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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내용 요약>

 

소개: 94년생. 직업 없음. 대학 졸업장 없음.

경력: 몇 개의 사업 경험 + 집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히키코모리 생활 1년 6개월.

 

이후 택배 일을 시작한 필자, 그에게 남다른 습관이 하나 있었다···


 

어릴 때 <내 머릿속의 지우개>라는 영화가 유명했었다. 언제 적 영화인지 문득 궁금해서 개봉 연도를 찾아보니 2004년, 대략 내가 9살 때 개봉했던 모양이다. 이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손예진이 젊은 나이에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아내로, 정우성이 그의 남편으로 나오는 로맨스 영화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어린 시절 우연히 보았던 주말 아침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여주인공이 매일 전날의 기억을 잊어버린 상태로 눈을 뜨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이런 설정은 니콜 키드먼과 콜린 퍼스가 나오는 2014년도 영화 <내가 잠들기 전에>에도 사용된다. 아침마다 20대에서 기억이 멈춘 상태로 깨어나는 여주인공(니콜 키드먼)에게 남편(콜린 퍼스)이 "당신은 20대가 아니라 40살이야."라는 충격적인 말과 함께 결혼사진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영화다. 이 영화도 물론 앞서 예시로 든 <내 머릿속의 지우개>처럼 직접 본 적은 없고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몇 번 봤던 영화다.

 

나는 이 영화들에 나온 여주인공들만큼은 아니지만, 아침에 눈을 떠서 전날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들의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될 정도로 지나간 일을 잘 잊어버리는 편이다. 사실 지금 이 도입부를 쓰면서도 <내가 잠들기 전에> 영화 제목과 여주인공 니콜 키드먼의 이름이 기억이 안 나 애를 먹었다. "그, 뭐였더라, 여주인공이 얼마 전에 봤던 파일럿 영화(이 역시 기억이 안 났다)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과 결혼했던 것 같은데..." 내가 본 영화를 기록해 둔 메모에서 얼마 전에 봤던 ‘파일럿 영화’가 <탑건>이고 남자 주인공이 톰 크루즈였다는 것을 찾아낸 후 열심히 검색해 주연배우 이름부터 찾았고, 영화 이름도 찾을 수 있었다. 물론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은 아주 오래전 이혼한 상태였지만, 그 둘이 결혼한 적이 없었고 내가 얼마 전에 탑건을 보지 않았다면 영원히 <내가 잠들기 전에>의 영화 제목을 찾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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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다음 영화>

 

영화 제목은 물론 지난 주말에 뭘 했는지까지도 잊어버릴 때가 많다. 엄청나게 맛있는 돈가스를 먹었다든지 하는 아주 인상적인 것이었다면 기억하긴 하는데 그조차도 누군가 ‘왜 그거 엄청 맛있었잖아!’하고 기억을 환기해 줘야만 ‘아 그랬었지!’ 하고 희미한 기억을 끄집어낸다. 이렇듯 과거는 대부분 잊어버리고, 의식적으로 떠올리지도 않다 보니 내 이런 점을 부러워하는 친구들도 꽤 많다. 아픈 기억도 슬픈 기억도 수치스러웠던 기억도 모두 잊어버리고 현재에 충실할 수 있는 점이 부럽다나. 하지만 잘 잊어버리는 것에는 단점도 꽤 많기에 필요할 때 언제든 과거의 기억을 불러오기 위해 ‘메모하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다. 항상 수첩이나 노트를 갖고 다니면서 사소한 것까지 모조리 적어두고 매일 일기와 가계부를 쓰며, 책을 읽으면 중요한 문장을 수집하고 내용을 요약해 컴퓨터에 저장해 놓는다. 그 외에도 내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거나 인상적인 게 있으면 아주 사소한 것까지 모조리 적어두고 저장해 놓는다.

 

메모의 종류에 따라 목적이 다르기에 방식은 조금 달리 한다. 그날 겪은 일을 기억하고 싶을 때는 내 느낀 점이나 생각 위주로, 훗날 필요하겠다 싶은 정보는 정확한 숫자나 디테일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메모한다. 어떤 경험을 기억하고 싶을 땐 감정과 생각들을 기록해 놓아야 훗날 봤을 때 그날의 경험이 한꺼번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머릿속에 기억을 쌓아가는 대신 노트와 컴퓨터에 기록을 쌓아가는 자타 공인 메모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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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기록만 해놓는다고 해서 잘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메모광은 기록하는 것만큼 정리하는 데도 공을 들인다. 청소와 정리 정돈을 좋아하다 보니 방대한 양의 메모도 언제든 찾을 수 있게 정리해 두었다. 메모의 종류는 정말 다양한데 이를테면 읽었던 책이나 보았던 영화·애니·드라마를 기록해 놓은 것도 있다. 지금까지 내가 몇 편의 책, 만화책과 영화를 보았는지 어떤 게임을 했는지 메모장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가령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드라마는 56편, 애니는 93편, 영화는 831편을 보았고 책은 1,060권, 웹툰과 만화책은 115편을 보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 게임은 총 199개나 된다.

 

중고 거래를 할 때는 물건을 보내기 전 내가 파는 물건들을 영상과 사진으로 꼼꼼히 남겨 놓는다. 좋은 분들과 거래하는 일이 더 많긴 하지만, 간혹 물건을 받고 ‘고장 난 물건을 받았다’며 물건값보다 더 비싼 돈을 청구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전에 자동차를 팔면서 그런 일을 당했던 적이 있다. 카센터를 운영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한 구매자는 중고차를 사 간 5일 뒤, 차 주행과는 관련 없는 범퍼 몰딩·도장·도색 등을 한 영수증을 첨부하여 찻값보다 3배나 비싼 수리비를 청구했다. 차를 인도하기 전 3시간 동안이나 이곳저곳 차를 확인하고 카센터도 같이 가서 아무 문제 없는 차량인 것을 확인하였는데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내가 수리비를 주지 않자 상대는 대형 로펌에 인맥이 있다고 협박하며 소송을 걸었고, 너무 당연한 결과지만 법은 내 편을 들어주었다. 이 경험 이후, 중고 거래를 할 때 내가 파는 물건들의 상태를 더욱 꼼꼼히 기록해 두고 있다.

 

얼마 전에도 중고 거래로 전자기기를 팔았는데, 물건을 받고 5일 뒤에 ‘그동안 사정이 있어 물건을 써보지 않았는데 막상 써보니 문제가 있다’며 내가 판 물건값보다 더 비싼 수리비를 청구하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물건을 보내기 직전 물건 기능을 시험해 본 영상들과 사진 찍은 것을 보내주었다. 내가 물건을 판 것은 사실이니 정말 문제가 있다면 당연히 대가를 치를 생각이었지만 상대는 내가 보낸 사진과 영상들을 온갖 핑계를 대며 확인도 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기록을 남겨두고 잘 정리해 두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물건은 물건대로 주고, 수리비 명목으로 돈이 나갔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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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하는 습관이 있는 유명인 중 한 명인 

코미디언 양세형

 

택배 일을 하면서도 애매하거나 CCTV가 없는 곳은 항상 사진으로 찍었고, 고객과의 통화 내용은 모두 녹음해 두었다. 그 덕에 택배를 시작한 4월에 한 번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물건을 분실한 적이 없다.

 

일을 하면서 내 구역에 대학교 건물들이 있다 보니 ‘무슨 무슨 과(전공)’로만 주소가 적혀오는 물건이 정말 많았다. 보내는 분은 모르겠지만 이렇게 보내면 택배 기사는 배송하기가 무척 힘들다. 그 전공실이 어느 건물에 몇 호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담당하는 대학교의 각 학과가 어떤 건물에 몇 호실을 뜻하는지 메모해 뒀다가 보기 쉽게 문서로 만들어서 그 건물을 드나드는 우리 팀의 다른 기사들도 볼 수 있도록 터미널 기둥에 붙여두었다.

 

개인적으로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특이사항을 일기처럼 기록하면서 하루에 몇 개의 택배를 배송했는지 배송 시간은 얼마나 걸렸는지도 매일 기록해 두었다. 기록에 따르면 배송을 가장 많이 한 날은 22년 3월 3일 463개였고, 가장 적게 한 날은 22년 1월 27일 24개였다. 가장 적게 한 날 같은 경우는 설날 택배 마감으로 인해 배송할 물건이 거의 없었다고 쓰여있다.

 

퇴근 시간이 제일 빨라 같은 구역에서 한 시간에 배송하는 수량이 내가 제일 많겠거니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는데 그게 궁금해 기록을 토대로 실제로 계산해 본 적도 있다. 가장 빨랐던 날의 배송 타수(1시간에 배송하는 개수)는 157개로 2시간 안에 하루치 일당을 모두 벌 수 있는 수준이었다. 물론 그날그날 한 건물에 물건이 많을 수도 있고 상황이 모두 달라 배송 타수로는 택배 기사의 업무 능력을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내 나름대로 메모를 토대로 하루에 몇 개를 얼마 만에 배송했고 어제보다 나아졌는지 못해졌는지 매일 확인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이 글을 쓸 수 있는 이유도 메모를 해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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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강사 전한길 강의>

 

왜 메모를 할까? 위에 언급한 것처럼 곤란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정확한 자료를 제시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도 있다. 또 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서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지금 생각하는 것들이 언젠가 나에게 다시 소중해지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시간이 갈수록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되거나 소중했던 꿈을 잃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살아남고자 주변 환경에 적응하다 보면 어느새 아무런 외압이 없던 시절의 진짜 자기 모습을 잊어버린다. 나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인간이기에 내가 정말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 나를 나로 만드는 소중한 것들을 현실적으로 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까맣게 잊어버릴지 모른다. 나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제의 생각과 오늘의 생각이 다를 때가 있고, 정말 간절하게 바라던 것도 막상 갖고 나서는 과거의 간절함을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남겼던 메모들은 그럴 때 필요하다. 과거에 남겼던 생각과 느낌들은, 원래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현실과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에 영향을 받아 잘못 생각하게 된 부분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들의 소중함을 다시금 되새겨 준다.