 슬픔은 아직 이르다. 질곡의 역사는 그것이 누려 마땅한 제 몫을 찾아주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본 기자는 모든 종류의 물류업계들을 아우르는 "짜스닥(JJasdaq) 시장"을 신설할 것을 물류증권업계에 제안하는 바이다.


위에도 언급했다시피 정보통신업계 또한 정보를 배달하는 것을 그 업으로 삼고 있으므로, 광의의 물류업계로 편입될 수 있는 바, 짜스닥 시장은 지금 꼬스닥 시장에 상장되어있는 대부분의 정통텔 업체들을 두루 포용해낼 수 있을 것이다. 삼성공업사등의 견실한 배달물류업계의 내공은 지금 꼬스닥에 끼어있는 거품을 일거에 혁파해내리라..


바야흐로, 부당한 거품으로 인해 그 도의가 땅에 떨어진 물류업계의 정도회복과 내실확충을 위한 업체 제위의 결단이 요구되는 시점이 도래하였다. 언제나처럼.


부디 고개 들어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읽어내는 혜안을 가지기를 충심으로 기대하는 바이다. 이상. 



 


- 음지에서 물류업계의 정통성을
본의아니게 수호하고 계시는
모든 분들을 기리며
딴지 말초 영화부 부장대우 한동원
(sixstring@netsg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