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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철학은 왜 필요한가

 

2009.9.16.수요일
위아더월드

 

1. 철학은 왜 필요한가?

 

도대체 삶에 철학이 왜 필요한가?

 

사실 오늘부터는 본론으로 들어가려고 계획했었다. 그런데 앞으로 삶을 바라보는 창이라는 의미에서의 철학을 다루는 이야기를 함께 해보려고 할 텐데, 그 철학이 왜 필요한지부터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재미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를 계속 하다보면 철학이 왜 필요한 지 마지막화 쯤에는 나오겠지만, 끝을 알고 보면 재미없는 반전영화와는 다르게 연재의 마지막화의 내용을 미리 좀 안다고 해서 우리의 인간에 대한 탐구의 재미가 반감되지는 않을 것 같다.

 


반전영화의 대표격인 <식스센스>.
어쩌다 결말을 알아버린 필자는 아직도 보지 못했다.
스포는 좀 자제하자.. ㅠ

 

삶에 철학이 왜 필요한가?

 

일단은 철학이 없기 때문에, 혹은 철학이 부재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두자.

 

그렇다면 현대사회는 진짜 철학이 부재한 사회인가?
만약 그렇다면 왜 지금 세상은 철학이 부재하는데?
왜 사람은 철학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데?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한번 해 보도록 하자.

 

2. 현대사회는 과연 철학이 부재한 사회인가?

 

그리스 아테네의 유적지 벽화엔 이런 낙서가 있다고 한다. 요즘 것들은 참 싸가지가 없다고.. 사실인지 아니면 이런 말들이 대개 그렇듯이 그저 소문에 불과한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들어왔고, 우리 선배들도 또 그 선배의 선배들도 이 말을 계속 들어왔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말이 아테네의 유적지에 꼭 쓰여 있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그 시대 사람들도 이런 말을 하고 살았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든다.

 

철학이 곧 싸가지는 아니지만, 삶을 바라보는 창인 철학에서 자연스레 사람을 대하는 방법인 예의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본다면, 기원전 아테네에서 깊은 한숨과 함께 탄식을 하던 그 시절부터 어쩌면 철학은 없어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철학이 쭈욱 없어왔다 치더라도, 기원전의 그리스 아테네의 부재양상과 2009년의 대한민국의 부재양상이 다를 수는 있는 일이다.

 

말장난은 이만 하도록 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현대사회는 철학이 부재한 사회인가? 아, 물론 가카께서는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을까라고 묻는다면, 독자제위께서는 설치류를 비롯한 포유류의 행동심리에 관한 이야기로 오늘밤 오징어눈 한 접시와 소주 몇 병으로도 밤새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을 자신이 있으시겠지만, 오늘은 좀 자제하도록 하고 인간에 관한 이야기만 하기로 하자. 다시 한 번 물어보자. 현대사회는 철학이 부재한 사회인가? 예? 아님 아니오?

 

다들 아시는 이야기이겠지만 이야기를 계속 하기 위해서 위 질문에 쓰인 철학이란 단어에 대해 한번 정의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위 철학이란 단어는 스피노자나 공자 혹은 허경영의 철학의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우린 저 질문에 대해 쉽게 대답할 수 있다.

 

만약 허경영의 철학이라고 한다면, 허경영의 철학은 서점 철학코너 혹은 이달의 신간코너의 책속에 계속 있다가 허경영에 대해 관심 있는 대한의 청년 현준이 사서 읽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청년 현준이 너무나 부럽게도 한번 보면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 환상의 뇌를 가지고 있어서 허경영 철학을 다 외워버릴 수도 있겠고. 그럼 이 건실하고 영리한 청년 현준은 허경영 철학을 아는 것일까? 우린 이 질문에 쉽게 예라고 하지 못한다.

 

왜냐면, 우리가 허경영의 철학을 안다, 철학이 있다고 할 때는 단순히 허경영의 세계관에 관한 지식을 습득했을 때 쓰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허경영이 바라보는 방법으로 세상을 볼 줄 안다거나, 그것을 실천하는 삶을 살 때 허경영의 철학을 안다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그러니까 아까의 청년 현준이 공중부양은 못하더라도 축지법은 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정도는 낯빛하나 바꾸지 않고 해줘야, 아 이놈이 허경영의 철학을 좀 아는 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허경영을 예로 들어보았지만, 위의 허경영을 공자로 한번 바꿔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자 그럼 여기까지는 허경영 혹은 공자철학으로 이야기를 한정시켜봤는데, 이야기를 해 보니 우리시대에 철학이 있는지 없는지 더 아리송해져만 간다. 예를 들어 아까의 청년 현준이 허경영이 아니고 공자철학을 알고 실천하는 삶까지 산다고 해보자. 그럼 이 청년 현준은 철학이 있는 건가? 이 청년 현준이 설령 건실하다고 하더라도, 이 질문에 예라는 대답이 어울리지는 않는다. 물론 공자의 삶은 타의 모범이 될 만큼 훌륭했고, 사상도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는 놀라운 점이 있었다. 하지만, 고대의 중국과 현대사회는 너무도 다르다. 좋은 술을 꼭 금으로 된 술병에 담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소주를 사발에 말아먹으면 고작 오징어눈 안주로는 술병이 나듯이, 각 시대에는 그 시대에 맞는 철학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시대에 맞는 철학이 과연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따른 답을 한번 내려보고, 우리 시대에 맞는 철학을 바탕으로 철학적 판단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한번 알아본다면, 우리 시대에 철학이 부재하는지, 혹은 부재하지 않는지에 관한 답을 내려 볼 수 있을 것 같다.

 

3. 우리시대에 맞는 철학이 과연 무엇이냐?

 

우리 시대에 있어야 하는 보편타당한 행동원리로서의 철학에 대한 탐구생활을 여기서 전반적으로 하지는 말도록 하자. 그러기엔 지면의 양도 부족하고, 시간의 양도 부족할뿐더러 더더욱 중요하게도 필자의 잠마저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능력도 없고 말이다. 우리는 그중 꼭 있어야 하는 보편타당한 행동원리로서의 철학을 한 가지만 생각해 보도록. 다음을 보자.

 

모든 것은 뿌린 대로 거둔다. 콩심은 데 콩나고, 팥심은 데 팥나는 것은 세상의 진리이다. 사람은 자신이 행동한 대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러니 사랑을 받았다면, 사랑으로 대하라. 증오를 받았다면 증오로서 갚아주어라.

 

확실히 땅에 콩을 심으면 콩이 나긴 한다. 또 누군가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면, 나도 베푸는 것이 세상이 말하는 미덕이고, 또 그런 게 다 사람 사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린 배신을 당했어도 때로 그것을 용서해주기도 한다. 이것도 사람 사는 맛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람에 사랑과 관심을 두어야 할 때는 상대방도 사랑과 관심으로 응해줄 때이다. 따라서 위의 다섯문장이 우리시대의 보편타당한 행동원리는 되지 못할지라도, 한 인간의 인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돈과 권력이라는 물적인 가치의 보상이 되어선 곤란하다라는 어느정도는 권장할만한 행동원리 하나는 얻을 수 있다.

 

위의 다섯 문장을 가지고 모든 상황을 아우르는 보편타당한 행동원리를 만들기는 힘들다. 그래서 위 내용대로 사랑과 관심엔 우리도 할 수 있는 대로 사랑과 관심으로 보답할 수도 있지만, 위 내용과 다르게 설령 한번정도 배신을 당했다 하더라도 이런 저런 상황을 고려해서 싹수가 보이는 놈들은 한번쯤 용서해주고, 술 한 잔 하면서 털어버리기도 하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자, 이정도면 어느 정도는 보편타당한 행동원리 하나가 수면위로 떠오르시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느낀 배신이 사실 그런 게 아니었다면? 배신과 사랑이라는 큰 두 주제로만은 삶을 요약하긴 힘드니 사랑과 배신사이에 있는 수많은 감정단위들을 생각해 보자. 사람이 사람을 마주하면서 드는 수많은 느낌들은 수많은 상황 속에서의 나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내가 배신의 징후라고 읽은 그 사람의 어투 혹은 행동을 내가 잘못 읽은 것이라면?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리가 상대방과 나와의 감정적인 상호작용에 대해서 즉, 우정에 대해서 판단할 때에는 상대방과 마주치면서 드는 느낌들에 기초하는데, 이 느낌이 상대방의 진의를 잘 못 읽은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상호작용, 우정은 진실과 거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만약 상황이 이렇게 전개된다면, 위에서 수면위로 떠오른 보편타당한 행동원리로서의 철학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다시 말하면 더 이상 이 행동원리는 보편타당한 것으로 권장하기 힘들다는 의미에서 철학이 부재한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현대사회의 철학의 부재여부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하기 위해서는 일단 우리 시대에 우리는 타인을,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인식하는가? 우리의 인식은 과연 진실과 가까운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한다.

 


4. 우리 시대에 우리는 타인을,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인식하는가? 우리의 인식은 과연 진실과 가까운가?

 

인간과 세상을 인식하는 데에는 인간의 정신활동이 기초가 되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이 진실과 가까운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해서 인간의 정신활동에 대해 한번 알아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는 프로이트 심리학, 뇌과학, 인지과학의 순으로 알아보도록 하자.

 

5. 인간의 정신활동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우선 프로이트 심리학에서 정신활동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한번 알아보자.

 

자 그럼 첫 번째인 프로이트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여기서 우리는 프로이트 심리학의 전반적인 내용에 관해서 다루지는 말자. 애초에 이야기를 현대사회가 철학이 부재한 사회라면, 그 이유는 타인과 세상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인식도 어쩌면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할 수 있고, 그 인식의 바탕이 되는 정신활동이 과연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라는 식으로 해왔으니, 우린 프로이트의 심리학에서 인간의 정신활동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간단히 추려 알아보도록 하자.

 

 

위 그림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개념을 한번 그림판으로 그려본 것이다. 밑에 있는 빨강색 판이 무의식의 세계이다.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여러 색의 타원들은 무의식의 세계에 존재하는 본능적인 충동들이고. 프로이트보다 훨씬 전의 철학자인 쇼펜하우어와 니체도 타고난 본능적인 충동이 인간에게 있다는 식의 글을 썼지만, 프로이트의 충동이 프로이트 이전의 충돌과 대비되는 점은 프로이트는 충동이 여러 개일 수도 있고, 더군다나 그들의 목적이 다를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다는 점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다시 그림을 보면서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위 무의식의 세계에는 총 일곱 가지의 충동이 있다. 7이라는 숫자는 별 의미 없는 것이니 신경 쓰지 말도록 하자. 그리고 이 충동들은 인간의 성욕에 기초하게 된다. 프로이트 심리학에 있어서 성욕이라는 개념도 상당히 중요한데, 이 개념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 나온다. 프로이트는 충동들의 에너지가 성욕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에너지의 차이가 위 충동의 타원의 크기에 해당한다. 가장 오른쪽에 있는 파랑색 타원이 제일 커 보인다. 이 무의식의 세계에서 다른 충동들과 충돌한 끝에 승리한 파랑색의 충동은 이제 승자가 되어 의식의 수면위로 올라오게 된다.

 

 

 

자, 파랑색 충동이 의식의 세계로 올라온 것을 그린 그림이다. 그런데, 파랑색 충동이 의식의 수면위로 올라오더라도 여전히 많은 충동들은 사라지지 않은 채로 있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의식의 수면 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나머지 충동들은 파랑색 충동과 결합하여 자아라는 포괄적인 통일체가 되게 된다. 비유하자면 봉건중세사회로 비유할 수도 있겠는데, 충동들끼리 무의식에서 부딪혀서 승자가 가려지게 되면, 가장 센 놈이 황제를 하되, 다른 놈들도 없어지지 않고 제후로 남아 하나의 통일된 자아를 형성하게 되고, 패배한 충동들도 언제든지 황제가 될 기회를 노리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까지가 프로이트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무의식과 의식의 개념이다. 이 개념과 억압, 성욕, 쾌락, 죽음의 충동 등의 개념 등을 더해서 인간의 심리를 설명하고 있다. 자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보자. 이번엔 뇌과학이다.

 

이제부터 뇌과학에서 인간의 정신활동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한번 알아보도록 하자.

 

뇌과학에서의 마음을 포함한 모든 정신활동은 뇌와 신경, 호르몬의 복합적인 작용이라고 설명한다. 사랑의 호르몬이라고 불리는 옥시토신에 대해서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보셨을 것이다. 영어단어와 한글단어가 일대일로 해석되지 않듯이, 호르몬과 감정도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기 때문에, 옥시토신을 사랑의 호르몬이라 부르는 것은 조금 어폐가 있다. 하지만 사람이 사랑 혹은 관계를 원할 때, 옥시토신이 뇌에 분비된다는 사실은 인간의 정신활동이 물질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넌지시 일러준다.

 

이렇게 뇌과학에서는 정신활동을 진화의 산물인 뇌가 진화의 과정에서 획득했다고 추정되는 몇 가지 특성들과 호르몬, 신경들 간의 상호작용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뇌과학자들은 정신병을 앓고 있는 환자의 무의식과 꿈, 쾌락을 분석하는 것보다 리튬을 투약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들은 상담치료도 병행하지만, 이들의 심리학적 분석은 프로이트의 그것과 상당히 거리가 멀다. 하지만 뇌과학은 프로이트 심리학을 전면 부정하진 않는다. 프로이트 심리학과 뇌과학의 인간의 정신활동에 대한 개념은 어느 정도 유사한 점이 있다. 뇌과학에서도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란 개념에 해당하는 뇌의 모듈이란 개념이 존재하기도 한다. 뇌과학은 프로이트 심리학을 일부분 부정하기도 하지만, 프로이트 심리학의 의학적, 과학적 설명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자, 이정도만 해도 뇌과학과 프로이트 심리학이 인간의 정신활동에 대해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는지 정도는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다. 프로이트 심리학에서 인간의 정신활동을 무의식과 의식이라는 비물질적인 소재를 가지고 설명한다면, 뇌과학에서는 뇌와 호르몬, 신경이라는 좀더 물질적인 측면에서 정신활동을 설명하고 있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도록 하자.

 

마지막으로 인지과학에서 인간의 정신활동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한번 알아보자.

 

뇌과학과 프로이트 심리학이 인간의 정신활동에 대해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지만 완전히 다른 말을 하고 있지는 않듯이, 인지과학 역시 뇌과학의 설명과 정반대의 설명을 하고 있지는 한다. 다만 뇌과학은 상당히 인간의 정신활동에 대해서 깊은 혹은 진실에 가까운 설명을 하고 있지만, 정신활동이라는 개념을 더 확장할 필요가 있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정신활동은 뇌에서 시작하지만, 과연 뇌에서 머무를까? 란 물음이 인지과학이 시작하는 물음이다. 뇌과학에서는 인간의 정신활동이 뇌와 신경, 호르몬의 복합적인 작용으로 만들어진다고 했으니, 인간의 마음이란 머리카락과 외피, 두개골의 안쪽에 있는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인지과학자들은 인간의 정신활동은 신체의 경계선을 벗어나 멀리 확장된다고 생각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마음이 더 넓어진다고? 뭐 넓어진다고 하니까 뭐 흐뭇하긴 하다만, 뭔가 어째 깨림찍하다. 마음이 나를 벗어난다고? 인지과학의 이 얼핏보면 이해되지 않는 설명을 좀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앤디 클라크가 내놓은 마인드웨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정신활동은 뇌에서 혹은 무의식이나 의식에서 시작할 수는 있지만, 결국 환경과 맞닥뜨리게 된다. 프로이트 심리학이나 뇌과학에서는 환경을 정신활동의 에너지를 일으키는 대상으로 보지만, 인지과학에서는 환경이 정신활동과 반응해 정신활동이 달라진다고 표현하고 있다. 마치 인터넷 브라우저로 익스플로러를 쓸 수도 있고, 크롬이나 파이어폭스를 쓸 수도 있듯이, 정신활동도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말 그대로 마음은 소프트웨어 즉, 마인드웨어라는 말이다.

 

예를 한번 들어보자. 우리의 환경을 둘러보면 편리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환경기술이 있다. 컴퓨터를 켜보자. 우리는 컴퓨터의 CPU가 어떤 방식으로 정보를 처리하는지 혹은 내가 어떤 명령어를 내려야 하드디스크에 기록된 야동 사이트 방문 기록이 삭제되는지 알지 못하더라도, 야동을 보거나 야설을 읽는데 그리고 엄마 몰래 이 모든 기록을 지우는 데에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이후 GUI)라고 부르는 이 컴퓨터 작동 방법은 이렇게 우리의 생활을 더욱 아늑하게 만들어 주었다.

 

우리가 따로 컴퓨터 언어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이 아늑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GUI의 편리하기 때문인데, 도대체 왜 우리에게 GUI가 편리한 거냐? 그건 GUI가 우리의 세상에 대한 인식방법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영화 <매트릭스>와 현실 그리고 GUI를 한번 생각해 보자.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인 네오가 세상을 보는 방식
모든 정보가 숫자 0과 1로 나온다.

 

위 그림과 같이 영화 <매트릭스>에서 각성한 네오는 인공지능 컴퓨터들이 제공하는 GUI를 뛰어 넘어서 0과 1로 표시되는 가상의 진실을 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우린 저 정보로는 어떤 것도 알 수 없다. 숫자 0과 1로 표시된 얼핏 의미 없어 보이는 숫자의 나열에서 우린 저 세 사람 중 제일 왼쪽 사람의 눈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지 알 수 없다. 그 이유는 우리가 진화의 과정에서 얻은 세상을 인식하는 능력은 0과 1의 반복으로 이루어지는 숫자를 해석하는 능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시광선의 반사정도와 20 Hz-20Khz사이의 공기의 울림을 가지고 세상을 인식한다.

 

그럼 우리가 이렇게 진화한 이유는? 당연히 이렇게 진화한 종이 살아남았기 때문 혹은 이런 방향으로 진화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이렇게 생겼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은 대답이다. 왜냐면 애초에 세상이 이렇게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박쥐가 듣는 세상과 우리가 보는 세상은 차이가 있다. 또 본질적으로 세상은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다. 

 

여기서 왜 GUI가 우리에게 더 편리한 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컴퓨터 언어보다 그림으로 표현한 모니터를 이해하는 것이 더 쉽게 진화해왔다. 다시말해서 GUI가 우리의 본능에 좀 더 익숙한 형식이다.

 

그런데, 여기서 인지과학자들은 사회 환경이 GUI처럼 우리의 본능을 배려해주게 되면, 우리의 정신활동도 이 배려의 방법과 강도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한다. 어쩌면 우리는 GUI를 이용하지 않았던 세대들, 삐삐삐삐삐하는 신호 소리와 함께 시작하는 pc통신세대들보다 더욱 본능을 배려하는 기술환경속에 삶으로서 본능을 방치하는 혹은 그대로 내비치는 방향으로 정신활동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한 해석은 사실은 아주 많이 무리가 있는 해석이다. 하지만 인지과학자들이 인간의 정신활동에 대해 어떤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는지 정도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실제 인지과학자들은 환경과 반응하여 변하는 인간의 정신활동에 대해 위와 같은 허접한 필자의 해석 식으로 일관하는 것이 아니고, 많은 실험과 관찰을 통해 증명하려는 시도들을 하고 있다.

 

다시 4. 우리 시대에 우리는 타인을,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인식하는가? 우리의 인식은 과연 진실과 가까운가?

 

인간의 정신활동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 지 프로이트 심리학, 뇌과학, 인지과학에 대해서 대략 살펴보았다. 어떤 설명이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하시는가? 이에 대한 판단은 각자 알아서들 하시기 바란다. 다만 우리가 궁금한 우리의 인식은 과연 진실과 가까운가? 라는 질문은 이제 어느 정도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의 정신활동이 프로이트 심리학에서 설명하는 식으로 이루어지든, 뇌과학이든 인지과학이든 관계없이 우리는 우리의 정신활동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성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원인이 무의식에 아직 남아있는 성욕과 충동의 충돌이건, 도파민 혹은 세로토닌 등의 뇌에 존재하는 호르몬의 비정상적 작용이건, 우리의 언어 혹은 기술이 존재하는 환경과 뇌와의 상호작용에 있건 말이다.

 

우리의 정신활동이 이성적이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의 세상과 사람에 대한 인식 역시 이성적이지 않을 수 있다. 혹은 진실에 가깝지 않을 수 있다.

 

다시 3. 우리시대에 맞는 철학이 과연 무엇이냐?

 

우리의 세상과 사람에 대한 인식이 이성적이지 않다고 가정한다면, 우리시대의 행동원리로서의 철학은 더 이상 제구실을 못한다는 의미에서, 보편적인 행동원리로서 권장하기 힘들다는 의미에서 더 이상 철학이라고 부르기 힘들다.

 

따라서 우리시대에 맞는 철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한마디 혹은 책 몇 권으로 답하긴 힘들겠지만, 우리의 권장할만한 행동원리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선 우리가 가진 철학이 적어도 세상과 사람을 적절하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정도는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2. 현대사회는 과연 철학이 부재한 사회인가?

 

과연 현대사회가 철학이 부재한 사회일까? 현대사회는 너무나 광범위하니 조금만 축소시켜보자. 현대한국사회는 철학이 부재한 사회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도 현대 한국사회에서 우리의 사람과 세상에 대한 현실인식이 잘못되었다면, 혹은 정확한 현실인식 아래서 상황을 왜곡하려는 시도들이 많다면, 현대 한국사회는 철학이 부재한 사회라는 식으로 답을 할 수 있겠지만, 굳이 이렇게 이런 식의 대답을 하지 않더라도 될 것 같다. 다시 한 번 물어보자. 현대 한국사회는 철학이 부재한 사회인가?

 

불행히도 그렇다. 씨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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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1. 철학은 왜 필요한가?

 

드디어 우리가 최초에 던져본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돌아왔다. 우리에게 왜 철학이 필요한가? 이제까지 해온 이야기를 토대로 하자면, 우리가 마주치는 상황들 그리고 마주하는 사람들에 대해 적절한 감정반응을 할 수 있기 위해서다. 그전에 정확한 현실 인식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말이다. 김대중은 담벼락에라도 대고 욕하라고 했다. 하지만 욕이라도 하려고 해도 뭘 욕해야 하는지, 얼마나 욕해야 하는지 정도는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왜 철학이 필요하냐고?

 

우주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순수한 지적 호기심에서 출발하여 때로는 그 어떤 문학작품보다도 아름답게 인간과 삶, 자연에 대해 노래했고,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 아래 더욱 인간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었던 철학은 이제 위대한 철학자들의 한때는 고귀했던 정신에 너무나 부끄럽게도, 욕이라도 하기 위해 필요하다. 욕이라도.

 

위아더월드(we_are_the_world@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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