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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혈연

 

우리는 살면서 많은 빌런을 만난다. 쉬는 날 카톡 보내는 상사, 꼭두새벽부터 쿵쾅 뛰어다니는 윗집, 내 플레이스테이션을 빌려 가 팔아먹은 친구. 이 정도는 소소하다. 문제는 지독한 빌런. 심지어 그 사람이 내 가족이라면 상황이 다르다. 인생이 상당히 고달프고 외로워진다.

 

아버지는 내 인생 최대 빌런이었다. 10대에는 두려웠고, 2-30대에는 증오했다. 그 무렵, 난 마음의 문을 닫았다. 이후로 아버지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본 기억이 없다. 이제 내 나이 40줄. 원망의 감정은 여전하다. 하지만 이제 아버지 대신 한 인간의 영역에서, 그는 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나. 그 인생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이쯤 되면 눈치채시겠지만 나는 관점에 따라 제법 불행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렇다고 불행 포르노를 쓰려는 것도, 빈곤 포르노를 쓰려는 것도 아니다. 세상엔 많은 언론사가 있고 많은 정치인이 있지만, 이제는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버린 자들에게, 우리의 세상을 조금이나마 이해시켜주고 싶다. 그래야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질 것 같으니까.

 

나의 이 소박한 이야기가, 꽤나 독특한 근현대사를 가진 한국에서, 한국인의 가난과 불행을 이해하는데 아주 조금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럼 조금이나마 공감하고, 위로받을 분이 있기를 바라며, 이야기는, 계속.

 

우리 땐 우유 배급이 있었습니다

 

제티 하나로 인기쟁이되던 시절,, 우유당번 우유 가져와! 1993년 우유급식 (+삶은 계란을 준다고.._) _ 옛날티브이 고전영상 옛날영상 0-13 screenshot.png

출처 - <MBC강원영동>

 

사람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 공감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어렴풋이 그 감정을 짐작하는 것일 뿐. 국민학교 3학년 때 일이다(글타. 난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우리 때는 우유 배급을 신청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루에 한 팩씩 나눠주었다. 일주일에 한 번(수요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초코우유나 딸기우유가 나오는 날이면 모두 입을 쪽쪽 거리며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그 자리에서 하나를 비워냈다.

 

학교에서 발주를 잘못 넣은 날이면 일주일 내내 흰 우유를 마셔야 하는 날도 있었다. 집안 형편이 좋았던 아이들은 가방에서 제티, 네스퀵 같은 초코가루를 꺼내 무심하게 초코우유를 만들어 마셨다.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초코가루 한 스푼이라도 얻어 보려고 부잣집 친구 주변에 모여 갖은 애교를 떨곤 했다.

 

미선이가 똥을 쌌습니다 

 

3교시가 끝나면 당번 두 명은 우유창고로 향했다. 초록색 플라스틱 우유 박스에 학급 인원 수만큼 우유가 들어있는지 세어보고 갯수가 맞으면 상자를 들고 오는 것이 당번의 업무. 우유 박스가 교실에 도착하면 앞줄부터 자리에서 일어나 우유를 하나씩 챙겼다.

 

우유 배급 직후 4교시 수업 시간이었다. 한창 수업 진행 중, 교실에서 이상한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악취에 선생님은 분필을 내려놓고, 아이들이 동요하지 않게 조심스레 교실을 살폈다.

 

한 여자아이가 "으악!" 소리를 질렀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 끄트머리로 뛰어갔다.

 

"선생님!! 미선이 똥 쌌어요!!!"

 

한 여자아이에게 모든 시선이 쏠렸다. 귀여운 외모로 남자아이들은 물론 여자아이들에게까지 인기가 많던 아이였다(나도 그 아이를 좋아했다... 발그레...).

 

새하얗게 질린 미선이 얼굴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선생님이 말했다. 

 

"전부 교실 밖으로 나가-"

 

아이들은 교실 밖으로 나갔다. 선생님은 이 교실, 저 교실 돌아다니며 깨끗한 새 옷 한 벌을 구해왔고, 미선이를 갈아입힌 후, 일찍 귀가시켰다.

 

그때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방귀!"라는 단어만 들어도 깔깔 넘어갔다. 똥, 방귀 같은 1차원적인 단어에 매료되어 있을 때다(지금도 딱히 다른 건 아닌가... .흐음). 친구들과 놀 때는 자연스레 외치던 소재인데, 막상 학교에서 대변을 보면 놀림을 당하는 이상한 문화가 있었다. 먹으면 싼다는 건 당연지사이지만, 학교에서 변을 보는 일은 학교 복도를 발가벗고 뛰어다니는 것과 비슷한 정도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대부분 친구들은 집에 갈 때까지 화장실 가는 것을 참고 생활했다. 그렇게 소변을 참다가 결국 수업 시간에 사고를 치는 아이들이 종종 있었다.

 

그날 이후, 짓궂은 남자아이들은 한동안 미선이를 똥쟁이라고 놀려댔지만, 또래보다 덩치가 컸던 미선이에게 등짝을 얻어맞고는 놀림을 중단했다. 난 미선이의 실수를 놀리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똥을 쌌지만 여저히 귀엽고 예뻤다... 당연한 소린가;;;). 더 본질적인 문제, 미선이가 옷에 실례를 한 상황 자체는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왜 저걸 못 참지?"

 

나도 똥을 싸려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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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국민학교를 다닐 때는 학년마다 반이 12개 이상 있었다. 학생 수가 너무 많아 오전, 오후 반으로 나눠 수업을 진행했다. 오전 반이었던 난 아침 일찍 등교해 점심시간 조금 지나 하교하는 일정이었다. 학교에 머무는 시간은 불과 몇 시간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 번도 대변을 참는다고 고통을 받은 적도 없거니와 학교 화장실에서 큰일을 보았다고 아이들에게 놀림당할 거리도 만들지 않았다. 다시 말해 난, 생리적 욕구를 참는 일이 힘들지 않았다.

 

미선이의 흑역사(?!)는 잊을만하면 생각이 날 것이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쪽팔려 할, 어떤 면에서 평생의 트라우마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런 미선이가 안쓰러워 보이기는 했지만, 미선이와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없었던 나는 그러한 몸의 통제불능 상태를 이해하지 못했다. 중학생이 되어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기 전까지는...

 

자. 왕따를 당하면 몸에 어떤 증상이 일어날 수 있는가! 체험자(?!)의 입장으로 함 써본다. 그러니까 지난 편에 얘기한, 희철, 상구, 성호에게 개무시를 당하기 시작한 뒤로 나에겐 두 가지 증상이 나타났는데... 

 

#1. 이명

 

귀울림이라고 불리는 이 증상은 내가 어떤 일에 신경을 써야 할 때 나타났다. 삐이--- 하는 소리가 귀 안을 울렸는데, 짧게는 몇 초, 길게는 몇 시간 동안 이어질 때가 있었다(진짜 사람 돌아버리게 만든다!!!). 일상 생활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명이 발생하면 내가 지금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구나 하면서 몸상태의 심각성을 파악할 수 있는 척도가 되었다.

 

왕따 사건 이후 증상이 시작되었고, 이명의 지속 시간이 점점 길어진 것을 보면 따돌림이 얼마나 나에게 큰 사건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이명은 조금만 버티면 증상이 약해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참을만했다. 내 삶의 질을 현저하게 떨어뜨리는 것은 두 번째 증상이었다. 바로...

 

#2. 과민성 대장 증후군

 

과민성 대장 증후군은 대장 근육의 과민해진 수축 운동으로 기능 장애가 발생한 것으로, 복부 팽만감, 만성 복통, 변비와 설사가 교대로 나타나는 배변 장애 현상이다. 변비와 설사. 사실 둘 중 하나만 시작돼도 힘든데, 지가 내키는 대로 번갈아 찾아온다고 하니 증상이 참으로 악독하다(한번 겪어본 사람들은 이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안다. 흐어...).

 

나의 경우엔 설사가 주된 증상. 정상적인 대장 운동이라면

 

"주인님아, 10분 뒤에 대변이 문 앞에 도착할 거야. 그전에 빼주겠니?"

 

나의 경우엔

 

"새끼야, 문 열린드아악?!!"

 

이런 식이었다.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따돌림이 시작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처음 몸의 변화를 느꼈다. 쉬는 시간 소변을 볼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신호가 없었는데 수업 시작 종이 치면 갑자기 신호가 왔다. 당시 선생님들은 수업 시간 때 이동하는 것에 굉장히 민감했기 때문에, 대부분 화장실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수업이 끝날 때까지 참아야 했다.

 

국딩 시절, 미선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한 내가 교실에서 부들부들 떨며 똥을 참고 있다니... 이것도 이유가 있다. 이전에 다른 친구가 큰 볼일을 봐야 할 것 같다고 선생님께 말씀 드렸더니

 

선생님: "이기 미칬나? 쉬는 시간에 안 가고 어디서 농땡이 칠라카노?!"

 

학우: "(ㅎㄷㄷ) 샘요, 진짜로 몬 참겠는데요..."

 

선생님: "그럼 거 앉아서 싸라!"

 

지금같으면 어떻게 그런 선생님이 있을 수 있냐고 할 수 있겠지만 90년대 부산의 중학교 기준, 이 정도 선생님은 널리고 널렸다. 아니, 화장실에 보내주지 않는 건 그나마 양반이다. 급하다는 아이를 앞으로 불러 나무 몽둥이로 엉덩이를 패는 선생님도 드문 건 아니었다(지금 생각해 보니 맞다가 싼 아이가 없다는 게 놀랍다?!?). 수업 시간 50분이 지난 후에야 나는 겨우 화장실에 갈 수 있었고, 그때부터 나의 대장은 더욱 불안해졌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엄마, 내 요즘 뭐 먹기만 하면 바로 화장실로 뛰간다. 쫌 이상한데..."

 

뭐, 특별한 해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예상한 답변대로 왔다.

 

"니 참 별나다."

 

어머니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긴,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겐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나에겐 생사에 필적한 일이다...!! 국딩도 아니고 남중에서 똥을 싼다고 생각해 봐라.... 이건 내가 전학을 가지 않는 이상, 고등학교 때까지 화자될 게 뻔하지 않은가?

 

쪽팔림은 차치하고 진짜로 생사를 오가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장 트러블이 시작되는 날이면 삶의 질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식사 시작 10분 이내에 반드시 신호가 오고,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과정 없이 바로 절정...!! 상태에 돌입했다.

 

왕따는 몸을 바꾸기도 한다  

 

화면 캡처 2023-04-26 055906.jpg

출처 - <SBS>

 

이후, 평온한 상태로 버스를 타고 가다가도 막히는 차를 보면 불안한 마음에 갑자기 신호가 왔고, 소개팅 후 상대를 버스 정류장에 데려다주는 길엔 화장실이 급해졌다. 언제 어디서 이런 신호가 올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라 최대한 위험 요소를 제거하고자 노력했다(웃지말자... 난 심각하다...!).

 

그 결과 여행을 멀리 가고, 처음 가보는 장소에 도착하면 일단 화장실 위치부터 확인, 다른 곳으로 이동할 계획이 있으면 신호가 없어도 화장실을 여러 번 들리는 습관이 생겼다. 장거리 여행이 있는 날이면, 전날 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고 계속 비워냈다. 버스에서도 억지로 잠을 청했다. 별거 아닌 것 같아 보여도 먹는 것부터 동선 하나하나 세세하게 체크하면서 살다 보면 삶이 굉장히 고달파진다.

 

'왕따'라는 나의 트라우마가 기폭제가 된 이 증상은 부모님도, 나도 희한한 몸뚱아리라 생각하고 방치했다. 마음의 상처도, 몸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고 성장한 셈이다. 스스로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했기에 부모님을 원망할 수 없다. 그냥, 이렇게 지내다 보면 몸도 적응하고 체질도 변하고, 언젠가 나의 대장을 통제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그후로 20년이 넘게 지났지만;;;; 지금까지도 이 증상은 계속되고 있다.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중학생 시절에 느꼈던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함을 여전히 문득 문득 느끼고 산다. 불안함에서 두려움으로, 다시 두려움에서 패닉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황을 마주하면, 나의 대장은 기다렸다는 듯 고장난다.

 

겉으로 보기에 나는 착실하고 무뚝뚝한 경상도 아재다. 일터에선 '상남자'로 불리기도 한다. 허나 불안한 순간이 오면 다시 어쩔 줄 모르는 '똥 참는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다. 무표정한 내 얼굴 뒤에 그런 나약한 어린 아이가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게 하고 싶지 않다. 

 

중학생 때 경험한 왕따 수준은 물리적인 피해는 전혀 없었거니와, 가장 친한 친구들이 어느 순간, 나와 다시는 말을 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 정도일 뿐인데도 가족에게 의지할 수 없는 내게, 그 충격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고 20년 넘게 나를 잡아 끌고 있다. 

 

 

추신: 아, 물론 딴게이들이 나를 똥쟁이라 놀리는 건 상관 없다. 나는 절대 얼굴을 드러내지 않을 테니까...! 여기선 왕따 트라우마를 극복 못한 똥참는 찌질이 아재지만 일터에서 난 휴잭맨 닮은 상남자라구! 에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