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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완용에게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
- 정운찬 총리 내정에 부쳐

 

2009.9.17.목요일
임종금

 

이완용에 대해서 다루고 싶다. 한국사 최강의 개새끼라 불릴 수 있는 이완용을 다루니 독자 여러분들은 혹시 의구심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이완용의 숨겨진 진실을 통해서 이완용에 대해서 옹호(?)하거나 변호 하려는 글을 쓰려는 거 아니냐? 그런 거 아니다. 그리고 아무리 지랄같이 숨겨진 진실 찾아봐야 변호할 껀덕지는 조금도 없는 인간이다.

 

그렇지만 그 시대와 그의 논리를 잘 살펴보면서 무언가 하나 감이 오는 것이 있어 이 글을 쓴다. (어이쿠, 저기 또 돌 들고 있는 사람 있네. 시대적 상황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간접적으로라도 변호할 마음 없으니 그냥 보시라.)

 

 

이완용을 어떻게 평가하던 그 시대를 빼놓고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일단 당시 시대적 상황부터 짚고 넘어가자.

 

1876년, 조선은 개항을 하게 된다. 물론 일본에 의한 강제적인 개항이었고,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외세에 침략의 길을 활짝 터주었다. 그 와중에 정권을 잡은 명성황후와 민씨척족들은 오로지 청나라에만 기대고 있을 뿐, 이도저도 아닌 상황을 연출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양쪽으로부터 쌍으로 귀싸대기를 얻어 맞게 되는데, 이것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다.

 

부풀은 귀싸대기를 거머쥐고 조선 정부는 더욱 청나라에 의존하게 되어, 청나라가 내정간섭을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한편 일본은 개화파들을 차근차근 지원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시킴으로써 개화파들을 친일세력으로 서서히 길들여 나간다. 또한 당장 조선의 정치적인 영향력 보다는 경제적으로 파고들어서 메이지 유신 이후 산업화의 과정에서 일어난 각종 모순과 부조리를 조선에서의 경제적 침탈로 해결하려 하였다.

 

그리고 1894년이 밝았다. 민씨일족의 세도정치와 일본의 경제수탈에 놓여 있던 농민들은 동학농민운동(갑오농민전쟁)을 일으켰고, 일본과 청나라는 이를 기회로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청일전쟁을 벌였다. 또한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경북궁 쿠데타를 일으키고, 키워놓았던 개화파들에게 정권을 넘긴다. 한편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동학군을 격파하고 전라도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을 학살함으로써 이제 조선을 완전히 지배하려는 찰나, 다 된 밥에 밥숟가락을 얹으려는 일본에게 러시아라는 놈이 포크를 들이댄다. 명성황후는 옳타구나 싶어 러시아에 기대려 하다가 일본에게 살해당했고, 고종 황제는 그대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튀었다.

 

많은 사람들의 요구로 고종 황제는 환궁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는 쇼를 벌이며 자주독립을 애써 외쳤다. 그리고 이면에서는 개화파들과 조금 세상 물정에 눈 뜬 사람들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여는 등 대한제국의 개혁을 요구하지만, 고종 황제는 개무시하고 전제군주정을 확고히 하였다.

 

일본과 러시아가 서로 노려보는 사이, 고종 황제는 조금 운신의 폭이 생겼다. 그 사이 대한제국의 헌법도 반포하고, 군대도 약간 보강하고, 산업도 발전시키려 해보고, 서양의 신식 문물인 전화기, 전차, 백열등 등을 들여와서 근대화를 추구하려 했으나, 실효성은 떨어졌다. 그저 문물 몇 개 들여온다고 해서 근대화가 자동으로 되는 법은 아니다.

 

눈치만 보던 러시아와 일본은 드디어 쌈박질에 들어가게 되었고, 일본은 이때부터는 아예 대놓고 각종 조약을 강요하고, 내정간섭을 시작했다. 러시아와의 쌈박질에서 몇 번의 행운과 치밀한 전략과 영국, 미국의 지원으로 승리한 일본은 이제 대놓고 조선, 아니 대한제국을 집어삼키려 한다.

 

그러나 500년 먹은 나라를 바로 집어삼키기는 쉽지 않다. 이 때, 이완용을 위시한 친일파들을 적극적으로 풀어서 한반도 점령을 시도한다.

 

그런데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었다. 해산된 대한제국 군대와 의병들이 일어나 일본을 위협한 것이다. 대토벌 작전을 펼친 끝에 의병들을 진압하고, 드디어 한반도를 집어 삼키게 된다.

 

이 격동의 시대를 이완용은 그대로 관통하면서 살아왔다. 이완용의 머리에 피가 마를 무렵인 20살에 조선은 개항을 했으며, 한창 활발하게 설칠 나이인 38살에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개혁,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그는 외세의 침략에 점점이 스러져가는 조선과 그 조선이 500년 동안 쌓아놓았던 봉건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살았다. 그 결과 그는 몇 가지 소신이 생겼고, 그 소신들로 인해서 이완용은 매국의 길을 가게 되었다. 오늘 그걸 좀 살펴볼 필요가 있어서 이 글을 쓴다.

 

나라 팔아먹은 개새끼 소신은 개뿔도 알고 넘어갈 필요가 없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으나, 오늘날에 시사하는 점이 좀 있다. 그냥 좀 참고 살펴보자.

 

이완용의 첫 번째 소신.

 

이완용의 첫 번째 소신은 바로 실리추구이다. 그는 이게 자기의 이익에 부합 한다고 생각하면 바로 새로운 길로 갈아탔다. 우리가 충분히 짐작하는 대로 그는 카멜레온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 격변의 시대에 카멜레온이 된다는 것은 그저 몸만 바꿔탄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이완용은 개항에 반대하던 위정척사파이면서 또 개화파와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 또 임금에게 충성하는 존왕주의자이면서 친일파이며, 또 친미파이며, 또 친러파였다.

 

 

카멜레온이 되려면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어떤 세력이나 사상에 적당히 물들어야지, 그것에 환장해서 몰입을 해 버리면 이런 변신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완용은 특별히 어떤 계파로 구분짓지 못한다. 이완용은 어린 시절에는 몰락한 양반집 가문에서 태어나 20대에는 갑신정변을 비판하는 위정척사계열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해서 위정척사에 완전히 몸을 담근 것은 아니고, 적당히 몸을 담궜다. 이후 세상이 바뀌자 육영학교에 들어가고 미국 문물을 또 적당히 담궜다. 이제는 개화파들과 어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개화파들과 어울리면서 정동구락부라는 클럽에서 친러세력과 친미세력과도 교류를 맺고, 또 독립협회 창설에도 큰 기여를 해서 당시 진보적 클럽과도 인연을 맺게 된다. 정동구락부 사람들의 힘을 빌어 아관파천을 이끌었으며, 고종 황제의 곁에서 존왕주의자로 변신한다. 고종 황제는 그를 지극히 아꼈다. 당시에는 러시아 공사관에 있었으니 당연히 친러세력이었다. 그러다 대한제국 건국 이후 친미세력이 되었고, 다시 친일세력으로 변신한다. 당시 그의 심정을 잘 나타낸 글이 있어 옮겨 본다.

 

나는 20세 때에 한학을 숭상하고 산림학에 종사했으나 갑오경장(갑오개혁)이 운의외(運意外)로 도(道)를 존(尊)하고 유(儒)를 숭상하는 것은 시대에 뒤지고 외국과의 교통이 확장됨에 따라 서양과의 교제가 매우 팽창했기 때문에  지난날의  구업을  교수(膠守)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서양 학문으로 전환하기 위해 하루 아침에 도복을 벗고 머리를 깎고 구주(歐洲)에 건넜다.

 

최초 25세 무렵에는 종래 조선인이 목적으로 하는 문과에 합격했다. 당시 미국과의 교제가 점차 긴요한 까닭에 그때 신설된 육영공원에 입학했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갑오경장 후 일미년에 이르러서는 아관파천 사건으로 인해 노당(露黨. 친러파)의 호칭을 얻었고, 그 후 일로전쟁(러일전쟁)이 끝날 때에 이에 전환하여 일파(日派. 친일파)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는 때에 따라 적당함(宜)을 따르는(制) 것일 뿐 다른 길이 없다. 무릇 천도(天道)에 춘하추동이 있으니 이를 변역(變易)이라 한다. 인사(人事)에 동서남북이 있으니 이것 역시 변역이라 한다. 천도 인사가 때에 따라 변역하지 않으면 이를 실리를 잃고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게 될 것이다

 

이완용의 실리추구는 바로 변신의 논리이다. 이완용은 변신하지 못하면 실리를 얻을 수 없다고 믿었다. 문제는 이 실리추구가 바로 그의 국정철학(?)에도 반영된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과 적극적인 관계를 가져야 하며 그것이 바로 이익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은 조선을 개발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의지를 잘 이용하면 조선에게 큰 이익이 된다는 것이다. 일본과 친하게 지내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그의 눈에 일본에 저항하는 이들은 약간 미친놈처럼 보였나 보다. 3.1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경성일보에 쓴 글이다.

 

제군,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면 깨달아라. 제군, 미친 이가 아니라면 깨어나라. 잘 살다가 죽는 것이 사람의 상정이다. 제군은 왜 죽음을 스스로 택해서 호생(好生)의 덕혜에 복종하지 호랑이 수염을 건드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면 일본이 지배하는 것이 뭐가 문제냐는 것이다. 괜히 자존심 내세우다가 호랑이 털을 건드려서 인간의 가장 중요한 생명을 버리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내용이다. 요샛말로 하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왜 지랄해서 목숨을 갖다 버리냐?는 것이다.

 

이완용의 두 번째 소신.

 

이완용의 두 번째 소신은 바로 경쟁을 강조하는 것이다. 자, 생각해보자. 경쟁은 불가피하게 승자와 패자로 갈리게 된다. 불평등이 일어나게 되고 차별이 일어난다. 그래서 이 경쟁을 불편하게 여기고 다 같이 좀 살자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누구는 원래 세상사 그런 거 아녀? 짐승들도 경쟁하잖어?라고 경쟁논리를 인정하고 옹호하기도 한다.

 

이완용은 당연히 후자의 생각이었다. 그의 생각을 잘 나타낸 글을 살펴보자.

 

학도들을 권면하여 가라대 세상에 사람이 살려면 승벽(이기려는 집착)이 있어야 그 사람이  언제든지 남보다 나가는 때가 있는지라. 오늘 달음박질 내기하는 것이 경계가 세계에서 사는 경계와 같은지라. 누구든지 힘을 다하여 달음질을  하여 기어이 붉은 기 먼저 얻으려  하는 사람은 세상에 남에게 지지 아니 하려는 것을 보이는 것이요...(중략) 이 승벽을 가지고 백사(모든 일)를 행하면 언제든지 이기는 때가 있으리라 하며(독립신문, 1897. 4. 15)

 

세계사에 두 본보기가 있으니 조선 사람은 둘 중에 하나를 뽑아 미국같이 독립이 되어야 세계에 제일 부강한 나라가 되든지 폴란드 같이 망하든지 좌우간에 사람하기에 있는지라, 조선 사람들은 미국같이 되기를 바라노라(독립신문, 1896. 11. 23).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독하게 이기려 마음을 먹고, 지랄같이 경쟁해서 이기면 그만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좌우간에 미국처럼 되기를 바란다.라는 그의 말은 그 속에 수많은 것이 생략되어 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규범이나 원칙이나 윤리는 개무시 해도 좋다는 것이 이 문장 속에 숨어 있다.

 

이완용의 이 같은 경쟁의 논리는 당시 친일 개화파들도 단골로 쓰던 논리다. 당시 조선의 상황에서 경쟁을 통해 미국과 같은 강대국이 되는 방법은 단순히 외세와 투쟁으로는 택도 없다는 것이 친일 개화파들의 논리였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산업을 발달시키고, 열심히 공부해서 우리의 실력을 키우면 언젠가는 경쟁에서 이길 날이 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독립운동이니 자주독립이니 개소리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탈정치화를 주문한 것이다. 어디서 정말 많이 들어본 소리다.

 

이완용의 세 번째 소신.

 

이완용의 세 번째 소신은 질서와 평화 중시라고 볼 수 있다. 이건 나쁘지 않은 것 같다고 여기시는 분들 있으실 것이다. 당연히 겉으로만 보기에는 좋은 말들이다. 이완용은 우리 상식과는 어울리지 않게 동양평화론이라는 책도 쓴 사람이다.

 

질서라는 단어의 이면에는 대세의 순종이라는 어구가 생략되어 있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연과 세계의 대세에 맞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대한제국)이 일본과 하나가 되는 것은 당연한 시대적 대세이며, 동양은 일본의 선의를 받아서 함께 힘을 합쳐야만 서양세력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서양의 침략이라는 폭력을 상쇄하고 평화를 낳을 수 있다는 논리다.

 

이완용의 변을 직접 들어보자.

 

도대체 조선과 일본이 상고 이래 동종동족, 동종동근인 것은 역사에 있어서의 사실(史實)인 바 일한 병합은 당시에 있어 역사적 자연의 운명과 세계적인 대세와도 순리하고, 동양평화를 확보하는 것은 조선민족의 유일한 길이라고 확담할 수 있는 것이다. (중략) 우리 조선은 국제경쟁이 과격한 때에 있어서도 일본과 함께 일국을 완전히 유지시킬 수 있었다는 것은 제군이 아는 바이다. 오늘과 같은 전세계가 개조하는 시대에 즈음하여 우리들은 일만여천방리에 지나지 않는 강토와 모든 정도가 부족한(수준 낮은) 천여백만의 인구를 갖고서 독립을 고창(高唱)한다는 것은 실로 허망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제군이 세계의 대세를 통해(通解)하지 않고 오직 감정적으로 일시에 틈발(闖發)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제군들이여 그것은 우리들이 기피할 수 없는 사실인 바 따라서 나는 생각건대 그 경고문 중 무슨 이유로 생(生)중에 사(死)를 구하느냐고 말하고 싶다. 동양평화의 대 이상을 해결하지 않은 채 어부지리를 획득코자 하는 무리들을 계고(戒告)하는 바이다. 내지(일본)와 조선과의 사이에는 하늘 뜻에 기인하는 공동 존립과 공동 이해가 있어 단연코 위 두 가지의 분립을 허용할 수 없는 바이며, 우리 조선인들이 일한 병합의 의의와 그 정신이 유효하게 실현되는 방면을 향해 노력한다는 것은 우리 장래의 행복을 도계(圖計)하는 최선의 양책(良策)임을 마음 속 깊이 믿지 않으면 안 된다.

 

위 내용은 3.1 운동에 대해 격분한 이완용이 우리민족에게 선언한 경고문으로 일본조차 그 내용에 고개를 내저을 정도였다. 또한 그는 평화를 강조하면서 독립시위를 하는 이들이나, 독립군을 이끄는 사람들을 매우 싫어했다. 그에게는 이런 이들은 폭력으로 대세를 거스르고 질서를 흩트려 동양평화의 대세를 무너뜨리려는 자에 불과했다. 그러면서 이완용은 구조적 폭력인 일제에 의한 착취에 대해서는 조금도 인식하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그건 자기가 알아서 실리에 맞게, 경쟁력을 갖춰서 살아남는 것이 핵심이지, 착취를 하니 마니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개화파

 

그의 이런 생각은 잠시 정신나간 또라이의 생각에 불과했을까? 그의 생각을 받쳐주는 세력들이 없었다면, 그의 생각은 공상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총리대신까지 오르게 된다. 그의 생각이 일정한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그 공감대를 형성해 준 세력이 바로 개화파들이었다.

 


초대 주미 공사관 일행(앞줄 좌부터: 이상재. 이완용, 박정양, 이하영, 이재연)
- 출처 :
www.koamhistory.com

 

개화파들은 봉건체제를 억수로 싫어했다. 그들의 소원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봉건체제 해체에 있었다. 그 봉건체제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뭔 짓이라도 하고 싶었다. 설령 외세를 끌어들여서라도 말이다. 그러니 외세에 대한 경계심은 상당히 약했다.

 

그러던 차에 일본이 나타났다. 솔직히 개화파들의 입장에서 서양인들은 무언가 거리감이 있었고, 도저히 그들처럼 될 자신은 없었다. 봉건체제 해체는 서양놈들만 할 수 있는 일인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이 해냈다! 우리 동양도 봉건체제를 해체할 수 있구나! 이들은 희망을 가졌다. "도대체 일본이 어떻게 했길래? 일본에 가고 싶어 미치겠다." 대개 개화파들은 이런 이유로 일본에 유학을 가게 된다. 일본은 이들 유학생을 적극적으로 유치하였고, 그들은 그곳에서 일본에 대한 경외심을 느꼈다. 그리고 귀국 후 개화문물을 접했다는 이유로 등용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개화정책들은 그렇게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그들은 씨바, 조선민족은 원래 이따군가?라는 민족열등론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되자 점점 더 일본에 의지하게 되고, 어떻게 해서라도 개화만 이루면 그만이라는 강박관념에 빠지게 된다. 그러던 차에 이완용의 논리들은 그들에게 일말의 비판의식도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친일로 빠져들게 된다.

 

이완용의 소신은 반역의 논리였고, 매국의 논리였다. 그러나 그 시대적 상황을 잘 타고 그 논리는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당대 개화파 지식인들은 그 논리에 대개 공감했고, 설령 공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딱히 반박하지 못해서 머뭇거리다가 일제강점기를 맞이했다. 장지연의 시일야 방성대곡을 보면 처음 이토 히로부미가 올 때는 모두가 반겼다.라고 적고 있다. 이것이 당대 지식인들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우리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정운찬 전 총장의 총리 내정이었다. 실리를 위해서라면 적당히 타협할 줄 아는 정운찬 총장, 공부 못하는 학생들은 솎아내는 것이 교육철학이라는 정운찬 총장, 대학 간의 경쟁을 통해 구조조정을 하고 못난 대학은 도태시켜야 한다는 정운찬 총장, 우리 대학이 좋은 애들 뽑기 위해서 고교 등급제를 하건 초고난도 논술문제를 내건 무슨 상관이냐고 하던 정운찬 총장의 그 소신의 뿌리를 찾고 싶었다.

 

 

비단 정운찬 총장 뿐인가? 미국처럼만 하면 우린 진정 선진국이라 믿는 한미 FTA의 김현종 유엔 대사를 보면, 일본처럼만 하면 된다고 믿는 그래서 아예 나라를 일본에 넘겨서라도 문명개화를 이루고 싶었던 친일 개화파들과 뭐가 다른가?

 

우리네 지식인 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 속에서도 이완용의 논리와 비슷한 논리를 한 없이 듣고 있다. 이것들의 뿌리를 밝히고 싶었다. 물론 우리 주변에서 듣는 논리들은 이완용과는 다른 배경에서 갖춰졌다. 이완용 논리와 비슷한 논리 외에는 모두 빨갱이었던 시절, 빨갱이로 몰려 100만~200만이 속절없이 죽는 꼴을 봐야 했던 우리 부모는 겁이 나서라도 그 논리를 읊어야 했고, 그렇게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우리에게 강요할 수 밖에 없었다. 이완용과 비슷한 논리를 주장한다고 해서 이완용과 비슷한 놈으로 몰아가고 싶지는 않다. 구한 말과 냉전 시대는 구조적으로 다른 시대였기 때문이다. 비록 겉으로는 비슷한 논리로 귀결되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이완용을 보면서 우리의 거울로 살펴보고자 함이다. 우리는 부끄러운 역사를 마주하면 그저 박살내려고 하거나 외면하려고 한다. 그 새낀 개새끼다. 여기서 역사공부가 끝이다. 역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끊임없이 살펴보고, 또 역사와 우리 모두 비판해 가면서 성찰하는 과정이다.

 

자신의 양심이나 철학과는 상관없이 실리를 위해서 변신을 하면 된다. 경쟁을 하다보면 불평등이 생기고, 그건 인지상정이다. 경쟁을 하고 실리를 얻기 위해서 다소간의 규범이나 원칙이나 윤리를 좀 부수기도 하지만, 이것 또한 인지상정이다. 질서와 대세에 순응해야 하고, 그것에 맞선다는 이유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볼썽사나운 짓이다. 외부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구조적으로 발생하는 더 큰 폭력은 내가 알 바 아니다. 이런 이완용의 생각들이 만연한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의 국민이 과연 구한 말로 돌아간다면 이완용처럼 행동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구한 말에는 위정척사파라는 꼴통 영감쟁이들이 그래도 모든 것을 걸고 의병전쟁을 벌이며 싸웠다. 그들은 살아남는 것 보다 민족적 자부심과 유교적 가치를 지키는 것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세와 끊임없이 싸웠다. 지금 우리에게 그런 세력이 남아 있는가?

 

이완용이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 앞선 논리로 자신을 합리화 한다면 우리는 그를 쳐 죽일 수 있을까? 물론 그래도 니놈은 니 사익을 위해서 민족을 팔아먹었잖아라면서 돌로 패죽일 수는 있겠지만 은근히 찜찜할 것이다.

 

그 찜찜함을 털어버리는 날, 이완용에게서 자유로운 시대를 맞이할 것이다. 대한민국에 그 날이 과연 올까?

 

임종금(lim149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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