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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경계를 뛰어넘은 한국 연극, 에딘버러를 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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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발, <몽연 A Love in Dream> 극단 모시는 사람들

 

2009.9.15.화요일
나나

 

 

공연 시간에 아슬하게 도착했다. 건물 전체가 여러 개의 소극장이었으므로 다른 층에서 표를 점검하는 청년에게 내가 찾는 극장의 위치를 물었다. 내 표를 힐끗 본 그는 이 공연을 이미 봤다면서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런던 특유의 또렷한 악센트로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너무나 아름다운 작품이란 찬사를 내뱉는 그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그 와중에 공연 시간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한국어는 모르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나중엔 슬쩍 울었다.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는 그를 뒤로하고 급하게 한 층을 더 올라갔다.

 

 

이 자리, 이미 주인이 있나요? 재킷을 벗어 올려둔 남자에게 씩씩하게 질문을 던졌다. 무대가 한눈에 잘 보이는 정중앙이었다. 가냘픈 체구의 여배우가 한복을 입은 채 이미 무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흐리고 추운 날씨의 에딘버러에서 다섯 겹씩 겹쳐입은 옷이 무거웠으나 나는 부시럭거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등지고 앉은 가냘픈 어깨위로 내려앉은 고요함, 공연이 시작되기 전의 정적이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배우와 무대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숨죽이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주연배우 박애리의 뒷모습에는 말할 수 없는 힘이 서려 있었다. 

 

꿈속에서의 연애, <몽연>이란 제목대로 연극은 꿈처럼 아름답고, 놀라울 만큼 영리했다. 광목천을 이용해 공간을 나누고 그림자 효과로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두 사람의 처지를 형상화 시킨 연출이 가장 돋보였다. 한국어로 진행되는 연극이지만 자막 없이 중간 중간 영어 대사와 나레이터가 등장했다. 신명나는 자진모리 장단처럼 조금은 숨 가쁘게 흘러가는 연극 속에서 나는 한동안 접하지 못했던 한국적인 것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안동에서 발견된 원이엄마의 사부곡에서 시작된 연극의 모티브처럼, 몽연은 한국적인 것들로 차곡차곡 들어차 있었다. 온통 과자와 빵으로 만들어진 헨젤과 그레텔의 집처럼.

 

 

한국 음식, 제삿상, 전통 혼례, 망자를 떠나보내려는 살풀이 굿, 상여가 지나가는 장례식, 국악이 주도하는 배경 음악, 광목천을 사용한 이승과 저승의 공간 분할, 심금을 울리는 판소리 가락, 관객의 박수를 이끌어낸 유쾌한 각설이 타령, 하다 못해 주연 여배우가 마지막 인사를 하는 순간 조심스럽게 허공을 짚어내던, 오래 한국무용을 해온 사람이 할 수 있는 섬세한 손짓까지 너무나도 한국적인 연극이었다.

 

 

이미 떠난 남편의 부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미망인이 쏟아내는 감정은 얼마나 무겁고도 진한 것인지. 어느 순간 이후부터는 나는 내내 울었다. 이야기 자체가 가져다 주는 안타까움과 슬픔이 나를 압도해왔다. 왜 나는 여기, 당신이 없는 곳에 있는지. 내가 두고 온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사용하는 말과 만나는 사람을 바꾸면서 내가 차갑게 버리고 온 것들이 갑자기 사무치기 시작했다. 명절이면 엄마와 함께 준비하던 음식들, 애끓는 마음으로 할아버지의 상여를 보내며 지폐를 정신없이 꽂았던 순간들, 유난히 국악을 좋아하는 아버지를 따라 지루함을 참고 보았던 판소리 공연의 장면들, 늘 내가 당신을 떠나 먼 곳에 홀로있음을 마음 졸여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종종 극장에서 한국 영화를 보면서는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니, 영화로는 받을 수 없는 농도짙은 감정일지도 모른다. 눈 앞의 무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와 그에 서린 감정은 지금 현재,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이기에 드라마가 허구가 아닌 진실로 느껴지는 것처럼 강하고 통렬했다.

 

 

남편을 기다리며 비단 이불 위를 헤매는 미망인을 보는 내내 나는 결국 격하게 흐느끼고야 말았다. 누군가를 기다려 본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오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려 본적이 있느냐고. 왜 이 오래된 목소리가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제는 다 지난 일이라고, 무심한 듯 담아 두었던 기억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사람을 기다리던 순간의 그 마음이라니. 옆에 앉은 남자가 재킷 주머니를 뒤적여 클리넥스를 내밀었다. 나는 가만히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을 닦았다. 무대 위에서는 성경 구절에서 가져온 모티브가 반복되고 있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그렇게 내가 당신을 낳고.

 

부활과 재생과 환생을 이야기하는 것이 정확히 어느 종교였는가, 하는 구별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곳에는 단지 너와 내가 있었고 너로 하여금 내가 생을 살고 있다는 논리는 어느 종교를 믿느냐를 뛰어넘는 명제였으므로.

 

 

그렇다고 몽연이 마냥 관객의 감정선을 휘젓는 진지하고 무거운 연극이느냐, 그건 아니었다. 신명나는 각설이 타령, 굿판의 광기, 몸을 사리지 않는 배우들의 춤, 뮤지컬 넘버 스타일의 노래들은 투명하게 밝고 신나는 것이었다. 관객들은 정신없이 웃거나 박수치거나 어깨를 들썩이며 즐거워했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오르내리는 것처럼 경쾌한 웃음과 진한 눈물을 모두 터뜨릴 수 있는, 사람의 감정선을 넓고 깊게 건드리는 작품이었다. 이런 깊은 슬픔과 투명한 명랑함까지 한 무대에 녹여내기 위해 무대 위의 배우들과 무대 뒷편에서 얼마나 숱한 땀을 쏟았을까. 이 먼 곳까지 날아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을까 싶어 괜히 마음한 켠이 묵직했다.

 

 

초등학교에 가기 전부터, 부모님 손을 잡고 대학로에서 아동극이며 인형극을 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꾸준히 적지 않은 연극을 보았다. 지금도 여전히 빠리 코메디 프랑세즈와 오페라 극장의 단골 손님인 까다로운 나로서도, 연출이며 연기에 대해서는 더 할말이 없었다. 

 

잘 짜여진 퀼트처럼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구조, 처음과 끝이 맞닿은 채 다시 순환하는 이야기는 남편의 영정사진에서 미망인의 영정사진으로 끝이 났다. 곧 불이 켜졌고 흠뻑 젖은 클리넥스를 손에 쥔 나에게 옆 자리 남자가 괜찮느냐, 고 물었다. 한국어를 모르는 그도 두 번이나 울었다는데 이 연극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내가 부럽단다. 공연이 끝난 직후의 흥분이 묻어있기는 했으나 남자의 목소리는 과장되지 않은 것이었다. 페스티발 오피스의 추천으로 우연히 보게 된 올해 유일한 한국 극단의 연극이 이만큼 훌륭하다는 것이 괜히 뿌듯했다. 

 

 

연극은 끝났다. 꿈속의 연애가 죽음으로써 끝났듯이. 허나 그 끝을 어찌 끝이라 할 수 있을까. 한과 신명, 과거와 현재, 생과 사, 남편과 아내, 당신과 나, 이쪽과 저쪽의 모든 경계를 허물며 무대를 가득 메우는 연극 한편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에너지는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계속 남아있으리라. 언어와 인종과 종교라는 장벽을 허물고 우리를 관통하는 이 순수하고 특별한, 무한하다고 까지 여겨지는 것.  현지 언론의 별 다섯개로도, 리뷰 몇 줄로도 이 에너지를 다 담아낼 수 없었다.

 

같은 공연을 보고 감동받은 사람과 우리는 얼마나 친근하게 가까워 질 수 있나. <몽연>을 보고 감동받은 작가 줄리안과 비평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도널드와 콜린을 우연히 만나 오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선물처럼 다가온 인터뷰, 결코 <몽연>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이어지는 인터뷰를 기다려 주시라.

 

나나(mllenahu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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